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단순한 바느질 기법인 홈질로 옷감 전체를 누비며, 끝내는 옷감 자체를 다른 재질로 바꿔버리는 누비질. 누비장 김해자(金海子·60)는 마음을 비우게 하는 단순한 반복이 좋아 누비에 관심을 갖게 됐고, 어느덧 누비 바느질이 자신의 인생이자 일생의 수행법이 됐다. 우리 민족의 독특한 바느질법인 누비의 아름다움과 정신적인 면을 재발견하고 되살려내 중요무형문화재가 된 그는 자신의 누비옷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옷’이 되길 바란다.
“묘한 것이, 옷을 지을 때 짓는 사람의 마음이 그 옷에 다 담기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옛 여인네는 아이 옷이나 남편 옷을 지을 때 아이나 남편이 건강하고 출세하도록 온 정성을 다해 바느질을 했지요. 또 전쟁터에 나가는 남편과 아들 옷은 천 명에게 한 땀씩 부탁해서 지으면 화살도 총알도 뚫지 못한다고 믿어 바느질 동냥도 했다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 어머니들에게 바느질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기도이자 종교였던 거지요.”
그럼 세상에 가장 편하고 좋은 옷은 당연히 정성을 다한 옷이란 말인가. 김해자 명장의 대답은 놀랍게도 ‘텅 빈 마음으로 지은 옷’이 가장 편한 옷이란다.
“무엇이든 구하는 마음은 사심(邪心)이 되게 마련이지요. 옷 짓는 사람이 아무 사심 없이 마음을 다 비운 상태에서 바느질해 만든 것이라야 누가 입어도 편한 옷이 되는 겁니다.”
옛 여인네들은 정성과 한(恨), 설움을 담아 바느질을 했을 테지만, 사랑하는 가족의 안위와 행복을 염원하는 그 마음조차 내려놓을 때 비로소 가장 편안한 옷이 된다는 뜻일 게다.
“바람처럼 설렁설렁 하라”
김해자의 바느질 인생에서 화두는 ‘편안함’인 것 같다. 그는 자신의 고운 누비 작품을 설명할 때도 ‘솜씨’니 ‘정성’이니 하는 말보다 ‘다 비운 마음’‘편안함’이라는 말을 더 자주 쓴다. 제자들에게도 그가 늘 당부하는 말이 있다. “너무 잘하려고 용쓰지 말고 저 바람처럼 설렁설렁 하라”고.
“너무 정성 들여 잘하려고 하거나 빨리 완성하려고 서두르면 바늘이 수십 개씩 부러지고 실도 자꾸만 꼬입니다. 그렇게 만든 옷이 편한 옷이 되겠어요? 또 ‘내가 널 위해 이렇게 정성을 다해 만들었다’는 식의 생색도 입는 사람을 불편하게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옷 할 때는 제발 생색 내지 말라고 타이르죠.”
무념, 무심으로 바느질하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은 알지만, 바느질을 하다보면 온갖 번뇌와 망상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매순간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상념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또 일어나곤 한다.
“번뇌가 일어날 때마다 바느질 한 땀에 생각을 밀어내며 해나가다보면 어느덧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습니다. 그렇게 편안해지는 마음이 좋아서 누비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게 된 것 같아요.”
홈질로 이어가는 누비는 아주 단순한 작업이지만, 배우는 이들이 3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포기하는 이유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단순함 때문이라고 한다.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 진력이 나게 마련인데, 그는 바로 그 단순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내공’이 쌓인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평생 수행하듯 단순한 동작을 끈기있게 반복했고, 그 결과 편안한 마음과 편안한 옷을 얻었다. 그의 옷은 입는 사람은 물론이지만 보는 사람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2001년 일본 NHK에서 주최한 세계 퀼트 초대전에 초청되어 갔을 때 그의 누비가 다른 화려한 퀼트보다 더 인기를 끈 것도 편안함 덕택이었다.
“60개국이 참가한 박람회였는데, 세계 퀼트 장인들이 저의 전시관을 많이 찾아왔어요. 그러면서 한결같이 ‘다른 전시장에서는 숨이 막힐 것 같은데, 이곳에 오면 마음도 호흡도 편안해진다’고 말하더군요.”
본래 퀼트는 자투리 천을 이용한 소박한 공예였지만, 오늘날에는 예술작품으로 퀼트를 만들다보니 그 기법이나 색상이 복잡하고 화려하다. 처음 보면 아름답지만 오래 두고 보거나 한꺼번에 많은 작품을 보게 되면 오히려 숨이 막히는 답답한 느낌을 받는 것도 기교가 너무 승(勝)하기 때문이리라.
“퀼트가 발달한 미국에서 600여 점의 개인 소장 작품전을 본 적이 있는데, 과거에는 미국 작품도 주로 흰색과 빨간색 천을 이용한 소박한 작품이 많더군요. 그런데 요즘엔 일부러 천을 잘라서 ‘작품’으로 만들다보니 작가들이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수고스럽게 만들어냅니다. 그러니 기교가 많이 들어가게 되어 숨이 막힐 지경이 된 것이지요.”
그는 일찍이 우리 누비가 다른 나라의 퀼트와는 다른 ‘무기교의 기교’를 바탕으로 한 것임을 알았다. 일본 NHK에서 그를 초대하기 위해 그가 사는 경북 경주까지 찾아왔을 때, 처음엔 참가를 거절한 것도 기교 위주의 퀼트와 함께 취급되는 것이 싫어서였다.
“초대전에 동참해달라고 하기에 우리 누비는 퀼트가 아니라고 했어요. 그러자 이해를 못하더군요. 솜을 넣어 바느질하는 것이 같지 않으냐면서요. 그래서 우리 누비는 기교라는 군더더기를 다 떨어낸 정신적인 산물이지, 보통 바느질 작품이 아니라고 했지요.”
누비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하늘 높은 줄 모른다. ‘기교가 없으므로 오히려 제일 수승(殊勝)한 것이 우리 누비인데, 어찌 기교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잡스러운 문화와 한데 섞일 것인가’ 하는 게 그의 마음이다. 일본 사람들도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어떻게 하면 동참해줄 것이냐고 물었고, 그는 퀼트라는 말 대신 ‘누비’라고 표기해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래서 참여하게 된 초대전에서는 ‘똑같이 바느질을 하면서도 퀼트라고 하지 않고 누비라고 하는 나라는 어느 나라겠는가’라는 슬로건이 내걸렸고, 그의 작품은 큰 관심을 받았다.
방한용 누비옷에는 솜을 넉넉히 두고 볼록하게 골을 내어 보온성을 높였다.
‘퀼트’가 아니라 ‘누비’다
다른 우리 공예품도 그렇지만, 그의 누비에 더 큰 관심을 보인 곳도 일본이다. 주름옷으로 유명한 일본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 브랜드의 미국과 프랑스, 일본 지부장 등 다섯 명이 그를 찾아온 것은 2000년대 초. 지부장들은 그의 공방을 참관하고 이세이 미야케를 위해 버선을 맞춰갔다.
“잘 때 발을 따뜻하게 해줄 목이 긴 누비버선을 만들어줬지요. 면에다 솜을 두어 발이 편안하도록 한 버선이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해자 명장이 일본에서 초대전을 열 때면 이세이 미야케가 직접 찾아오고 함께 식사도 하는 사이가 됐다. 때로 김 명장이 지갑 등을 누비로 만들어 선물하면 미야케는 쓰지 않고 전시한다고 한다. 김 명장 자신은 아무런 홍보도 하지 않았는데 이세이 미야케 쪽에서 먼저 관심을 갖고 찾아온 것은 아무래도 미야케의 대표작인 ‘주름’과 누비가 비슷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오목누비는 주름옷에 가깝고, 미야케의 초기 주름 작품은 우리 누비옷 그대로라는 것이 김 명장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일본에는 전통 누비 바느질이 없단 말인가.
“일본의 누비질은 거의가 장식적인 스티치에 불과하고 그래서 부분적으로만 써왔어요. 우리처럼 천 전체를 다 누빈다거나 골이 오목하게 파이는 누비 바느질이 없어요.”
그가 보여준 일본 잡지에는 그의 작품이 소개돼 있고, 일본 작가나 기자들이 그를 소개한 책자나 기사도 꽤 됐다. 특히 나오키상 수상자로 유명한 일본 작가 이츠키 히로유키는 한국의 불교문화를 소개하는 책에서 그를 인터뷰하고 그의 누비 바느질을 불교 수행법과 비교하는 내용을 실었다. 그동안 한국 불교를 기복신앙으로만 치부했던 이츠키 히로유키는 김해자 명장의 누비에서 무념의 공(空) 상태를 추구하는 불교정신을 읽어냈다. 그의 누비는 바느질을 넘어 한국의 불교문화까지 새롭게 알린 셈이다. 경주 공방까지 찾아왔던 히로유키는 자신의 초등학교 동창인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전 도쿄도지사)를 김 명장에게 소개했고, 이시하라는 김 명장에게 옷을 맞추기도 했다.
김해자 명장이 누비옷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불교와 관련이 깊다. 본래 누비옷은 승려가 입는 납의(衲衣)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납의는 말 그대로 ‘기운 옷’을 말하며, 이 기운 옷을 입은 ‘납자(衲子)’는 곧 승려를 뜻한다. 누비가 납의에서 나왔다는 설은 조선시대 후기 자료에 따른 것이다. 영조 때 문신 이의봉이 우리나라와 주변국의 어휘를 비교 정리한 ‘고금석림(古今釋林)’에서 납의를 누비라 풀이했고, 정약용은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승가에서 입는 기워 보수한 납의를 누비라고 잘못 옮겨, 해진 옷을 기웠다는 뜻의 누비를 새 옷감에도 쓰게 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제자와 함께. 그가 이끄는 누비문화연구원의 전국 지부에서 2년간 공부한 사람은 3년째 되는 해부터 그의 경주 누비 침방에서 직접 지도를 받을 수 있다.
박물관 유물을 스승으로 삼다
유래야 어찌 됐건 누비옷이 승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출토 유물에서는 호사스러운 각종 누비옷이 많이 나오고, 군포납세 중 누비옷을 납부한 기록도 보이지만 최근까지 누비 바느질 기법이 전승돼온 곳은 절집이었다.
“우리나라 스님들은 누비옷을 많이 입어왔고, 또 왕실의 침방 나인들은 모시던 분이 돌아가시거나 나이가 들어 궁궐을 나오게 되면 보통 절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어요. 스님들은 다 손수 옷을 해 입어야 하잖습니까. 그러니 누비 승복을 만들면서 누비 바느질의 전통이 절집에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창녕에서 15년을 산 뒤 경주에 터를 잡았다. 그의 침방이자 살림집이기도 한 이 집에서 그는 제자들과 손님을 맞고 작업도 한다.
“그 무렵 우리 옷 수요가 많았고, 특히 종로 주단집에서는 혼수용 한복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열심히 하면 밥 먹고 살 수 있었지만, 자칫 실수라도 하면 여지없이 노임에서 깎아버리므로 어떤 이들은 한 달 내내 일하고도 몇 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때 기억으로 그는 남의 노동의 대가를 깎는 것이 얼마나 야박한 일인지 뼈저리게 느낀 듯하다. 그는 곧 자신의 한복집을 차렸고, 또 그때 이미 불교와 인연을 맺어 누비 바느질에도 자연히 관심을 갖게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손누비 바느질 기법을 배울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대한제국 황실침방 나인 출신인 성옥염 상궁이 탑골선방(현 보문사)에 계신다고 해서 거기까지 찾아갔지만, 유감스럽게도 연세가 너무 많아서 기술을 전해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창녕에 살고 있는 황신경 씨를 알게 돼 찾아갔는데, 당시로서는 누비 기술을 가진 거의 유일한 인물로 승복을 전문으로 만들고 있었다. 황씨 역시 절집에서 옛 침방 나인 출신인 선복스님과 지내며 누비 기술을 보고 배웠는데, 선복스님은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의 옷을 지은 인물이다. 김 명장의 누비질 계보를 굳이 따지자면 황신경 씨와 선복스님으로 이어지지만, 그렇다고 그 계보가 사제관계로 이어져 내려온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18세기 파평 윤씨의 유물을 재현한 것이다.
그는 곧 ‘창녕 할매’ 곁을 떠나 혼자 누비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누비옷을 공부하기 위해 그가 가장 많이 찾았던 곳은 박물관이다. 그는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과 도록을 그저 눈으로만 보고 이를 직접 만들어보고 익혔으니 그의 진정한 스승은 그의 말마따나 ‘박물관의 유물’이었던 셈이다.
그는 30대와 40대 중반까지 15년 동안 경남 창녕에서 누비를 연구하면서 바느질만 하며 살았다. 생계는 유명 한복디자이너나 서울 한복집의 ‘작품’을 주문받아 대신 바느질해주는 것으로 해결했다. 어떤 면에서 철저한 ‘기능인’으로 살았던 그는 유명 디자이너들이 그가 만든 작품을 자신들의 이름으로 발표할 때도 그저 그러려니 했다. 심지어 어떤 디자이너는 그가 연습하다 ‘실패’로 치부한 누비옷까지 얻어가지고 가서 잡지에 자신의 작품으로 낸 경우도 있었다.
일도 공부도 수행하듯
“나중에 물어보면 웃으면서 시인을 해요. 저를 그저 기능인으로만 봤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거겠죠. 저 자신도 그런 걸 일일이 따질 마음도 없었고, 그저 주문을 받아 생계를 해결하는 게 더 시급했죠.”
그는 누비질의 전통을 잇기 위해 제자도 키웠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우리 옷을 점차 입지 않게 돼 일감이 떨어지자 제자들도 하나둘 떠났고, 주문받은 한복집에서 공임을 떼이기도 했다. 그러니 한복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대신 만드는 일도 그에겐 아쉬운 일거리였던 것이다.
“한 달에 한 사람 주문 받으면 밥을 굶지는 않았으니까 크게 번거롭지 않게 살 수 있었습니다. 일이 없어서 오히려 고요하고 정갈하게 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대신 누비옷 연구만은 아주 열심히 했지요.”
일도 공부도 수행하듯 했던 그 15년 동안 그의 얼굴도 맑은 기운에 넘쳐서, 처음 보는 사람은 그에게 말 걸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중요무형문화재가 된 이후 그가 원하지 않던 명성과 지위가 생겨 번잡하게 살아온 15년 동안 그는 속으로 늘 고요했던 그 시기를 그리워해왔다.
하지만 실제 창녕에서 보낸 15년간은 혹독한 시련기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우리 옷이 인기를 잃어가던 시기였고, 누비옷은 더더욱 수요가 없었다. 일반 한복집이 쇠퇴하는 대신 ‘한복 디자이너’라는 이들이 등장하던 시기, 어느 유명 한복 디자이너는 그에게 “당신이 만든 누비옷은 잘 해지지 않으니, 누비옷만 계속 만들다가는 당신은 망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정성 들여 만든 옷인데 누군가는 사주겠지’ 하는 희망을 품고 누비에만 매달렸다. 제자들이 모두 떠나갔을 때에도 그는 누비질을 하면 편안해지는 그 순간이 좋아서 누비를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그렇게 창녕에 ‘처박혀서’ 누비만 하던 그는 1992년 전승공예대전에 누비옷을 출품했다.
“이름 내려고 출품한 게 아니고, 주문이나 받아볼까 하고 내본 것이었습니다. 당시 침선장이었던 정정완 선생님이 격려해주셔서 출품을 결심하게 됐지요.”
정정완 선생은 위당 정인보의 맏딸이자 정양모 전 중앙박물관장의 누이다. 평소 김해자의 솜씨를 눈여겨본 정 선생은 그가 단순한 기능인이 아닌 장인으로 커나가도록 격려했다. 그러나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하려면 출품작으로 유물 재현품이 하나쯤은 들어가야 했다. 그러자면 실제 유물을 얻어야 했다. 그는 단국대 석주선 박사가 많은 유물을 모으고 연구한다는 말을 듣고 누비옷 한 벌을 들고 석 박사를 찾아갔다.
‘침선장’ 마다하고 ‘누비장’ 요구
“유물을 재현할 수 있도록 유물을 좀 내달라고 부탁 드렸는데 저의 옷에 만족하셨는지 유물 114호를 내주시면서 그 옷들을 재현할 수 있는지 물으셨어요.”
유물 114호는 철릭(문반인 직령이 입는 직령포)인데, 그는 그 외에도 치마저고리와 두루마기, 승복까지 누비옷을 여섯 달 만에 만들어 출품했다. 석 박사는 물론이고 그를 아끼는 이들은 모두 ‘여섯 달 만에 이 많은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아무도 안 믿을 터이니 3년 걸려서 만든 것이라고 하라’고 조언했다. 실제로 그는 여섯 달 동안 밤잠도 아끼며 만들어냈으니 3년 걸려 만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의 출품작은 문화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출토 유물로 나온 많은 누비옷을 재현해내지 못했던 문화재청과 학자들은 누비옷 전통기술이 끊어진 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의 뛰어난 솜씨에 깜짝 놀랐던 것은 당연했다. 그는 첫 출품에서 단번에 국무총리상을 거머쥔다.
하지만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솜씨’라며 대통령상 감이라고 했던 전문가들은 그가 대통령상을 받지 못한 것에 크게 아쉬워했다. 대통령상 감이 국무총리상에 머문 것은 어쩌면 아무런 출품 경력도 없는 무명의 기능인에 불과했던 그의 부족한 경력 탓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화재청에서는 유물 재현을 위해서라도 서둘러 그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려고 나섰다. 무형문화재는 보유자가 제자에게 물려주는 형식이어서 문화재청에서는 침선장인 정정완 선생의 후계자로 그에게 침선장을 주려고 했다. 인격자였던 정정완 선생은 ‘나보다 더 뛰어난 이를 어떻게 후계자로 삼느냐’면서도 후계자로 지정하는 데 서명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그는 문화재청에 ‘침선장’ 대신 ‘누비장’이라는 별도의 분야를 마련해달라고 요구했다.
“누비도 바느질의 일종이니 침선장이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지요. 하지만 나라에서 필요해서 저를 쓰고자 한다면 누비장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부여해주기를 바랐습니다. 누비는 일반 바느질과는 다른 면이 많은 기술이니까요.”
무형문화재에서 새로운 분야를 설정하게 되면 전국 장인들에게 공고를 내야 한다. 어느 지방에서는 재봉틀로 만든 기계 누비옷을 추천해 올리기도 하고, 많은 바느질 장인이 누비장에 도전했지만, 승복 말고 일반 옷까지 재현해내는 기술을 가진 이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1996년 ‘누비장’이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중요무형문화재가 됐다.
이제 그를 단순한 기능인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했던 작품을 사간 어느 유명 한복 디자이너는 파리에서 그의 작품을 자신의 작품으로 둔갑시켜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세계 퀼트계가 알아주는 한국의 대표 바느질 명장이다. 일본은 물론이고 중국, 미국 등지에서도 초대전을 열어온 그는 미국 전시회 때에는 강연회와 함께 박물관 만찬 초대를 받아 비로소 ‘대접 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의 생활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지난 40년의 생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생계를 위해 누비옷을 짓고 제자를 키운다. 물론 이제 그의 작품 값을 깎으려 드는 이는 없어졌지만.
‘불같은 성질’ 눅이는 누비
“제 옷값이요? 정해놓은 가격이 없어요. 사람마다 형편이 다 다르고 마음 씀씀이가 다르니, 사람 봐가며 받지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봄철이면 제자들과 함께 지리산 차밭에 가서 직접 차를 덖어 만들기도 했고, 커피도 직접 콩을 볶고 갈아서 내려 먹었던 그는 직접 만든 차와 커피를 내면서 ‘편안한 맛’이냐고 물었다. 몇 년 전에 만든 차라고 하는데 정말로 그의 차는 쓴맛이 나지 않는다. 차든 옷이든 편한 마음으로 만든 것이라야만 편한 맛과 멋을 낼 수 있다는 그의 지론은 맞는 것 같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차까지 직접 만들 정도로 멋과 맛에 예민하고 그의 머리는 온갖 아이디어로 넘쳐난다. 그의 공방 작업대가 다른 바느질 장인들의 작업실과 달리 모두 서서 작업할 수 있는 입식으로 만들어진 것도 허리가 나쁜 그 자신이 생각해낸 것이라고 한다. 게다가 그의 성격은 급하기로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요, 제자들도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여장부이자 일벌레다. 그런 그가 어찌해서 늘 ‘편안함’과 ‘텅 빈 마음’을 이토록 강조한단 말인가.
“하하하.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제 불같은 성질을 눅이는 수행에 누비만한 것이 없어서 이날까지 하고 있는지 모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