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참여 인물 ‘품질관리’ : 진짜 부자는 high risk 상품에 투자 안 해
② ‘고난의 행군’ 견딜 세력 : 걷잡을 수 없는 이탈 막아야
1월 9일 서울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신동아’ 특별기획 ‘이낙연-이준석, 한국 정치를 말하다’ 대담 중인 이준석 개혁신당 정강정책위원장. [박해윤 기자]
[+영상] 이준석, 이낙연 손잡나
“저는 오늘 국민의힘을 탈당합니다. 동시에 국민의힘에 제가 가지고 있던 모든 정치적 자산을 포기합니다.”
1985년 자신이 설립한 애플에서 쫓겨날 때의 스티브 잡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개혁신당 정강정책위원장)는 결국 자신을 발탁하고 기회를 준 동시에 자신이 당대표로서 황금기를 이끌었던 국민의힘을 떠났다. 2011년 12월 27일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으로 정치를 시작한 지 꼭 12년째 되던 날이다.
진보도 싫고 보수도 싫다
혹자는 그랬다. 손에 쥔 것을 놓아야 더 큰 것을 쥘 수 있다고. 그가 예고한 ‘넥스트스텝(NeXTSTEP)’은 더 큰 걸 잡기 위한 과정일 것이다. 다만 그가 넥스트(NeXT) 설립 이후 애플로 권토중래한 잡스처럼 다시 국민의힘으로 돌아갈지는 미지수다. 지금까지의 결기만 보면 친정에 돌아가기보다 새로운 정치 구도를 구축하는 데 힘쓸 것 같다. 허은아 전 의원이 비례대표 국회의원직을 버리고 합류했으니 이준석 신당은 창당준비위원회를 꾸린 시점을 기준으로 현역 국회의원 한 명 없이 제3지대 정당을 만드는 모험을 하게 됐다.제3지대 정당 자체는 새로울 게 없다. 십수 년 전부터 기성 정치권을 향한 분노가 커지면서 대선주자급 인물을 중심으로 한 제3지대 정당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이러한 경향은 2000년대 후반부터 두드러졌다.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시대가 막을 내린 이후 지도자들 간 막후 협상이 사라지면서 정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보스들의 빈자리는 대중을 동원하고 그 지지세를 바탕으로 당권을 장악하는 정치 행태가 채워나갔다. 특정 정치인 팬덤이 당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정치적 양극화는 심화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안철수가, 2017년 대선에서는 안철수와 함께 유승민, 안희정 등 중도 포지션 정치인이 주목받은 건 우연이 아니다. 진보와 보수 두 진영이 포섭하지 못하는 유권자층은 크게 늘었다. 특히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고 더불어민주당에서 이재명 대표 체제가 시작되면서 3:3:3 구도가 유지되고 있다. 전체 국민을 10으로 놓고 봤을 때 국민의힘과 민주당 지지층 그리고 무당층이 각각 3,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표와 아주 약간의 정의당 표가 1을 차지하는 구도다. 한국갤럽이 2023년 12월 27일 공개한 연간 통합 여론조사 결과는 이를 뒷받침한다. 2023년 한 해를 종합했을 때 국민의힘 지지율은 34%, 더불어민주당은 32%를 기록했다. 무당층도 그에 준하는 28%였다. ‘진보도 싫고 보수도 싫다’는 정서는 청년층에서 더욱 강력하게 나타난다. 18∼29세에서 무당층은 48%. 30대에서도 36%나 됐다.(이 글에 나온 여론조사 관련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유권자 세 사람 중 한 명꼴로 무당층이 존재하는 현실은 기존 정치 구도가 한계에 봉착했음을 보여준다. 그런 이유로 최근 수년 동안 기존 양당 체제에서 벗어나자는 목소리가 꾸준히 대두됐다. 국민의당, 바른정당 등 중도를 표방한 제3지대 정당이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은 실패로 귀결됐다. 커다란 국민적 열망에도 왜 그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들의 반면교사는 이준석 신당이 고려할 두 가지 조건을 일러준다.
신당은 일류보다 이류·삼류가 모여들기 십상
가장 중요한 건 인물이다. 얼마나 좋은 사람을 많이 끌어들이느냐가 정당의 성패를 결정짓는다. 제아무리 저명한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함께하는 사람이 없다면 정치적 영향력을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 국회의원 한두 번 하고 말 게 아니라면 말이다. 문제는 신생정당이 참여하는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점이다. 소선구제하에서 당선 가능성을 담보할 수도 없고, 재정 측면의 지원도 기대하기 어렵다. 현역 국회의원이 없어 투표용지 아래쪽에 위치해야 하는 점은 대부분의 정치 신인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유권자들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인식된 후보들일수록 당선 가능성이 높은 거대정당의 영입 제안에 응할 가능성이 높다.반대로 정치 신인이나 거대 양당에서 인정받지 못한 이들에게 신당은 매력적 공간이 된다. 경쟁이 적다 보니 공천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다. 잘만 되면 선거 때 바람을 타고 국회의원 자리를 꿰찰 수도 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진짜 부자들은 이런 상품에 투자하지 않는다. 만화 ‘도박묵시록 카이지’의 한 장면처럼 막다른 길에 다다른 이들이 목숨 걸고 고위험 상품에 투자한다. 그래서 신당에는 일류보다 이류, 혹은 그보다 못한 삼류 정치인이 모여들기 십상이다.
안철수 의원이 창당했던 국민의당이 대표적 사례다. 그는 ‘새정치’를 내걸었지만 짧은 정치 경력 탓에 세력이 변변치 않았다. 마침 새정치민주연합 내에서 ‘호남홀대론’이 일었다. 친문계와의 경쟁에서 밀린 호남 출신 인사들이 대거 뛰쳐나와 안철수를 중심으로 뭉쳤다. 지역 토호 세력과 손잡은 새정치라니 얼마나 초현실적인 일인가.
아니나 다를까, 2017년 4월 대선을 앞둔 안철수 후보 행사에 전북 지역 조직폭력배가 동원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에 대해 경찰은 범죄 관련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확인해 줄 수 없다는 견해를 발표했다. 비슷한 시기 전남 선거관리위원회는 국민의당 관계자들을 불법 선거인단 모집 등의 혐의로 고발한 일도 있었다. 당 관계자가 렌터카 17대를 동원해 경선 선거인 130여 명에게 투표하도록 편의를 제공하고, 운전자에게 수당을 지급하거나 지급을 약속한 혐의였다.
삼류 정치의 백미는 누가 뭐래도 제보 조작 사건이었다. 제19대 대통령선거일을 며칠 앞두고 국민의당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아들 문준용 씨의 한국고용정보원 채용 과정에서 특혜가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육성 증언 파일과 카카오톡 캡처 화면이 증거로 제시됐다. 그 증거는 당원 이모 씨와 그의 남동생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국민의당은 사실 확인조차 하지 않고 이를 언론에 공개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모 전 최고위원이 개입한 정황도 드러났다. 그해 12월 서울남부지법 형사합의11부는 당원 이 씨에게 징역 1년, 이 전 최고위원에게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참고로 이 전 최고위원은 같은 해 5월 폭행 혐의로 입건되기도 했다. 말다툼 도중 앉아 있던 상대의 얼굴을 발로 찬 혐의다.
요즘 정치권 수준이 아무리 낮아졌다지만 사람 얼굴을 발로 차는 인성의 소유자를 최고위원에 앉힐 정도는 아니다. 안철수 의원의 실수일 수도 있겠지만, 이 사건들은 신당을 시작하는 지도자라면 빠질 수밖에 없는 딜레마를 보여준다.
신당이 세를 확장하는 과정에서는 한명 한명이 아쉽다. 그런데 쓸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당선이 유력한 거대 정당이 선점한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수준이 좀 떨어지더라도 선뜻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의 손을 잡아야 할까. 한 사람이 아쉬울 때 와주는 사람은 우리 편이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악마와의 거래’가 시작된다.
‘고난의 행군’ 견딜 만큼 세력화해야
제법 괜찮은 인물들로 당을 꾸렸다고 하더라도 넘어야 할 산이 또 있다. 그들을 결속하는 일이다. 기성 정치를 바꿔보고자 했던 신당에서 기대한 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걷잡을 수 없는 이탈이 일어나곤 했다. 수권 정당을 꿈꾸고 합류한 이들은 원내교섭단체도 못 꾸리는 현실을 버티지 못한다. 여느 진보정당이 한 손에 꼽을 만큼 적거나 아예 없는 의석으로도 오래 유지될 수 있는 건 기본값이 소수 정당이기 때문이다. 구성원들이 어려운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신념으로 똘똘 뭉쳐 있는 것과 한국 정치의 판을 바꿔보자며 호기롭게 모이는 건 엄연히 다르다. 후자의 경우 언제까지 함께할 거란 보장이 없다. 바른정당의 실패도 이 지점에 있다.국정농단 사건 당시 새누리당 안에서 친박근혜계와 비박근혜계 간 갈등은 봉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30명의 비박계 의원이 당을 뛰쳐나와 바른정당을 창당했다. 2017년 1월의 일이다. 당시 분위기가 어땠나. 친박계를 비롯한 새누리당은 마치 역사의 죄인으로 여겨졌다. 대중적 인지도와 호감도를 두루 갖춘 인물은 대부분 바른정당으로 넘어갔다. 리얼미터가 2016년 12월 26∼28일 전국 성인 1521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가칭 개혁보수신당(이후 바른정당)의 지지율은 17.4%로 보수 본류인 새누리당(15.8%)을 제쳤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전후해서는 보수정당 패권이 바른정당으로 넘어가리라는 분석도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당의 수권 경험은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수십 년간 쌓아 올린 조직 운영 경험과 인지도는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는다. 새누리당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 홍준표 현 대구시장을 중심으로 다시 결집했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숨지도 말자”던 그의 당당함은 절망감에 풀 죽어 있던 보수의 심장을 두드렸다. 이때부터 바른정당의 대열이 흐트러졌다. 장제원, 권성동 의원을 비롯한 13명의 의원이 바른정당을 탈당했다. 자유한국당이 선거비용 전액 보전 기준인 득표율 15% 달성도 어려울 것이란 예상을 깨고 득표율 24.03%로 2위를 기록했다. 보수 본가(本家)로서 자부심이 되살아나 정당이 다시 역동적으로 뛰기 시작한 것이다. 대선 이후 이듬해 지방선거가 다가오자, 바른정당 의원들은 “돌아가야 한다”는 지방의원들의 요구를 묵살할 수 없었다. 정치적 동지의 낙선은 곧 그들이 가져다줄 자기 표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몇 차례 탈당 사태로 원내교섭단체 지위마저 잃은 바른정당은 결국 국민의당과 합당한다. 중도라는 포지션을 공유하긴 했지만 국민의당은 사실상 호남 지역주의 정당이었다. 처음부터 물과 기름처럼 함께할 수 없었던 이들은 현안마다 사사건건 충돌했다. 결국 2년을 가지 못했다. 만일 바른정당이 출범 당시 의석을 2020년 총선까지 유지했다면 정치 지형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확실한 건 유권자들이 표를 주려고 해도 ‘고난의 행군’을 견디지 못하고 와해된 정당에 표를 줄 수는 없다는 점이다.
각국의 정치와 선거에서는 최근 유사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무능하고 부패해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기성 정치에 대한 분노가 임계점을 넘어섰다는 것이 그것이다. 어떤 나라는 이상한 사람의 당선으로, 또 어떤 나라는 극우 포퓰리즘의 득세로 국민의 분노가 표출됐다.
대통령 낳은 제3지대 정당 ‘앙 마르슈!’
2017년 5월 프랑스 대선 결선투표에서 신생정당 ‘앙 마르슈!’로 대통령에 당선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뉴시스]
제3지대 정당이라는 말에는 서너 번째 의석을 가진, 그래서 의사결정에 캐스팅보트를 행사하는 정당이라는 뉘앙스가 있다. 소선거구제 체제가 빚어낸 양당 구도가 거듭되며 자연스레 각인된 인식이다. 그러나 민심과 동떨어진 기성 정치에 대한 염증, 새로운 정치를 향한 국민적 기대와 열망은 제도적 한계를 뛰어넘는다. 마크롱의 르네상스(앙 마르슈!에서 당명 변경) 사례처럼 기존 정치 구도를 단숨에 깨버리는, ‘제1당이 되는 제3지대 정당’의 출현도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이준석 신당은 바른정당의 길과 마크롱의 르네상스로 가는 두 갈래 분기점에 서 있다.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느냐는 과거 바른정당 실패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느냐, 그래서 어떻게 달라졌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