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호

“친일은 없었다…학병 권유는 힘 기르라는 뜻”

육당 장손 최학주가 말하는 ‘내 할아버지 최남선’

  • 김지영 기자│kjy@donga.com

    입력2013-01-22 11: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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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실역행, 진실정신, 지방색 타파’ 강조
    • 육당은 조선총독부 중추원이 어딘지도 몰랐다
    • 친일이 ‘부역’이라면… 그런 일은 없었다
    • 학병 권유는 軍 지휘 경험 쌓으라는 의미
    • 후예들 “육당은 한국의 토머스 제퍼슨”
    “친일은 없었다…학병 권유는 힘 기르라는 뜻”

    ● 1941년 서울 출생<br>● 경기고, 서울대 공대, 미국 터프스대 대학원 졸업<br>● 한국기술개발공사, 아메리칸 시아나미드 근무, 블록드러그사 기술이사<br> ● 미국 식품의약국(FDA) 규제 자문회사 ‘케이텍’ 설립<br>● 조선광문회복원추진위원회 자문

    파란만장했던 20세기 한국사에 한 획을 그은 육당(六堂) 최남선(1890~1957)이 최근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그의 장손 최학주 씨(72)가 화두를 던졌다. 최 씨는 2011년과 2012년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근대의 터를 닦고 길을 내다’라는 책을 각기 한국어와 영역본으로 펴낸 데 이어 8월 출간을 목표로 ‘최남선 한국학 현대문 총서’를 만들고 있다.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최 씨는 군복무를 마치고 도미 유학 후 줄곧 뉴저지에 터를 잡고 살았다. 그런 그가 육당 사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왜 새삼 이 같은 책들을 내는 것일까. 육당의 행적과 공과(功過)에 대해 그와 후손들은 어떻게 평가할까. 그가 기억하는 할아버지 최남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육당은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상가요, ‘시대일보’라는 일간신문을 창간한 언론인이었다.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한 시인이었으며, 일생을 조선사 연구에 매진한 역사학자였다. 육당은 최초의 종합잡지 ‘소년’을 창간하고 ‘열하일기’를 비롯한 우리 고전 35종 59책을 중간(重刊)했다. 최초의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도 펴냈다. 조선광문회를 만들어 선대가 일군 가산 30만 원(현재 가치 300억여 원)을 모두 이런 출판·문화사업에 쏟아 부었다. ‘황성신문’에 투고해 일화배척(日貨排斥)을 주장하고,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죄로 옥고를 치렀다. 그럼에도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일제 말기 조선사 편수위원 등을 지낸 친일 행적을 문제 삼아 육당을 ‘친일파’로 규정했다.

    육당은 반민족행위자라는 오명과 건강 악화로 말년을 불우하게 보냈다. 최학주 씨는 육당과 17년을 함께 산 장손인 만큼 그에 대한 궁금증을 누구보다 명쾌하게 풀어줄 만한 증인이다. 태평양 너머의 그와 e메일로 문답을 주고받았다.

    ▼ 집안에서 육당은 어떤 분이었나요.



    “당신이 태어난 시기가 유교적인 가족 질서와 전통을 중요시하던 때였으니 가문의 명예를 지키며 부모님 말씀 잘 따르고 형제간 우의에 충실했습니다. 육당이 소년시절에 벌인 조선 근대화 작업은 갑신정변의 실패에 실망했던 엄친(嚴親) 최헌규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었고 모친은 엄친보다 더 엄했다고 합니다. 육당은 어려서부터 부지런한 학동으로 소문 나 있었는데 그런 성품과 체질은 모친을 닮았다고 합니다. 육당은 한때 프랑스 유학을 계획했었는데 엄친의 병환으로 뜻을 접었을 만큼 유교적 효심이 지극했어요.

    참척(慘慽)의 아픔을 딛고

    “친일은 없었다…학병 권유는 힘 기르라는 뜻”

    1957년 정초 최남선(왼쪽) 최두선 형제.

    차남이던 육당은 맏아들을 형님이 가문을 이을 수 있도록 양자로 보냈습니다. 3남1녀를 뒀는데, 자식들의 선택과 판단을 신뢰했습니다. 진로 선택도 스스로 하게 해서인지 아무도 육당의 학문적 유업을 계승하지 않았어요. 육당은 집안 살림과 대소사 통솔을 제 할머니인 부인에게 맡겼습니다. 소년시절부터 명사로 이름이 나 바쁘기도 했지만 안팎의 일에 분명하게 선을 그었고, 한번 믿은 사람은 끝까지 믿었던 듯합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 할머니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 사랑방 손님들을 접대하느라 늘 바쁘셨어요. 제 아버님이 휴전 직후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빈자리까지 채워주셨습니다. 아주 자상하셨고 손자손녀들의 응석을 물리치는 때가 없었습니다. 육중한 체구로 제 손아래 누이와 고무줄 넘기도 할 정도였어요. 자전거 타는 법도 할아버지께 배웠지요.”

    ▼ 6·25전쟁을 전후해 힘겨운 나날이 이어진 걸로 압니다.

    “큰딸은 인민군에게 학살당했고, 그 사위는 납북되어 아직도 생사불명입니다. 막내아들은 자진 월북하고, 몸이 약해진 큰아들은 부산 피난처에서 병사했어요. 손자 하나도 대구 피난처에서 익사했고요. 전쟁으로 풍비박산 난 집이 우리뿐은 아니었지만 육당에겐 가슴을 찢는 아픔이 또 있었습니다. 하나는 민족과 국토가 둘로 갈라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 우이동에 소장하고 있던 17만 권의 장서가 소진(燒盡)된 것입니다. 국가적으로도 귀한 문화재를 잃은 거죠. 자손들 앞에서 내색하진 않았지만 많이 아파하셨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불경으로 마음을 달래곤 하셨지요. 그런 중에도 전쟁 전부터 집필하시던 ‘조선역사사전(朝鮮歷史辭典)’을 완성하겠다는 강한 의지로 당신을 지탱하셨어요. 사전 편찬 작업으로 불철주야 과로한 탓에 병환을 얻었고 돌아가시기 수년 전에 천주교에 귀의했습니다.”

    ▼ 불교에 독실했고 또 평생 단군 연구에 매진하던 분이 왜 개종한 건가요?

    “당시 많이들 놀랐지요. 특히 조계종 내분으로 적잖이 시끄럽던 불교계가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압니다. ‘경향신문’인가에 당신의 개종 성명서가 나온 다음 날, 넓은 마당은 아니지만 아무튼 마당에까지 스님과 유림계 손님들이 가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 성명에서 ‘과거 50~60년간의 종교적 체험을 청산하고 가톨릭에 귀의하여 감연히 영세하니,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개인적으로 구령(救靈)인 동시에, 국가 민족에 대하여는 혁구진신(革舊振新)에 일대 염원’이라고 하면서 ‘지난 200년 우리 우국선철(憂國先哲)들이 미처 다하지 못한 빚의 책임을 벗어볼까 한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실학운동으로 시작된 우리의 근대화 작업을 끝내지는 못하더라도 가톨릭적인 정신체계가 결국은 당신의 조국 근대화 염원을 들어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후 제 어머님을 포함해 가족들 전부가 천주교 영세를 받았지만 저만 아직도 이른바 종교의 구제, 구속, 구령의 문제에 확신이 없어 그 은혜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민족은 대치욕”

    ▼ 육당이 평소 강조하던 말씀이 있다면.

    “도산(島山)의 가르침인 무실역행(務實力行·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자)과 진실정신(眞實精神·거짓말하지 말고, 진실만을 전하고 남기자)입니다. 아울러 지방색 타파도 강조하셨어요. 인사(人事)건 혼사(婚事)건 지방색을 가리지 말자는 뜻이지요.”

    ▼ 육당이 친일파라는 비난을 들은 건 언제쯤인가요.

    “중학교에 들어가서였을 거예요. 국어, 역사, 공민…그런 순서로 육당의 글과 이름이 등장했던 것 같아요. 선생님들은 육당의 역사적 행적과 공과에 관한 세평을 곁들여 알려주셨어요. 그러면 육당이 제 할아버지인 것을 아는 친구들이 선생님에게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제 친구들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선생님들한테 별로 시원한 설명이나 답변을 들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직도 의문은 남아 있어요.”

    ▼ 할아버지가 왜 친일파로 몰렸다고 봅니까.

    “모르겠어요. 정말 연구 대상입니다. 대한민국 건국 직후 육당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돼 한 달 정도 투옥됐을 때 당신이 직접 그런 혐의를 받게 된 이유를 ‘자열서(自列書)’라는 제목으로 일간신문 등을 통해 설명했습니다. 당시 받고 있던 혐의에 대해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전제로 입장을 밝히셨어요. 두 세대 정도가 더 지난 현 시점에서 다른 해석이 있더라도 저로서는 자열서에서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뺄 생각이 없습니다. 육당의 공과(功過)는 격랑의 시대를 한반도에서 함께 버텨낸 동시대인이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지금의 ‘친일파’ 분류 논쟁은 정치인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것일 뿐 별 의미가 없어 보여요.”

    1949년 3월 9~10일 ‘자유신문’에 실린 자열서는 육당이 수감 중이던 서울 마포형무소에서 반민특위 위원장 앞으로 쓴 글이다. 최학주 씨는 2011년에 펴낸 저서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근대의 터를 닦고 길을 내다’에 자열서 전문을 공개했다. “민족의 일원으로서 반민족(反民族)의 지목을 받음은 종세(終歲)에 씻기 어려운 대치욕이다”라는 고백으로 시작하는 자열서에는 변절자라는 오명을 쓴 육당의 심경과 해명이 담겨 있다. 주요 대목을 살펴보자.

    “친일은 없었다…학병 권유는 힘 기르라는 뜻”

    육당이 직접 작성하고 조판한 독립선언서 원본.

    “임박한 신운명에 대비하자”

    (…) 문제는 세간의 이른바 변절로부터 시(始)하여 변절의 남상은 조선사편수위원(朝鮮史編修委員)의 수임(受任)에 있다. 무슨 까닭에 이러한 방향 전환을 하였는가. 이에 대하여는 일생의 목적으로 정한 학연(學硏) 사업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 빠지고 그 봉록(俸祿)과 그리로서 있는 학구상 편익을 필요로 하였었다는 이외의 다른 말을 하고 싶지 않다. (…)

    이 ‘조선사’는 다만 고래(古來)의 자료를 수집 배차(排次)한 것이요, 아무 창의와 학설이 개입하지 아니한 것인 만큼 그 내용에 금일 반민족행위 추구(追究)의 대상될 것은 일건일행(一件一行)이 들어 있지 않을 것이다. (…)

    소위 대동아전쟁의 발발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일본인은 나를 건국대로부터 구축(驅逐)하였다. 고토(故土)에 돌아온 뒤의 궁액(窮厄)한 정세는 나를 도회로부터 향촌으로 내어몰았다. 이제는 정수내관(靜修內觀)의 기(機)를 얻는가 하였더니 이사의 짐을 운반하는 도중에서 붙들려서 소위 학병 권유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

    처음 학병문제가 일어났을 때 나는 독자(獨自)의 관점에서 조선청년이 다수히 나가기를 기대하는 의를 가지고 이것을 언약한 일이 있었더니 이것이 일본인의 가거(可居)할 기화가 되어서 그럴진대 동경 일행을 하라는 강박을 받게 된 것이었다.

    당시 나의 권유 논지는 차차(此次)의 전쟁은 세계역사의 약속으로 일어난 것이매 결국에는 전 세계 전 민족이 여기 참가하는 것이요, 다만 행복한 국민은 순연(順緣)으로 참가하되 불복한 민족은 역록(逆綠)으로 참가함이 또한 무가내하(無可奈何)한 일임을 전제로 하여 우리는 이 기회를 가지고 이상과 정열과 역량을 가진 학생 청년층이 조직, 전투, 사회 중핵체 결성에 대한 능력 취위성(取爲性)을 양성하여 임박해오는 신운명에 대비하자 함에 있었다. (…)

    이상의 밖에 나에게 총집하는 죄목은 국조 단군을 무(誣)하여 드디어 일본인의 소위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에 보강 재료를 주었다 함이다. 상래(上來)의 몇 항목은 일이 다만 일신(一身)의 명절(名節)에 관계될 뿐이매 그 동기 경과 내지 사실 실태에 설사 진변(陳辯)할 말이 있을지라도 나는 대개 인묵(忍默)하고 만다. 그러나 이 국조문제는 그것이 국민정신의 근본에 저촉되는 만큼 일언의 변파(辯破)를 용훼(容喙)치 못할 것이 있는가 한다.

    “대중의 분노는 사랑”

    “친일은 없었다…학병 권유는 힘 기르라는 뜻”

    1969년의 조선광문회.

    대저 반세기에 걸치는 나의 일관(一貫)한 고행이 국사연구, 국민문화 발양에 있었음은 아마 일반의 승인을 받을 것이요, 또 연구의 중심이 경망한 학도의 손에 말소(抹消) 폐각(廢閣)되려 한 국조 단군의 학리적 부활과 그를 중핵으로 국민정신의 천명에 있었음은 줄잡아도 내 학구과정을 보고 아시는 분이 부인치 아니할 바이다. (…)

    나는 분명히 일평생 일조로(一條路)를 일심으로 매진한 것을 자신하는 자이다. 중간에 간난(艱難)한 환경, 유약한 성격의 내외 양인(兩因)이 서로 합병하여서 내 의상에 흙을 바르고 내 행리(行履)에 올가미를 씌웠을지라도 이는 그때그때의 외적 변모일 따름이요, 결코 심여행(心與行)의 변전변환(變轉變換)은 아니었다. 이 점을 밝히겠다 하여 이 이상의 강변스러운 말을 더하지 않거니와 다만 조선사편수위원, 중추원 참의, 건국대학 교수 이것저것 구중중한 옷을 열 벌 갈아입으면서도 나의 일한 실제는 언제고 종시일관(終始一貫)하게 민족정신의 심토(深討), 조국 역사의 건설 그것밖에 벗어진 일 없었음은 천일(天日)이 저기 있는 아래 감연(敢然)히 명언하기를 꺼리지 않겠다.

    그러나 또 나는 분명히 조선대중이 나에게 기대하는 점 곧 어떠한 경우에서고 청고(淸高)한 지조와 강렬한 기백을 지켜서 늠호(凜乎)한 의사의 형범(型範)이 되어 달라는 상식적 기대에 위반하였다. 내가 변절한 대목 곧 왕년에 신변의 핍박한 사정이 지조냐 학식이냐의 양자 중 기일(其一)을 골라잡아야 하게 된 때에 대중은 나에게 지조를 붙잡으라고 하거늘 나는 그 뜻을 휘뿌리고 학업을 붙잡으면서 다른 것을 버렸다. 대중의 나에 대한 분노가 여기서 시작하여 나오는 것을 내가 잘 알며 그것이 또한 나를 사랑함에서 나온 것임도 내가 잘 안다. (…)

    ▼ 육당이 친일하지 않았다는 것을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 근거가 있습니까.

    “질문하신 ‘친일’이 ‘부역’과 같은 개념이라면 육당은 그런 행적을 남긴 일이 없습니다. 물론 역사학자로서 ‘조선사’를 세계사의 일부로 정립해나가는 과정에서 일본 학계에도 참석했고 중국 학계에도 학술적인 협조를 구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도 사랑하는 ‘조선땅’을 떠나 프랑스 세계사 학계 참가까지 계획한 바 있습니다. 육당은 조선사의 세계화가 조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첩경이라는 확신에서 역사학자로서 시대의 요구에 최선을 다했어요. 궁극적으로 조선 독립을 위한 육당의 1930년 이후 노력은 역사학자로서 학술연구가 부인할 수 없는 목적이었습니다. 주어진 시점에서 친일 여부라든지 좌우 성향의 정치적 선택은 염두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학계 도움으로 ‘친일’에 반론 제기

    노무현 정부 시절 소급 제정한 2004년 특별법에 따르면 20세기 초 60여 년간 최남선이 조선에서 한 작업 중에 친일 행위 부분이 있어 친일파로 분류하는 심사를 한다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족으로서 이의가 있으면 반론에 구체적 근거를 제시해달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육당의 조선사편수회 참가, 총독부 자문기관 중추원 참의 활동, 만주건국대학 교수 강연, 만주국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고문, 2차 대전 종전 직전 학병 권유 등을 증거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제게 그런 혐의의 가부를 가릴 증거자료가 별로 없어 한국 역사학계에 학술 자료로서 연구조사된 것이 있으면 준비해서 이를 제출해달라고 부탁한 바 있습니다.”

    최 씨가 이후 우리 학계의 도움으로 제출한 반론의 증거와 요지는 이렇다.

    첫째, 조선사편수회 회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육당의 참가 목적은 조선 고대사 정립임이 명백하고, 육당의 ‘단군론’과 단군시대의 한국사 편입 노력은 치열한 반일 역사 투쟁이었다.

    둘째, 육당은 조선총독부 중추원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고, 참의로 등록돼 있던 시기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만주에서 보내며 만몽사(滿蒙史)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육당은 조선총독부의 자문에 응한 적이 없다.

    셋째, 육당의 만주건국대학 교수 발령을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것은 오히려 조선총독부였다. 육당의 만주행 목적은 조선의 고토인 만주사 연구였다.

    넷째, 육당은 만주에서 이른바 비적(항일무장투쟁세력)의 투항 권유문을 작성한 일이 없다. 고문으로 이름이 올라 있는 문건이 있다 해서 소급법이 규정한 ‘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그 활동을 주도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일제 치하에서 숱하게 조직된 관 주도 단체에 본인의 동의 없이 이름이 올랐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경우는 육당뿐이 아니다.

    다섯째, 학병 권유에 대해 육당은 조선의 미래를 위해 조선의 젊은이들이 군대 지휘 경험을 얻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장준하 씨와 강영훈 전 국무총리 등 당시 학병을 지원한 이들의 광복 후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강 전 총리가 학병을 나가기 전 육당을 찾아가 자문하자 육당은 “학병을 나가는 것은 일본을 위해서도, 천황을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가 힘이 없어서 나라를 빼앗겼으니 힘을 길러야 한다. 힘을 기르려면 군인이 필요하고 군대를 알아야 한다. 학병으로 나갔다 살아온 사람은 희생자들의 몫까지 다해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 전 총리는 “육당의 말처럼 광복 후에 학병으로 나갔던 사람들이 실제로 국군을 창설할 때 큰 도움이 됐다”고 증언했다.

    ‘최남선 한국학 현대문 총서’

    ▼ 도미(渡美)한 것은 할아버지 때문이었나요.

    “전혀 무관합니다. 할아버지께선 1957년 별세하셨고 제가 유학을 떠난 것은 10년 뒤인 1967년입니다. 대학에 입학할 때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인문학을 권하셨겠지만 저는 자연과학 계통의 공학을 공부했어요. 1960년대에는 한국의 산업화가 시대적 요구라고 생각해서 선택했지요. 제가 미국에서 계속 사는 이유도 제 전공 분야가 세계화해 있어 어디에 생활근거를 두고 활동해도 무리가 없기 때문일 뿐, 할아버지와는 무관합니다.”

    ▼ 육당이 중풍에 걸렸을 때 한방을 썼다고 들었습니다.

    “한방과 내과 치료를 같이 받으셨습니다. 당신 스스로 병세를 잘 아는 듯했습니다. 병상에서도 평소처럼 손님을 맞으시고 구술로 가벼운 집필도 계속하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병환을 얻어 돌아가실 때까지 3년 동안 제가 같은 병실에서 기거했기 때문에 방과 후에는 집필 자료 준비를 돕는 심부름도 하고 구술하시는 대로 원고 작성도 해드리고 그랬습니다.”

    ▼ 말년에 회한 같은 것을 털어놓지는 않았습니까.

    “당신에게 주어진 시대의 요구에 최선을 다한 분이 무슨 후회가 있겠습니까. 육당의 좌우명은 언제나 무실역행과 진실정신이었습니다. 다만 하나, 말년에 ‘조선역사사전’ 완간에 모든 노력을 경주하셨는데도 뜻대로 되지 않은 건 건강 때문이었습니다. 계획한 10권 중에 첫 권만 생전에 탈고하셨지만 언젠가는 후학들이 나와 끝을 내겠지요.”

    ▼ 육당의 유품 중에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은.

    “당신께서 작성하고 직접 조판한 독립선언서 원본입니다. 제가 지금도 소장하고 있어요. 그것을 가장 아끼는 이유는 육당의 그 글 하나로 조선 민족의 정체성이 세계에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우리 세대는 그 첫 문장을 가슴으로 외우며 자랐지요. ‘오등은 자에 아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평등의 대의를….’ 이 글은 중국의 5·4운동과 인도 간디의 무저항운동에도 영향을 줬다고 합니다.”

    ▼ 8월 발간 예정인 ‘최남선 한국학 현대문 총서’는 어떤 책입니까.

    “육당이 조선 근대화 초기에 발표한 조선학 관련 중요 저술과 논문 전부를 현대문으로 바꿔 전문 분야의 문헌학적 해제와 함께 24권으로 펴낼 겁니다. 현재 국내 대학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역사 문학 언어 민속 신화 종교 철학 정치 영토 해양 지리 언론출판 등 거의 모든 인문학 분야의 소장 연구자 16명의 원고 작업은 거의 완성 단계에 있습니다. 예정대로 출간되면 근·현대 한국학의 기초 자료로뿐만 아니라 학제 간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또 분야별로 제목을 달아 단행본으로도 출간하니 일반 독자도 쉽게 구해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역사 통해 미래 내다볼 때

    ▼ 총서를 내는 취지는.

    “한국이 그동안 산업화와 민주화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곤 하나 최근 정계 개편 방향을 불안해하는 이가 저뿐만이 아닙니다. 동북아 정세 변화도 안정적으로만 볼 수 없고요. 어느 시대건 사실과 진실에 의한 역사 인식만이 미래 예측을 가능케 합니다. 정치적 시류나 불확실한 정치 이념에 근거한 편향된 역사 인식은 우리의 미래를 더 불안하게 합니다. 20세기 초 동북아 한반도의 지식인들이 어떤 작업을 통해 중세적 중화 중심 문화권에서 탈출해 세계화의 길을 냈는지 다음 세대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 후손들은 육당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미국에서 성장해 저마다 일가를 이룬 저희 아이들은 육당을 한국의 토머스 제퍼슨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안에 그런 인물이 있다는 것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합니다. 지난가을 출간한 제 졸저의 영역본에는 독립선언서가 부록으로 붙어 있는데 아이들은 특히 한국의 독립선언이 인류평등의 대의를 밝히는 데 의의를 둔 점이 아주 인상적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독립선언서도 비슷하죠.”

    ▼ 육당을 위한 다른 사업도 구상하고 있습니까.

    “육당이 독립선언서를 쓰고, 창문을 모두 걸어 잠근 채 홀로 밤새 인쇄 활판을 직접 조판한 청색기와 목조건물이 지금은 복원된 청계천 광교 남쪽에 있었습니다. 육당이 ‘신문관’이라는 인쇄소 간판을 걸어놓고 출판구국(救國) 운동을 주도하던 건물이지요. 당시 지식인들이 모이는 본거지였고 조선총독부를 향한 저항의 실체였던 조선광문회가 바로 그 건물에 있었습니다. 청계천 복개 공사로 건물은 철거됐고, 지금은 한구석에 서울시가 마련한 조그만 표지석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그곳이 우리가 처음으로 근대 민족 정체성 정립에 성공한, 3·1운동의 발상지입니다.

    제 다음 사업은 건물 복원 작업을 지원하는 일입니다. 현재 그 터는 서울 중구청 소유 공원부지가 돼 있고 건물복원위원회가 제출한 복원청원서를 서울 시청 주무 부서에서 검토 중에 있습니다. 건물이 복원되면 독립선언서 원본을 비롯해 제가 소장하고 있는 유품 전부를 서울시에 기증해 시민에게 공개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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