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로는 사진이 징그러웠다”고 그는 말했다.
- “독한 사진…” “사진 하려면 독해야 해”라고도 했다.
- 95세 나이에도 눈 밝고, 귀 맑으며, 총기가 또렷하다.
- 독하게 또 치열하게 살아서 그러리라.
“맞선도 보지 않고 결혼했어요. 젊은 예술가에게 누드는 로망이었죠. 혼례 3일 후 아내를 찍었습니다. 승강이하다 촬영용 램프가 바닥으로 떨어져 깨졌는데, 아내가 당황했죠.”
그가 소리 내 웃으면서 오래된 기억을 꺼낸다. 호랑이 만난 사슴처럼 놀란 신부는 그날 맨발로 뛰어나가 시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가 한달음에 달려와 갓 결혼한 아들을 꾸짖었다.
“미친놈.”
부부는 72년 해로(偕老)했다. 아내 건강이 전만 못해 걱정이다.
“다 벗고 찍었어야죠”
이명동은 한국 사진계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사진예술 개척자면서 방향타였고 조타수였으며 저널리스트로서도 거인의 발자국을 남겼다.
‘먼 역사 또렷한 기억.’
서울 송파구 한미사진미술관에서 7월 5~31일 열린 ‘이명동 사진전’ 주제다. 1949년의 백범 김구 선생, 6·25전쟁 종군 기록, 이승만 정권 시절 조병옥·신익희 선생, 4·19혁명 현장, 1950~60년대 한반도의 섬이 사진예술로 오롯하게 남았다.
72년 전 아내 사진은 전시를 준비하면서 필름을 정리하다 발견한 것이다. 딸은 필름에 담긴 소싯적 어머니 모습을 보면서 까르르 웃었다.
“다 벗고 찍었어야죠, 아쉽다.”
‘먼 역사 또렷한 기억’이 이명동의 첫 개인전. “70년 넘게 사진예술에 헌신하면서도 자신을 앞세운 적이 단 한번도 없다”면서 월간 ‘사진예술’ 발행인 김녕만(65)은 이렇게 말했다.
“6·25전쟁 때 사진가로 종군해 화랑무공훈장을 두 차례나 받을 만큼 열심히 사진을 찍으셨습니다. 4·19 때는 목숨을 걸고 혁명의 현장을 촬영했고요. 안타깝게도 선생이 찍은 사진 대부분이 유실됐습니다. ‘먼 역사 또렷한 기억’은 전설의 그림자나마 엿볼 수 있는 자리였어요.”
‘전설’이라는 낱말은 누구에게나 붙이는 게 아니다. 이명동은 한국 사진의 지평을 연 선구자면서 한국 사진예술의 아버지다.
그는 ‘동아일보’가 창간된 1920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카메라가 소년의 첫사랑이었다. 보통학교 다닐 적 하굣길마다 일본인 상인이 판매대에 진열한 카메라를 들여다보면서 설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이명동(왼쪽)이 7월 21일 첫 개인전 ‘먼 역사 또렷한 기억’을 찾은 4·19혁명공로자회 이기택 회장(가운데)을 만났다.
소값 훔쳐 카메라 사다
김구 선생이 서거하기 사흘 전인 1949년 6월 23일 이명동이 촬영한 사진. 사진으로 남은 백범의 마지막 모습이다.
눈 온 날 강아지처럼 신이 났다. 카메라를 목에 걸고 깡충깡충 마을을 뛰어다녔다. 신줏단지 모시듯 렌즈(lens)와 보디(body)를 닦았다.
“이 녀석아, 당장 가서 물러와!”
카메라 산 돈의 출처를 알아낸 아버지는 분노했다. 그는 물러오라는 말을 듣지 않고 산으로 올라가 숨어 지냈다. “손자 죽겠다”는 할머니의 읍소 덕분에 아버지가 화를 풀었다.
“파란색 현상약과 빨간색 정착약으로 인화하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당신을 찍은 인물사진을 보시면서 신기해하고, 칭찬도 해주셨어요.”
독학으로 익힌 사진은 일생의 업(業)이 됐다. “찰카닥이 무슨 예술이냐”고 깎아내리는 이들을 평론과 작품으로 꾸짖으면서 왜 사진이 예술인지 증명해냈다.
최봉림(한국사진문화연구소 소장)이 ‘먼 역사 또렷한 기억’에 붙인 헌사(獻詞)를 읽어보자.
“그의 보도사진은 1960년대 전후 한국사회의 복판에 서 있었고, 한국 언론의 중심이던 ‘동아일보’와 ‘신동아’의 지면을 장식한 사진비평은 한국 사진계 흐름을 주도했다. 그는 끊임없이 사진인의 예술관의 빈약을 질책하면서 사진행위의 지성화를 요구했다. 그가 책무로 여긴 사안은 빠른 속도로 실현됐다. 모더니즘이 한국 사진 주류로 자리 잡았고 사진의 지성화는 사진학과의 확장과 유학 세대 등장으로 충족됐다. 그의 방향타는 우여곡절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한국 사진계를 주도했으며, 그의 여정은 한국 현대사진의 흐름과 궤를 같이했다.”
그는 사진평론가면서 사진기자였고, 사진예술 운동가요, 포토저널리즘을 가르친 교육자였다. 리얼리즘 사진 운동에 앞장서면서 1962년 한국사진작가협회 창설을 주도했다. 1963년부터 동아사진콘테스트가 열린 것에도, 이듬해 국전(國展)에 사진 부문이 신설된 것에도, 1966년 동아국제사진살롱을 창설한 중심에도 그가 서 있었다.
1968년 그가 주선해 동아일보사가 발행한 최민식의 ‘인간’은 한국 최초의 개인 사진집이다. 1969년 ‘젊은 사진작가 주명덕’ 제하 칼럼을 시작으로 1983년까지 ‘신동아’에 연재한 사진비평은 한국 사진의 ‘먼 역사’면서 ‘또렷한 기억’이다. 이젠 내로라하는 사진가가 된 이들은 그의 비평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백범 김구의 최후를 찍다
그는 평론을 통해 한국 사진의 낙후성을 꼬집으면서 “사진은 사진이어야 한다” “회화주의를 극복하고 모더니즘에 합류하자”고 외쳤다. 비평가로 활동한 것은 사진이 예술의 한 장르라는 것을 널리 인식시키려는 노력이었다. 1989년 5월 칠순의 나이에 창간한 잡지 이름을 ‘사진예술’이라고 지은 것도 같은 이유다.
저널리스트로서 남긴 족적도 눈부시다. 수필가 윤세영은 ‘먼 역사 또렷한 기억’을 보고 이렇게 썼다.
“1920년생이니 거의 한 세기를 살았다. 일제강점기에 사진을 시작해 광복의 기쁨을 찍었고, 1949년에는 경교장 뜰에서 백범 김구 선생의 마지막 사진이 된 하얀 두루마기 차림의 인물사진을 찍었다. 6·25전쟁을 종군 기록했으며 자유당 정권의 부패를 고발했고, 4·19혁명 때에는 경무대 앞 총알이 날아오는 현장을 기록했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났던 역사의 현장에서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다는 자체가 전설처럼 느껴졌다.”
그는 1949년 6월 서거하기 사흘 전 백범의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1956년에는 신익희가 기차에서 사망하기 3시간 전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1959년에는 조병옥의 최후 사진을 남겼다. 4·19혁명 때 찍은, 민중의 피가 독재를 몰아내는 경무대 앞 현장을 담은 사진은 이듬해 우표로 제작됐다.
“광복 후 미군 군정청 농림부에서 사진가로 일하면서 성균관대 전문부 정치과를 다녔습니다. 백범 선생이 성균관대 후원회장을 맡았어요. 경교장(백범 사저) 일을 봐주면서 선생을 따랐습니다. 백범 비서이던 선우진 씨 등과 백범동지회를 만들었어요. 백범을 지키자고 의기투합한 것이었죠. 그즈음 경교장에서 백범 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 백범이 안두희의 총탄을 맞고 서거한 후 입관 직전의 모습을 찍은 것도 기억납니다. 살아서 마지막 모습, 죽어서 마지막 모습을 기록한 셈이네요. 백범과의 인연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1969년 백범 동상을 세울 때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이사로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1951년 어느 날 강원 인제군 7사단 주둔지에서 한 병사가 편지를 읽는다. 철모에는 칠성부대 상징인 별(★) 7개가 새겨져 있다. 총열에 묶어 매단 인형이 앙증맞다. 편지를 읽으며 웃는 병사의 얼굴이 앳되다. ‘보병7사단의 중동부’라는 제목으로 남은 사진 속 병사는 이튿날 전사했다.
1951년 작 ‘보병7사단의 중동부’.
“1·4후퇴 때 할머니와 함께 열차 지붕에 올라타 대구까지 피난을 갔습니다. 터널을 지나갈 때 느끼는 공포는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지 못합니다. 인민군에게 죽을 뻔한 경험도 했습니다. 분에 못 이겨서라도 종군하지 않을 수 없었죠.”
국군이 공격하면 중공군이 도망갔고, 중공군이 반격하면 국군이 후퇴했다. 능선에는 초연이 가득했으며 계곡엔 피가 흘렀다. 참호 코앞으로 포탄이 날아드는 밤을 뜬눈으로 지새기 일쑤였다. 세월이 60년 넘게 흘러서일까. 그가 남긴 사진은 참혹하기보다는 처연하고, 울분을 샘솟게 하기보다는 눈시울을 어루만지게 한다.
“실제 전투 사진은 남은 게 없습니다. 누구도 찍을 수가 없어요. 고지전은 밤에만 벌어지거든요.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면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 서로 치고받는 겁니다. 국군이 참호에서 송아지골이라는 것을 먹었거든요. 골가루에 영양 성분이 많아요. 그게 사실 되놈 골을 가루 낸 것인데, 알고도 먹었어요.”
옆에 앉아 대화를 듣고만 있던 김녕만이 말허리를 자른다.
“아이고…그런 얘기 마세요. 젊은 친구들 끔찍하게 여겨요. 화랑무공훈장 받은 얘기를 하셔야지.”
“뭐가 끔찍해. 전쟁 통에 그렇게 살았는데…. 훈장은 되놈(중공군)들 다 때려잡아서 받은 거고.”
사진기자가 된 것은 우연이다, 아니 운명인지도 모른다.
“휴전하자마자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정부고 뭐고 다 부산 있을 때예요. 군복 입고 광복동 거리를 쏘다니다 우연히 지인을 만났어요. 대뜸 3일만 암실을 봐달랍디다. ‘중앙일보’(지금의 ‘중앙일보’와는 다른 신문) 암실이었어요. 중앙일보는 이북통신이라고 실향민에게 북한 사진을 팔아 돈을 꽤 벌었어요. 200만 실향민이 가장 아낀 신문이었죠. 김일성 첩 얘기 같은 허무맹랑한 기사도 실었거든요. 논조가 반공만 강조하니 이승만 대통령이 이 신문을 특히 좋아했죠. 발행인을 수양아들처럼 여겼더랬습니다.”
진해공군기지=이명동 특파원發
중앙일보 사진부장이던 지인은 암실을 떠넘기고 나타나지 않았다. 암실을 맡은 후 3일 만에 얼결에 경남 진해로 취재를 갔다. 공군 행사를 찍는 일이었다.
“소설가 이무영이 소령이었는데 스리쿼터를 타고 기자들을 데리러 왔습니다. 스리쿼터에 탔더니 기자들이 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거야. 신문기자는 다 사진을 찍나보다 그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볼펜기자들은 접대받으러 먼저 출발했더라고요. 헬기 편대가 비행하는 것을 배경으로 이 박사(이승만 대통령)가 손 흔드는 모습을 찍었습니다.”
그는 신문사로 돌아와 밤을 꼬박 새우며 기사를 썼다.
“중뿔나게 행동한 거였어요. 성균관대 다닐 적 신문학자에게 기사 작성법을 배웠습니다. 강의 때 초등학교 4학년이면 사회부 기사 쓸 수 있다고 했거든요. 사회 정의에 따라 작성하고 6하 원칙만 지키면 된다고 알고 있었어요.”
편집부 차장에게 밤새 쓴 기사를 건넸다. 차장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뭐요? 전에 신문사에서 일해봤어요?”
기사를 읽어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처넣는 게 아닌가. 자존심이 상했다. 암실로 돌아와 문을 잠그고 잠을 청하면서 신문사는 오늘로 끝이라고 다짐했다. 12시쯤 됐을까. 누군가 문을 쾅쾅쾅 두드렸다.
“이형, 점심 식사하러 갑시다.”
차장의 손에 갓 나온 신문이 들려 있었다. 진해에서 촬영한 이승만 대통령 사진이 1면에 실렸다. ‘진행공군기지 이명동 특파원발’이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그가 쓴 기사도 함께 실려 있었다. 뭔가로 정수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 맛에 기자 노릇 하는구나 싶었다.
“그때부터 사람 대접 하더라고요. 볼펜기자가 접대받고 잠자느라 기사를 안 보낸 겁니다. 통신사 기사도 한 줄도 안 왔고요. 내 이름 석 자가 인쇄된 지면을 보면서 신문 일이 가진 어떤 마력을 느꼈어요.”
사진기자로 일하면서 글 쓰는 것을 병행한 데는 이때 일이 계기가 됐다.
1955년 인촌 김성수 선생 장례식 때 소문난 여당지이던 중앙일보는 인촌의 타계 소식에 무관심했다.
“당신은 잠도 안 자는가?”
“장례식 취재를 하지 말라는 겁니다. 인촌 선생과 이 박사(이승만 대통령)가 사이가 나빴죠. 일국의 부통령을 지낸 분이 돌아가셨는데 보도하지 않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졌죠. 이승만 정부에 늘 비판적이던 동아일보 설립인이면서 정치적으로는 이 박사의 라이벌이었으니 중앙일보로서는 무시하고 싶었던 거죠.”
그는 회사 방침을 어기고 인촌의 집을 찾았다. 불참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이승만 대통령이 새벽에 조문 왔는데, 이걸 정작 동아일보 기자가 낙종하고 중앙일보 기자가 단독으로 이 모습을 촬영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일을 겪은 후 그는 동아일보 사진부로 일터를 옮겼다.
“그 일 덕분에 직장을 옮긴 게 아니고, 스카우트된 겁니다. 김상만 전무(고 김상만 동아일보 명예회장)께서 나를 보자마자 ‘당신은 잠도 안 자는가?’라고 물은 게 떠오릅니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김 전무께서 나를 예뻐했습니다. 다른 이가 부러워하는 것을 넘어 질시할 정도였어요. 건의하면 대부분 받아들여주셨거든요.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동아사진콘테스트, 동아국제사진살롱은 비용이 상당히 드는 행사였거든요. 동아일보사 덕분에 한국 사진예술이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명동(왼쪽)과 김녕만의 40년 인연. 1974년 ‘사진예술’ 발행인 김녕만이 동아사진콘테스트에 입상해 이명동과 기념사진을 찍었다(위). 40년 후인 2014년 7월 15일 이명동 개인전 ‘먼 역사 또렷한 기억’이 열린 서울 송파구 한미사진미술관에서 두 사람의 모습이 다시 기념사진으로 남았다.
1960~1970년대 사진사(史)는 ‘이명동’이라는 이름 석 자를 빼놓고는 기술할 수 없다. 사진과 관련한 모든 일에 그가 있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는 전국의 사진가를 파일로 관리했고, 일본과의 사진 교류에도 앞장섰다.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사진 이론을 정립했다. 1960년대 이후 비평에 주력한 것은 사진인의 지성을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알리려는 뜻이었다.
그는 ‘신동아’ 지면을 통해 살롱사진(회화적 감성을 사진 영역에 끌어들인 회화주의 예술사진)의 타파를 외치면서 리얼리즘을 강조했다. “사진은 사진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담론 영역에만 머문 게 아니라 동아사진콘테스트, 동아국제사진살롱의 산파 노릇을 하는 등 사진계의 중심에서 또 막후에서 한국 현대 사진 발전에 이바지하면서 모더니즘 사진을 진흥하는 데 기여했다.
“회화나 조각하는 이들이 사진을 무시하고 조롱했습니다. 신문사에서도 사진기자를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었어요. 사진이 미술보다 예술적으로 높은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진가는 많은데, 글 쓰는 사진인은 없었습니다. 사진 관련 지면을 얻어냈는데도 글을 맡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썼어요. ‘신동아’ 편집장이 내 뜻을 받아줘 오랫동안 평론을 쓸 수 있었습니다.”
‘사진예술’ 후배에게 넘겨
이명동은 여든이 넘은 2001년, 일흔에 창간한 ‘사진예술’을 제자이자 후배인 김녕만에게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고 넘겨줬다. 김녕만은 평생 스승이 밟은 길을 그대로 걸었다. 사진기자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현장에서 기록했으며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쳤고 다큐멘터리 사진가, 사진잡지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사진전만 스승보다 먼저 열었다.
이명동의 첫 전시를 기획한 게 김녕만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사진기자가 꿈이었다. 중앙대 사진학과 2학년이던 1974년 이명동의 강의를 들었다. 같은 해 사진작가의 등용문이던 동아사진콘테스트에 ‘강제등교’라는 작품으로 입상했다. 이 수상은 훗날 동아일보사로 스카우트되는 단초가 됐다.
“선생님이 사진 촬영보다 사진평론에 더 힘쓰시느라 개인전을 열 겨를 없이 세월이 흐른 것 같습니다. 남아 있는 작품 중 전시할 것을 고르고 프린트하면서 선생님과의 40년 인연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이명동과 김녕만의 40년 인연 중 일화 한 토막.
1950년대의 어느 날. 이명동은 육군회관 건립식 행사를 취재했다. 약장(군복에 다는 훈장 표식)이 달린 군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6·25전쟁 때 훈장을 서훈 받았으나 약장만 수여받았다. 휴전 후 훈장을 챙겼어야 했는데 잊고 살았다. 육군참모총장 백선엽이 행사장에서 이명동에게 다가오더니 약장을 가리키며 시비를 걸었다.
“기자가 뭐하는 짓이오? 당장 떼시오.”
두 사람은 나이가 같다. 이명동이 맞받았다.
“최전방에서 받은 훈장이오.”
실랑이가 벌어졌다. 백선엽이 손을 내밀어 약장을 떼려 했다. 이명동은 참모총장 군복의 별 4개를 붙잡고 비틀었다.
“내 게 가짜면 네 것도 가짜다.”
이명동은 화랑무공훈장수여증을 지갑에서 꺼내 보여줬다. 백선엽이 훈장을 수여한 것으로 적혀 있었다.
“네가 준 훈장인데, 이게 가짜냐고 윽박질렀죠. 행사장을 나오면서 홧김에 약장을 떼버리고 훈장수여증도 찢어버렸어요. 한심한 게, 현장에 있던 사진기자 누구도 장군과 기자가 몸싸움하는 흥미로운 장면을 못 찍었다는 거예요. 사진기자는 순발력이 있어야 하는데….”
김녕만이 1990년대 초반 청와대 출입기자로 일할 때 이명동의 훈장을 찾아줬다. 1974년 수업 때 화랑무공훈장 얘기를 들은 김녕만이 언론사 후배가 돼 스승이자 선배에게 “훈장을 잘 보관하고 계시냐?”고 물었는데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백선엽과 실랑이한 사연을 듣고, 육군본부에 서훈 기록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기록이 남아 있었다. 서훈 40여 년 만에 이명동은 훈장을 수령했다.
이명동이 촬영한 1960년 4·19혁명 기록. 이듬해 그의 사진이 담긴 기념우표(오른쪽)도 제작됐다.
민완기자 vs 정치깡패
장충단공원 야당 집회에서 유지광 등 정치깡패들이 김두한을 위협하는 사진이 실린 ‘동아일보’ 1957년 6월 6일자(맨위). 같은 날 신문에 깡패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사진을 따로 실었다(가운데). 나흘 후인 6월 10일자 동아일보는 깡패들의 얼굴마다 이름을 지목해 이 사진을 다시 게재했다(맨아래). 원 안의 인물이 유지광.
이명동은 사진기자로서도 민완(敏腕)했다. 1960년 4월 19일 촬영한 경무대 앞 사진은 유일하게 사진으로 남은 ‘혁명 최전선의 기록’이다.
“4·19는 동아일보가 주도했어요. 현장을 동아일보만 취재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신문사 차량이 현장에 왔다면 시위대가 불을 질렀을 거예요. 부통령 이기붕의 집이 불에 탄다는 소식을 듣고 신이 나 달려가던 게 떠오릅니다. 효자동 분수대 쪽에 경무대로 가는 마지막 차단 벽이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이 순진해요. 그 차단 벽을 넘으면 총을 쏠 수밖에 없습니다. 학생들이 최후의 차단 벽을 향해 행진했습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학생들과 함께 걸었고요. 콩 볶는 소리가 났어요. 시위대가 하나둘씩 총에 맞아 쓰려졌습니다. 내장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시신도 있었고요.”
1960년 4·19혁명의 최전선은 이명동에 의해 사진으로 남았다. 학생들이 경무대로 행진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동아일보에 실렸다. 이듬해 4월 19일 발행한 ‘4월혁명 제1주년 기념우표’에도 이 사진이 담겼다.
‘민완기자 이명동’의 일화 한 토막.
1957년 6월 6일 동아일보에 흰색 중절모를 맞춰 쓴 깡패들의 사진이 실렸다. 자유당 정권의 비호를 받는 유지광을 비롯한 정치깡패였다. 이들은 야당 집회 때마다 몰려와 깽판을 쳤다. 검찰과 경찰은 체포는커녕 오히려 깡패들을 비호했다. 누가 누군지 얼굴을 몰라 검거하지 못한다고 둘러댔다.
“국회의원이 된 김두한도 유지광패를 무서워했습니다. 장충단공원 집회 때 김두한이 연설하는데 유지광패가 단상 쪽으로 다가오면서 ‘야 이 새끼야,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내려와’ 하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김두한의 가랑이 사이에 숨어 단상 쪽으로 더 접근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요즘 카메라처럼 줌 기능이 훌륭하지 않았거든요.”
유지광을 위시한 깡패들이 단상 바로 앞에 다다랐을 때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찰칵 소리를 들은 깡패들이 “저놈 잡으라”고 외치면서 이명동을 쫓았으나 그는 쏜살같이 도망쳤다.
나흘 후(1957년 6월 10일) 동아일보에는 6월 6일 실린 것과 똑같은 사진이 다시 실렸다. 이번엔 깡패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유지광 일당의 배신자 하나가 보도한 사진에 담긴 깡패 얼굴마다 이름을 적어 신문사에 제보한 것. 배신자는 유지광 담당 검사에게도 똑같은 제보를 했다.
“얼굴과 이름을 알았으니 체포해야 하는데 검찰과 경찰이 또 어물쩍거리는 겁니다. 붙잡을 생각이 아예 없었던 거죠.”
이명동은 유지광 담당 검사가 낮잠 자는 모습을 촬영해 보도했다. 제목이 걸작이다. ‘잠자는 체포령.’
“여론의 질타가 심해 유지광을 체포하긴 했는데 1년 몇 개월 만에 석방됐습니다. 4·19혁명 후 또다시 구속되고요.”
국회의원 보궐선거 개표 때 전등을 끄고 표를 바꿔치기하는 찰나를 촬영해 선거를 무효로 만들기도 했다. 부정을 저지를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전등이 꺼지길 기다리다 셔터를 누른 것이라고 했다.
그는 ‘대한민국 1호 출판사진기자’다. 1967년 ‘여성동아’가 복간할 때 일이다(여성동아의 전신은 동아일보사가 1933년 창간한 ‘신가정’이다. ‘신동아’와 함께 1936년 9월 일제에 의해 폐간됐다).
“김상만 전무께서 어느 날 나를 부릅디다. 골치 아프거나 부탁할 일 있을 때 짓는 표정이 있어요. 편집국 사진부장을 맡았을 때입니다. 사진부에서 ‘신동아’ 흑백 화보를 찍어줬어요. 그냥 해준 건 아니고 고료를 받아 회식비로 썼죠. 김 전무께서 여성동아에 실릴 사진도 그런 식으로 해달라는 겁니다. 단칼에 못한다고 거절했습니다. 아사히신문 사진부를 견학한 적이 있는데, 출판사진부가 편집국 사진부보다 규모도 훨씬 크고 기자들의 실력도 좋았어요.
그래서 출판사진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의했습니다. 도둑놈 사진 찍던 사람이 패션, 요리 사진 못 찍는다고 했습니다. 카메라에 컬러필름을 끼워본 적조차 없다고도 했고요. 출판사진부를 만들면 1년 후 다른 언론사에도 다 생긴다고 설득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됐고요. 설명을 듣더니 흔쾌히 동의하시더군요. 보름 후 조직 개편이 이뤄졌습니다. ‘부장은 누굴 보낼까?’ 하시기에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대신 컬러사진을 배워야 하니 두 달 동안 일본에 연수를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여성동아에 실릴 사진 찍는 부서로 간다니 좌천돼 가는 것처럼 생각한 사람이 있었는데 사진을 몰라서 하는 소리요, 그게.”
창간호부터의 동아일보를 마이크로필름으로 기록한 것도 그가 출판국 부국장 때 제안해 시작한 일이다.
사진의 전설
“종이로 보관한 신문은 결국엔 삭아 없어집니다. 일본 언론은 마이크로필름으로 지면을 기록해 서로 다른 지역 10군데 이상에 보관했어요. 창간호부터 복사해 마이크로필름에 저장했습니다. 그것으로 돈도 꽤 벌었어요. 1974년 동아일보 광고탄압 때인데,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3000대 넘게 마이크로필름을 판 것으로 압니다. 독재와 맞선 한국 언론을 도와야 한다면서 미국, 유럽은 물론이고 아프리카에서까지 사갔습니다.”
이명동은 “때로는 사진이 징그러웠다”고 했다. “독한 사진” “사진 하려면 독해야 해”라고도 했다. 젊은 시절 날카롭던 눈매는 어느덧 푸근하게 변했다. 95세 나이에도 눈 밝고, 귀 맑으며, 총기가 또렷하다. 사진을 예술로 자리매김하려 독하게 또 치열하게 살아서 그러리라. 노(老)사진가는 “사진은 사진이면서 사진 그 이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명동은 ‘우리 시대 사진의 전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