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韓 갈등 초래한 김경율 ‘마리 앙투아네트 발언’
‘김건희 죽이기’ 옳지 않지만…
평범하지 않은 평범함이 ‘유죄’인 자리
대중과 멀어진 권력은 대가 치른다
프랑스 화가 마리 루이즈 엘리자베트 비제르브룅이 그린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 [동아DB]
17일 김경율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이 JTBC 유튜브 채널 ‘장르만 여의도’와 인터뷰하면서 한 말이다. “유튜브라는 특성을 이용해서 조금은 어그레시브하게 해도 되나”라고 주저하며 꺼낸 이 발언은 매우 큰 파장을 불러왔다. 더불어민주당뿐 아니라 범(凡)야권이 한몸이 돼 ‘김건희 특검’을 외치고 있는 판에 ‘내부총질’을 했다는 비판이 국민의힘 내에서 제기됐고, 급기야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전면 갈등으로 비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23일 충남 서천 특화시장 화재 현장에서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이 만나는 장면이 연출되면서 당정 갈등은 일단 봉합된 듯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확인됐다. 이번 사건은 이른바 ‘김건희 리스크’를 전면에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물론 그 여파를 현재 시점에서 예측하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한민국 선거의 한 달은 조선왕조 500년에 맞먹는 격변의 시기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과연 ‘억울한 희생자’일까
지난해 12월 12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동물보호재단에서 김건희 여사가 보호 받고 있는 강아지를 쓰다듬고 있다. [뉴스1]
유창선 시사평론가는 후자의 관점을 택하고 있는 듯하다. 23일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마리 앙투아네트를 둘러싼 소문들은 대부분 사실무근이거나 과장된 것들이었다”며 김경율의 발언을 비판했다. 앙투아네트는 그저 ‘평범한 여성’이며 왕비였는데, 혁명의 필요에 의해 악녀가 ‘돼야 했다’는 것.
유 평론가의 발언엔 맥락이 있다. 18세기 프랑스인들이 정치적 필요에 의해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치와 음란의 아이콘으로 만들어버렸듯 21세기 한국에서는 김건희 여사를 향한 비열한 공격이 판을 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의 책 ‘김건희 죽이기’ 64쪽의 한 문단을 인용해 보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얘기는 단지 18세기 프랑스에서만 존재했던 서사는 아니다. 혁명의 과정에서 민중들의 분노를 조장하기 위해 왕비에 관한 온갖 괴소문들을 퍼뜨렸듯이, 2020년대 한국 정치에서도 국민들의 적개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악녀 만들기’가 버젓이 반복됐다.”
프랑스 혁명 당시 아홉 살 아들과 근친상간을 한다는 등 마리 앙투아네트를 겨냥한 악소문은 실로 흉측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듯 그 모든 소문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었지만 ‘민중의 뜻’을 받드는 배심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형을 선고했다. 이와 같이 20대 대선 과정에서 김건희를 대상으로 한 여성혐오, 인신공격, 마타도어는 상식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열린공감TV를 비롯한 친(親)민주당 계열 유튜브와 지지자들은 김 여사가 술집에 나갔던 ‘쥴리’라며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는 분명히 옳지 않은 일이다. 특히 상대적으로 여성 인권 친화적이라고 인식되는 민주당에서 노골적 여성혐오 정치 운동을 하는 모순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김건희 죽이기’는 잘못된 일이다. 여성주의적 관점 이전에 보편적 인권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마녀사냥이자 인간사냥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대상으로 쏟아졌던, 오늘날뿐 아니라 당시 기준으로 보더라도 심각했던 인신공격이 도덕적 정당성을 지니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보편적 인권 개념이 성립하지도 않았던 18세기의 야만이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되풀이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전제하고 상황을 좀 더 인문학적 관점에서 바라보기로 하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과연 ‘억울한 희생자’였을까. 그에게 쏟아진 온갖 비난과 혐오와 저주가 극단적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앙투아네트를 ‘만들어진 악녀’라고만 이야기하는 것을 타당하다고 볼 수 있을까.
평민이라면 겪지 않았을 비극
참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료는 독일의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1881년 태어나 1942년 세상을 떠난 독일어권 최고의 전기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방대한 자료를 섭렵한 후 인물의 내면으로 들어가 전지적 관점에서 서술해내는 필력을 지닌 작가다.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는 그런 그가 오스트리아의 문서 보관서에서 잠자고 있던 편지들을 섭렵한 후 써낸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한 전기소설이다.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이케다 리요코 작(作) 순정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원작이기도 하다.유창선 평론가는 저서에서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의 한 대목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만들어진 악녀’라는 해석을 전개하고 있다.
“진실과 정치가 한 지붕 밑에 사는 일은 드문 법이고, 선동을 목적으로 어떤 인물을 그릴 때에는 정의란 별로 기대할 수 없는 법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기요틴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 어떤 비방도 불사했다. 모든 악덕, 모든 도덕적 타락, 온갖 종류의 풍자가 각종 신문, 팸플릿, 서적을 통해서 마구 이 오스트리아의 창부에게로 전가됐다.”(슈테판 츠바이크, ‘김건희 죽이기’ 63쪽에서 재인용)
이러한 해석론은 인간적이다. 비단 유 평론가뿐 아니라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온정적 시각을 품고 있는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관점이기도 하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희생양론’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문제는 저서의 다른 부분을 보면 위와 같이 저술한 슈테판 츠바이크마저도 희생양론을 전적으로 옳은 견해라고 보진 않았다는 것이다. 츠바이크에 따르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나라를 망친 타락한 음녀가 아니었다. 하지만 츠바이크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혁명에 대해 아무 책임을 질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순수한 역사 속 피해자 또한 아니었음을 분명히 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왜 단두대의 제물이 돼야 했을까. 왜 그들은 부르봉 왕가의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속수무책으로 혁명의 물결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던 것일까. 츠바이크의 해석에 따르면 그들의 문제는 단 하나다. ‘비범한 시대’에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평민처럼 그저 평범한 시대를 만났다면 결혼 생활도 잘 유지해갔을 것이고 그럭저럭 괜찮은 인상을 남겼으리라. 그러나 극적으로 격앙된 시기에 맞서 자신도 내적 변화를 겪고 똑같이 고양된 상태가 돼 대처할 줄을 마리 앙투아네트도 루이도 몰랐다. 그들은 강하고 영웅적인 삶을 살기보다는 품위 있게 죽을 줄밖에 몰랐다. 운명이 다가왔으나 그들은 주인이 돼 그 운명을 지배할 줄 몰랐다.”(‘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116쪽)
여기서 츠바이크가 말하는 ‘평범함’이란 오늘날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를 읽는 독자들의 그것처럼 일상적이고 무해한 무언가가 아니다. 평민 위에 군림하고 그들의 고혈을 빨아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면서도 그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앙시앙 레짐(프랑스혁명 이전 옛 제도)의 일원인 특권층의 관점에서 보는 평범함일 뿐이다.
이렇다보니 계급적 자의식과 정체성을 갖게 된 평민들의 아우성이 빗발치고 있던 와중에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평범한 왕족’처럼 행동할 뿐이었다.
“한 세기의 거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세월 동안 프랑스 국왕의 아내는 자신의 왕국을 헤아려달라는 국민의 여망에 단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었다.”(같은 책, 119쪽)
이들의 ‘평범한 삶’이 국민의 고혈 위에 세워진 사치의 탑이었음은 물론이다. 츠바이크는 그 점을 결코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로코코의 여왕’으로서 ‘근심 없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근심 없고, 낭비가들 중에서도 가장 낭비가 심하고, 멋지고 애교 있는 여자들 사이에서도 가장 사랑스러운 멋쟁이이며 애교 덩어리였다.”(같은 책, 122쪽)
“어린 여왕이 하루 종일 걱정하는 것은 그저 무슨 옷을 입을지, 어떤 머리 모양을 할지, 장신구를 벗지 않고 옷을 갈아입을 수는 없을지 뿐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재정 낭비만을 불러오는 일이 아니었다. 이른바 ‘문고리 권력’을 낳았다. 이처럼 옷이 중요했기 때문에 의상가 마드무아젤 베르탱이 왕비에게 재상보다도 더 큰 위력을 행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같은 책, 123쪽)
그들의 평범한 삶은 평범한 게 아니었다
필자는 이번 원고를 쓰기 위해 오래 전 읽었던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를 다시 보며 감탄했다. 이 책이 희생양론을 담고 있다고 막연하게 기억하고 있었긴 했지만 슈테판 츠바이크의 시각은 그보다 훨씬 더 냉철하면서도 따스했기 때문이다.츠바이크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에게 무조건 온정적 시각을 취하지 않는다. 앞서 잘 살펴보았듯 그들이 누렸던 평범한 삶은 사실 전혀 평범한 게 아니었으며, 그 막대한 풍요와 사치를 누리기 위해 백성들이 고생하는 구체제적 질서가 있었음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관의 무게를 더 빨리 인지하고 현명한 통치자가 됐어야 한다는 탄식이 책장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츠바이크의 시각은 이러한 피상적 차원에서 멈추지 않는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인간적 성숙이 책이 전달하는 진짜 주제인 것이다. 츠바이크에 따르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영민한 두뇌와 아름다운 몸가짐을 지닌, 좋은 통치자가 될 재목이었지만 그 어떤 것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진지하게 배우려 들지 않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본인에게 주어진 사치와 향락의 거품 속에서 살았다. 역사가 격변하면서 그 거품이 꺼지고 남편과 자신의 권력이 위태로워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여왕 노릇을 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미 거세진 혁명의 폭풍 앞에서 그 노력은 부질없이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앙투아네트는) 혁명이 그녀를 이 좁디좁은 로코코의 무대에서 완력으로 거세게 끌어내려 세계사라는 위대한 비극의 무대 위에 올려놓았을 때에야 비로소 운명이 자기에게 영웅적 역할을 맡을 힘과 강한 영혼을 주었는데도, 지난 20년 동안 너무나 보잘것없는 시녀의 역과 살롱 귀부인의 역만을 해왔음을 깨달았다. 뒤늦게 이런 잘못을 깨달았지만 그것은 이미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왕비의 역을 맡는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진정한 모습을 보였다. 연극이 진지한 현실로 바뀌어 사람들이 자기에게서 왕관을 빼앗을 때 비로소 마리 앙투아네트는 진짜 왕비가 된 것이다.”(같은 책, 118쪽)
구체제의 지배계급을 향한 비판적 시선을 거두지 않거니와,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의 비극은 결국 스스로 불러온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는 냉철하다.
그러면서도 슈테판 츠바이크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지닌 인간적 면모를 오직 인간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인격적으로 해석하며, 다른 가능성도 있었음을 진심으로 애석해 한다. 그의 시각이 냉철하면서도 따스하다고, 모순된 말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두 가지 측면 가운데 하나만을 부각하는 것은 책을 잘못 읽는 일일 수밖에 없다.
절대왕정조차 대중과 괴리되면 무너졌건만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홍익표 원내대표를 비롯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김건희 특검’ 수용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선의가 있더라도 나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은 정치인으로서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일개 회계사 혹은 시민운동가가 아닌 정치인으로서 아무리 좋은 취지라 해도 오해받기 쉬운 어휘를 쓰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다. 그에 따른 비판 혹은 비난도 스스로 감내해야 마땅하다.
평론가 관점에서 보면 다르다.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키워드를 누군가의 정치적 실언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 더 깊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김 여사를 향한 여성혐오적 공격의 잔인함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대중으로부터 괴리된 권력이 스스로를 위기에 빠뜨리는 어리석음에 대해서도 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소리다.
궁궐에 틀어박힌 마리 앙투와네트와 루이 16세는 자신들이 위기에 빠진 줄도 몰랐다. 국왕의 절대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성장을 간과하고 있던 것이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대중의 의견이란 의미 없는 웅성거림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제는 왕을 끌어내고 목을 치자는 성난 함성이 넘실거리게 됐다.
우리의 현재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실물경기는 북극 한파처럼 얼어붙었고, 대통령 국정지지율은 30%대에서 답보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가 계속되고 있고, 우크라이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으며, 예멘 반군 기지 포격을 시작으로 중동에서도 또 다른 전쟁의 기운이 꿈틀거린다. 만약 올해 11월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집권한다면 윤석열 대통령이 임기 초반 공을 들였던 한미관계는 처음부터 다시 논의해야 할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국내 상황을 놓고 보더라도 암울하긴 마찬가지다. 법과 원칙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진 지 오래다. 정치는 점점 더 극한 대립으로 향하고 있으며, 그 결과 저출생과 고령화에 대한 대응 등 중장기적 관점에서 추진돼야 할 개혁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요컨대 우리는 부정적 의미에서 ‘비범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권력이 ‘평범’하거나, 심지어 국민으로부터 ‘평범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는다면 나라의 미래가 어찌 될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 너무 자주 듣다 못해 식상하게 느껴진다. 그 속에 담긴 반일 선동의 맥락을 생각하면 더욱 꺼림칙하다. 그러나 한국사에 함몰되지 않고, 전 세계로 눈을 넓히며, 인간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휴머니즘적 관점을 갖는다면, 역사를 통해 현재의 교훈을 얻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왕조 시대에서조차 대중의 시각으로부터 철저히 멀어진 권력은 그 대가를 처절하게 치러야 했건만 지금 우리는 절대왕정 시기가 아닌 민주주의, 대중정치 시대를 살고 있다. 1932년, 지금으로부터 90년도 더 된 책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슈테판 츠바이크가 목놓아 외친 경고에 한번쯤 귀를 기울여 봐야 하지 않을까.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칩 워’ ‘인간의 본질’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