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 회사 사령탑에 반도체 전문가 이석희?
SK하이닉스 성공 경험 SK온에 통할까
공격적 투자로 성장… 재무 부담 극복이 숙제
[Gettyimage, SK온]
국내 재계에서 기업이 퇴직 임원을 다시 불러들인 사례가 없진 않지만 흔한 일도 아니다. 통상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해석될 공산이 커 대안이 있다면 고르지 않을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이 사장의 SK온행(行) 역시 이례적이라고 평가된다. 평생 반도체 한 우물만 파온 반도체 전문가로 배터리와 접점이 없어서다.
더군다나 지금은 잘나가던 배터리 산업의 기세가 한풀 꺾여 업계 전반에 빨간불이 켜진 상태다. 미·중 패권 경쟁과 지정학적 리스크 등 대외적 불확실성도 여전해 국내 3사(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모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런 중차대한 상황에 수장을 교체했다. 그것도 반도체 엔지니어 출신이자 2년 전 퇴임한 인물로. SK그룹은 왜 이 같은 결정을 내렸을까.
돌아온 이석희 “품질로 승부 보겠다”
이석희 SK온 사장. [SK온]
발표 직후 업계 안팎에선 인사 의도와 배경을 파악하려는 움직임이 분주했다. SK의 2024년 인사 내용 가운데 이 사장이 가장 눈에 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파격적 인사라는 평가가 나왔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들도 예상치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 자연스럽게 이 사장의 임무와 역할에 관심이 쏠렸다.
제조업에 오랫동안 종사한 경험을 살려 SK온의 부족한 점을 찾아내고 한 단계 도약을 이끌 거란 상식적 수준의 해석이 잇따랐다. 도달할 듯 도달하지 못한 흑자 달성이 그의 최우선 과제일 거란 추측도 나왔다. SK온의 현재 상황을 고려할 때 모두 그럴듯했지만 모두 명확한 답이 되진 못했다.
궁금증이 해소되는 데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사장은 임직원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경영 구상을 간략히 밝혔다. 여기엔 임기 중 초점을 맞출 부분이 무엇인지에 대한 힌트가 들어 있었다. 사실상의 방향 제시였다. 이 사장은 “대외 환경이 어려울수록 ‘이기는 환경’을 만들어놓고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며 “첨단기술 제조업에서 이기는 환경이란 탄탄한 연구개발(R&D) 역량을 기반으로 고품질 제품을 통해 고객의 신뢰를 얻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술력을 뒷배 삼아 ‘양’이 아닌 ‘질’로 승부를 보겠다는 것이다.
이 사장의 발언 가운데 ‘첨단기술 제조업’도 눈여겨볼 만하다. 반도체와 배터리 산업의 교집합 영역이자 SK하이닉스 출신을 SK온 사령탑에 앉힌 이유가 설명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산업군이 다르지만 큰 틀에선 성장전략이 유사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또 이 사장 스스로 SK온에서 해야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는 풀이도 가능하다.
SK온 NCM9 배터리. [SK온]
SK하이닉스에선 미래기술연구원장과 D램개발부문장, 사업총괄(COO) 등을 차례로 역임하며 풍부한 공정 경험을 쌓았다. D램 미세공정 기술 발전과 수율 안정화에 기여해 회사의 가파른 성장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다. 즉 SK하이닉스에서 거둔 성공 경험을 첨단 제조업이란 공통분모를 가진 SK온에 이식해 질적 성장을 책임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 사장은 3월 주주총회와 이사회를 거쳐 정식으로 대표이사에 선임될 예정이다. 선임 후엔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동생인 최재원 수석부회장과 ‘투톱’으로 SK온을 이끌게 된다. SK온은 출범 초기부터 2인 각자 대표 체제를 유지해 오고 있다.
SK온에 공정 전문가인 이 사장이 필요한 이유는 간단하다. 제조업 특성상 안정적 생산이 ‘기본 중 기본’이기 때문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수율과 가동률이 뒷받침돼야 원활한 판매, 추가 수주 등 선순환이 가능하다. 매출 증대와 수익성 개선이 뒤따르는 건 물론이다. ‘글로벌 톱티어’를 꿈꾸는 SK온으로선 당연히 생산 안정화에 신경 쓸 수밖에 없다.
SK온은 배터리 생산성·수익성의 핵심인 수율 문제로 적잖이 골머리를 앓아왔다. 수율은 전체 생산품 가운데 양품(良品)의 비율을 일컫는 말로, 불량률의 반대 개념이다. 수율이 정상 수준(통상 90%)에 도달하지 못하면 공장을 돌릴수록 적자가 커진다. 불량품에 사용된 소재가 모두 버려지기 때문이다.
수율은 기술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SK온은 경쟁사 대비 뒤늦게 시장에 뛰어들어 경험과 노하우가 부족했던 영향이 컸다. 어떤 기업이든 수율 제고엔 시간이 걸리고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는다. 후발주자로서 거쳐야 하는 단계지만 전기차 시장 확대로 배터리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선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지난해 3분기 SK온은 수율 90%를 달성했다. 일단 급한 불을 끈 모양새다.
투자 일변도 전략, 선명한 明暗
출범 당시 40기가와트시(GWh)이던 글로벌 생산능력은 지난해 말 89GWh로 2배 이상 증가했다. 같은 기간 글로벌 생산 공장은 5곳에서 8곳이 됐다. 국내 직원 수 역시 1445명에서 3411명으로 2년 새 2.4배 많아졌다. 매출 성장세도 가파르다. 2021년 4분기 1조665억 원이던 매출은 지난해 3분기 3조1727억 원으로 3배 가까이 늘었다. 지난해 2분기엔 분기 기준 최대 매출(3조6961억 원)도 찍었다.
그럼에도 투자는 이어지고 있다. SK온은 지난해 8조 원 안팎의 자본적지출(CAPEX)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모회사 SK이노베이션이 연결 기준으로 밝힌 CAPEX(10조 원)를 기준 삼아 유추한 금액이다. 나이스신용평가는 SK온이 지난해 상반기 4조8067억 원을 설비투자 등에 썼다고 분석했다. 2022년 연간 CAPEX(4조8712억 원)에 맞먹는 금액이다.
대규모 투자는 차입 확대로 이어져 이자비용 증가를 초래했다. 고금리 시대와 맞물려 재무 부담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SK온의 총 차입금은 지난해 3분기 말 기준 14조5614억 원으로 2년 전(2021년 4분기) 4조5242억 원 대비 3배 이상 늘었다. 2022년 말(10조9202억 원)과 비교해도 9개월 새 3조6000억 원 이상 증가했다. 현금성 자산을 제외한 순차입금도 10조 원을 넘겼다.
유동성 확보가 시급해진 SK온은 자금 조달 방식을 다각화하는 모습이다. 출범 초기 모회사 대상 유상증자와 상장 전 지분투자 등 자본성 조달에 의존했지만 지난해부턴 회사채 발행 등 부채자본시장(DCM)도 노크하기 시작했다. 최근엔 금리가 높은 기업어음(CP) 발행도 주저하지 않는다.
업계에선 SK온이 흑자전환을 통해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해야 재무 부담을 덜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지난해엔 감가상각전영업이익(EBITDA) 흑자, 올해 상반기엔 영업이익 흑자전환이 가능하리라는 것이 중론이다. 다만 배터리 산업 성장 둔화에 맞춰 투자 속도 조절에 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지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