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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 | 新전환시대의 5大 화두 |

‘나라다운 나라’의 헌법과 정치를 위하여

21세기 국가운영 청사진 : 개헌

  • 윤평중|한신대 철학과 교수 pjyoon@hs.ac.kr

‘나라다운 나라’의 헌법과 정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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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한 동아일보 기자]

[전영한 동아일보 기자]

지금 한반도는 전쟁 위기 한가운데 위태롭게 서 있다. 하지만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운 것처럼 위기가 협상 국면으로 전격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금 단계로선 예상하기 쉽지 않지만 만약 협상 국면이 본격화한다면 평화협정 논의와 통일 담론이 국내외에서 만개(滿開)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럴 경우 한반도 정전체제의 질적 변환을 고려한 정치적·법률적 대비가 필수적이다. 정치 영역에서 21세기적 전환시대의 논리가 시급히 요청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1세기는 21세기의 논리를 요구한다. 새로운 전환시대의 헌법과 정치를 모색하면서 중요한 것은 단연 촛불의 경험이라고 나는 본다. 촛불 집회는 권력자가 아니라 보통 사람인 ‘나와 우리’가 나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체험한 순간이었다. ‘제왕적 대통령’을 합헌적으로 파면하는 과정에서 연인원 1700만 명이 참여했음에도 합법적 평화축제로 일관한 것이 촛불혁명이었다. 국민이 주권자임을 선포한 민주공화정의 헌법정신이 헌정 절차에 따라 차분하게 관철되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법치의식이 탄핵과 대통령 보궐선거라는 비상시국을 관통해 유기적으로 작동했다. 궁극적인 헌법 제정권력의 주체인 국민은 헌법 절차에 따라 옛 대통령을 파면했고 새 대통령을 선출했다. 주권자인 국민의 정치적 효능감이 극대화하면서 집단적 유포리아(행복감), 즉 ‘공적 행복감’이 한국 사회를 감싸 안는 현상을 우리는 목도했다. 국가 규범의 정점인 헌법의 근본정신을 현실에서 실천한 시민들의 주인의식이 창출한 장엄한 행복감이었다.

헌법 개정 작업에서도 이러한 국민적 공감대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지금의 개헌 작업에서 국민은 소외되고 있는 듯 보인다. 지난 8월에서 9월 말까지 전국을 순회하면서 11차례나 ‘헌법개정 국민대토론회’를 열었다. 하지만 정작 시민 대다수는 별 관심이 없거나 토론회가 열렸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국민대토론회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다. 지난 대선에서 모든 대선 주자와 여야를 불문한 모든 정당이 개헌의 시급성과 필요성을 강조했음에도 개헌 문제를 당리당략으로 접근하는 제도정치권의 관행에도 전혀 변화가 없다.

‘그들만의 리그’

국회 개헌특위는 내년 2월까지 개헌안을 도출해 5월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하겠다는 일정표를 내놓았다. 2018년 5월 24일까지 본회의 의결 절차를 완료한 후 대통령이 그다음 날 공고하면 6·13 지방선거 날 개헌 국민투표를 함께 치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협치는커녕 발목잡기 식 정쟁만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빠듯한 일정이 지켜지리라고 보기 어렵다. 올 2월 가동하기 시작한 개헌특위가 지금까지 합의한 내용이 ‘군인의 이중배상금지’ 조항을 삭제하기로 한 것 단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이를 웅변한다.



설령 정치권의 기적적인 타협으로 10차 개헌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들만의 리그’에 머무를 공산이 크다. 국민적 동의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행복감 위에 21세기 전환시대를 이끌 전향적인 새 헌법을 정초하기는커녕 새 헌법조차 장식용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엄존한다. 9차에 걸친 지금까지의 개헌이 대통령 선출 방식이나 임기 등 권력구조 개편에 제한된 미봉책에 머무른 것이 단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만약 10차 개헌까지 이런 양상을 되풀이한다면 촛불로 상징되는 오늘의 시대정신을 거스르는 심각한 퇴행이 아닐 수 없다. 국회 개헌특위 활동에 시민들이 무관심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터이다. 먹고사는 민생 문제가 여전히 어려울 뿐 아니라 안보 위기가 주기적으로 우리 생활세계를 강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대로 권력구조 개편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정치권 탓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주권자인 시민의 책임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이는 헌법의 의미를 돌아볼 때 명징하게 드러나는 근본 이치다. 헌법은 정치결사체의 근원적 통치 질서를 규정한 최고기본법이자 국가운영의 근본 틀이다. 따라서 헌법에 대한 학문적 탐구는 국가론과 연결된 국민 주권론과 분리될 수 없다. 근대 이후 모든 민주국가가 그 내실에 상관없이 헌법을 보유하는 까닭이다. 용어 자체가 암시하는 것처럼 헌법(Constitution)의 근대적 성격은 주권성(Sovereignty)을 특징으로 하는 근대 국가(State)의 창립(constitution)과 불가분리적이다. 국가의 주권성이 헌법에 의해 형상화되는 것이다.

나라의 魂 세우는 일

여기서 국가와 헌법 중 어느 것이 선차적이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민주주의 헌법 이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통치권과 결정권은 국민에게 귀속되므로 정치 의지의 통일체이자 통치 질서인 국가는 헌법에 의해 비로소 창설된다. 이는 민주적 정당성 이론의 출발점으로서 헌법국가의 이념 자체가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친 부르주아 입헌주의 운동에 연원을 둔다는 사실에서 재확인된다.

헌법의 본질을 관류하는 첫 번째 특징은, 국가 또는 정치사회를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 간의 동의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는 점이다. 헌법의 본성을 증명하는 두 번째 특징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단지 힘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법 창조자인 주권자를 설정하고 그 주권자가 제정한 법에 주권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따르는 합법적 지배로 준거했다는 사실이다. 국가의 3가지 필수요소로 예거되는 영토, 국민, 주권의 개념도 이런 헌법철학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헌법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근대국가의 주권적 지위는 헌법이 지닌 최고의 기본법이라는 철학적 성격에 의해 정해진다. 헌법의 최고규범성과 자기보장성은 헌법이 특정 국가의 정치적 통일의 형성과 유지 및 법질서의 창설과 유지를 맡는다는 사실에서 확정된다. 헌법은 국가 통합 과정의 준거이며 국가라는 정치적 결사체의 고유한 핵심이다. 헌법의 최고규범성과 자기보장성이 정치공동체의 원리로 착근되지 않은 정치공동체는 붕괴 위기를 맞게 된다. 결국 민주공화국 헌법은 나라의 혼(魂)에 비유되어야 할 만큼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개헌은 헌법이라 불리는 법률 조항 몇 개를 고치는 기능적 작업이나 정치공학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개헌을 정치권의 당리당략에 따른 권력 나눠먹기로 여겨온 제도정치권의 관행은 헌법의 근본 정체성에 대한 자기부정이 아닐 수 없다. 헌법 개정 과정 자체가 ‘나라 만들기와 성숙한 시민 되기’가 어울려 빚어내는 장엄한 협주곡이자 교향악이 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협주곡과 교향악이 되게 하라

특히 새 헌법은 현행 헌법이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국민주권 이념을 최우선으로 살려내야만 한다. 현행 헌법에서 제10조 이후에 서술되는 국민 기본권 규정을 헌법 서두로 옮기는 것이 급선무다. 새 헌법은 개인의 자유권과 사회권, 평등권과 안전권 조항을 대거 추가하고 국민의 주체적 권리를 부당하게 제약해 온 조항은 과감하게 삭제함으로써 헌법의 존재 이유와 성립 근거가 국민 기본권 수호에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천명해야 한다. ‘국민’이라는 용어 자체를 ‘사람’으로 바꾸자는 일각의 견해는 권위주의적 국가중심주의의 유산을 벗어던지고 인권 존중의 국제주의를 새 헌법에 담아내자는 전향적 움직임으로 평가된다.

10차 개헌 작업에서 헌법의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개헌의 과정과 절차다. 개헌 자체가 민주시민교육과 시민의 자기형성에 필수불가결한 무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처럼 시민들이 무관심한 상황에서 국회가 일방적인 개헌주체로 나서는 것은 절제해야 마땅하다. 이른바 전문가들이 마련한 개헌안에 대해 국민이 국민투표에서 ‘네 또는 아니오’로만 수동적으로 답하는 것은 국민주권의 능동성을 형식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아일랜드 사례가 참고할만한 가치가 있다. 아일랜드는 개헌 과정 자체를 국민 참여 형태로 꾸려서 헌법의회라고 하는 헌법 논의기구를 100명 정원(의장 1, 국회의원 33, 일반 시민 66명)으로 구성해 충분한 시간을 들여 개헌 사항을 심의해 결정한 바 있다. 헌법 개정이야말로 넉넉한 시간을 갖고 신고리 원전 존폐 공론화 모델 같은 공론화의 틀을 응용하고 접목해야 할 중차대한 국가적 현안이 아닐 수 없다.

정치권 중심의 개헌안은 개헌 논의 자체를 권력구조 개편이나 정치의 문제로 틀 짓는 한계가 있다. 반면 공론화 모델을 차용해 국민 참여를 확대하면 보통 사람의 삶과 직결된 기본권, 경제민주주의, 사법제도, 지방 분권, 환경권 등을 개헌 과정과 함께 선명하게 의제화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특히 민생 문제에서 시민 참여의 중요성을 재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현행 헌법에서 경제민주화 조항이라 불리면서 논란이 되는 제119조 1항과 2항 사이의 우선성 문제도 제헌헌법을 참고하면 어떤 해석이 국민 친화적인지 분명히 드러난다.

진정한 공화주의의 실천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들은 제헌헌법 제84조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의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 현행 헌법 제119조 1항과 2항의 순서가 제헌헌법에는 거꾸로 되어있는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공정성과 정의를 강조한 제헌헌법의 국민 친화적 성격이 역대 개헌 과정에서 제도정치권의 필요와 담합으로 말미암아 폐지되거나 후퇴했다는 역사적 교훈을 확인하게 된다. 결국 개헌은 국회·시민사회·정부의 3자 협력 형태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민 참여를 이런 방식으로 담보할 수 있을 때에만 최고 기본법인 헌법의 현실 관련성과 국민 주권성을 충실하게 확보할 수 있다.

촛불은 ‘나라다운 나라’를 한목소리로 요청했다. 촛불혁명은 진정한 공화정을 구현하려는 한국 시민의 공공적 실천이었다. 모두가 평등한 자유인으로 살되, 민주공화정의 공동목표와 공통의 이해관계를 공유한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정치공동체가 촛불이 지향하는 나라다. 따라서 촛불은 특정한 정치세력이 독점할 수 없는 한국 시민 모두의 공유 자산이다.

나라다운 나라를 바라는 국민의 뜻은 우리 시대의 일반의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헌법 개정에서 대통령제·내각제 같은 권력구조 개편도 시도해볼만한 가치가 있겠지만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개헌을 통해 시민의 삶이 좋아지고 성숙해지는 일이다. 그것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선포한 헌법 제1조의 뜻일 터이다. 대한민국 헌법 1조 1항을 함께 노래한 찬란한 촛불의 경험이야말로 새로운 전환시대의 논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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