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연임 참호 없애라” 은행지주社 모범안 제시한 금감원
업계 “옳은 관행도 있는데 몰아세우기만 해서야…”
“한국 금융권 후진성 드러내”
[Gettyimage, 각 사]
지난해 12월 12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금융지주 이사회 의장 간담회에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금융지주 회장의 이른바 ‘셀프 연임’을 방지하는 내용 등이 포함된 ‘은행지주·은행 지배구조에 관한 모범 관행’을 발표하며 이같이 말했다. 이 모범안은 강제력은 없지만 향후 금융 당국이 은행 정기 검사를 할 때 평가 기준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향후 은행지주사 최고경영자(CEO) 승계 절차를 문서 형태로 미리 공개하도록 한 점이다. 최소 임기 만료 3개월 전 개시하도록 시점을 명문화하라는 방안도 마련됐다. 셀프 연임 등 부작용을 막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금감원 제시 모범안, 官治 변질 가능성 有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여덟 곳 은행지주의 최근 CEO 선임에서 승계 절차 개시 후 최종 후보 결정까지 평균 45일이 걸린 것으로 나타났다. 쇼트리스트(압축된 후보군)를 확정한 뒤 최종 후보를 정하기까지는 평균 11일이 소요되는 데 불과했다. 금융감독원은 이런 체제라면 제대로 된 후보군을 평가하기 어렵다고 보고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길 주문한 것이다.국내 은행지주사는 뚜렷한 대주주가 없는 지배구조 탓에 CEO를 선임할 때마다 잡음과 논란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회장이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로 이사회를 구성하는 식으로 ‘참호’를 구축하며 셀프 연임을 이어가는 후진적 구조가 나타났다는 평가가 적지 않았다.
실제 은행지주사 회장 선임에 대한 비판은 쭉 있었다. 은행 지주들이 쇼트리스트 후보에 대한 대면 평가를 단 한 번의 인터뷰로 진행한 경우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2년 전부터 승계 절차를 진행하는 글로벌 은행들과 차이가 크다고 지적된다.
이사회 역시 안건에 찬성만 하는 ‘거수기’로 전락했다고 비판받는다. 사외이사 수도 평균 7~9명으로 글로벌 주요 은행보다 매우 적어 문제로 여겨진다. 이에 금융감독원은 이사회 전문 분야와 직군, 성별 등과 관련해 전문성과 다양성 확보 방안을 마련하도록 하는 내용도 모범안에 담았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금융감독원의 모범안이 향후 국내 은행지주 CEO 선정 과정에 투명성과 합리성 등을 부여할 수 있다는 긍정적 평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일각에서는 우려의 시선을 보낸다. 금융감독원이 은행별 특성에 적합한 자율적 개선을 유도한다고 말하긴 하지만 자칫 이번 모범안이 또 다른 관치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이 제시한 모범안에 담긴 원칙은 총 4개 부문 30개에 달한다. 업계에선 “여기에 하나하나 맞추려다 보면 자율성이 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또 “기존 관행에 장단점이 있을 수 있는데 무작정 몰아붙일 경우 불필요한 제도 변경 등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도 성토한다.
업계는 특히 금융감독원이 모범안을 제시한 뒤 그간 일부 은행지주들이 운영해 온 부회장 제도가 사실상 폐지됐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내부 후보에게 부회장직을 부여해 CEO 육성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경우 경쟁력 있는 외부 후보에게도 비상근 직위를 부여하는 등 이사회와 접촉할 기회를 제공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CEO 후보군에 포함된 외부 후보에게 불공평하지 않도록 평가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부회장제를 운영하면 부회장직이 회장 승계 코스로 여겨지면서 지배구조 세습을 공고히 할 수 있다는 지적에 따른 방안이다.
12월 12일 간담회에서 이복현 원장은 부회장제에 대해 “기업 내부에서 폐쇄적으로 운영돼 신임 발탁과 외부 인사 기용을 차단하는 부작용도 있어 우려된다”고 말한 바 있다. 사실상 부회장제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한 셈이다.
지난해 12월 12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금융지주 이사회 의장 간담회를 마친 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질의에 답하고 있다. 이날 간담회에서 이 원장은 금융지주 회장의 ‘셀프 연임’을 방지하는 내용 등이 포함된 ‘은행지주·은행 지배구조에 관한 모범 관행’을 발표했다. [뉴스1]
“당국 취지는 좋지만 모양새가…”
국내 4대 은행지주사(KB, 신한, 하나, 우리) 가운데 부회장 자리를 뒀던 곳은 KB금융과 하나금융이다. 이에 따라 업계에서는 이 원장이 사실상 두 지주에 부회장 자리를 없애라고 주문한 것 아니냐는 반응도 나왔다.실제 이후 하나금융과 KB금융은 부회장직을 없애는 내용이 담긴 조직 개편 방안을 발표했다. 하나금융은 2020년 3월 김정태 당시 회장 아래에 함영주·이진국·이은형 체제를 구축하며 부회장 직제를 도입한 바 있다. 2022년 3월 함영주 회장이 취임한 이후에도 박성호·강성묵·이은형 부회장 체제를 유지했지만 지난해 12월 26일 부회장제를 폐지하고 임원 부문제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KB금융은 2022년 양종희·허인·이동철 3인의 부회장을 선임했는데, 지난해 11월 양 부회장이 회장으로 취임하고 허 부회장과 이 부회장은 사임한 후 부회장을 새롭게 선정하지 않다가 12월 28일 폐지했다.
이 원장의 지적처럼 은행지주 부회장 제도는 사실상 소수의 인물을 차기 회장 후보군으로 확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비판을 받곤 했다. 외부 후보들이 경쟁하기 쉽지 않다는 것. 한 금융 당국 관계자는 “부회장은 핵심 사업을 두루 거친 인물이 대다수인 데다가 이사회와의 네트워킹도 탄탄하게 구축된 경우가 많아 외부 후보군이 진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반대로 부회장제는 오랜 시간에 걸쳐 경쟁력 있는 인재를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등 순기능도 있다. 주로 계열사 CEO에게 부회장을 맡겨 치열한 내부 경쟁을 통해 차기 회장 후보를 정하는 방식을 쓴다는 점을 고려하면 부회장 제도는 차기 리더 후보군을 검증하는 내부 시험대로 기능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장단점이 있는 제도에 대해 금융감독원장이 직접 부정적 견해를 피력해 두 은행지주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부회장직을 폐지했다는 점은 문제로 지적된다. 업계에서는 외부 후보에게 비상근 직위를 부여하는 방안은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다른 회사에 근무하는 외부 후보자는 겸업 금지 의무 조항을 위반할 소지가 있다. 그렇다고 보수를 받지 않는 비상근 직위를 받아들일 외부 후보가 있을지도 미지수다.
또 하나의 특징은 주요 은행지주사들이 올해 조직 개편을 통해 상생금융 조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조직에 그룹의 상생금융 활동을 지원하고 실행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긴다는 계획이다.
이는 최근 상생금융에 대한 정치권과 금융 당국의 요구가 커진 데 따른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지난해 금융 당국은 금융권에 상생금융 확대를 요구했고, 정치권에선 이른바 ‘횡재세’ 도입까지 추진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국내 은행들은 지난해 말 2조 원 이상의 상생금융 지원 방안을 마련해 내놨다.
한 대형 은행 관계자는 “선진적 지배구조 시스템을 마련하고 은행들이 사회에 공헌할 수 있도록 하는 취지 자체는 좋지만 금융감독원장 말 한마디에 부회장 직제가 사라지고 정치권 압박에 너도나도 새 조직을 만드는 등의 분위기는 우리나라 금융권의 후진적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아쉽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