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호

세 얼굴을 가진 사나이

[고담기담]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입력2024-02-18 09: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Gettyimage]

    [Gettyimage]

    피투성이가 된 채 예조판서 댁 안채 뜰로 들어선 여종 홍련은 자신을 부축해 데려와 준 청지기 할아범을 돌아보며 물었다.

    “예조판서 대감께선 정말 방 안에 계신가요?”

    안쓰러운 표정을 지은 할아범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자네가 아까 대문 앞에서 내게 한 말을 그대로 전해드렸네. 이리로 데려와 기다리게 하라 분부하셨으니 조금 기다려보게.”

    홍련은 늦가을 추위로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둥그렇게 빛나는 달도 그녀의 불안한 마음을 다독여줄 순 없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어찌 잘 설명하면 이 모진 목숨을 지킬 수 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마침내 방문이 열리고 예조판서가 대청마루로 모습을 나타냈다.



    “다들 잠든 깊은 밤에 이 무슨 소란이란 말이냐? 청지기로부터 대충 얘기는 들었다만, 어디 더 자세히 말해 보아라.”

    두 눈을 잔뜩 찌푸리며 호흡을 가다듬은 홍련이 얼굴에 흐르는 피를 소매로 훔치고 입을 뗐다.

    “쇤네는 호조판서이신 노응린 대감 댁의 여종 홍련이라 하옵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홍련을 노려본 예조판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리 말해 두겠다. 함부로 날 속이려 들면 넌 죽는다. 혹시 노응린이 날 떠보려 널 보낸 것이라면 지금 당장 이실직고하고 목숨을 구걸하는 게 좋을 것이야. 난 너 따위에 속는 사람이 아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홍련이 목청을 돋웠다.

    “저희 대감과 예조판서 어르신께서 정적 사이란 걸 쇤네도 잘 압니다. 그래서 이리로 달려온 것입니다. 비록 하찮으나 이 목숨 부지해 보려 이리 달려왔습니다.”

    “그 얘긴 좀 전에 전해 들었다. 호판이 널 죽이려 했다고? 그리 말한 게 맞느냐?”

    “그러하옵니다. 이제 제 목숨줄은 예조판서 대감께서 쥐셨습니다.”

    “노응린 그자가 실성하지 않고서야 왜 너처럼 천한 계집종을 죽이려들었을까? 혹시 네가 알아선 안 될 무슨 비밀이라도 알았기 때문이더냐?”

    크게 고개를 끄덕인 홍련이 간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노 대감님 조카로 근자에 홍문관 요직에 오른 노정환이란 자가 실은 제 남편이었습니다. 그 짐승 같은 자가 제 입을 막으려 노 대감님과 짜고 오늘 절 죽이려들었습니다. 노정환은 얼굴이 세 개인 천하의 사기꾼입니다. 지금부터 쇤네가 알아낸 그 괴물의 정체를 소상히 아뢸 것이오니 부디 놀라지 마시고 들어주소서.”

    괴물의 탄생

    경남 창녕 땅에 살던 선비 유장현은 지독한 가난 탓에 제대로 글공부조차 할 수 없었다. 포부만큼은 야무지고 컸던 그에게 가난은 지옥일 뿐이었다. 그는 지옥으로부터 벗어나보려 이웃 마을 부잣집 딸에게 접근해 마침내 장가들었지만 재물운은 본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장인 장모가 차례로 괴질에 걸려 죽자 욕심 많은 처남이 처가 재산을 독차지해 버린 것이다.

    “내 운명은 이게 전부인가? 이리 보잘것없는 것이던가?”

    변변한 가구 하나 없이 썰렁한 자기 집 안방을 둘러보며 장현이 처량하게 되뇌었다. 미안한 표정을 한 아내가 구석에 누워 잠든 두 딸을 돌아보며 흐느껴 울었다. 장현이 그런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고 속삭였다.

    “이렇게 삶을 낭비만 하고 있을 순 없소. 내 재주는 내가 아오. 한양에 올라가 반드시 성공하고야 말 거요. 그러니 삯바느질이라도 해서 몇 년 버텨줄 수 있겠소? 내 꼭 큰돈 벌어 돌아오리다!”

    큰 고생 모르고 자라며 세상일에 어두웠던 순진한 아내는 남편의 말에 담긴 무서운 속셈을 눈치챌 수 없었다. 그녀는 남편의 허황한 말을 철썩같이 믿고 친정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금붙이를 노잣돈으로 내놓았다.

    장현의 한양살이는 녹록지 않았다. 돈이 많이 돈다는 시전 주변을 맴돌아봤지만, 시골에서 막 상경한 몰락 양반에게 기회가 쉬이 찾아올 리 만무했다. 그는 한양 여곽을 이리저리 떠돌며 아내가 준 돈을 야금야금 탕진했고, 마침내 몸을 써서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삯꾼이 됐다.

    남한강을 따라 한양으로 올라오는 삼남의 채소를 왕십리에서 받아 성내로 옮기는 일을 하던 장현은 차라리 상놈 행세를 하는 게 유리하다는 걸 깨닫자 아예 신분을 바꿔버렸다. 그렇게 그는 성도 없는 떡쇠가 됐다. 떡쇠는 한양 하층민의 노련한 삶의 기술을 온몸으로 익히며 점점 더 영악해졌고 장터에서 난무하는 야바위에도 정통하게 됐다. 남을 속이는 게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걸 깨달은 그는 판을 키워보기로 했다.

    장현은 한양에서 촉망받는 신임 문관들 가운데 성격 호탕한 자를 물색했다. 자신이 넝쿨이 돼 타고 오를 나무라면 되도록 높이 자랄 재목이어야만 했다. 그렇게 선택된 자가 사헌부 지평이던 노응린이었다. 떡쇠는 서북도에서 내려온 뜨내기로 신분을 위장하고 응린의 집 하인으로 들어갔다.

    하인 생활 역시 쉽지 않았다. 고된 노역으로 지친 몸을 추스르기도 바쁜 판국에 응린에게 접근할 꾀를 내기란 아예 불가능했다. 그런 그에게 홍련이란 계집종이 눈에 들어왔다. 응린의 처를 수발하던 홍련은 몸종치곤 꽤 영리하고 일솜씨 또한 빈틈이 없어 주인 내외에겐 물론이고 노복들 사이에서도 칭찬이 자자했다.

    “날 연모한단 말인가? 떡쇠 넌 인물도 제법 좋고, 또 언뜻 듣자 하니 서북도에선 한때 양반 신분이었다던데?”

    의심 가득한 표정이 된 홍련은 떡쇠의 첫 고백에는 눈도 끔쩍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이리저리 구슬리며 비위를 맞추던 떡쇠는 어느 날 저녁 이렇게 말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천애 고아로 살아온 나야. 양반 뭐 그런 게 밥 먹여주진 않더군. 오직 내 힘으로 죽지 않고 여기까지 왔어. 홍련아! 너도 혼기를 지나친 지 오래고 나 역시 홀몸으로 이 세상이 외로워. 함께 지혜를 모아 큰 재산 이뤄 떵떵거리며 살아보지 않으련?”

    말재주 하나는 기가 막혔던 떡쇠의 감언이설에 마침내 홍련의 마음도 움직였다. 둘은 지평 내외의 도움으로 혼인해 바깥채 방 한 칸을 얻어 살림을 차렸다.

    야심가의 본심

    신혼 기간이 저물어갈 무렵, 자식을 간절히 원하는 홍련에게 떡쇠는 이런 말로 응수하곤 했다.

    “돈이 없으면 자식도 원수가 돼. 우선 재물을 모아 살 집을 구하자. 요즘이야 돈만 많으면 양반도 부리면서 살 수 있는 세상 아냐? 좋은 꾀를 내야 해.”

    홍련은 남편이 말하는 좋은 꾀가 무얼까 늘 궁금했지만 선뜻 물어보진 못했다. 떡쇠는 깊은 잠이 들지 못해 새벽녘이면 홀로 일어나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는데, 아마 그 꾀란 걸 내는 중이려니 여길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무슨 결심을 했는지 떡쇠가 홍련에게 넌지시 말을 붙여왔다.

    “임자! 아무래도 우리 힘만으론 가난을 벗어나기 힘들겠어. 노응린을 움직여야 할 것 같아.”

    주인님 이름을 함부로 올리는 남편의 불경한 말투에 더럭 겁이 난 홍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만 보자 떡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본시 꿈이 큰 사람이야. 임자가 지평 아내를 통해 내가 지평과 독대할 수 있도록 주선하면 안 될까? 일단 그와 마주하면 일은 반은 성공이야.”

    “안방마님을 곁에서 모시니 말을 넣어볼 순 있겠어. 하지만 당신이 무슨 말을 올리려는지 알기는 해야 입이라도 떼지.”

    평소와 달리 눈빛이 날카로워진 떡쇠가 힘주어 대답했다.

    “지평에게 평안도관찰사로 나가라고 조언할 셈이야.”

    “사헌부 지평이란 좋은 내직을 놔두고 험지인 서북면 외직으로 나가시라고? 가당키나 한 소리를 해.”

    “임자는 요즘 정세를 잘 몰라서 그래. 다 생각이 있으니 일단 지평 아내를 움직여봐. 어차피 언젠가 한 번은 크게 한판 걸어야 해. 지평 어깨를 딛고 더 높이 오를 거야. 임자는 정경부인이 될 거고. 선뜻 믿기지 않겠지만 속는 셈치고 날 한 번만 믿어줘.”

    남편의 허무맹랑한 말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홍련은 연이은 성화에 못 이겨 지평 아내에게 자신의 뜻을 살짝 풀어놓았다. 지평의 아내는 자기를 대신해 어려운 일을 척척 해내는 홍련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할 수 없었기에 지평이 기분 좋아진 틈을 타 이 엉뚱한 제안을 끝내 성사시키고야 말았다.

    평안도의 대성공

    첫 독대에서 떡쇠의 제안을 묵묵히 듣고만 있던 응린은 한참을 방바닥만 쳐다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당파 싸움에서 우리 당이 불리하다? 그러니 우선 외직인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저들의 공세를 잠시 피하라 그 말 아니더냐?”

    고개를 크게 끄덕인 떡쇠가 마른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사헌부는 위엄 넘치는 힘이 센 조직이오나 그만큼 위험한 곳이기도 합니다. 당이 수세에 몰리면 누가 제일 먼저 희생되겠습니까? 바른말 많이 하고 사람들 약점을 두루 틀어쥔 지평 어르신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관찰사 품계는 지평보다 훨씬 높습니다. 다들 기피하는 곳에서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신다면 출세는 보장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떡쇠를 지긋이 노려보던 응린이 다시 물었다.

    “나처럼 내직에만 있던 관원이 민심 험악한 서북도에서 어찌 큰 공을 세울 수 있느냐?”

    “그건 쇤네에게 맡겨주십시오. 어려서부터 장바닥에서 구르며 재물 굴리는 데엔 도가 텄습니다. 평안도엔 군자금이 풍부하게 보급되지 않습니까? 그걸 잘만 운용한다면 몇 배의 재물로 불릴 수 있고, 또 그걸 기반으로 인심도 얻고 또 조정에 널리 덕을 베풀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나보고 관가의 자금을 편취해 뇌물로 쓰라는 말이더냐?”

    “그게 아니오라, 길게 보시고 적도 동지로 만들어두시란 뜻입니다. 큰일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작은 의리로 나라의 큰 이익을 저버린다면 그건 일개 필부가 아닐까 합니다.”

    잔뜩 두 주먹을 움켜줬던 응린이 표정을 느긋하게 풀며 물었다.

    “너 누구냐?”

    “네? 무슨 말씀이신지?”

    “누구냐고 물었다. 네놈 말이다. 천출이 아니라 본디 양반이었다던데? 조정 소식은 어찌 그리 잘 알며, 무엇보다 그 음흉한 책사 기질로 너 자신은 끝내 무얼 얻으려 하느냐?”

    한 호흡 길게 내쉰 떡쇠가 자신의 본명과 살아온 내력을 길게 진술하고 한 마디 덧붙였다.

    “선비 유장현의 삶을 저버리고 제가 끝내 얻으려 하는 것, 그건 바로 돈입니다!”

    “돈? 돈이라고? 그저 돈이란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이놈에게는 오직 돈만이 필요합니다. 돈에 굶주리며 살아왔기에 돈에 한이 맺힌 놈입니다. 훗날 홍련이를 데리고 정실 아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 고대광실 짓고 떵떵거리며 살다 죽고자 합니다. 그거면 됩니다.”

    입가의 웃음기를 감추며 응린이 천천히 입을 뗐다.

    “알았다. 앞으로 자주 독대하자꾸나. 그런데 홍련이는 네가 유부남인 걸 모를 텐데, 앞으로 어찌 감당하려고?”

    “그건 평안도에서 성공하고 난 뒤 걱정하려 합니다. 나리와 전 이제 같은 운명에 올라탔습니다. 오직 나리를 정승으로 만드는 일에만 열중하려 합니다. 나머지 일은 하늘에 맡겨둬도 좋겠습니다.”

    그날 독대에서 떡쇠는 지평의 숨겨진 어떤 마음을 흡족히 만족시켰고 마침내 평안도행을 결심하게 이끌었다. 이후 관찰사가 된 응린은 변방 관무에 그리 신통치 않은 성과를 냈지만, 재정 업무를 담당한 떡쇠의 비밀 사업만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감영의 공식 회계사들을 몰아낸 떡쇠는 온갖 이권 사업에 공금을 투자해 재물을 몇 배로 불렸다. 불어난 이익의 반은 평안도 국방비와 백성 구휼에 써서 인심을 얻었으며, 나머지는 한양 조정에 뿌려 노응린이란 이름 석 자를 조야에 널리 알렸다. 응린의 대궐 요직 복귀는 시간문제였다.

    위험한 계약

    한양 조정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응린은 떡쇠의 조언에 따라 호조에서 경력을 쌓아 올렸다. 평안도에서 부리던 금융 기술을 한양에서도 마음껏 발휘한 떡쇠는 마침내 응린을 호조판서 반열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눈부신 성공 가도를 달리던 응린은 이제 떡쇠와 결별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내 이제 약속한 대로 네게 거금을 주려 한다. 홍련이를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천수를 누리며 잘 살거라. 기다리는 가족들도 생각해야지. 네 은공은 죽을 때까지 잊지 않으마.”

    늦은 밤 처소에서 떡쇠를 마주한 응린이 이렇게 말할 때만 해도 그는 상대가 자신에 버금갈 만만찮은 탐욕의 화신이자 찰거머리 같은 집착의 소유자란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능글능글한 미소를 띤 떡쇠가 대답했다.

    “그건 합당한 계산이 아니지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나리께서 제게 주신단 그 돈 말입니다. 그건 평안도에서 제가 이룬 성과에 대한 보수 아니겠습니까? 한양에 돌아오셔서 이제 호조판서에 오르셨습니다. 그게 또 누구 공입니까? 그에 대한 보수는 별도로 계산해 주셔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떡쇠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응린이 거친 쇳소리로 물었다.

    “얼마를 원하느냐? 5만 냥이 부족하다면 내 나중에 더 얹어주마. 한데 넌 날 정승으로 만들어준다 하지 않았더냐? 그 목표를 아직 이루지 않았거늘, 자꾸 뭘 더 요구하는 게 부끄럽지도 않으냐? 심보가 조금 고약하구나.”

    팔짱을 낀 떡쇠가 천장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그러게 약속엔 반드시 계약 문서가 필요한 법입니다. 정승 만들어드린단 건 제 마음이었고, 성공의 계단마다 각기 다른 성공보수가 있는 게 세상사 당연한 이치 아니겠습니까? 원하신다면 정승까지 만들어드리리다! 그러니 계약을 여기서 확실히 해뒀으면 합니다만.”

    “무슨 계약 말이더냐? 10만 냥을 원하느냐?”

    “돈은 됐습니다. 까짓 돈이야 지위를 따라 저절로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리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

    “뭐라? 자리를? 상것 주제에 무슨 자리를 원한단 말이더냐?”

    몸을 살짝 앞으로 구부린 떡쇠가 미묘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이래 봬도 저 양반이올시다. 나리 집안 족보에 절 올려주십시오. 조카 하나 만들어내는 건 호조에서 일도 아닙니다. 제가 직접 나서도 되고요. 아무튼 나리와 혈연으로 얽혀 죽을 때까지 보필해 드리지요. 그리 되면 우리 사이의 비밀도 무덤까지 지켜지지 않겠습니까?”

    낭패를 본 표정의 응린이 허탈하게 웃었다. 벌떡 일어선 떡쇠가 방문을 열며 속삭였다.

    “아, 그리고 과거는 나리가 조금만 힘을 보태주시면, 뭐 제힘으로 통과하겠습니다. 기본기는 닦아놨으니 집안 뒷배만 있다면, 까짓거 당장 내년에라도 급제해 대궐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든든한 조카 하나 얻었다 여겨주십시오.”

    떡쇠가 문을 드르륵 여는 순간 대청마루를 급히 벗어난 그림자 하나가 쏜살같이 멀어지고 있었다. 떡쇠는 그게 응린의 아내일 거라 여기고 가볍게 웃어넘겼다.

    홍련의 번민

    [Gettyimage]

    [Gettyimage]

    홍련의 이야기를 다 들은 예조판서의 얼굴이 삼엄한 긴장으로 떨렸다. 그가 물었다.

    “그날 밤 노응린과 네 남편이 나눈 대화를 다 엿들었다고?”

    고개를 끄덕인 홍련이 울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네! 남편은 그게 안방마님인 줄 알고 안심했지만 실은 쇤네였습니다. 전 그저 남편이 큰돈을 모아 한양 외곽에 근사한 살림집을 지을 줄로만 알고 있었나이다. 평양에서 돌아온 후로 사람이 조금 바뀌어 의아했으나, 애써 외면하며 살던 참이었습니다. 그이는 표정부터 무섭게 바뀌기 시작했거든요.”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하던 예조판서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넌 어찌 대처했느냐? 다른 누군가한테 이 사실을 알렸느냐?”

    고개를 가로저은 홍련이 잦아드는 목소리로 힘겹게 대답했다.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남편은 노 대감님 부부가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며 거의 매일 밤을 뜬눈으로 새우기 일쑤였나이다. 낮에 잠시 선잠이 들었는데 그땐 쇤네가 곁을 지켜야 했습니다. 지옥이 따로 없었나이다. 남편이 유부남란 걸 안 후부터 그 사람이 정말 무서워졌는데, 이를 또 잘못 발설했다간 노 대감님 손에 저까지 죽어나갈 판이었습니다. 오로지 어찌하면 살 수 있을까 홀로 고민하고 또 했지요.”

    “비밀을 끝까지 지켰다?”

    “그 수밖엔 없었나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행동했습니다. 그래야 남편은 죽더라도 저만은 살길이 실낱같이 보였으니까요. 그러다 결국 떡쇠가 이기더군요. 집요하고 끈질기게 노 대감님을 협박하더니 기어이 노 씨 집안 족보에 이름을 올리더이다.”

    “그자가 노정환이가 됐다? 지금 홍문관에 있고?”

    “네! 과거급제까지 일사천리로 해치우더니 급기야 그 높은 자리까지 타고 오르더이다.”

    “그렇구나. 다른 노복들은 몰라도 너만은 살려둘 수 없었겠구나? 그렇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구나, 너무 많이.”

    예조판서의 말투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낀 홍련이 흠칫 몸을 움츠리며 입을 뗐다.

    “몇 년만 입 다물고 있으면 쇤네도 양반 족보에 올려 정경부인 만들어주겠다 하더이다. 그 입에 발린 말, 어디 그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떡쇠, 아니 노정환 그자는 명례방에 따로 집을 얻어 나간 뒤로 절 다시 찾은 적이 없습니다. 노 대감님 부부는 제 주변에 머슴 둘을 붙여 철저히 감시했고요. 이미 죽은 목숨인 셈이지요.”

    고개를 끄덕인 예조판서가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속삭였다.

    “그래도 용케 오래 버텼구나? 노응린이 좀 모질지 못한 위인이긴 하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홍련이 재차 하소연했다.

    “부디 이년을 살려주십시오! 잠자는 사람을 거적에 말아 두들겨 패는 걸 간신히 뿌리치고 이리 달려왔나이다. 오직 여기가 제 살 곳임을 알기에 죽기 살기로 왔나이다.”

    “그래, 그래. 잘 알겠다. 네가 영리해 노응린을 제일 미워하는 내 집을 알아뒀구나. 용하다, 아주 용해!”

    예조판서가 혀를 끌끌 차고 있을 때 홍련의 등 뒤로 누군가 살며시 다가왔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해 예조판서 집에서도 도주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홍련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가 놀라 입을 막으며 벌떡 일어섰다. 그런 그녀를 밀어 쓰러뜨린 노정환이 음산하게 말했다.

    “어찌 찾아도 죽을 자리만 찾누? 한심하긴!”

    아무도 모르는 죽음

    예조판서 집 후미진 광에 갇힌 홍련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전날 노정환의 정체를 발고하기 위해 의금부 위치를 확인하고 돌아왔을 때, 잠자리가 유난히 두려워 부엌칼을 손에 쥐고 잠들었던 게 신의 한 수였다.

    그녀를 거적으로 만 노 대감 집 머슴들은 다짜고짜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녀는 혼신을 다해 외쳤다.

    “이보시게들! 여기서 사람을 이리 죽이지 말고 고통 없이 죽여주시게! 제발! 칼을 써서 죽여주시게!”

    큰소리 나는 게 꺼려졌는지 머슴들은 거적을 풀고 낫을 가져왔다. 그 작은 빈틈에 부엌칼을 마구 휘두른 홍련은 어찌어찌 대문을 벗어나 의금부를 향해 뛰었다. 그렇게 한참을 뛰다 길을 잃었고, 문뜩 의금부에도 노 대감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당파에 대해선 잘 몰랐지만 노응린의 적수가 예조판서임은 남편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평소 알고 있던 예조판서 댁을 향해 무작정 내달렸던 것이다.

    광의 문이 살짝 열리고 노정환의 얼굴이 빠끔히 나타났다. 그가 몸은 밖에 두고 얼굴만 들이민 채 말했다.

    “부부의 의리가 있어 얘기해 주는 건데, 넌 여기서 이따 목을 맬 거야. 한 많은 인생 끝내는 거지. 뭐 너무 슬퍼하진 마. 나 같은 사람하고 한번 살아봤잖아? 나 노정환과 살을 맞대고 살 수 있었던 자는 행운아야. 왜인 줄 알아? 내가 곧 노응린을 역적으로 조정에 고변할 거거든. 평안도 관병을 멋대로 동원하고 공금을 횡령한 증거는 차고도 넘쳐! 그걸 내가 틀어쥐고 있어. 예조판서? 아직 몰랐어? 그는 내 편이야. 당파를 갈아탔지. 어차피 노응린 집안은 삼족의 씨가 마를 거야. 정난공신이 될 이 노정환이가 집안을 계승해 잘 가꿀 거야.”

    *이 작품은 조선 후기 문인 안석경의 야담집 ‘삽교만록’ 속 일부를 모티프로 창작됐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外




    고담기담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