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월 준비해 12월 창당… 총선서 30석 목표
민주당은 ‘카르텔’도 아냐, 이념은 포장일 뿐
국민의힘은 ‘보수’ 외피 쓴 의원 노린 사람들 모임
尹 보면 협치하겠다던 사람 맞나 싶어
운동권·反한총련·북한인권운동, 그리고 편의점주
한 번도 정치 안 해 본 적 없어, 정당 가입만 처음
제3지대 연합 정당… ‘무한한 헌신’ 결실 볼 때
[+영상] 편의점주 봉달호에서 정당인 곽대중으로
곽대중 새로운선택 대변인. [조영철 기자]
곽 대변인의 삶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한곳의 목적지로 향해 가는 형태는 아니었다. 그는 그 나이대 으레 성취해야 할 것들을 좇는 일반적 인생행로를 따르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대중이 기억하는 그의 모습도 제각각이다. 70년대생은 그를 열혈 주사파 운동권 혹은 전남대 반(反)한총련계 총학생회장으로, 80년대생은 북한인권운동가로, 90년대생은 편의점주 겸 에세이스트 봉달호로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소 복잡해 보이는 곽대중 대변인의 인생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는 1974년 전남 나주군 산표면 등정리에서 태어나 1980년대 광주에서 자랐다. 1989년 고등학교 재학 시절 노태우 정부의 전교조 해직 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전남대 진학 후 1997년 이종권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반한총련 조직위를 구성해 1999년 총학생회장에 당선했다. 대학 졸업 후 상경해 북한인권운동에 투신, 북한민주화네트워크 편집장과 데일리NK 논설실장으로 일했다. 2006년 중국으로 건너가 여러 사업을 하면서 북한 민주화운동에 기여했고, 2012년 귀국해 그때부터 편의점을 운영하며 ‘봉달호’라는 필명으로 에세이를 써왔다. 2023년 6월 금태섭 대표의 제안을 받아 신당 준비에 뛰어들었고, 12월 17일 새로운선택 창당 이후 현재 대변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치인 곽대중의 경력은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현역 정치인에 뒤지지 않을 만큼 분주하게 총선 정국을 헤쳐나가고 있다. 총선을 석 달여 앞둔 지금, 정치인들은 출마와 경선, 공천과 탈락, 탈당과 창당 사이 계산기를 두드리는 일로 정신없다. 제일 중요한 건 누가 뭐래도 정당이다. 특정 정당 안에서 공천이 담보되지 않으면 출마 희망자들의 이합집산이 시작된다. 연초부터 탈당 랠리와 창당 러시가 촉발되는 모양새다.
장은 열리지도 않았는데 물건 팔러 다닌다
지난해 12월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새로운선택 창당대회가 열렸다. 왼쪽부터 이준석 개혁신당 정강정책위원장,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금태섭 공동대표, 조성주 공동대표, 양향자 한국의희망 대표, 류호정 정의당 의원. [뉴시스]
제3정당 가운데 가장 먼저 움직였고, 8개월간 체계적인 과정을 거쳐 창당에 이르렀습니다. 총선을 석 달 앞둔 현재, 준비가 잘됐다고 자평하나요.
“창당 준비를 너무 빨리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장은 열리지도 않았는데 물건 팔러 다닌다며 비아냥거리듯 얘기하는 분도 있었죠. 그게 오히려 의아하더라고요. 그러면 신당은 선거를 바로 앞두고 만들어져야 하나요? 저희는 정말로 정당을 만들고자 했는데, 인식의 차이가 있었죠. 처음부터 쉽지 않은 길이긴 했어요. 현역 정치인은 하나도 없지, 돈도 조직도 없고, 밑바닥부터 쌓아가는 정당이었죠. 지금은 뿌듯해요. 상근 당직자만 20명 정도로 상당한 조직력을 갖췄고, 이런저런 현역의원의 타진도 많이 들어와요. 미리 준비를 안 했다면 대응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기초를 잘 닦았으니 이제 기둥을 잘 세우고, 지붕을 만들고 해나가면 될 거라고 봅니다.”
새로운선택은 ‘합리적 진보와 개혁적 보수가 함께하는 제3지대 연합 정당’을 표방하고 있다. 언뜻 이상적으로 들리지만 좌우로 확연히 나뉜 지금의 대한민국 정당정치 현실에서 표방하는 바가 유권자에게 먹혀들기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제3지대 연합 정당이 이번 총선에서 승산이 있을 걸로 전망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많이 힘들겠죠. 여러 정당이 제3지대 중심 정당을 자처했지만 실패했어요. 다들 그것이 ‘힘들지만 옳은 길’이라는 걸 알아요. 저희에겐 하나의 거대한 도전인 셈이죠. 이런 이유로 장기적 계획을 갖고 시작했어요. 이번 총선을 기점으로 다음 대선까지 내다보고 있죠. 꽃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힘든 건 선거제도 자체가 양당 중심, 승자독식 형태라는 거예요. 지금 양당제가 옳으냐고 물어보면 대다수가 아니라고 답하지만, 자기가 나서서 고쳐보겠다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 측면에서 쉽지 않은 길을 가고 있는 거죠.”
일단 목표는 서울·경기 30석
지난해 12월 18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금태섭(왼쪽 네 번째)·조성주(왼쪽 여섯 번째) 새로운선택 공동대표와 곽대중 대변인(맨 뒷줄 오른쪽 두 번째) 및 당직자 10명이 참배하고 있다. [뉴시스]
새로운선택의 강점은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며 영호남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참신함에 있다. 이 참신함은 한편으론 어느 지역에서도 표를 받기 어려운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새로운선택은 이번 총선에서 30석 확보를 목표로 한다.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에서 30석 확보를 노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일단 준비 기간이 1년밖에 안 됐어요. 언감생심 ‘전국 정당이 되겠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죠. 2000년에 민주노동당이 생겼는데 4년 뒤 17대 총선에서 지역구 2석, 비례 8석 총 10석으로 의회 진출에 성공했어요. 저희는 기존 제3정당들이 겪은 여러 시행착오를 극복하면서 가고 있지만 처음부터 전국 정당이 되기는 힘들다고 봐요. 그래도 가능성 있는 지역은 수도권이고, 100개 지역구에 후보를 낸다면 3분의 1 정도의 승산이 있을 거라 보고 있어요. 그러려면 서울·경기 거의 모든 지역구에 후보를 내야 해서, 그에 맞춰 준비하고 있어요.”
지금 여당이건 야당이건 참신한 인물이 보이지 않는데, 새로운선택은 후보군이 갖춰졌나요.
“사람들이 정치를 안 하려는 경향이 큰 건 사실이에요. 웬만큼 사회적 지위를 가진 분들에게 인재 영입 차원에서 의사를 타진하면 ‘지금 하던 일 잘 할 게요’라고 답해요. 쉽지 않은 일이죠. 그런데 또 나가서 만나다 보면 소중한 사람들이 잡혀요. ‘이런 사람이 숨어 있었다니’ 싶을 정로 괜찮은 분들이 있어요. 곧 공개할 생각인데, 이분들이 열심히 할 수 있게 길을 닦아주고 싶어요.”
새로운선택 조직위에는 전 민주노총 대변인 정호희 사무총장, 전 정의당 대변인 이재랑 공동대변인, 류호정 세 번째 권력 공동대표 등이 있다. 곽 대변인은 정당 가입이 이번이 처음이지만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터라 조직위만 놓고 보면 좌편향됐다고 볼 수 있는 인적 구성이다.
민주당과 정의당 출신이 공동대표인 데다가, 정의당 색채가 있는 이들도 대거 합류해 중도좌파 정당으로 비치는 것 아닌가 싶은데요.
“중도좌파라고 불리지만 사실 국민의힘 출신이 꽤 있어요. 출마 대기자들도 국민의힘 출신이 더 많아요. 당직자 가운데만 없을 뿐이죠. 진보정당에서 합류한 분들도 일을 하면서 대화를 나눠보면 제가 ‘왜 이렇게 우클릭을 많이 했어요?’라고 물어볼 정도로 생각이 열려 있는 분이 많죠. 지금 우리당이 발표하는 정책 공약도 오히려 기존 좌파로부터 욕을 많이 듣고 있어요. 심지어 변절했다는 얘기까지 들으니까요. 어느 한쪽 편이라고 보지 말아줬으면 합니다.”
고쳐 쓸 수 없는 정당
곽 대변인은 지난해까지 월간 ‘신동아’에서 필명을 앞세운 ‘봉달호 칼럼’을 통해 기존 양당을 강하게 비판해 왔다. 특히 반성하지 않는 정치인들을 향해서는 날을 세웠다. 지난 연말에는 자신의 SNS를 통해 1990년대 학생운동 시절 치사 사건에 가담한 강위원·정의찬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특보를 향해 “국회의원이 되는 길 말고는 자신의 과거를 분칠할 다른 방법이 없다”며 “이재명이라는 동아줄을 잘 부여잡았다”고 공개 비판하기도 했다. 일견 그가 민주당에 대단히 염증을 느끼는 듯했다.지난해 7월 새로운선택은 첫 번째 논평을 통해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를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민주당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발전적 해체’라는 표현은 기존 양당이 고쳐 쓸 수 없는 정당이라는 뜻에서 그걸 좀 강하게 말하기 위해 쓴 거예요. 만약 ‘고쳐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쪽으로 입당을 하든, 고치려는 노력을 하든 했겠죠.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민주당은 진보적 스탠스를 취했는데, 20년 가까이 상황이 유지되면서 기존 보수당과 다를 바가 없어졌어요. 또 다른 86세대 기득권 정당이 된 거죠. 윤석열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이념 카르텔’이라는 표현을 했지만 제가 볼 때는 아니에요. 이분들에게 이제 이념은 없어요. 이념은 그들을 포장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에요. 같이 운동했던 세력끼리 세대적 연대성 속에 서로 이익을 봐주고, 의원 한 번 더 연임하고, 누구에게 자리를 하나 더 주고, 이런 카르텔로 가버리면서 도대체 이 정당이 처음에 뭘 하려고 했는지 그 ‘가치’조차 상실해 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곽 대변인은 지난해 4월 국민의힘 민생특위에 외부 인사로 영입돼 석 달 동안 일했다. 보수 여당의 특위 영입 제안을 승낙했던 것은 어떤 변화의 희망이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을까.
“정확히 말하자면 국민의힘 민생특위가 아니라 ‘집권여당의 민생특위’라고 생각했어요. 민주당도 민생특위의 성격과 비슷한 조직인 ‘을지로위원회’가 있지만 이쪽을 택한 건 ‘일하는 특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조수진 위원장 영입 제안에 ‘일 할 수 있나?’ 하나만 물었는데 ‘전권이 있고 성과를 낼 것’이라고 해서 갔죠. 확실히 집권여당 특위라 실천적 측면에서 고민을 하더라고요. 편의점에 붙은 불투명 시트지를 떼고, 자영업자의 건강진단비를 국가에서 지원하도록 하는 등을 실현시켰어요. 제안하면 행정부에서 바로 반응이 오더라고요. 그때 배운 점도 많은데, 실망스러운 것도 많았어요. 대통령 집권 초기다 보니 민생특위와 관련 없는 마약재활센터 방문 같은 걸 하더라고요. 대통령 하명 실현이랄까, 대통령의 코드에 맞추려는 그런 모습에 실망해 석 달 만에 나왔어요.”
지금 국민의힘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특위 회의 몇 번 참여한 것으로 전체를 평가할 수 없지만, 결국 국민의힘은 용산의 집행기구 수준을 못 벗어나는 게 문제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기보다 ‘용산의 뜻이 이러하니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했어요. 국민의힘은 어떤 이념적 동일체가 아니라 ‘의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자 보수라는 외피를 쓴 정당’이라고 봐요. 자기 재산에만 관심 있는 분들이죠. 특히 지난 총선에서 수도권을 다 잃었기 때문에 대다수가 TK, PK 출신이거든요. 공천만 받으면 재선이 보장되는 분들이니 어떻게든 공천권 쥔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데만 급급한 거예요. 회의를 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까’ 하는 게 딱 느껴지더라고요. 문제가 있는 대목이죠.”
한동훈 비대위원장 체제하의 국민의힘은 달라질 거라고 보나요.
“이제 막 시작한 분에게 악담할 수는 없고, 어떤 정당이든 잘됐으면 해요. 첫 행보로 비대위 내부 문제를 도려내고, 노인회를 발 빠르게 방문한 건 잘한 듯해요. 그런데 이미지 쇄신 이외에 실질적 정책을 만들고, 후보를 추려내는 데 용산의 하명을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당을 만들려는 의지를 보여야 성공하지 않을까 싶어요.”
윤석열 정부가 5월 출범 2년을 맞는데, 제3정당으로서 긍정 평가와 부정 평가를 균형 있게 한다면.
“노동, 교육, 연금. 3대 개혁의 큰 틀은 잘 짰어요. 그런데 좀 거칠게 말하자면 그런 큰 계획서는 누구든지 짤 수 있어요. 문제는 이걸 실행하는 능력이죠. 가장 아쉬웠던 건 모든 게 입법 사안이고, 국민의힘은 소수당인데 후보였을 때 ‘협치하겠다’ ‘대통합 정부 만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거예요. 노동개혁 하겠다면서 김문수 같은 사람을 경제사회노동위원장에 임명하고, 유튜브에서 극단적 발언을 한 김채환 같은 사람을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에 앉힙니다. 뭘 하자는 건지 알 수가 없어요. 이재명 대표가 여러 사법 리스크가 있고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어쨌든 형식적으로 제1야당 당수인데 한 번도 만나지 않은 건 입법 의지가 있는지 의심되는 부분이죠.”
소년 곽대중의 가슴을 뛰게 한 것
곽 대변인의 어투는 젠틀한데 곱씹어 보면 말 속에 가시가 깊게 박혀 있다. 다년간 정치 칼럼을 써온 이력 덕이기도 하지만 광주 출신, 그것도 1980년대 광주를 온몸으로 겪은 운동권 출신이라는 과거도 무시 못 할 요인이다. 여섯 살이던 1980년 5월, 비장한 눈빛으로 트럭에 몸을 싣고 광주로 향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학생 의식화 잡지’를 돌려 보며 일찌감치 운동권에 몸담았던 그다. 활동비를 마련하기 위해 신문 배달, 세차 아르바이트 등을 직접 할 정도였으니 어떤 마음으로 가담했을지 짐작 가고도 남는다.그 시절 소년 곽대중의 가슴을 뛰게 만든 건 무엇이었나요.
“지난해 윤석열 퇴진 중고생 집회가 있었어요. 관련 기사 댓글에 ‘중고등학생이 뭘 알고 집회를 하느냐’는 말이 있더라고요. 그 학생들이 30년 전 제 모습이에요. 그 당시에는 고등학생 운동(줄여서 ‘고운’이라고 했단다)이라는 게 좀 많기도 했어요. 계기가 된 건 1989년 노태우 정부 때 전교조에 가입한 1500명의 교사가 일시에 해직된 사건이에요. 그전까지는 저 역시 ‘교사가 노동자야? 교사가 노조를 만들면 교육이 제대로 돼?’ 이런 생각을 했죠. 그렇더라도 교사를 일시에 해직하는 방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이 커서 운동장으로 뛰어나갔어요.”
1989년 5월 전교조 교사들이 일시에 해직된 직후 전국적으로 중고등학생 시위가 번지자 교육부에서 조기 방학을 결정했을 정도로 문제가 심각했다. 여름방학 직후 학생 대부분은 교실로 돌아갔지만, 피 끓는 고등학생 곽대중(1년 일찍 입학한 그는 당시 고교 1학년이었다.)은 끝까지 레지스탕스로 남아 자력갱생으로 고교생 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개인적으로 1980년 5월 민주화운동을 간접적으로 겪은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요. 광주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광주만의 1980년대 느낌 속에서 ‘이 나라가 모순이 가득하고 문제가 많다’는 의식을 자연스럽게 함양한 거죠. 당시 시대가 운동권을 만들었고, 남들보다 조금 빨리 운동을 시작한 정도예요. 제가 무슨 특별한 경로를 거쳤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곽 대변인은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입학 후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또 한 차례 다른 길을 선택한다. 1996년 한총련 연세대 점거 사건, 1997년 5월 전남대 이종권 고문치사 사건, 그해 6월 한양대 이석 치사 사건 등이 연이어 터지면서 전국적으로 대학 내 반한총련 분위기가 형성됐다. 공교롭게도 그해 7월 제대한 곽 대변인은 복학 후 전남대 학생운동 혁신모임에 참여했다. 그리고 1998년 11월 열린 총학생회장 선거에 ‘반한총련계’ 후보로 나서 20여 조직원으로 2000여 운동권 조직원을 꺾고 당선했다.
조직원 수가 100배 차이 나는데 어떻게 당선할 수 있었던 건가요.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던 건 내 키가 커서가 아니라 거인의 어깨에 올라탔기 때문’이라는 뉴턴의 격언과 같은 상황이었죠. 운동권 조직원 2000명이 각자 친구들한테 2표씩만 가져와도 당선되는 건데, 그게 힘들었을 정도로 운동권에 대한 반감, ‘한총련은 변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가 컸던 거예요. 저희가 변화의 열망을 잘 캐치했고, ‘우리가 대안을 던지면 어떤 선거든 이길 수 있다’는 인생의 조그마한 교훈을 얻은 선거였어요.”
북한 주민에 대한 미안함
졸업 후 곽 대변인은 상경했다. 총학생회장 타이틀을 가지고 정치판에 청년 정치인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그러나 주사파 운동권 학생으로서 북한 주민들의 인권 문제를 외면했다는 죄책감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북한 인권문제 해결과 북한 민주화운동을 위해 그는 2000년 북한민주화네트워크를 설립해 편집장으로, 2004년에는 데일리NK 논설실장으로 일하며 국제사회에 북한의 인권탄압 실상을 알렸다.2005년 데일리NK 논설실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모습. [곽대중]
“사실 졸업할 당시에 정치권 영입 제안을 많이 받았어요. 배지를 달려고 했다면 아마 지금쯤 3선 정도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런데 선후배들이 정치권에 뛰어든 걸 보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에 대한 욕심이 안 생기더라고요. 특히 여의도 정치의 길로 갔다가 비참한 결과를 맞는 선배도 많이 봤거든요. 그보다는 저 나름대로 주사파 운동을 하면서 어떻게 보면 독재권력에 헌신하고, 북한 인권 문제가 세계에 알려지는 데 장애물이 됐던 스스로를 반성하며 참혹한 북한 인권 실태를 세계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무모하게 민간인 대북 라디오방송도 했죠. 그런 일을 한 10년 정도 하니까 지치는 면이 있어서, 2006년 중국으로 넘어가 자영업을 하며 6년 정도 살았어요. 거기서도 북한 민주화운동을 하던 분들을 개인적으로 아니까 물심양면으로 도왔는데, 우연한 계기로 2012년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왔어요.”
곽 대변인은 귀국 후 편의점 문을 열었다. 북한 민주화운동과 편의점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었는지 도통 알기 어려웠다. 저출산 고령화, 갈수록 초개인화하는 한국 사회에 적합한 업종이라고 판단한 것일까. 대답은 의외였다.
“아버지가 편의점을 계약했다는 소식을 듣고 말리려고 귀국한 거예요. 그때 광고기획사를 차리려고 법인 등록까지 마친 상태였는데, 동업하는 친구에게 3개월만 말미를 달라고 했어요. 그사이 시스템만 갖춰놓으면 광고기획 사업을 하면서도 편의점을 컨트롤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죠. 큰 착각이었어요. 결국 3개월이 3년이 되고, 6년이 되고, 어느덧 12년이 됐네요.”
곽대중 대변인은 올해로 12년차 편의점주다. 편의점을 소재로 쓴 에세이를 엮어 2018년과 2023년 각각 2권의 책을 펴냈다. [곽대중]
“글 쓰는 일은 숙명이더라고요. 학생운동할 때 유인물과 대자보 초안을 쓰며 처음 글 쓰는 일을 시작했죠. 기관지 편집장을 하면서는 필자 원고료를 줄 돈이 없으니 거의 다 제가 썼고요. 하루, 한 달 쓰는 원고량이 어마어마했어요. 빨리 쓰고 많이 쓰는 건 이골이 났죠. 편의점을 운영하면서는 스쳐 지나가는 일상을 놓치기 아깝더라고요. 사람들한테 따뜻하고 좋은 일상을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에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많이 사랑해 주셔서 책까지 냈어요.”
정치인 곽대중의 꿈
2023년 4월 3일 김기현 당시 국민의힘 대표와 곽대중 민생특위 위원이 서울 국회에서 열린 민생119 임명장 수여식 및 제1차 회의에서 곽 위원의 사인이 담긴 에세이집 ‘셔터를 올리며’를 함께 들어 보이고 있다. [뉴스1]
“정당에 몸을 담지 않았을 뿐, 평생 정치를 했어요. 편의점 칼럼을 쓰면서도 정치적 입장을 밝히며 정치에 기여해 왔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4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버지 친구들이나 상사들을 보면 인생에 꽃이 피는 시기가 50대더라고요. 육체적으로 기력이 남아 있고, 30~40대 인맥들이 정점에 이르는 시기인데 ‘그렇다면 나는 50대에 뭘 할까?’ 하는 질문이 생겼고, ‘세상에 남길 거 하나는 하고 가자’ 싶어졌어요. 20년 뒤 제 손자손녀들이 ‘할아버지는 뭐 했어요?’ 물으면 ‘무슨 당 알지? 그거 할아버지가 같이 만든 정당이야’라고 답하는 걸 인생 목표로 삼고 있어요. 50대 10년은 승부수를 걸어보려 합니다.”
새로운선택이 살아남기 위해선 1석이라도 더 확보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곽 대변인도 출마 계획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당이 결정해 어디에든 출마하라고 하면 할 생각입니다. 원래 살던 곳은 남양주였는데 여의도로 출퇴근에만 4시간을 허비하는 데다 기름값으로 큰돈이 나가 결국 비교적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게 됐어요. 저희 집 지역구가 강서을인데 이사한 지 한달 밖에 안 된 사람이 언감생심 주민들에게 ‘찍어주십시오’ 하고 말하기란 미안한 일이죠. 그래도 당에서 나가라고 하면 나갈 생각이고, 지역구를 바꾸라고 하면 주소지를 옮겨서라도 나갈 생각을 하고 있어요.”
새로운선택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꿈은 무엇인가요.
“새로운선택의 정책1호는 ‘내각제 이행’이에요. 지금의 대통령제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생각해요. 과거에는 ‘대통령을 잘 뽑으면 된다’고 했는데 우리가 그동안 인재가 없었나요? 결국 운전기사의 문제가 아니라 차 자체의 구조 결함 문제거든요. 대통령제가 아닌 의회중심제, 내각책임제로 가야 하죠. 헌법 사항이라 국민투표도 필요하고, 큰 로드맵을 짜야 해요. 그래서 2032년까지 로드맵을 그리고 있어요. 그때가 총선과 대선이 같이 치러지는 황금의 해거든요. 국회의원 특권, 대통령 특권을 동시에 내려놓고 개헌을 통해 의원내각제로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인터뷰하는 내내 곽 대변인은 새로운선택에 대한 애정을 재차 드러냈다. 모든 질문에 대답은 기승전 ‘우리 당’으로 끝났다. 그만큼 곽 대변인이 새 정치에 거는 희망, 당에 들이는 에너지가 차고도 넘쳐흐르는 듯했다.
“저 하나보다는 당이 잘됐으면 좋겠어요. 우리 정치에 새로운 빛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창당을 해보니 이게 정말 ‘무한한 헌신’이 필요하더라고요. 저희 당직자 20여 명은 생업을 내려놓고 정말 새로운 정치 해보겠다는 분들이에요. 우리나라 정당사에 보기 힘든 분들이고, 우리 당이 가진 파워죠. 이분들과 정치를 해나가면 언젠가 결실을 볼 것이라 믿습니다.”
신동아 2월호 표지.
정혜연 차장
grape06@donga.com
2007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 여성동아, 주간동아, 채널A 국제부 등을 거쳐 2022년부터 신동아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금융, 부동산, 재태크, 유통 분야에 관심이 많습니다. 의미있는 기사를 생산하는 기자가 되기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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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치 실종’ 尹, ‘전투 정치’ 野… 현대 정치 심각한 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