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도 학원처럼 수요 맞춰 최적화 필요
학령인구 줄지만, 고등교육 수요 늘어
실무·연구 투 트랙 대학 발전 이끌어야
예산 투입보다 규제 혁파가 지방대학 살릴 방안
대학이라는 작은 사회로 지방혁신 실험도 가능
전남 광양시 광양보건대 안경광학과 폐과로 텅 빈 강의실에 2016년 시험문제지가 책상 위에 놓여 있다. [동아DB]
학생들이 더는 이상 대학 진학의 꿈을 꾸지 않는다. 대학이 이제 윤택한 삶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에는 대학 졸업장이 취업을 책임졌다. 입시와 재학 기간 내 돈과 시간을 들여 졸업장을 따내면 당장 돈 벌고 경력 쌓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젠 대학 졸업장만으로는 더 나은 삶은커녕 취업도 어렵다.
취업이 보장된 학과에만 사람이 몰린다. 의대가 대표적이다. 서울대에 합격하고도 지방 의대로 진학하는 학생이 많다. 지난해 12월 29일 종로학원 집계에 따르면 수시모집에서 서울대에 합격하고도 등록하지 않은 학생의 비율은 10.5%로 2022년(9.4%)에 비해 다소 늘었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서울대가 자연계열을 중심으로 미등록 인원이 지난해보다 늘어난 건 다른 대학 의대로 빠져나가는 최상위권 인원이 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지방대학의 상황은 더 절박하다. 학령인구도 줄어드는데, 대학 서열화 문화는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 좋은 대학이 아니라면 굳이 갈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더 커지고 있다. 지원금이라도 받기 위해 정원을 채워야 하지만 그마저 어렵다. 대학 홍보물에는 ‘취업률 1위’라든지, ‘글로벌 인재’ 같은 슬로건이 전면 배치되고 있다. 학생들에게는 전혀 와닿지 않는 허울뿐인 구호다.
지금이라도 대학이 변해야 한다. 대학이 제공하는 상품이 뚜렷한 교육 사업이 돼야 한다. 정부 지원금에 의존적 구조가 아니라, 자체 사업 모델로 투자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목적에 따라 대학 체질 바꿔야
대학은 문 닫을 위기에 처했지만 고등교육 수요는 어느 때보다 늘고 있다. 유튜브 등의 뉴미디어 매체에서는 대학 강의에 준하는 콘텐츠가 인기를 끌고 있다. 경제·역사·인문학 강의는 물론 의학·양자역학·뇌과학 등 전문 과학 분야 콘텐츠도 수십만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관심이 한 편의 영상 시청에 그치지 않는 사례도 많다. 아예 강의를 찾는 사람도 많다.그래서인지 관심사에 대해 자유롭게 강의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클래스101’이나, 실제 대학 강의를 무료로 제공하는 ‘KOCW’ 같은 플랫폼의 사용자도 크게 늘고 있다. 아예 커리어 전환을 바라고 대학원 진학을 검토하는 경우도 있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원하는 분야엔 학위 과정이 없거나 제대로 된 교육을 하는 곳이 적기 때문이다. 원하는 걸 배우는 데 내는 돈을 아끼지 않는 시대가 왔지만, ‘제대로’ 배울 곳을 찾긴 어려운 실정이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에는 기회다. 대학이 이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가르쳐줄 수 있다면 충분히 자생이 가능한 상황이다. 이를 위해서는 대학의 목적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 작금 대학에 가장 필요한 덕목은 ‘최적화(Optimization)’다. 실무 중심의 교육 기능을 갖춘 대학과, 연구 중심의 대학이 명확히 구분돼야 한다.
교육 중심의 대학은 실무 위주의 교육을 담당한다. 당장 현업에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내용 위주로 가르쳐 인력 공백을 메운다. 이를 위해서는 교수진을 바꿔야 한다. 관련 학위를 가진 학자보다 현업에 종사하는 베테랑을 채용해야 한다. 현장 중심의 현직자 특강이 인기를 끄는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 최전선의 현직자가 신입 사원을 교육하듯 한 학기 동안 짜임새 있게 수업을 진행한다고 생각해 보자. 기업에서도 졸업자를 교육 비용 부담 없이 채용할 수 있게 된다.
연구 중심 대학은 연구를 중심으로 학제를 운영한다. 연구진과 연구 성과를 홍보 전면에 내세워서 학부 과정부터 연속성 있게 원하는 연구자 진로에 진입할 수 있어야 한다. 학부가 아니라 대학원까지 생각하고 입학할 수 있도록 커리큘럼을 다듬어야 한다. 연구진을 꿈꾸는 학생들이 입학하는 만큼 최전선에 있는 연구진의 강의가 이들에게 도움이 된다.
지방 발전의 시작은 대학 혁신부터
대학 구조가 바뀌면 사설 학원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유능한 교수진과 교직원부터 시설과 브랜드까지, 모든 면에서 학원을 압도한다. 다만 지식의 상아탑이라는 이름과 관련 규제에 묶여 있었을 뿐이다. 편견과 규제가 사라진다면 스타 교수 영입, 필수 재학 기간 단축, 자율 커리큘럼, 해외 대학 연계 수강, 공동 학위 수여 등 다양한 발상이 가능하다. 네트워크 기반 ‘멤버십’ 서비스 강화로 이른바 ‘잘 밀어주는 학교’가 된다든지, 아예 ‘저렴한 등록금’을 내세울 수도 있다.이러한 구상에 교육 서비스의 수요자인 학생이 참여할 수 있는 것도 대학의 강점이다. 대학은 특이하게 소비자인 학생이 공급자인 학교를 위해 일한다. 그만큼 학교에 대한 애정이 커서다. 실제로 학생이 만든 슬로건이나 학교 마크, 캐릭터 등을 사용하는 학교가 종종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학생의 눈에서 바라본 학교 발전 방안도 수집하자. 다만 학생이란 이유로 ‘열정페이’는 금물이다. 반드시 제값을 치러야 한다. 학교 발전 방안 수립이 학생의 경력이 될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좋다.
이 과정에서 ‘학생회’도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다. 학생회는 그동안 이념과 정치 구호에 경도돼 있다는 인식이 강했지만, 최근에는 인식이 달라졌다. 지금은 학교와 학생 사이를 잇는 가교 구실을 하고 있다. 대학 개혁에 학생들도 적극 참여한다면 학생회의 역량이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과거 학생회와는 반대로 학생의 이익을 위해 도리어 정치권을 활용할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지방대학의 역량이 커진다면 수도권 과밀화 해결의 실마리도 찾을 수 있다. 대학 주변에 상권이 생기고, 창업 중심 대학이 생겨 스타트업 단지가 생긴다면 지역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교육 당국과 지방자치단체는 이러한 혁신 논의의 장을 만들어줘야 한다. 이미 대학은 변화에 나섰다. ‘글로컬대학’ 사업 등은 가치가 분명한 시도다. 한 대학은 ‘우주항공·방산 분야’를 선도해 인력을 유치하겠다는 포부를 보였다. 5개 단과대 폐지, 인근 2개 대학과 통합 후 서울대와 학제 교류하겠다는 혁신안을 내세운 곳도 있다. 계기가 없었다면 구상도 집행도 불가능했을 내용이다.
한편에선 ‘비상 대학’ 간 연계 체계 구축도 필요하다. 청사진과 이상을 논하기엔, 의지가 있더라도 당장의 사정이 급급한 대학도 있기 때문이다. 교수 충원이 어려운 학교의 학생에게 인근 학교 강의 수강을 연계해 주고 비용을 분담하는 등의 방안을 구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서로 권한과 역량을 공유한다면, 갑작스러운 변화로 인한 구성원의 권익 침해와 사회적비용을 덜어낼 수 있다.
대학을 ‘작은 사회’라고도 한다. 교수, 교직원은 물론 학생까지 다양한 세대와 분야가 한데 어우러져 있어서 이 같은 별명이 붙었다고 생각한다. 작은 사회인 대학을 제대로 개혁해 낸다면 한국 사회를 둘러싼 세대 갈등, 지역 균형 성장 등 다양한 문제 해결의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태일
● 1993년 출생
● 한국외대 국제학부 졸업
● 前 신전대협(신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
● 現 국가교육위원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