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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통일대박론’은 1층 안 짓고 2층 짓겠다는 것”

원로 언론인·정치인 남재희가 본 대통령들

“박근혜 ‘통일대박론’은 1층 안 짓고 2층 짓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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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전 대통령의 성과 중 하나가 조선공산당 출신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에 발탁해 농지개혁을 시행한 것입니다. 농지개혁 덕분에 공산화를 막아낼 수 있었다는 평가가 적지 않습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가 미국 대통령으로는 전무후무하게 4선을 했습니다. 네 번째 임기 때 사망했는데, 대공황 때 뉴딜정책은 아주 개혁적이었습니다. 루스벨트의 이 정책을 뒷받침한 관료, 지식인을 ‘뉴딜러’라고 일컫습니다. 일본을 점령하고 남한에 진주하면서 뉴딜러들이 함께 왔어요.

일본의 농지개혁은 우리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이뤄졌습니다. 일본의 전후 개혁은 뉴딜러 철학에 따라 진행됐습니다. 뉴딜러들은 우선 일본의 재벌을 해체했고, 이어 노동조합을 육성했어요. 민주주의를 하려면 노조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게 농지개혁입니다.

요컨대 한국의 농지개혁은 뉴딜러들의 프레임에 따라 집행된 거예요. 또한 해방 공간은 혁명적 분위기였습니다. 뉴딜러들이 요구하지 않았더라도 토지개혁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승만 박사는 토지개혁과 관련한 미국의 방침을 잘 알았고요. 공산당 출신인 조봉암이 보상 비율을 낮춰야 한다고 주장해 농림부 장관을 시킨 겁니다. 이 박사의 선견지명이라느니, 조봉암이 역할을 했다느니 하는 식으로 보는 것은 좁은 소견입니다.”

▼ 이승만 전 대통령의 의지로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됐습니다. 한국이 산업화, 민주화를 성취하는 데 이 조약이 도움이 됐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잘 유도했습니다. 6·25전쟁 중 작전권을 미군에 넘긴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이 박사가 반공 포로를 석방하는 강수를 두자 미국에서 특사가 옵니다. 복잡한 상황을 잘 정리해 상호방위조약으로 나아갔으니 외교를 아주 잘한 거죠. 이 대목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전시작전통제권을 지금껏 미군에 맡기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거의 60만에 달하는 대군을 가졌으며 막대한 예산을 쓰는 국군이 전작권을 맡지 못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 사고입니다. 이 박사와 관련해 하고 싶은 얘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권력을 대중에게 넘기다

▼ 말씀하십시오.

“이승만 박사가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던 제도를 부산 정치파동을 거치면서 직선제로 바꿉니다. 그것을 두고 이 박사를 아주 나쁜 사람으로 매도합니다. 직선제로 바꾼 것은 제도로서 좋은 겁니다. 계엄령을 선포해 국회의원들을 반(半)구속 상태로 만들어놓고 통과시킨 탓에 독재 수법이라는 식으로 매도만 당하는데 나는 견해가 다릅니다. 이승만 박사가 자유당을 창당할 때 처음엔 당명을 노동당으로 지으려고 했습니다. 자유당 정강정책을 보면 무지하게 진보적입니다. 부산 정치파동 때 깡패짓 한 것만 빼놓으면 직선제로 바꾼 것은 한국 정치사의 진일보 중 하나입니다. 부산 정치파동은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 절차적 문제를 일으켰으나 미래를 생각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 부산 정치파동을 통해 권력을 봉건귀족으로부터 대중에게 넘긴 거예요. 물론 직선제를 해야 대통령을 계속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겠지만요. 이 박사에게 독재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아요. 별도의 표현을 써야 할 것 같아요. 독재보다는 ‘도약하는 전제(專制)’라고나 할까요. 박정희 대통령을 dictator(독재자)라고 규정한다면 이 박사는 authoritarian(독재적 권위주의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이 박사 양아들 쫓아내는 시위를 주모한 게 나예요. 선봉에 서서 쫓아내버렸습니다. 이 박사를 별로 안 좋아하지만 독재자라고 부르는 것은 안 맞습니다. 분단은 어쩔 수 없었던 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박사가 자기 좋으려고 분단의 길로 매진했다? 그건 아니란 말입니다. 대한민국 수립은 미소 냉전 탓에 불가피했습니다. 김구 선생은 그 와중에도 단념하지 않고 민족 통합에 몸을 던진 것이고요.”

▼ 박정희 정권으로 화제를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장준하 선생은 ‘사상계’ 1961년 6월호 권두언에서 “5·16군사혁명은 누란의 위기에서 민주적 활로를 타개하려는 최후의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1960년대 지식인 사회에서 5·16군사정변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어떠했는지요.

“1963년 대통령선거가 끝난 후 사상계에서 투표 결과를 총괄하는 논문을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제목을 ‘미지수 민주주의’라고 달았는데, 사상계에서도 그 제목을 그대로 실었습니다. 미지수 민주주의라고 명명한 것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뜻이었습니다. 제목을 참 잘 단 것 같아요. 4·19 때 활약한 진보적 정치인 일부가 오판했어요. 장준하 씨 역시 그런 맥락에서 지지한 것이고요. 널리 알려졌듯 미국에서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상을 의심하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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