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실역행, 진실정신, 지방색 타파’ 강조
- 육당은 조선총독부 중추원이 어딘지도 몰랐다
- 친일이 ‘부역’이라면… 그런 일은 없었다
- 학병 권유는 軍 지휘 경험 쌓으라는 의미
- 후예들 “육당은 한국의 토머스 제퍼슨”

● 1941년 서울 출생<br>● 경기고, 서울대 공대, 미국 터프스대 대학원 졸업<br>● 한국기술개발공사, 아메리칸 시아나미드 근무, 블록드러그사 기술이사<br> ● 미국 식품의약국(FDA) 규제 자문회사 ‘케이텍’ 설립<br>● 조선광문회복원추진위원회 자문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최 씨는 군복무를 마치고 도미 유학 후 줄곧 뉴저지에 터를 잡고 살았다. 그런 그가 육당 사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왜 새삼 이 같은 책들을 내는 것일까. 육당의 행적과 공과(功過)에 대해 그와 후손들은 어떻게 평가할까. 그가 기억하는 할아버지 최남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육당은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상가요, ‘시대일보’라는 일간신문을 창간한 언론인이었다.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한 시인이었으며, 일생을 조선사 연구에 매진한 역사학자였다. 육당은 최초의 종합잡지 ‘소년’을 창간하고 ‘열하일기’를 비롯한 우리 고전 35종 59책을 중간(重刊)했다. 최초의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도 펴냈다. 조선광문회를 만들어 선대가 일군 가산 30만 원(현재 가치 300억여 원)을 모두 이런 출판·문화사업에 쏟아 부었다. ‘황성신문’에 투고해 일화배척(日貨排斥)을 주장하고,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죄로 옥고를 치렀다. 그럼에도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일제 말기 조선사 편수위원 등을 지낸 친일 행적을 문제 삼아 육당을 ‘친일파’로 규정했다.
육당은 반민족행위자라는 오명과 건강 악화로 말년을 불우하게 보냈다. 최학주 씨는 육당과 17년을 함께 산 장손인 만큼 그에 대한 궁금증을 누구보다 명쾌하게 풀어줄 만한 증인이다. 태평양 너머의 그와 e메일로 문답을 주고받았다.
▼ 집안에서 육당은 어떤 분이었나요.
“당신이 태어난 시기가 유교적인 가족 질서와 전통을 중요시하던 때였으니 가문의 명예를 지키며 부모님 말씀 잘 따르고 형제간 우의에 충실했습니다. 육당이 소년시절에 벌인 조선 근대화 작업은 갑신정변의 실패에 실망했던 엄친(嚴親) 최헌규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었고 모친은 엄친보다 더 엄했다고 합니다. 육당은 어려서부터 부지런한 학동으로 소문 나 있었는데 그런 성품과 체질은 모친을 닮았다고 합니다. 육당은 한때 프랑스 유학을 계획했었는데 엄친의 병환으로 뜻을 접었을 만큼 유교적 효심이 지극했어요.
참척(慘慽)의 아픔을 딛고

1957년 정초 최남선(왼쪽) 최두선 형제.
▼ 6·25전쟁을 전후해 힘겨운 나날이 이어진 걸로 압니다.
“큰딸은 인민군에게 학살당했고, 그 사위는 납북되어 아직도 생사불명입니다. 막내아들은 자진 월북하고, 몸이 약해진 큰아들은 부산 피난처에서 병사했어요. 손자 하나도 대구 피난처에서 익사했고요. 전쟁으로 풍비박산 난 집이 우리뿐은 아니었지만 육당에겐 가슴을 찢는 아픔이 또 있었습니다. 하나는 민족과 국토가 둘로 갈라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 우이동에 소장하고 있던 17만 권의 장서가 소진(燒盡)된 것입니다. 국가적으로도 귀한 문화재를 잃은 거죠. 자손들 앞에서 내색하진 않았지만 많이 아파하셨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불경으로 마음을 달래곤 하셨지요. 그런 중에도 전쟁 전부터 집필하시던 ‘조선역사사전(朝鮮歷史辭典)’을 완성하겠다는 강한 의지로 당신을 지탱하셨어요. 사전 편찬 작업으로 불철주야 과로한 탓에 병환을 얻었고 돌아가시기 수년 전에 천주교에 귀의했습니다.”
▼ 불교에 독실했고 또 평생 단군 연구에 매진하던 분이 왜 개종한 건가요?
“당시 많이들 놀랐지요. 특히 조계종 내분으로 적잖이 시끄럽던 불교계가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압니다. ‘경향신문’인가에 당신의 개종 성명서가 나온 다음 날, 넓은 마당은 아니지만 아무튼 마당에까지 스님과 유림계 손님들이 가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 성명에서 ‘과거 50~60년간의 종교적 체험을 청산하고 가톨릭에 귀의하여 감연히 영세하니,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개인적으로 구령(救靈)인 동시에, 국가 민족에 대하여는 혁구진신(革舊振新)에 일대 염원’이라고 하면서 ‘지난 200년 우리 우국선철(憂國先哲)들이 미처 다하지 못한 빚의 책임을 벗어볼까 한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실학운동으로 시작된 우리의 근대화 작업을 끝내지는 못하더라도 가톨릭적인 정신체계가 결국은 당신의 조국 근대화 염원을 들어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후 제 어머님을 포함해 가족들 전부가 천주교 영세를 받았지만 저만 아직도 이른바 종교의 구제, 구속, 구령의 문제에 확신이 없어 그 은혜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민족은 대치욕”
▼ 육당이 평소 강조하던 말씀이 있다면.
“도산(島山)의 가르침인 무실역행(務實力行·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자)과 진실정신(眞實精神·거짓말하지 말고, 진실만을 전하고 남기자)입니다. 아울러 지방색 타파도 강조하셨어요. 인사(人事)건 혼사(婚事)건 지방색을 가리지 말자는 뜻이지요.”
▼ 육당이 친일파라는 비난을 들은 건 언제쯤인가요.
“중학교에 들어가서였을 거예요. 국어, 역사, 공민…그런 순서로 육당의 글과 이름이 등장했던 것 같아요. 선생님들은 육당의 역사적 행적과 공과에 관한 세평을 곁들여 알려주셨어요. 그러면 육당이 제 할아버지인 것을 아는 친구들이 선생님에게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제 친구들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선생님들한테 별로 시원한 설명이나 답변을 들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직도 의문은 남아 있어요.”
▼ 할아버지가 왜 친일파로 몰렸다고 봅니까.
“모르겠어요. 정말 연구 대상입니다. 대한민국 건국 직후 육당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돼 한 달 정도 투옥됐을 때 당신이 직접 그런 혐의를 받게 된 이유를 ‘자열서(自列書)’라는 제목으로 일간신문 등을 통해 설명했습니다. 당시 받고 있던 혐의에 대해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전제로 입장을 밝히셨어요. 두 세대 정도가 더 지난 현 시점에서 다른 해석이 있더라도 저로서는 자열서에서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뺄 생각이 없습니다. 육당의 공과(功過)는 격랑의 시대를 한반도에서 함께 버텨낸 동시대인이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지금의 ‘친일파’ 분류 논쟁은 정치인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것일 뿐 별 의미가 없어 보여요.”
1949년 3월 9~10일 ‘자유신문’에 실린 자열서는 육당이 수감 중이던 서울 마포형무소에서 반민특위 위원장 앞으로 쓴 글이다. 최학주 씨는 2011년에 펴낸 저서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근대의 터를 닦고 길을 내다’에 자열서 전문을 공개했다. “민족의 일원으로서 반민족(反民族)의 지목을 받음은 종세(終歲)에 씻기 어려운 대치욕이다”라는 고백으로 시작하는 자열서에는 변절자라는 오명을 쓴 육당의 심경과 해명이 담겨 있다. 주요 대목을 살펴보자.

육당이 직접 작성하고 조판한 독립선언서 원본.
(…) 문제는 세간의 이른바 변절로부터 시(始)하여 변절의 남상은 조선사편수위원(朝鮮史編修委員)의 수임(受任)에 있다. 무슨 까닭에 이러한 방향 전환을 하였는가. 이에 대하여는 일생의 목적으로 정한 학연(學硏) 사업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 빠지고 그 봉록(俸祿)과 그리로서 있는 학구상 편익을 필요로 하였었다는 이외의 다른 말을 하고 싶지 않다. (…)
이 ‘조선사’는 다만 고래(古來)의 자료를 수집 배차(排次)한 것이요, 아무 창의와 학설이 개입하지 아니한 것인 만큼 그 내용에 금일 반민족행위 추구(追究)의 대상될 것은 일건일행(一件一行)이 들어 있지 않을 것이다. (…)
소위 대동아전쟁의 발발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일본인은 나를 건국대로부터 구축(驅逐)하였다. 고토(故土)에 돌아온 뒤의 궁액(窮厄)한 정세는 나를 도회로부터 향촌으로 내어몰았다. 이제는 정수내관(靜修內觀)의 기(機)를 얻는가 하였더니 이사의 짐을 운반하는 도중에서 붙들려서 소위 학병 권유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
처음 학병문제가 일어났을 때 나는 독자(獨自)의 관점에서 조선청년이 다수히 나가기를 기대하는 의를 가지고 이것을 언약한 일이 있었더니 이것이 일본인의 가거(可居)할 기화가 되어서 그럴진대 동경 일행을 하라는 강박을 받게 된 것이었다.
당시 나의 권유 논지는 차차(此次)의 전쟁은 세계역사의 약속으로 일어난 것이매 결국에는 전 세계 전 민족이 여기 참가하는 것이요, 다만 행복한 국민은 순연(順緣)으로 참가하되 불복한 민족은 역록(逆綠)으로 참가함이 또한 무가내하(無可奈何)한 일임을 전제로 하여 우리는 이 기회를 가지고 이상과 정열과 역량을 가진 학생 청년층이 조직, 전투, 사회 중핵체 결성에 대한 능력 취위성(取爲性)을 양성하여 임박해오는 신운명에 대비하자 함에 있었다. (…)
이상의 밖에 나에게 총집하는 죄목은 국조 단군을 무(誣)하여 드디어 일본인의 소위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에 보강 재료를 주었다 함이다. 상래(上來)의 몇 항목은 일이 다만 일신(一身)의 명절(名節)에 관계될 뿐이매 그 동기 경과 내지 사실 실태에 설사 진변(陳辯)할 말이 있을지라도 나는 대개 인묵(忍默)하고 만다. 그러나 이 국조문제는 그것이 국민정신의 근본에 저촉되는 만큼 일언의 변파(辯破)를 용훼(容喙)치 못할 것이 있는가 한다.
“대중의 분노는 사랑”

1969년의 조선광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