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 LG전자 세탁기는 국내는 물론 세계 주요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
- 세계 최대 가전 시장 미국에서도 5년 연속 드럼세탁기 부문 판매 1위다.
- 초대용량 고효율 세탁기 구동 기술을 개발해 LG전자의 승승장구를 이끈 이는 최근 인사에서 LG전자 새 사장에 임명된 조성진 HA사업본부장(57).
- 공고 졸업 뒤 입사한 조 사장은 최고의 엔지니어를 거쳐 고졸사원 최초 CEO가 된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이다.
<약력><br>● 1956년 충남 대천 출생<br>● 1975년 서울 용산공고 졸업<br> ● 1976년 9월 LG전자 전기설계실 입사<br> ● 1995년 4월 세탁기설계실(부장) <br> ● 2001년 3월 세탁기연구실장(상무) <br> ● 2005년 1월 세탁기사업부장<br> ● 2007년 1월 세탁기사업부장(부사장) <br> ● 2013년 1월 HA사업본부장(사장)<br>● 수상 : 신지식 특허인상(2002), IR52장영실상(2005), 국산 신기술 KT마크(2005), 대한민국 10대 신기술상(2005), 동탑산업훈장(2007), 대한민국 100대 기술 주역상(2010)
그러나 조 사장은 취임 후 어떤 언론과도 공식 인터뷰를 하지 않고 있다. 회사 관계자에 따르면 서울 연구소와 창원 공장을 오가며 꼼꼼히 업무만 파악 중이다. 축배를 드는 대신 곧바로 ‘새 일’에 뛰어들었다. 조 사장을 아는 이들은 이것이 바로 ‘조성진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조 사장은 사장이 되기 전부터 업계에서 이미 ‘학벌의 벽을 뛰어넘은 엔지니어’로 유명했다. 통돌이 세탁기, 노클러치 터보드럼 세탁기, 대용량 스팀드럼 세탁기 등 우리나라 세탁기 시장의 판도를 바꾼 제품이 모두 그의 연구를 바탕으로 탄생했다. 1976년 금성사 전기설계실에 배치돼 세탁기 설계를 시작한 뒤 30여 년간 한 우물만 파면서 이뤄낸 성과다. 그동안에도 그는 한결같았다. 혁신적인 기술로 ‘대박’을 기록하고 나면 곧 다음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조 사장에게 ‘Mr.세탁기’라는 명성을 가져다준 ‘LG 통돌이 세탁기’ 개발 무렵으로 가보자. ‘통돌이’는 요즘 일반 세탁기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처럼 쓰인다. 하지만 1996년 LG전자가 이 제품을 내놓기 전까지, 모든 세탁통은 세탁기 안에 단단히 고정돼 있었다. 바닥의 세탁판만 돌아가면서 물살을 만들고 빨랫감을 돌렸다. 조 사장은 이 ‘고정관념’을 깼다. 세탁통과 세탁판을 역회전시키는 알고리즘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1997년 9월 1일 ‘매일경제’는 이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통이 돌아가는 세탁기
“조성진 실장을 주축으로 구성된 개발팀은…매일 ‘고정관념을 깨자’는 주제로 회의를 하면서 신선한 아이디어를 모았다.…통돌이 세탁기 프로젝트팀은 한번 토론을 하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물고 늘어져야 직성이 풀렸다고 한다. 수시로 철야와 야근을 해야 하는 연구팀원들의 침식을 위해 아예 연구실 내에 오디오, 침대는 물론 식기세척기까지 갖춰놓았다. 새벽에 퇴근하는 것이 일상화된 연구원들은 집에서도 문전박대당하기가 일쑤였지만…그 보람은 말할 수 없이 컸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당시 LG전자가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고정돼 있던 세탁통을 역방향으로 돌린 효과는 놀라웠다. 기존 세탁기에 비해 세탁물 엉킴 현상이 51% 감소하고 세탁력은 22%, 헹굼력은 24% 개선됐다. 통돌이 세탁기는 그해 가전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다.
조 사장의 다음 도전은 세탁기 모터 혁신이었다. 당시 세탁기의 기본 구조는 세탁통과 모터를 벨트로 연결해 클러치로 조정하는 방식이었다. 세탁통과 모터의 연결 부분에서 결함이 자주 일어나고 소음과 진동이 컸다. 모터의 힘이 세탁통에 바로 전달되지 않아 세탁기 용량을 키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조 사장은 ‘세탁통에 직접 모터를 부착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당시 세계 세탁기 시장을 석권하고 있던 일본을 비롯해 해외 어느 나라에도 없는 기술이었다.
철야근무와 합숙 연구가 이어졌다. 해법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외환위기까지 찾아왔다. 조 사장은 “외환위기 당시 고비용이 드는 모터 기술 개발을 포기하라는 윗선의 지시를 받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상사의 눈을 피해 일과 후 팀원들과 몰래 숨어 연구를 계속했다. 마침내 1999년 ‘다이렉트 드라이브(Direct Drive)’ 기술을 완성했다. 세탁통에 속도 조절이 자유로운 인버터 모터를 단 것. 현재 LG전자의 모든 드럼세탁기에는 이 때 개발된 ‘DD모터’가 장착돼 있다.
세탁력은 강해지고 진동과 소음은 줄었다. 전기소모량도 감소했다. LG전자는 그해 미국에서 열린 가정용·산업용기기 학술행사 AMCE에서 이 기술로 논문 대상을 차지했다. 통돌이에 터보드럼 기술을 더한 ‘터보드럼 세탁기’는 1999년 한국능률협회컨설팅이 선정한 히트상품 대상에 선정됐고, 조 사장은 공로상을 받았다.
대용량 드럼세탁기의 탄생
미국 드럼세탁기 시장에서 LG전자는 5년째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조 사장은 이번에도 멈추지 않았다. 또 한 번, 신기술 개발에 도전했다. 2005년 출시된 ‘스팀 트롬’ 세탁기도 그의 손끝에서 나왔다. LG전자에 따르면 조 사장이 이 기술 연구에 뛰어든 건 2003년 무렵부터다. 해외 출장 중에 바지가 자꾸 구겨지는 데 불편함을 느끼다가 뜨거운 김이 서려 있는 샤워실에 걸어두니 주름이 펴지는 것을 보고 착안했다고 한다. 2년여의 연구 끝에 세계 최초 듀얼 스팀 드럼세탁기가 나왔다. 스팀을 이용해 때를 불려 세탁함으로써 세탁력은 높아지고, 전기와 물 사용량은 각각 51%, 38%씩 줄었다. 시장 반응은 역시 뜨거웠다. 세계가 움직였다. 2003년 2.3%에 불과했던 LG 세탁기의 북미 시장 점유율은 2006년 14.3%로 뛰어올랐다. 2007년 초에는 미국 드럼세탁기 시장 1위에 올랐다. 단일 국가로는 세계 최대 규모 가전시장인 미국에서 현재 LG전자는 5년째 드럼세탁기 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다. 2012년까지 6년 연속 1위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상도 뒤따랐다. 2006년 당시 산업자원부는 조 사장의 ‘스팀 세탁 기술’을 ‘대한민국 10대 신기술’로 선정했다. 생활가전 분야 기술이 ‘신기술’로 선정된 건 이때가 처음이다. 2007년에는 세탁기 사업 분야에서만 3년간 60억 달러 상당의 글로벌 매출을 달성해 국가 산업 발전과 국가 경쟁력 향상에 기여한 공로로 동탑산업훈장도 받았다.
조 사장의 스팀 기술은 이후에도 꾸준히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2012년에는 ‘스팀트롬 알러지케어’로 발전해 LG전자의 주요 드럼세탁기 제품에 적용되고 있다. 이 기술은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주요 원인물질인 집먼지 진드기 등을 효과적으로 제거해주는 것으로, 한국천식알레르기협회(KAF·Korea Asthma Allergy Foundation)와 영국알레르기협회(BAF·British Allergy Foundation) 등의 인증을 받았다.
어쩌면 조 사장의 삶에서 진짜 ‘신화’는 사장이 된 것이 아니라 최고의 세탁기 엔지니어가 된 것,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그가 금성사에 입사할 무렵 우리나라의 세탁기 보급률은 채 1%가 안 됐다. 관련 기술도 전무했다. 당시 한국 전자회사가 하는 건 일본 부품의 조립에 불과했다. 조 사장은 오랜 기간 자신의 업무는 일본에 가서 머리 숙이고 기술을 베껴오는 것이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전자회사가 모여 있는 일본 오사카를 하도 드나들어 지금도 오사카 사투리가 강한 일본어를 쓴다. 도쿄에 가면 곧잘 ‘오사카 출신이냐’는 질문을 받을 정도다.
‘세탁기 기술 독립’의 꿈
1998년 LG전자가 터보드럼 세탁기를 출시한 뒤 낸 언론 광고.
어느 정도 내공이 쌓이자 비로소 자신의 소신을 회사에 밝혔다. 1990년대 초반의 일이다. LG전자에 따르면 조 사장은 세탁기설계실 근무 시절 ‘일본으로부터의 탈피’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냈다. 독자적인 기술로 일본을 뛰어넘든지 새 영역을 찾아 일본을 비켜나가자는 내용이었다. 이후 통돌이와 DD모터와 스팀드럼세탁기 등이 차례로 세상에 나왔다. 첨단 기술에 세련된 디자인까지 더한 LG세탁기는 이제 미국·유럽 등에서 프리미엄 제품으로 평가받는다. 일본 세탁기는 국내외 시장에서 LG전자의 적수가 되지 못한 지 오래다.
조 사장은 2001년 LG전자 최초의 고졸 출신 상무로 승진했을 당시 “이 직책이 회사가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2005년 세계 최초의 듀얼분사 스팀 드럼세탁기 개발을 통해 세탁기의 새 역사를 쓴 뒤 2007년 세탁기사업부장인 부사장으로 승진했을 때는 “승진해서 기쁜 것보다 세탁기 부문에서 계속 일할 수 있어서 안도했다. 한동안 다른 부문으로 발령이 난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오직 ‘세탁기에만 미쳐’ 살아왔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실제로 그는 세탁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뒤 사내 다른 사업부로 옮길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TV나 휴대전화 같은 첨단기술 분야에서 일해보면 어떠냐는 제안도 받았다. 그러나 조 사장은 자리를 지켰다. 옷을 벗지 않은 상태에서 빛으로 빨래를 할 수 있는 세탁기나 휴대전화와 연동해 작동하는 스마트 세탁기 등의 첨단 기술이 세탁기 분야에서도 얼마든지 구현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어떤 명문대 출신도 이루지 못한 ‘외제보다 좋은 국산’의 역사를 앞장서 일궈냈다. 최근에는 세탁하기 힘든 양복이나 외투를 보관해두기만 하면 냄새와 세균이 제거되는 ‘LG 트롬스타일러’를 출시해 세탁기의 영역을 한층 넓히기도 했다.
이제 조 사장은 36년 만에 세탁기에서 벗어나 냉장고, 청소기 등 가전제품 전반을 총괄 경영하게 된다. 1978년 금성사의 고졸 신입사원 초임은 월 11만300원이었다. 그렇게 입사해 일본 기술을 배웠던 그가 샐러리맨의 신화로 우뚝 선 것이다. LG전자 전통적 주력 분야인 HA사업본부를 조 사장이 어떻게 이끌어갈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