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돌보는 선생님이자 말벗
세 명의 한의사, 한 명의 간호사
“다리가 계속 아프고 저렸는데…”
이번이 9번째다. ‘온기를 전하는 한의사들(이하 온전한)’은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을 찾는다. 진료도 진료지만, 그들은 이곳에 사는 주민들에게 어떻게 사는지, 어쩌다 아팠는지 묻는다. 누워만 있지 말고 자주 걸으라며 단호하게도 말했다. 임석현, 최일훈, 송은성 한의사는 창신동 주민들을 돌보는 선생님이자 말벗이다.
어느 토요일 오전
온기를 전하는 한의사들(이하 온전한)’의 구성원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최일훈, 임석현, 송은성, 김현기. [정채린]
침 치료를 받고 효과를 본 주민이 옆방 주민에게 추천하기도 했다. 김 간호사는 “월 1회 방문이지만, 주민들이 많이 반겨준다”면서 “(다만) 침을 맞아야 낫는다고 권유해도 통증에 예민한 분들은 안 맞으려고 한다”고 했다.
임 한의사는 주민 진료를 위해 의료진이 더 필요하다고 느껴 학회에서 만난 최일훈, 송은성 한의사와 의기투합했다. 이렇게 한의사 셋이 모여 지금의 ‘온전한’이 꾸려졌다. 한의사 셋의 신분은 현재 모두 공중보건의다. 창신동에 모일 때 말고는 의료취약지역에서 주민들을 만난다. 이들은 매달 약속한 주 토요일에 창신동 쪽방상담소로 모인다.
2023년 10월 14일 토요일 오전 10시. ‘온전한’ 구성원들은 상담소를 나와 계속해 큰길에서 좁은 길로 걸었다. ‘종로44길’ 이정표가 공간을 안내했다. 벽 곳곳에는 ‘방 있습니다’라고 적힌 빛바랜 종이가 붙어 있다. 마침내 사람 한 명이 서 있을 만한 폭의 길이 되자, ‘온전한’의 구성원들은 걸음을 멈췄다.
길 왼편 작은 문을 최일훈 한의사가 열었다. “안녕하세요, 한의사들입니다.” 그 뒤로 송은성, 임석현 한의사와 김현기 간호사가 따랐다. 복도 왼편의 방문 2개가 차례로 열리며, 주민 두 명이 ‘온전한’을 반겼다. 첫 번째 방에 최 한의사, 두 번째 방에 임 한의사가 들어갔다. “잘 계셨어요?” 최 한의사가 주민 김모 씨와 반갑게 인사했다. 이내 허리, 다리, 목을 차례로 천천히 주물렀다. 침을 놓을 준비를 하자, 김모 씨가 천천히 엎드렸다. “와, 시원하다.” 어떤 질문에도 묵묵부답하던 김모 씨가 따끔한 침 한 방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한의학에서 침이 가진 의미는 크다. 가늘고 뾰족한 침이 신체 내부의 신경과 조직을 자극해 통증과 염증을 완화하고 혈액순환을 도와 신체의 재생을 촉진한다. 침을 통한 신경 자극은 인체 멀리, 뇌까지도 전달될 수 있어 내과와 외과의 여러 질환을 치료할 수 있다. 또 넓은 공간이나 특별한 의료기기가 필요하지 않으므로 침은 쪽방 방문 진료에 최적화된 도구다.
바로 옆방에서 임석현 한의사가 진료 중이었다. 이번에 3번째로 침을 맞는 주민 한기범 씨는 이곳에서 2년을 살았다. 교통사고로 무릎을 다쳐 다리가 불편한 상태였기에 이동과 외출이 편리한 1층으로 거주지를 마련했다. 임 한의사는 침을 빼고, ‘두둑’ 소리가 날 때까지 기범 씨의 어깨를 꾹 누르다가, 어느새 하체 쪽으로 내려와 무릎을 살살 돌려가며 근육을 풀어줬다. 이는 흔히 아는 안마와 비슷한 ‘추나요법’이다. “다리가 계속 아프고 저렸는데, 이렇게 찾아와서 만져주고 풀어주니까 너무 시원하지요.” 한기범 씨가 말했다.
“등이 쑤셨는디, 고마워”
임석현 한의사가 주민 한기범 씨의 어깨에서 침을 뽑고 있다. [정채린]
김현기 간호사는 1층과 2층을 바쁘게 돌아다니며, 진료 중인 각 방에 폐기물과 쓰레기를 처리할 플라스틱 통을 건넸다. 그런 와중에 침 치료를 받지 않는 주민들의 방문도 두드리며 파스와 간식거리를 나눠줬다. “등이 쑤셨는디, 고마워.” 파스를 받아 든 주민이 말했다.
네 사람은 첫 번째 건물을 빠져나와 바로 옆 건물로 향했다. 주민 이모 씨는 척추를 따라 다리까지 통증이 있었다. 임석현 한의사는 엎드린 이모 씨의 상의를 살짝 걷어 올렸다. 그러고는 등에서부터 왼편 다리까지 죽 침을 놓았다. 이모 씨가 말했다. “침을 계속 맞으니까 아픈 게 많이 나아졌어.”
김현기 간호사는 주민들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상담소 앞 감나무 아래에 고구마 네 봉지 놔뒀으니까 가져가세요.” 주민들의 식사도 챙겼다. 쪽방촌 주민 대부분은 즉석밥, 통조림, 컵라면 등으로 끼니를 때운다. 쪽방 상담소는 제대로 된 요리나 양질의 간식을 먹기 어려운 주민들의 사정을 고려해 식사와 간식을 종종 마련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여인숙이었다. 주민 이종필 씨는 별다른 지병은 없지만, 답답하고 찌뿌둥한 정도로 가끔 머리가 아팠다. 스트레스 및 신경성 두통이었다. 송은성 한의사는 이종필 씨의 머리에 촘촘하게 침 여러 개를 놓았다. “노동 안 하면 운동, 운동 안 하면 노동이에요.” 이종필 씨가 말했다. 이 씨는 막노동 일을 하지만 그 외 시간에는 운동을 했다. 꾸준히 몸을 움직인 덕에 이날 만난 주민 중 몸도 마음도 가장 건강했다. 송 한의사는 앞으로도 계속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자주 외출할 것을 거듭 권했다.
최일훈 한의사가 마지막 주민을 만났다. 박모 씨는 척추협착증이 있어 걷기를 어려워했다. 최 한의사는 박모 씨의 척추 사이에 침을 놓고, 바로 뺐다. 보통의 침보다 더 두꺼운 ‘도침(刀針)’이었다. 도침의 끝은 염증으로 들러붙은 부분을 떼어 원래 상태로 회복시킨다. 따라서 제 역할을 마친 도침은 놓자마자 바로 뺄 수 있어 시간 제약이 있는 방문 진료에 유용하다.
여인숙을 떠날 때, 이종필 씨가 말했다. “사람이 오면 위안이 되잖아.” 침을 맞지 않고, 한의사들을 지켜보던 이 씨의 옆방 주민도 말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와.” 한 달에 한 번뿐인 만남이 그들에겐 고마움과 아쉬움으로 남아있었다. ‘온전한’은 주민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안녕히 계세요, 또 올게요.”
임석현 한의사는 환자를 보고 많이 고민하고, 연구했다. 그는 의사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치료받는 사람의 마음이 크게 변화하는 걸 느꼈다고 했다. ‘온전한’은 말의 힘을 알았다. 그들은 주민들의 몸에 침을 놓고 나서 모두 하나같이 행동했다. 몸을 만져주며 대화하고, 마지막에는 꼭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는 인사를 나눴다. 이도희 창신동 쪽방 상담소장은 말했다.
“상호 신뢰가 없으면 주민 방 안에 들어가는 것도 힘든데, 한의사 선생님들이 이런 부분들을 잘 파악하고 지켜주면서 방문 진료를 진행하는 것 같아요.”
구성원들은 앞으로 ‘온전한’을 더 큰 단체로 키워 많은 사람이 봉사에 함께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 골목 속의 더 많은 몸을 돌보고, 마음을 나누기 위해 ‘온전한’은 다음 달에도 창신동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