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 김광균의 딸이자 간송 전형필의 맏며느리인 김은영 매듭장은 어릴 적부터 골동품 같은 오래된 우리 공예품을 접하고 살아왔다. 대학에서는 실내장식을 전공했지만 결혼 후 김희진 매듭장을 사사하며 50년 가까이 매듭과 인연을 맺어왔다. 대학원에서 염색 공부를 한 그는 우리 매듭의 아름다운 색상을 되살리는 데 관심을 갖고 옛 의궤나 유물로 남아 있는 큰 작품을 재현하는 데 힘을 쏟는다.
그러나 역할로 사는 삶과 본래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삶은 다르다. 그에게 매듭은 김은영이라는 자신으로 사는 삶을 뜻한다.
“매듭을 하는 순간은 저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지요.”
더욱이 놀라운 것은, 역할로 사는 삶과 자신으로 사는 삶이 갈등을 일으키기보다는 조화를 이뤄왔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삶은 여러 인연의 타래가 얽히고설키며 때로 헝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러 가닥의 실이 질서와 조화를 얻으면 아름다운 매듭으로 완성되듯이 그의 삶도 수많은 인연의 끈을 아름답게 엮어낸 것 같다.
할머니 노리개로 만난 매듭
인연으로 이루어진 게 인생이지만 김은영에게 찾아온 인연은 죄다 문화와 전통, 아름다움과 관련이 깊었으니 확실히 인연이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인가보다. 그의 어린 시절을 지배한 것은 개성의 문화다. 그 자신은 1942년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은 개성의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개성은 음식도 그렇지만 풍속이나 옷차림, 머리치장도 독특하고 화려한 데가 있다.
“어머니의 혼례복을 보면 서울의 붉은 활옷이 아니라 녹색 활옷에 소매에는 색동을 대었어요. 거기다 머리도 네모나게 틀어 올려 목단 꽃으로 장식했고요.”
실제로 이 혼례복은 근대유물로 지정됐다.
“시집오기 전 25년은 할머니 밑에서 개성 사람으로 살았고, 시집오고 난 뒤부터는 시어머니 밑에서 서울 사람으로 살아왔습니다.”
시집오자마자 시어머니가 제사를 물려주었을 때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도 할머니 교육 덕택인지 모른다. 개성과 서울의 문화는 달랐지만 할머니나 시어머니나 유교를 바탕으로 한 것은 마찬가지여서 그는 시집 전통에 어렵지 않게 적응했다. 신식 교육을 받으면서 유교 전통에 거부감을 가질 법도 한데, 그에게는 그런 거부감을 도통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전통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그가 매듭의 아름다움을 처음 접한 것도 할머니의 노리개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인사동에 자주 나가는 아버지를 따라 골동품 가게에서 생애 최초로 자신의 노리개를 선물 받았다.
“아버지의 단골 가게였던가봐요. 따님도 오셨냐며 주인이 저에게 노리개를 선뜻 내주더군요. 지금으로 치면 값나가는 건데 말입니다.”
할머니의 노리개를 볼 때도 그랬지만, 자신의 첫 노리개를 봤을 때 그는 ‘사람 손으로 어떻게 이렇듯 곱게 만들었을까’ 하고 신기해했다. 훗날 매듭을 해보자는 마음을 낸 것도 어릴 때 접한 노리개에 대한 추억 때문이었다. 골동품을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둘째 딸인 그는 인사동 나들이의 동반자이자 비서 같은 존재였다.
“아버지가 백자를 사오시면 제가 큰 함지박에 물과 함께 넣고 빨래비누를 풀어서 데웠어요. 그러면 때가 깨끗이 벗겨지거든요.”
첫째 딸인 언니가 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면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특별히 받은 딸이었다. 그래서 이중섭이 육군병원에 입원했던 당시 아버지와 함께 병문안을 간 기억이 있다.
“그때는 누군지 모르고 아버지가 화가 친구 병문안 가자고 해서 따라간 거였어요. 이중섭은 뒤로 넘긴 머리에 가운데 가르마가 보이는, 아주 순하고 얌전한 인상이었어요. 아버지가 ‘잘 있었나?’ 하고 물으면 ‘응’ 하고 대답하고 ‘부인 소식은 듣나?’ 하고 물으면 ‘아니’라고 짧게 대답하면서 책상의 먼지만 손으로 잡아냈습니다.”
김광균은 이중섭과 친하게 지내서 이중섭이 죽은 뒤, ‘이중섭을 욕보이지 말라’라는 글도 발표했다. 이중섭이 낙서하듯 그린 그림들을 다 불태우라는 유언을 무시하고 유작처럼 거래하는 세태를 꾸짖는 내용이다.
우리나라의 기본 매듭은 서른여덟 가지인데, 그중 열 가지가 기초가 된다. 매듭 이름은 거의 곤충이나 꽃 이름에서 땄다.
골동품을 사랑한 아버지와 시아버지
주머니 끈도 매듭을 곁들이면 멋이 난다.
“두 분이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서로 존재는 아셨겠지요. 간송 선생님에 관한 기사를 신문에서 보고 저와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어요. 두 분 모두 겸재의 작품을 좋아하신 공통점도 있고요.”
간송이 우리 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서예가이자 우리나라 서화 작품에 관한 기록 ‘근역서화징’의 저자인 위창 오세창 선생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는데, 김광균 시인도 위창 선생에게 받은 서예 작품으로 만든 병풍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김은영이 이사장으로 있는 서울시 무형문화재보존회의 교육전시장이 돈화문으로 옮겨왔는데, 마침 그 맞은편이 위창 선생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인연은 이렇듯 깊이 연결돼 있다.
김은영 자신은 간송이 세상을 뜬 뒤 시집갔는데, 우연히도 생전에 간송과 두세 번 마주친 적이 있다고 한다.
“저의 집이 종로 경운동에 있었는데, 한동네에 시댁과 친한 의사 댁이 있었어요. 시아버님이 자주 들르셨다고 하는데, 제가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르고 서 있다가 트렌치코트를 입고 지나가는 모습을 뵈었지요.”
그가 간송을 알아본 것은 그 이틀 전 한국미술오천년전을 미국 시애틀에서 연다는 신문기사에서 간송의 사진을 본 덕택이었다. 그는 간송을 알아보고 속으로 ‘신문에서 뵌 분 아닌가?’ 하고 신기하게 생각했었다고 한다. 물론 그렇게 몇 번 바람결로 스쳐간 분이 미래의 시아버지가 되리라곤 그 자신도 몰랐다.
김은영이 간송의 둘째 아들이자 일찍 세상을 뜬 형 대신 맏이로 산 화가 전성우를 만난 것 역시 미술 전람회에서였다.
“고모님이 국전에 같이 가자고 해서 모시고 갔다가 시어머니와 함께 나온 남편을 소개받았습니다. 우연처럼 만났지만 나중에 보니 이대원 화백께서 중매를 서신 거더군요.”
미국에서 오랫동안 유학하면서 주목받는 신인 화가로 화랑의 전속작가까지 되었던 전성우 씨는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별세로 미국 활동을 접고 귀국해 오늘날까지 간송미술관을 지키고 있다. 남편의 첫인상은 보통 사람은 소화하기 힘든 올리브그린색의 트렌치코트를 입은 사람으로 남아 있다.
“남편은 10년 뒤 살이 부해져서 시아버지와 꼭 닮게 됐지만, 처음 만났을 땐 마른 몸매에 코트가 잘 어울려서 나중에 제가 남편에게 그 코트 덕분에 결혼하게 됐다고 말했지요.”
그러면 남편은 장인이 마음에 들어 결혼했다고 대답한단다. 시인이었지만 사업을 했던 장인과 화가지만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야 했던 사위 사이에는 무언의 공감대가 있었던 것 같다고 김은영은 짐작한다. 그러나 이 부부의 공통점이 더 눈에 띈다. 둘 다 미대를 졸업하고 전통 예술을 지켜가는 일을 평생 해왔으니, 과연 두 집안과 두 사람의 인연은 깊은 것 같다. 그래서일까.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김은영은 몇 달 만에 약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데 유학 꿈이 물거품이 되는 대신 매듭 인생이 열렸으니 이 또한 신기한 일이다.
“약혼 시절, 매듭이 떠오르더군요. 제 공부를 못하게 되었으니 대신 무언가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약혼자에게 매듭을 배울 스승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지요.”
전성우 씨가 미술사학자인 최순우 선생에게 자문을 구해 소개받은 이가 바로 매듭장 김희진 선생이다. 김광균 시인과 함께 개성 출신인 최순우 선생은 김광균의 시에도 등장할 만큼 두 집안과 잘 알고 지냈으니 인연의 실타래는 오묘한 데가 있다.
김희진 선생의 첫 제자
중요무형문화재인 김희진 선생은 매듭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매듭의 맥이 끊어지던 1960년대 초, 김희진은 문화재를 연구하던 예용해 선생의 권유로 매듭장인 정연수 선생에게 매듭을 배웠는데, 정연수 선생은 조선시대 매듭장인들이 모여 살던 시구문(광희문) 부근에 살던 전통 장인이었지만 매듭끈은 기계로 짠 끈을 쓰고 있었다. 김희진은 남원까지 내려가 박용학 노인에게서 끈 짜는 법을 배우고 약수동의 김입비 할머니를 찾아가 매듭의 술 만드는 법을 배우는 등 매듭 기술을 온전히 복원해냈다. 또한 옛 유물을 수집하고 최순우 선생과 함께 문헌을 찾으면서 우리 매듭의 원형과 역사를 추적하고 정리했으며, 일본까지 찾아가서 일본 장인들이 짜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잃어버린 넓은 끈 짜는 법까지 재현해냈다.
“김 선생님은 우리 매듭의 기틀을 마련하신 공로자시죠. 또 굵은 끈을 짤 수 있는 다회틀(끈틀)도 직접 고안해내셨고요.”
김은영이 김희진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66년으로 김희진 선생이 한창 매듭 연구를 해나가던 무렵이다. 그는 명실 공히 김희진 선생의 첫 제자로 스승의 매듭 연구를 함께 해왔다.
“약혼 시절 매듭 기본형 서른여덟 가지를 배웠는데, 결혼하고 3년간 쉬었어요. 그러다 다시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하셔서 본격적으로 염색부터 끈 짜고 술 비비는 것까지 배우게 됐습니다.”
비록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한창 자라는 아이가 넷이고 큰 집안 살림과 손님접대까지 해가며 매듭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큰 작품을 하느라 지칠 때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제가 힘들어하면 친정어머니는 그만두라고 하셨지만, 아버지는 힘들더라도 계속 하라고 하셨죠. 작품 전시회에 필요한 액자나 진열대도 신경써주시면서 제가 고비를 넘기도록 이끄셨어요.”
그의 인생에 아버지는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미대 진학도 아버지의 선택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문학을 하시고 언니도 영문학을 전공했으니 저도 국문학이나 불문학을 할까 생각했었는데, 아버지가 이화여대 미대에 실내장식 전공이 생겼다며 권하셨어요.”
아마 아버지는 딸의 눈썰미와 솜씨를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다. 과연 그는 줄리앙 석고상 데생을 석 달 동안 연습하고 시험에 붙었으니, 아버지의 판단은 옳았던 셈이다. 엄마와 아내, 며느리라는 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늘 책 보고 공부하라고 일러주던 아버지는 그가 뒤늦게 서울여대 미대 대학원 공예학과에 진학했을 때도 크게 기뻐했다. 힘들게 공부해 드디어 석사모를 쓰고 편찮은 아버지와 사진을 찍을 때 그도 정말 기뻤다.
남자들이 더 많이 썼던 매듭끈
노리개는 보석에 매듭을 엮어 품위를 살린 장식품이다.
“그 전시회에 당시 무형문화재 기능보존협회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갓일 하시던 정춘모 선생이 오셔서 이력서를 달라고 하시더군요. 어른이 말씀하셔서 이력서를 한 장 드렸는데 이듬해 서울시 무형문화재가 되었습니다.”
무형문화재가 되고부터 그의 마음은 새로워졌다고 한다.
“그전에는 그저 제가 즐거워서 한 일이었지만 문화재가 되고 보니 이 문화를 제대로 지키고 제자도 길러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기더군요.”
문화 지킴이라면 간송의 며느리로 딱 맞는 일 아닌가. 그가 책임감을 느낀 데는 매듭이 우리 공예에서도 풍류와 멋이 뛰어난 가장 한국적인 공예라는 자부심도 한몫했다.
“흔히 매듭이라고 하면 여인의 노리개를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남자에게 더욱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도포를 입고 도포끈을 매지 않으면 오늘날 슈트를 입고 넥타이를 매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멋도 멋이지만 빠져서는 안 되는 품목이지요. 또 갓끈, 차고 다니는 호패와 장도의 끈, 안경집, 부채까지 다 매듭끈과 술 장식이 있었습니다.”
도포끈은 품계에 따라 색깔도 달리했고, 관복에는 허리띠와 후수(뒤에 늘어뜨리는 장식 띠)에도 매듭이 들어갔다. 옛 선비가 도포끈과 갓끈을 길게 늘어뜨리고 장도를 차고 부채를 든다면 최고 멋쟁이가 될 터다. 또 사냥이나 궁술에 필요한 활통과 화살통, 심지어 매의 발목에도 매듭 끈을 달았다. 한편 사랑방에 걸리는 고비와 붓걸이, 발걸이, 겨울에 보온용으로 치는 방장걸이(커튼 같은 장막) 등도 모두 매듭끈과 찰랑이는 술이 달려야 멋이 난다.
그러나 매듭은 개인의 치장이나 실내를 꾸미는 데만 필요한 게 아니었다. 가마와 상여, 불교의식에 쓰는 연(가마)과 번(깃발), 고승이 드는 불자(拂子·벌레 쫓는 총채 비슷한 모양. 고승의 상징이다), 잔치 마당에 놓는 지당판(연못 형태를 딴 넓은 판으로 그 위에 꽃이나 구슬로 장식한다)과 궁중무용의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죽간자(장식을 단 기둥)와 포구락(럭비 골대처럼 기둥을 세우고 작은 구멍에 공을 던져 넣는 놀이를 춤으로 만든 것)에 필요한 의물(儀物) 등에도 어김없이 매듭으로 장식했다. 특히 음악을 연주할 때 모든 악기에 매듭을 달았다. 이처럼 매듭은 장식성뿐 아니라 군주의 위엄, 종교와 제례, 연회의 장엄함을 표현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매듭 수요가 얼마나 많았는지 조선시대 명주실을 염색하는 장인과 실 꼬는 장인, 끈 만드는 장인, 매듭짓는 장인, 술 만드는 장인이 다 따로 있었어요. 조선후기 법전인 ‘대전회통’을 보면 매듭 만드는 과정이 분업화되어 있고 총 아흔 명 가까이 등장하는데, 염색하는 데도 붉은 물들이는 홍염장과 푸른 물들이는 청염장이 따로 있을 정도입니다.”
사실 우리가 매듭으로 통칭하고 있지만 매듭을 맺기 위해서는 우선 꼰 실로 끈(다회多繪)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매듭 아래에는 술을 붙여야 비로소 모든 유소(늘어뜨리는 술 장식)가 완성된다. 매듭끈에는 둥근 동다회(원다회)와 납다회(납작한 모양으로 광다회라고도 한다) 두 가지가 있고 굵기도 다양하다. 이 끈을 만드는 것이 매듭의 기본으로 끈 만드는 일을 ‘다회친다’고 말한다.
인류는 끈을 엮어 문자도 표현하고 셈도 했다. 남미 잉카제국에서는 키푸(Quipu)라는 결승문자가 있었고, 우리나라는 고구려 안악고분에 이미 캐노피 같은 방장에 매듭 장식이 드리워진 걸 그린 벽화가 나올 만큼 일찍부터 매듭을 장식용으로 써왔다.
“고려시대까지 옷에 허리띠가 필요했고, 또 호주머니가 없었기 때문에 주머니와 장식을 허리에 많이 매달았어요. ‘고려도경’에 지체 높은 부인일수록 허리 장식을 많이 했다고 돼 있습니다.”
김은영은 보석과 향을 매단 주머니에서 우리 노리개가 발전했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노리개는 호박이나 산호 같은 보석으로 아름답게 꾸미면서도 그 안에 향이나 침, 구급약을 넣거나 은장도를 다는 등 주머니 구실을 했고, 남자들이 휴대하던 패도나 부채꼬리에도 휴대용 패철(나침반)이나 침, 젓가락, 귀이개 등을 장착했으니, 조상들은 매듭 장식으로 멋과 실용성을 두루 만족시킨 셈이다.
“누구나 차고 다녔던 다양한 주머니에는 끈이 필요하고, 관복과 옷고름 없는 모시옷의 단추 역시 매듭으로 만들었으니 매듭은 왕실부터 사대부, 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쓰였습니다.”
염색하고 매듭하면서 동심으로 돌아가
중국과 일본도 비슷한 매듭을 하고 있지만, 중국은 글자 모양 위주의 매듭이 많고 일본은 우리와 비슷하지만 꽉 조이지 않아 모양이 아주 달리 보인다고 한다. 무엇보다 우리나라만큼 매듭을 많이 쓰고 경우에 따라 어울리는 매듭 종류와 술 종류를 다양하게 발전시킨 나라는 없다는 얘기다.
“매듭은 좌우 대칭에 앞뒤가 똑같은 모양입니다. 질서가 가져다준 균형미가 돋보이는 공예지요. 특히 우리 매듭은 꽉 조여주어 더욱 정갈한 맛이 납니다.”
서양 매듭이 무명실 위주인 데 반해, 동양 매듭은 명주실로 짠 끈목으로 엮는다. 김은영은 이 점을 특히 강조한다.
“매듭에는 비단 특유의 은은한 광채가 납니다. 만약 그 빛이 화학섬유처럼 번쩍거렸다면 제가 이토록 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비단의 빛은 자연 그대로의 빛이니까요.”
미술학도답게 그는 빛과 색깔에 민감하다. 그래서 염색 과정을 특히 좋아한다고 한다. 대학원에서 염색을 전공하고 한국색과 공예사를 대학과 삼성디자인학교에서 강의도 했지만, 직접 천연염색으로 자연을 닮은 빛을 내는 데 몰두한다.
“제가 바라던 대로 색이 나와도 좋고, 또 의외의 색이 나와도 기쁠 때가 있습니다. 그게 염색의 묘미인 것 같아요.”
그는 낙엽색을 표현하고 싶어 전통 청 홍 황 삼색으로 만드는 삼작노리개에서 벗어난 색다른 노리개를 만들기도 했다. 실제로 오방색의 원색 말고도 간색을 잘 썼던 우리 고유의 색상을 다양하게 살려내는 것이 김은영의 특기이기도 하다.
매듭 과정은 명주실을 염색하는 데서 시작한다. 염색한 실타래를 그늘에 잘 말려 얼레에 감고 길이에 맞춰 실을 날아(실 길이를 맞추는 과정) 굵기에 따라 실을 꼬아 합사한다. 그리고 다회틀에서 끈목을 짜는데, 틀 위로 끈목이 수직으로 올라오는 모양이 신기하다.
“이렇게 손으로 짠 끈목은 눈이 또록또록 살아 있어요. 기계로 짠 밋밋한 끈목과는 비교할 수 없지요. 끈이 굵을수록 다회틀과 접시도 큰 게 필요합니다. 아주 넓고 단단한 광다회를 칠 때는 두 사람이 하는 그림이 남아 있는데, 기술은 없어졌습니다.”
앉아서 다회를 치면 얼마 안 돼 어깨부터 손목까지 얼얼해지고 허리도 아파온다. 여름내 앉아서 작업하는 그를 보고 친정어머니는 “그렇게 꼬부리고 앉아 하니 사람 진이 다 빠지겠구나” 하고 한탄하셨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나비매듭을 맺을 때면 재미가 나서 시간가는 줄을 몰랐고, 가지방석을 엮을 때면 어린 시절 어머니가 콩을 빼고 버린 콩깍지를 주어서 얼기설기 엮으며 놀던 추억이 떠올라 향수에 젖곤 했다.
“매듭 이름도 연봉매듭, 벌매듭, 잠자리매듭, 꼰드기(번데기)매듭, 국화매듭, 도래매듭(어린애가 도리도리하는 모양을 딴 이름) 등 모두 정다운 우리말인 데다 곤충과 꽃 이름이 많습니다. 하얀 명주실이 이런 아름다운 매듭으로 나왔을 때 정말 신기하고 기쁘지요.”
명주실이 예쁜 나비도 되고 꽃도 되는 기적은 창작의 기쁨이리라. 자신의 작품이 언제나 흡족한 건 아니지만, 창덕궁에 보관돼 있던 궁중 가마와 지당판 같은 대작을 재현할 때는 힘든 만큼 뿌듯했다고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지금은 순조의 맏아들 효명세자의 진찬연(잔치)에 나오는 홍개(붉은 의장용 일산)를 제자 노미자와 함께 재현하고 있습니다. 제자가 없으면 이 나이에 혼자 엄두도 못 낼 작업이지요.”
벌써 서른 명 가까운 제자가 전승공예대전에서 상을 타고 개인전도 열었다고 자랑한다. 그 자신도 올해 들어 불가리아와 헝가리 전시회를 성황리에 마쳤고 6월에는 벨기에 전시회를 위해 떠난다. 아, 이렇게 다복하고 멋진 인생도 있을까 싶다. 훌륭한 집안과 명예, 무엇보다 아름다운 문화와 자연, 그리고 제자들까지 다 갖추었으니. 하지만 팔의 인대마저 상할 정도로 고된 작업과 큰 집안의 맏며느리로 ‘봉제사 접빈객’으로 보낸 노고, 밤을 새워 공부한 노력을 여기에 다 쓰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