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호관, 비서관이 근접수행했는데 왜 의혹이…
- 청와대 安家? 아는 바 없고, 알아도 말 못해
- 靑 인사위원장 맡고 있어 대외접촉 자제
- 유흥수 주일대사 인사, 개인 인연과 무관
- 나이 많다고 ‘시대에 맞지 않다’니…
“여보세요. 아, 저는 청와대 비서실장입니다.”
▼ 아, 실장님.
“허만섭 기자님 맞습니까? 질의서를 저한테 보내셨죠?”
▼ 네.
“제가 사실은 바빠서…그동안 자세히 못 보고 오늘 읽어봤는데요.
▼ 네.
“제가 뭐 간단히 답변드릴 수 있는데, 월요일 제가 이메일로 넣어드려도 되겠습니까.”
▼ 저희가 어제 기사 마감을 했는데….”
“그래요…. 제가 요즘 행사가 많아 바빠서 그것(마감시간)을 좀 실기(失期)했는데. 봐서 오늘 오후에라도 빨리 해서 이메일로 넣어드릴 테니 뭐, 참고하시죠.”
▼ 네…알겠습니다.
“제가 탐구의 대상이 되는 사람도 못 됩니다만, 권위 있는 ‘신동아’에서 하신다니까 참고가 되시게 조목조목 간단히 답변 드리겠습니다. 제가 사무실에 나가서 이걸 하면 한두 시간 안에 답변을 넣을 수도 있는데….”
▼ 네. 그럼 주십시오.
“네. 그렇게 해 주시죠.”
“‘신동아’에서 하신다니까…”
왕실장, 부통령, 기춘대군…. 이런 별칭을 가진 김기춘(75) 대통령비서실장은 박근혜 정권의 2인자 실세로 알려졌다. ‘7시간 미스터리’, ‘국무총리·장관 인사 참극’ 같은 뜨거운 이슈의 중심에도 서 있다. 그는 국민의 세금으로 급여를 받으면서 국가와 공공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고위 공직자인 만큼 언행에 관한 폭넓은 비평을 감수해야 하는 위치에 있기도 하다. ‘신동아’는 ‘정국(政局)의 핵’ 김기춘 실장이 이들 이슈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 본인에 대한 주변의 평가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들어보기 위해 8월 13일 김 실장에게 질의서를 보냈다.
그에게 기사 마감일인 8월 15일까지 답변을 달라고 요청했으나 아무 연락이 없었다. 사실 그는 취임 이후 어떠한 언론 취재에도 응한 적이 없다. 하는 수 없이 그의 답변을 넣지 못하고 기사를 작성했다. 그런데 다음날 그가 전화를 걸어와 답변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는 통화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메일로 답변을 보내왔다. 각 질문에 번호를 붙여가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의 충실한 답변 내용을 감안해 ‘신동아’ 9월호 인쇄를 잠시 중단하고 이를 기사에 반영했다.
비서관도 수행
우선 김 실장에게 ‘세월호 정국’의 주요 쟁점이 되고 있는 이른바 ‘7시간 미스터리’ 논란에 대해 물었다. 이 논란은 ‘세월호 사건 당일인 4월 16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박근혜 대통령의 소재지가 불분명하다’는 의구심에서 출발했다. 김 실장은 국회에서 “대통령이 집무실에 계셨는가, 관사에 계셨는가”라는 질문에 “잘 알지 못합니다”라고 답했다. 그의 ‘몰랐다’ 답변으로 언론과 야당은 오히려 의혹을 더 키웠다. ‘국가적으로 큰 사고가 난 긴박한 상황에서 비서실장이 대통령의 위치를 몰랐다면 대통령은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이후 조선일보와 산케이신문은 ‘7시간’을 놓고 박 대통령의 의원시절 비서실장 정윤회 씨와 관련된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내용”(윤두현 청와대 홍보수석의 표현)의 소문을 보도했다. 청와대는 “경내에 계셨다”고만 했다. 그럼에도 의혹이 계속되자 청와대는 조원진 새누리당 의원을 통해 당일 박 대통령이 21차례 서면·유선 보고 받은 내역을 공개했다.
그러나 7시간 동안 대면보고가 없었다.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박 대통령이 이 사건과 관련해 비서진 중 누구와도 만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됐다. 야당은 “대통령이 7시간 동안 경내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다”고 공격했다. 다음은 이 논란에 대한 ‘신동아’와 김기춘 실장의 질의응답이다.
▼ 청와대는 4월 16일 대통령이 경내에 있었다고 하면서 경내의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선 경호 또는 안보상의 이유를 대며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일부 인사들은 “대통령의 4개월 전 청와대 내 소재지는 경호 또는 안보상 필요한 사안이라고 하기 힘들며, 불필요한 오해를 해소하는 차원에서 밝히는 게 맞다”고 합니다. “청와대가 불투명하게 해명해 의혹을 키웠다”고도 지적합니다.
“경내에 계셨고, 경호관과 비서관이 수행했고 21회에 걸쳐 보고를 받으시고 지시를 하셨음을 국회와 언론에 이미 밝혔음에도 의혹을 계속 제기하는 것은 저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7시간 동안 경호관 외에 비서관이 박 대통령을 수행했다는 것은 처음 나온 얘기다.
▼ 큰 사고가 발생한 마당에 대통령이 청와대 경내에 머물면서 사고와 관련해 청와대 비서진 중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오직 문서와 전화로만 의사소통을 했다는 점을 의아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은데요.
“유선보고와 문서보고로서도 충분히 보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고, 국가안보실장과는 통화한 사실이 있습니다. 긴박한 상황 하에서는 문서와 전화보고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보다 신속하고 효과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7시간 미스터리’와 관련해 박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와 같은 국가적 재난이 발생했음에도 박 대통령이 다른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 아니냐’ ‘박 대통령이 누군가 외부 인사를 만나고 있었던 것 아니냐’라는 의구심을 갖는 듯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누구도 7시간 동안 박 대통령이 청와대 관계자가 아닌 외부인사를 만난 지에 대해 직접 묻지 않았고 청와대 측도 답하지 않았다.
이어지는 김 실장과의 문답이다.
“넓은 경내의 많은 집무실 중에…”
▼ 4월 16일 대통령께서 경내에서 외부 인사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4월 16일에 대통령께서 외부 인사를 접견한 일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 국회에서 김 실장께선 4월 16일 대통령이 집무실에 있었는지, 관사에 있었는지 잘 모른다고 답했습니다. 긴박한 상황에서 비서실장이 대통령의 위치를 몰랐다는 건 선뜻 납득되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비서실장이 넓은 청와대 경내의 많은 집무실 중에 (대통령이) 어느 곳에 위치하고 계시는지는 만나 뵙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고, 따라서 추측해서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질의에 대해 김 실장은 얼마 뒤 아래와 같이 추가 답변을 보내왔다.
“경내에 계셨다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습니다. 대통령이 어디에 계신지 모른다는 것은 대통령이 경내에 계셔도 경호상 그 위치를 말씀드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고 세월호 국정조사특위 기관보고에서 답변했습니다.”
‘4월 16일 박 대통령이 외부 인사를 접견한 일은 없다’는 김 실장의 발언에 따르면,‘7시간’과 관련된 의혹의 상당부분은 설 자리를 잃는다. 다만, “외부 인사를 접견한 일은 없다”라고 잘라 말하는 대신 “접견한 일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며 다소 유보적으로 표현한 점에도 눈길이 간다.
‘7시간 미스터리’와 관련해 여권 일각에선 “청와대 경내에는 안가(安家·‘안전가옥’의 준말)가 있다. 박 대통령이 여기 있었을 수도 있지 않느냐”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청와대 인근 안가들은 김영삼 정부 시절 모두 철거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취재 결과 청와대 안가의 존재가 확인됐다. 다음은 박관용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설명이다.
“내가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 김영삼 대통령이 안가를 전부 없애겠다고 했어요. 안가 중에 제일 작은 곳 하나를 남겨서 비서실장공관으로 삼고 나머지 안가들은 없앴죠. 그런데 비서실장공관 바로 앞에 작은 양옥집이 하나 있어요. 거기에 테니스코트도 하나 붙어 있고. 그 집을 남겨놓은 겁니다. 유일하게 대통령이 안가로 쓰는 집이 된 거죠. (‘지금도 사용합니까?’라는 질문에) 지금도 쓰고 있어요. 역대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부터 거기에 자주 머물렀어요. (‘청와대 경내 안가라고 봐도 되나요?’라는 질문에) 물론. 청와대 부속 건물로 봐야죠. 손님 만날 때 거기서 만나죠. 이명박 대통령도 그 집으로 손님 불러서 식사하고 자주 이용했어요. 박근혜 대통령도 이용하는지는 모르겠어요.”
‘외부인과 비공개 회동하는 곳’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이명박 정부 때 그 안가에서 이 대통령과 저녁을 함께했다”고 했다. 청와대에서 고위직을 지낸 한 인사는 “그 안가는 대통령들이 요긴하게 썼다. 외부인이 대통령을 만나려고 청와대를 출입할 땐 기록이 남는데, 안가에서 만나면 출입기록이 남지 않는다. 대통령이 외부인을 비공개로 만날 때 이 안가를 이용한다”고 전했다.
이 안가는 지금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청와대 건물인 이상 폐건물로 방치해놓고 있진 않을 듯했다. 박 대통령이 이 안가를 사용해왔는지 김 실장에게 물어보자 이렇게 답변했다.
“질문하신 안가 건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으며, 설령 안다 하더라도 경호 비밀 때문에 말씀드릴 수가 없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당시 대통령께서 청와대 경내 어디에 있었는지 다시 묻고 싶습니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5시까지 대통령께서 경내 어떤 장소(본관 집무실, 관사, 안가 등 제3의 건물)에 있었습니까.
“4월 16일 대통령께선 외부 행사가 없었으므로 줄곧 청와대 경내에 계셨습니다. 청와대 경내에는 곳곳에 집무실이 산재해 있어 언제 어디서든 보고를 받고 지시를 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대통령께서는 가족이 없으므로 기침(起寢)하셔서 취침하실 때까지 근무시간이며 경호관과 비서관이 언제나 근접수행하고 있습니다.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경호 필요성 때문에 위치와 동선은 비밀로 되어 있어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당일 대통령이 청와대 안가에 있었는지 경내 다른 곳에 있었는지 알려줄 수 없다는 것이다. 김 실장이 안가 건물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답한 데 대해서는 ‘직전 이명박 대통령 때까지 역대 대통령들이 외부 인사와의 비공개 회동 장소로 요긴하게 써온 청와대 부속 건물을 비서실장이 모른다?’라는 의문이 나올 법하다.
“안대희·문창극 추천자 못 밝혀”
‘국무총리·장관 인사 참극’은 국민이 크게 실망한 부분 중 하나다. 이 문제와 관련해 야당은 ‘만만회(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 박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 EG회장, 정윤회 씨)’의 비선(秘線)인사 의혹도 제기한다. 취재한 바에 따르면, 안대희·문창극 전 총리 후보자의 경우 청와대 인사위원장인 김 실장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두 사람을 추천했다. 이 문제에 대한 김 실장과의 문답이다.
▼ 김 실장께선 안대희·문창극 총리 후보자를 개인적으로 추천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두 후보자를 누구한테서 추천받은 것인지….
“인사 문제는 후보자들의 개인 사생활과 관계있으므로 말씀드릴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실장께서 인사 참극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청와대 비서실장이면서 인사위원장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인사의 잘못된 점은 책임을 통감하며 앞으로 인사수석실을 잘 운영하여 개선해 나갈 것입니다.”
사실 김 실장은 본인 스스로가 뉴스메이커다. 박 대통령이 가장 신임하는 측근이고 인사·정책·정무 등 국정 곳곳에 그의 손길이 안 미치는 곳이 없다. 그에 관한 사람들의 고정관념은 대략 ‘유능한 인물, 그러나 시대에 안 맞는 인물’ 정도로 집약된다. ‘7인회’ 동료 멤버인 김용환 전 재무장관은 그를 향해 “검사, 법무장관, 국회의원을 두루 거치면서 정의감이 넘치는 분”이라고 말했다.
그의 의원 시절 보좌관 전상철 씨는 “합리적 보수주의자다. 인생의 멘토로 생각했다. 2009년 자서전 ‘오늘도 내 인생의 마지막인 것처럼’을 나눠주셨는데 너무나 배울 점이 많았다”고 했다.
김 실장은 박근혜 정권이 ‘채동욱 검찰’의 국가정보원 댓글 수사로 휘청거릴 때 전임 허태열 실장과 전격 교체됐다. 이후 ‘수호천사’처럼 청와대의 영(令)을 세웠다. 청와대에선 ‘김기춘의 유능함’이 거의 ‘신화화(神話化)’ 되는 분위기다.
검사 후배인 안대희 전 총리후보자는 “김기춘 실장에 비하면 나는 발바닥이다. 우리 아이큐가 130~140 수준이라면 그분은 170대”라고 말했다. 청와대 사람들은 김 실장에 대해 “업무처리 치밀” “사심 없이” “머리가 20대처럼 돌고” “사회 전 분야 두루 섭렵” “구하기 어려운 분” “혜안” 등으로 평가한다. 또 “김 실장은 남을 웃길 때 자신은 절대 웃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웃는지 안다”라는 말도 빠뜨리지 않는다.
충성맹세, 촌지, 불통 논란
그러나 김 실장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상당한 게 사실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정부의 여러 요직이 그와 가까운 사람들로 채워졌다는 비판이 나온다. 김 실장의 경남중고·서울대 법대 동문이자 한나라당 한백회 동료 멤버인 유흥수(77) 전 의원이 역대 최고령 일본 대사로 가게 된 것이 최근 사례다.
검사 출신인 박철언 전 의원의 2005년 저서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 따르면, 1970년대 후반 중앙정보부(중정)가 국군보안사령부의 기를 꺾으려고 보안사에 대한 감사를 오래 끌어 애를 먹였는데 그때 중정 대공수사국장이 김기춘 실장이었다고 한다. 1981년 신군부가 정권을 잡은 뒤 실세인 허화평 대통령보좌관은 검찰 인사 때 김기춘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을 면직하려 했다고 한다.
이 책에 따르면 김기춘은 박철언 당시 청와대 법률비서관에게 구명을 요청했고 박 비서관은 김기춘에게, 허화평에게 줄 편지를 써 가져와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기춘은 일종의 ‘충성맹세’인 장문의 편지를 써줬다고 한다. 덕분에 김기춘이 검사장으로 승진했다는 것이다.
박 전 의원은 기자에게 “김 실장은 나의 검찰 선배이고 그분에겐 실례가 되지만, 누군가는 바른 역사를 위해 기록으로 남겨놓아야 한다. 책 내용은 전부 진실이고 살아 있는 역사다. 내 메모를 바탕으로 쓴 거니까…”라고 말했다.
김기춘 실장이 1992년 초원복집사건으로 기소되자 법조출입기자 수십 명에게 선물을 줬다는 의혹도 있다. 1993년 2월 18일자 기자협회보에 따르면, 그가 초원복집 지역감정 조장 발언으로 기소돼 재판을 앞둔 1993년 설날 즈음 법조 출입기자 30여 명에게 “자성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글과 함께 고급 양주 ‘발렌타인 30년산’ ‘로얄살루트 21년산’과 ‘인삼세트’를 선물로 돌렸다고 한다.
한 공중파 방송 기자는 “당시 언론계에서 파문이 꽤 컸다. 관련된 기자들이 기자협회에 ‘왜 그런 걸 보도하느냐’고 항의하거나 협회를 탈퇴하는 소동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또한 김 실장은 ‘불통(不通) 이미지’라는 평가도 듣는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기자에게 “김 실장이 나를 안 만나주더라. 전화도 안 받고. 지난해 말 철도파업 중재 때 10번이나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 대표 경선 때도 전화 안 받더라. 김 실장이 요즘 얼마나 비판받고 있나. 내가 굉장히 존경하는 선배지만 대통령 보좌 스타일이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실장은 자신을 둘러싼 이러한 문제제기와 평가에 대해서도 답변했다.
비서실장 사퇴설 일축
▼ 박철언 전 의원을 통해 5공화국 실세에게 장문의 충성맹세 편지를 쓴 일이 있습니까.
“그런 편지를 쓴 일이 없습니다. 저(고시 12회)는 서울지검 공안부장에서 후배(고시 13회)들과 함께 검사장으로 승진되어 출입국관리국장, 검찰국장 그리고 법무연수원 연구부장으로 전보됐는데 그 과정에서 소위 5공 실세라고 하는 그분들로부터 도움 받은 일이 없습니다.”
▼ 초원복집 사건으로 재판을 앞두고 법조기자 30여 명에게 고급양주를 돌린 적이 있습니까.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사실이기에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 유흥수 전 의원이 주일 대사가 된 것은 김기춘 실장과의 인연이 작용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돕니다.
“유흥수 대사는 4선(選)으로서 장기간 외교위원과 외교통상위원장으로 활약했습니다. 한일의원연맹 간사장으로서 일본어에 능통하고 일본 조야의 정치인들과 친교가 깊어 발탁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 인연 때문에 인사에 관여한 일이 결단코 없습니다.”
▼ 실장께서 일하시는 스타일에 대해 야당과 일부 여당 인사 등이 ‘불통’ ‘권위주의’ ‘구시대’라고 비판합니다.
“인사위원장 업무의 성질상 많은 분과의 교류·교통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해 대외접촉을 삼가고 근신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불통이라고 하면 그 비판은 감수하겠습니다. 여, 야, 기타 관계자와의 소통은 소관 수석의 몫입니다.
저는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은 아닙니다. 나이가 많아서 ‘시대에 맞지 않다’고 하는 모양인데, 생각이 늙었으면 나이가 젊어도 늙은이가 되고, 생각이 젊으면 나이가 들어도 시대에 맞추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이의 추진력과 늙은이의 지혜가 조화되면 많은 일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김 실장은 자신을 향한 불통, 권위주의, 구시대 비판에 적극적으로 해명했다.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된 비서실장 사퇴설을 일축하며 자신의 업무에 강한 의욕을 보인 것으로 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