- 작가 황석영씨가 웹블로그에 소설을 연재하고 있다. 중견작가의 소설 연재가, 인터넷이 종이매체를 대체해가는 상징적 증거가 아니냐는 진단도 나온다. 독자의 반응은 좋다. 새로운 시도, 모험에 남다른 승부사 기질을 보이는 노(老)작가의 열정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는 “앞으로 20년은 더 쓰고 싶다, 최고령 현역 작가가 되고 싶다”며 팔팔한 의욕을 드러냈다.
‘한국 떠나온 지 30여 년~ 그래서 한국 문학서적은 접어두고 살았는데…. 오늘 선생님 블로그에서 글을 만나보게 되네요.’(잰이삐)
‘와~ 황석영 선생님 블로그도 하시네요? ㅎㅎ 멋져요~ 언제나 건강하시길!!!’(빨간약)
‘개밥바라기 별’(해지고 난 초저녁, 개들이 저녁밥 달라고 짖을 무렵 떠오르는 금성을 이르는 우리말)은 작가가 열여섯 살 때부터 군 입대 직전까지 겪었던 일을 뼈대로 청년기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성장소설이다. 성장소설이란 그 시대의 문화적 ·인간적 환경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정신적으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그리는 소설을 말한다. 감동적 요소는 있지만 대개 무겁고, 말초적인 재미와는 거리가 있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네티즌들이 연재 초기 ‘개밥바라기 별’에 이렇듯 열띤 반응을 보이는 것은 작품 자체의 매력 때문일까, 아니면 블로그라는 매체의 흡인력 때문일까.
흥미로운 점은 문단에서도 이를 하나의 ‘사건’으로 보고 있다는 것. 이제까지 인터넷 매체란 너무나 가벼워서 본격문학이 들어설 자리가 없을 것이라 여겨졌다. 그러다 지난해 중견작가로선 박범신씨가 처음으로 ‘촐라체’라는 소설을 연재해 좋은 반응을 얻었고, 이번에 황씨가 연재를 하면서 이런 관념은 완전히 부서지는 듯하다. 문학평론가인 서영채 한신대 교수는 “종이 매체는 20세기 초부터 국내 장편소설의 중요한 산실이었다. 박범신씨에 이어 최고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인 황석영씨도 인터넷 포털에 연재를 시작했다는 것은 종이 매체의 이런 기능을 인터넷 매체가 대신하게 됐음을 뜻한다”라고 했다.
이런 변화의 기운을 몰고 온 황씨는 사실 그간 새로운 시도나 모험 앞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민주화운동, 방북, 독일 망명, 수감생활, 런던과 파리 체류, ‘바리데기’ 등 근작의 실험적 작풍, 지난해 대선에서 손학규 지지 선언…. 그러나 이제 그도 우리 나이로 예순여섯이다. 그를 만나기 전 가장 궁금했던 점은 그처럼 당당하게 세상과 맞서온 그가 나이 앞에, 속절없는 세월 앞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네티즌과 덧글로 소통
3월7일 오후 3시께 경기도 일산의 주택가 모퉁이에 자리 잡은 한적한 카페. 배우 알 파치노처럼 짧게 깎은 머리에 스타일리시한 재킷을 걸친 그가 성큼성큼 카페 안으로 들어서더니 방송인 이종환씨처럼 걸걸하고 분명한 발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어쩌면 “어허허허” 하는 웃음소리조차 이씨와 판박이다. 자리에 앉은 그가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 카페라테를 즐겨 드세요?
“아니, 뭐 정신 좀 차릴까 해서요. 조금 아까 일어났어요. 밤새 작업하고, 오전 11시에 잤나? 한 네 시간 잤네.”
▼ 요즘 대통령이 일찍 일어난다고 관가 사람들도 덩달아 부지런을 떠는 바람에 ‘얼리 버드(early bird)’가 되어간다는데, 황 선생은 거꾸로 사시는군요.
“얼리 버드? 벌레를 많이 잡아먹으려고 그러시나? 어허허.”
‘새도 일찍 일어나야 벌레를 잡는다(The early bird catches the warm)’는 서양 속담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황석영씨가 소설 ‘개밥바라기 별’을 연재하고 있는 네이버의 웹블로그.
“아 그것, 말이 돼요. 옛날 1970, 80년대 대기업 직원들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근대화 일선에서 뛰어다녔죠. 그 버릇이 되살아났군.”
▼ 요즘 황 선생도 웹블로그에 연재소설 대느라 몸과 머리를 많이 쓰고 계신데, 블로그 연재의 감회가 남다를 듯합니다.
“정말 새로운 경험입니다. 특히 독자들이 자신의 감상을 표현하는 덧글이 참 신기해요. 그래서 제가 거기다 다시 덧글도 달고 했습니다. 정말 독자의 열기가 대단합니다. 그야말로 사람살이를 바로 곁에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글을 쓰면서 글의 내용을 갖고 독자와 곧바로 대화한다는 게 어디 상상할 수 있던 일인가요? 작가로서 창작에 번거롭고 방해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고무되고 있습니다.”
▼ 블로그에 들어가 보니 어느 독자가 ‘독자들의 요구에 의해 내용도 바뀔 수 있나’라고 물었더군요.
“답장을 할까 하다가 그냥 뒀어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계속 치고들어올까봐. 사실 그건 가능하지 않지요. 내가 구상했고 쓰려는 것이 있는데…. 말하자면 창작의 자율성 독립성이라는 것은 피차 존중해야겠죠.”
90% 이상이 젊은 독자
▼ 열성 독자는 단행본으로 나와도 사보잖아요. 이번엔 전에 없던 새로운 독자를 만나는 즐거움도 컸겠네요.
“독자 반응을 보니까, 뒤늦긴 했지만 인터넷 매체에서 본격문학의 문예란을 두는 게 필요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난해 ‘바리데기’가 나오고 나서 예스24 같은 인터넷서점에서 ‘참 묘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독자의 80%가 20~30대고, 10대도 13%가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젊은 독자도 ‘관리’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네이버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와 승낙했지요.”
▼ 박범신씨는 “포털사이트에 소설을 연재하면서 패스트푸드에 익숙한 젊은 독자들에게 한식 정찬을 차려내는 마음이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건 좀 비유가 안 맞는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이미 매체가 변화하는 이행기에 있는데, 작가들은 꼭 문예지나 신문 지면 같은 데에 실어야 한다는 관습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인터넷도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날로그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남에게 동정심을 갖는 이런 것들이 다 아날로그 세계입니다. 별이나 대지처럼 말입니다. 그런 콘텐츠는 인류가 살아가는 한 지구상에 영원할 겁니다. 그런데 도구는 미디어뿐 아니라 돌에서 구리 철 전기 컴퓨터 등으로 좀 많이 변했습니까. 중요한 것은 변화하는 미디어의 적재적소에 콘텐츠를 어떻게 싣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터넷 같은 새 미디어로 인해 종이나 문자가 위축되는 게 아니라 상호 보완하는 길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블로그 연재가 끝나면 저는 종래 방식의 출판으로 넘어갈 생각입니다. 컴퓨터 모니터에서 흘러가는 문자를 들여다보는 것과, 책장을 넘기며 자신과 혼자 대면하고 사고하는 것과는 다른 체험이니까요. 외국에서도 인터넷이 출판문화를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출판문화가 더 활성화됐다고 그래요.”
카페 구석, 스피커가 있는 쪽에 앉아서 그런지 음악 소리가 제법 크다. 황씨가 그예 참지 못하고 한마디했다. “이 소리를 계속 들어야 하나? 보소, 안녕? 언니(웃음)? 음악 소리 좀 줄여줘요.” 주인은 어디를 나갔는지 대답이 없다. 그가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려 틱틱, 라이터를 켠다.
“제대로 된 성장소설 남기고파”
▼ 이 시점에 굳이 성장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유라면.
“한 출판사와 다음 소설을 출간하기로 계약을 했어요. 그때 쓰고 싶은 주제 중 하나가 역사 쪽이었어요. 그런데 요새 ‘팩션(faction, fact+fiction)’에 관심 가진 이가 많아져, 나마저 또 그런 걸 써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러다 출판사 대표 몇 명과 술을 마셨는데, 이구동성으로 우리나라에 수십년간 본격 성장소설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지적하더라고. 그 장르를 휩쓰는 것은 일본 대중소설들이고, 국내 작품은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나 황순원의 ‘소나기’처럼 단편에 그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분야 장편소설을 하나 남기자고 작정했습니다.”
소설 ‘바리데기’ 표지.
“젊은이란 불확실성의 안개에 둘러싸여 있는 존재고 선택에 따라서는 무한한 자유와 엄청난 억압에 짓눌려 있다. 성인이 되는 길은 독립운동처럼 험난하고 외롭다. 대부분 그 무렵의 연애는 첫사랑이라고 불려지면서 애처롭게 좌절하게 되어 있다. 이 소설에서 나는 사춘기 때부터 스물한 살 무렵까지의 길고 긴 방황에 대하여 이야기할 것이다.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면서도 다만 자기가 작정해둔 귀한 가치들을 끝까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의 모든 것을 긍정하라고 말해줄 것이다. 물론 삶에는 실망과 환멸이 더 많을 수도 있지만 하고픈 일을 신나게 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태어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말에도 리듬이 있다”
▼ ‘개밥바리기 별’ 서두에 군대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서부터 과거로 돌아가는 방식인가요.
“제1장에서 주인공 준이는 베트남 전쟁터로 출발하면서 ‘내 청춘이 막을 내린다, 끝이다’는 인식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으로 돌아가서 되짚어 올라오는 식으로 진행될 겁니다. 아직 독자들은 눈치를 못 챘을 텐데요. 2장에는 1장에서 거론된 인물 중에 누군가가 화자로 등장해 자신이 겪은 준이와의 일을 객관적으로 진술합니다. 3장에선 다시 준이, 4장에선 또 다른 화자가 등장하겠죠. 그렇게 해서 주인공의 객관적인 여러 모습이 나올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 서술 방식이 독특하군요.
“사실 내레이터가 여럿 등장하는 것은 민담에도 많이 나오는 방식입니다.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도 ‘내 이름은 빨강’에서 그런 기법을 잘 사용했고, 윌리엄 포크너도 ‘내가 죽었을 때’에서 비슷한 방식을 썼어요.”
사실 그는 이런 방식을 종종 사용해왔다. ‘손님’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에서 세계적인 현실이나 현상을 우리 전통양식에 담아내는 실험들을 해왔다. ‘오래된 정원’에서는 과거의 서술체계를 해체해서 서술문과 독백체 서간문, 1인칭이 서로 엇갈리는 양식적 변화가 드러난다. 주인공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그대로 진술되거나, 세밀한 묘사도 과감하게 축약되고 장면 전환도 빨라졌다.
▼ 조만간 ‘한겨레’에 새 소설을 연재한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하반기쯤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주제는 오래전에 생각한 겁니다. 서울 강남 형성사. 우리 사회 욕망의 뿌리, 한국 자본주의 근대사를 한 가족의 부침을 통해 그려볼까 합니다. 한국형 중산층이 바로 거기서 탄생했거든요.”
그의 글은 밑줄 치면서 읽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좋은 문장이 많다. ‘바리데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늘 기대보다는 못 미치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 소설가 지망생들이 문장 공부할 때 황 선생 소설을 베껴 쓴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좋은 문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건가요.
“우선 정확한 문장이 중요합니다. 사실 나는 문장론을 그다지 강조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문장은 독서하는 사이 저절로 배거든요. 특히 고전을 많이 읽으면 좋습니다. 저는 ‘장길산’을 쓰면서 학습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 우리말에도 리듬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즉 문장을 쓸 때 저는 그 리듬을 중시하고, 같은 단어를 가까운 행에서 반복하지 않고 다른 표현을 쓴다는 정도만 염두에 둡니다. 사람은 누구나 독서 많이 하고 경륜이 생기면, 편지로 자기 생각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정도만 돼도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봐요. 감각이니 작품이 주는 인상 같은 것은 바로 구성에서 옵니다. 결국 좋은 구성이 좋은 글을 만드는 셈이죠.”
개인과 일상의 소중함
갑자기 그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비발디 ‘사계’의 ‘겨울’ 제2악장이다. “누구요? 그렇소. 뭐요? 인터뷰요? 인터뷰 같은 거 안 해요”라며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었다. 특별한 인연으로 그와 인터뷰 자리를 마련한 기자가 머쓱해진다. 그는 “가능한 한 창작에 방해받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다”며 다시 담배를 피워 문다.
황씨는 1998년 감옥에서 나와 집필을 시작한 무렵을 ‘후반기 문학’이라고 자칭했다. 세상을 탐미적으로 바라보던 그가 베트남전을 계기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고,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급진화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전반기 문학’이 이데올로기라든지 정치·사회적인 문제에 정면으로 맞섰고 그 형태도 정통 리얼리즘에 입각했다면, ‘후반기 문학’은 집단이나 공동체, 역사적 거대 사건 등에 대한 관심에서 개인과 일상의 수준으로 내려왔다고 볼 수 있다.
▼ 작품 경향이 바뀐 계기는 무엇입니까.
“방북 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쏟아져나온 사람들을 보면서 개인의 아름다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일상의 소중함을 발견했고요. 저에게는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옥서 나오자마자 동아일보에 ‘오래된 정원’을 연재했는데, 그 배경으로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을 정면으로 다루는 게 아니라, 부침하는 가냘픈 개인들의 일상생활과 그들의 구체적 생활상을 다뤘거든요. 옛날하고 다른 태도죠. 그래서 옛날식 독법으로 제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뭐, 이거 좀 풀어지고 나약해진 것 같다’라는 말을 하곤 했는데, 제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변화한 겁니다.”
2005년 독일의 한 문학행사에서 발표한 글에는 그의 세계 인식 메타포가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그의 렌즈는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철새들을 향하고 있다. 어느 순간 그들 앞에 더 큰 철새 무리가 날아들어 일제히 동요가 일어난다. 앉아 있던 새들은 놀라 일제히 하늘로 떠오르지만 다른 데로 날아가지 않고 다시 더 촘촘하게 자리를 좁혀 앉는다. 일부는 다른 곳으로 이동해버린다.
“누군가 나에게 ‘지금의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마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허공을 맴돌고 있는 때에 있다’고 대답하겠다. 그러고는 나의 작업이 ‘새들이 다시 내려앉는 것’에 관여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대답할 것이다.”
즉, 한 국가 안에서 정착해 있던 이들이 외국으로 이주해가는 것, 예컨대 탈북자나 난민의 삶, 노동력을 찾아 타국으로 이주한 이주노동자들의 세계에 그의 시선이 고정된 것이다.
해외 체류하며 한반도 통찰
▼ ‘바리데기’의 뒷부분이 재미있어요. 주인공 바리의 런던 생활, 연인이 된 알리와 주변인물과의 관계, 그들의 상징….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블로그에 올린 사진들을 보니 모두 외국에서 촬영한 것이더군요. 외국에 대한, 세계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많이 보이는 특별한 까닭이 있을까요.
“망명 시기뿐 아니라 근래 런던과 파리에서 보낸 몇 년간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일이 세계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것을 새삼 여러 번 느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 파병을 했으니 전쟁에 직접 가담해 있는 처지입니다. 또 세계화 재편성 기간에 IMF 외환위기라는 간난고초를 겪었지요. 굉장히 재밌는 것은 ‘바리데기’ 뒷부분에 중동 분쟁지역이 배경으로 언급되는데, 책 출간 1주일 만에 아프가니스탄 인질 사태가 터졌습니다. 지난 4년 동안 해외에서 체류하며 거리감을 갖고 한반도 문제를 더 뚜렷이 볼 수 있었고, 냉전체제 이후 변화된 세계의 보편성 같은 것을 본 게 큰 수확입니다. 그중 한 가지 주제가 바로 ‘바리데기’에서 다룬 마이그레이션(migration, 이주)의 문제입니다. 이주로 인한 갈등을 풀어낼 하모니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고요. 즉 이 두 가지가 21세기에 굉장히 중요한 화두가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 외국 생활이 불편하진 않았나요.
“저는 하도 많이 돌아다닌 사람이라 어디 가면 금방 낯설지 않게 자기 터전이랄까, 그런 것을 만듭니다. 그러니까 한 달쯤 있으면 완전히 적응하죠.”
▼ 언어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외국어를 잘하진 못하지만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어요. 독일어나 프랑스어로 식당에서 주문하거나 물건을 살 수 있을 정도는 되죠. 영어는 베트남전 갔을 때 미군들과 한 1년 있으면서 말문이 툭 터졌어요. 우선 상대방이 말하는 걸 잘 들어야 하는데, 저는 듣기 실력이 좋습니다. 그리고 영국에서 2년 살았는데, 1년쯤 지나니까 익숙해지더군요. 발음에 겁먹지 마세요. 영국인들은 자국 아이덴티티를 가진 억양으로 정확하게 발음하는 것을 품위 있다고 해요. 그들의 농담 중에 ‘술 취한 사람의 7단계’라는 게 있는데, 마지막 단계가 뭔지 아세요? ‘아메리칸 잉글리시가 나온다’입니다, 어허허.”
서너 살 때 일도 또렷이 기억
▼ 특별히 언어감각이 남다르거나 기억력이 좋습니까. 작가에게 사진을 촬영한 듯 선명한 기억력(photographic memory)이 있다면 아주 큰 도움이 될 듯한데요.
“저는 기억력이 아주 좋은 편입니다. 그런데 일상에서 자잘한 부분은 잘 잊어버립니다. 다만 지나간 일들의 미세한 분열 같은 것은 아주 잘 기억합니다. 지금도 지각이 제대로 발전하기 전인 서너 살 때의 일을 분명히 기억하는 게 많습니다. 저보다 훨씬 연상인 누이 두 분도 제가 그때 이야기를 하면 깜짝 놀라곤 했어요. 지금도 이렇게 앉아서 생각을 하면 그때 일을 영화 장면처럼 자세히 되돌려 그릴 수 있어요.”
▼ 그건 타고난 건가요.
“그보다는 제가 그런 쪽으로 밥을 먹고 살았으니까 그 부분이 특별히 강화된 게 아닌가 합니다. 오히려 길눈은 어두워서 어디엘 가도 자꾸 헛갈립니다.”
▼ 외국어를 하고, 꽤 오랫동안 여러 나라에서 거주했는데 스스로를 코스모폴리탄이라고 생각하나요.
“일찍이 세계시민이 되고 싶었어요. 이 나라 안에서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생각을 하면서 세계적 보편성을 위해 행동하고 글을 쓰겠다는 겁니다. 그것은 종래의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와는 일단 거리를 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 ‘거리를 둔다’는 게 어떤 의미입니까.
“1989년 방북하고 나서 베를린에 망명했을 때 그곳이 동독 가운데 있는 도시니까, 중간지대 혹은 휴전선 안에 있는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저는 남북 양쪽으로부터 왕따를 당했지요. 남도 북도 갈 수 없었어요. 완전히 단자화한 개인이 된 거죠. 망명자 신세니 국적도 없었죠. 그런 상황을 겪으면서 개인의 존엄성을 새삼 느꼈고요. 분단된 한반도를 민족주의적으로 대하는 게 얼마나 세계 현실과 동떨어진 것인가 하는 걸 그때 자각했습니다. 그래서 조국통일, 민족통일 그런 관념 갖고는 한반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벌써 남북연합이란 말도 나오고 있잖아요.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했고 서로 체제가 다르니 서로를 다른 나라로 인정해야 하거든요.”
바로 이 지점에서 그는 아주 엄청난 규모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한 전망이었다. 그는 내년쯤 핵 문제가 해결되고 북미수교가 이뤄질 것이라고 보는 듯했다.
北을 이념의 대상으로 보지 말아야
“그렇게 되면 동아시아라는 정치판에 큰 지각변동이 올 겁니다. 베를린 장벽 붕괴보다 더 큰 변화가 올 겁니다. 그때 남북도 재빨리 수교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종래의 이념적 족쇄들도 풀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남북한 군축을 통해 남는 노동력으로 동시베리아 개발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 지역은 이제 지구 온난화로 더 이상 동토(凍土)가 아닙니다. 핵 문제가 해결되면 YS정권 때 약속했듯이 나진·선봉지역에 원자력발전소를 짓고, 그 전력으로 동시베리아 개발에 들어가는 겁니다. 인구는 적지만 국토가 넓은 몽골은 한국을 활용해 근대화를 이루고 싶어 하니까 남한 북한 몽골이 연합하면 중국과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동아시아연합이 탄생하고, 지역도 안정될 겁니다.
이것은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런던대 SOAS, 파리 7대학 동양학부에서 여러 동아시아·한반도 전문가들과 접촉하면서 이런 시각을 갖게 됐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이명박 정부가 말하는 실용적 노선과 맞닿은 발상 아닐까요? 이제 더 이상 북을 이념의 대상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이명박 정부가 휴전선을 등지고 좁은 한반도 남쪽을 향해 대운하를 팔 게 아니라, 우선 연결된 철도를 잘 살려서 대륙과 연결하는 작업에 매달려야 한다고 봅니다.”
황석영씨는 1월9일 진로발렌타인스 주최 ‘마크 오브 리스펙트’ 시상식에서 ‘올해의 존경받는 문화예술인’으로 선정됐다.
“아무튼 한반도의 운에 달린 거죠. 그래서 이명박 정부가 잘해야 합니다. 북한을 어떻게 우리 경제공동체로 끌어안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개성공단이나 해주공단 같은 것을 더 넓혀서 저임금의 북한 노동자들을 이용해 남한의 내수를 진작시키고 북한에도 도움을 준다면 변화의 기초가 생기는 거죠. 허리띠 졸라매고 굶다가 좀 먹고 살게 되면 생각이 바뀝니다. 사람은 물질적 존재이거든요. 이렇게 단순한 것을 왜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노무현 정부, 소통 회복에 실패
▼ 한반도대운하는 왜 반대합니까.
“대기업들 통해 내수를 키워서 서민들의 실물 경제를 좀 개선하려는 모양인데, 제 생각에는 ‘언 발에 오줌 누기’ 아닐까 합니다. 강산은 우리가 같이 살아가는 생물체이고, 원래 그렇게 된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걸 파헤쳐서 활용하는 효과도 그로 인해 잃게 될 것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은 듯하고요. 더구나 우선순위를 따지면 북방으로 눈을 돌리는 게 먼저라고 봅니다.”
▼ 기왕 정치 얘기가 나왔으니 지난 노무현 정권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합니다.
“실패했다고까지는 보지 않지만 그렇게 잘했다고도 보지 않습니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린 격이랄까.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는데 아쉬워요. 지난 정권의 가장 큰 약점은 프로젝트만 있고, 인간끼리의 정이나 소통을 회복하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한국 근대화도 그 점을 무시하며 치달려왔지요.”
황씨는 남한 사회가 IMF체제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 속에 재편됐는데,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는 바로 거기에 적응하는 시기였다고 보았다. 그 시기 동안 국민의 의식도 변화됐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이 바로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민주주의가 우리의 영원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부정부패니 양극화 같은 문제는 민주적 내실이 다져지지 않아서 벌어지는 일이거든요. 노무현 정권의 주도세력을 ‘386’이라고 하는데, 과거 그들과 얘기를 해보면 ‘토론 좋아하고 기획은 잘하는데, 남의 말을 안 듣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민주적 소통 부재가 바로 거기에서 연유한 겁니다. 그들은 ‘소설 따위는 안 본다’고 해요. 그 이유를 물으면 ‘사회과학 책 읽을 시간도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소설을 안 보면 동시대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읽나’라고 야단치곤 했습니다. 물론 노무현 정부가 복지정책 등 잘한 것도 많지만, 남북 문제나 FTA 협상, 이라크 파병 같은 일을 처리하면서 자신을 뽑아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렸거든요. 그래서 고립된 게 아닌가 해요.”
▼ 지난해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당시 무소속)를 대선후보로 밀자는 지지선언을 하셨는데요.
“당시 누구나 ‘87체제’의 종언이니, 패러다임의 전환기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잖아요. 그래서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기존의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구도로는 어렵고 촉매제가 될 수 있는 인물이 손학규씨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그는 섣불리 우리당으로 들어갈 게 아니라 문국현 후보처럼 자기 세력을 키워나가면서 제3의 세력을 규합했어야 했어요. 당시 판이 깨지긴 깨졌는데, 아주 조금 깨졌어요. 와장창 부서졌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그걸 주도했던 이들이 다 범생이여서 그랬나 봅니다. 저는 진퇴가 분명한 사람이니까 이후엔 전혀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이문구 선생 없어 참 아쉽다”
▼ 지금도 자신을 참여작가라고 생각합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선 일정한 직업윤리가 있죠. 특히 사람의 삶과 직접 관계된 일에 종사하는 교사, 종교인, 의사, 그리고 작가들을 생각해봅니다. 그들은 동시대와 관계를 가지면서 자기 생업을 영위하므로 동시대 사람들에 대해 일단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동아시아에서는 공자 이래로 ‘지식은 공동체에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했고, 서양은 소크라테스 이래로 ‘비판적 기능’을 지식인의 주요 기능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양자를 결합해보면 작가는 최소한 동시대 삶과 결부된 중요한 일에는 발언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시 그의 휴대전화에서 ‘사계’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그의 아내가 전화를 했다. 앞서 인터뷰 요청을 거절할 때와는 딴판으로 목소리가 아주 정겨운 톤으로 바뀌었다.
“응, 나 인터뷰 중인데. 왜? 그래, 그래, 응응~.”
▼ 국내외에 호적수나 좋아하는 작가들이 있다면.
“작가란 각자 독립된 존재니까, 호적수니 뭐니 하며 비교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다들 색깔이 다르고 자라온 배경과 시대배경도 다르니까. 들판을 보면 작은 풀꽃도 있고, 큰 나무도 있듯이 말입니다. 다만 동시대에 같이 활동하고 싶은 작가가 있다면 이문구 선생을 꼽고 싶어요. 저는 그분의 소설을 아주 좋아하고 존중합니다. 제가 가지지 못한 장점들을 갖고 있거든요. 그가 이 세상에 없는 게 참 아쉽습니다.”
▼ 해외 작가로는 어떤 이들을 좋아합니까.
“훌륭한 작가가 많죠. 그런데 요새 서구 문학이 ‘매가리’가 없어요. 오히려 서구문학이 주변부인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의 문학에서 수혈받고 있는 느낌이에요.”
▼ 황 선생께서도 그런 주변부 문학을 높이 사는지요.
“저는 라틴문학을 특히 높이 칩니다. 환상문학도 좋지만, 잉카·아즈테카 문명을 바탕으로 정복자의 언어인 스페인어로 세계의 보편성에 도달하는 라틴 문학이 흥미롭습니다. 지난해 아시아·아프리카 문학제에 50개국 83명의 작가가 참가했는데, 그들이 자국의 생생한 현실을 끌어안고 있는 것을 보고 서구문학이 얼마나 오만하게 일방적으로 세계를 자기화해왔는가 하는 점을 새삼 발견하게 됐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베트남전쟁 외엔 큰 전쟁도 없었고, 살상도 없었다고 아는 이가 많습니다. 그러나 1990년 이후 세계 37개국에서 분쟁이 있었고, 이 기간에 1200만명 이상이 살상됐어요. 콩고 내전에서 400만명, 르완다 내전 때는 3개월 만에 100만명이 죽어나갔습니다. 또 미국의 봉쇄가 이뤄진 10년 동안 북한에선 300만명의 동포가 아사했습니다. 전쟁과 다를 게 뭐가 있나요. 유엔 통계에 따르면 하루에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12억명이 넘습니다. 국제 교역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분야가 바로 무기입니다. 우린 그런 현실을 망각해왔습니다.”
“실수 저지를 용기가 젊음의 비결”
▼ 전북 진안에 황석영 문학촌이 들어선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문학촌 전망이 뚜렷하지 않아 일단 접었습니다. 아내나 지인들도 당분간 사회봉사보다는 창작에 전념하는 게 좋겠다고들 합니다.”
▼ 마지막으로, 황 선생께선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고 보십니까.
“한국 중산층은 이미 너무 잘살고 있죠? 런던과 파리에서 몇 년 보내면서 만난 중산층 이웃들은 아주 검소했습니다. 온 가족이 한 달에 한 번 외식하는 것도 부담스러워해요. 그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잘 살고 돈을 흥청망청 쓰는 편입니다. 검소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 좋지 않은가요. 저는 북구(北歐) 형태의 삶이 참 괜찮은 것 같아요. 약간 심심하고 쓸쓸한 정도의 검소한 생활이 정말 잘사는 것 아닐까요. 우리는 생애 대부분을 집 사고 아이들 대학 보내는 데 바칩니다. 그 두 가지에서만 놓여나도 삶의 질이 훨씬 높아질 겁니다. 그러면 가족이 여행도 다니고 책도 읽고 전람회나 콘서트에도 가며 생활할 수 있지 않을까요.”
두어 시간의 인터뷰 내내 그는 줄담배를 피워댔다. 술 담배를 얼마나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의 답이 재미있다.
“오스카 와일드가 그랬대요. 젊은 시절에 저지른 실수를 거듭해서 저지를 수 있는 용기와 각오가 있는 사람이면 그는 젊은 거래요, 어허허허. 그러니 내 젊음의 비결이 거기에 있지 않나 생각해요. 그리고 창조적인 열정을 끊임없이 자기 내부에서 퍼내면 그것이 사람을 늙지 않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다 글이 잘 써지지 않으면 폭삭 늙겠죠. 하지만 지금 저는 생애 가장 왕성한 창작욕에 불타고 있거든요.”
그가 자의반 타의반 작가로서 글을 쓰지 못했던 시기는 거의 15년에 이른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몇 년간의 사회운동(그는 ‘사회봉사’라고 표현), 5년간의 망명, 5년간의 감옥생활 동안 그는 사실상 작가가 아니라 행동가였다.
“그러니까 사실 지금이야말로 혼자 집필실에 틀어박혀 왕성하게 쓸 수 있는 시간과 때를 만난 거죠. 건강이 허락한다면 앞으로 한 20년은 더 쓸 거예요. 그때면 86세가 되니, 세계 최고령 현역작가가 돼보고 싶어요. 누가 사주팔자를 따져보더니 향후 20년 동안 왕성하게 활동한다고 그래요. 명도 길어 90대 중반까지는 간다니까 한 10년은 유유자적하면서 생애를 보내고 싶어요.”
황씨는 그 어느 때보다 창작 엔도르핀이 왕성하게 분비되고 있는 듯했다. 그런 상황에서 ‘개밥바라기 별’이 연재되고 있으니 그 소설을 읽는 독자도 행복해질 것 같다. 삶의 진실을 찾아 모순된 사회에 맞서 치열하게 살아온 노작가의 열정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