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호

50년 ‘정치독점’ 붕괴시킨 시민의 힘

  • 입력2006-11-24 14: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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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대 총선을 앞둔 시점에 400여개 시민단체들이 ‘2000년 총선시민연대’를 결성하여 부적격자 공천반대 및 낙선운동 (이하 ‘총선시민연대운동’ 또는 ‘공천반대운동’으로 부름)을 전개하면서 몰고 온 충격과 파장은 매우 위력적이다.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시민정치혁명’ ‘선거혁명’ ‘제2의 6월항쟁’으로 규정짓고 있으며, 혹자는 이를 ‘시민혁명’이라고까지 명명하고 있다. 2000년 벽두에 한국 정치를 강타한 이 사건이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하며, 그 정치적 효과는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는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나 규명되겠지만, 한국정치사와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에 하나의 획을 긋는 큰 사건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
    한국의 민주화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나타난 ‘시민사회의 폭발’에 의해 가능했다. 한국의 경우, 라틴아메리카 등의 사례에서 보듯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시민사회의 폭발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역으로 시민사회의 위력적인 팽창과 활성화에 따른 폭발이 민주화를 가져온 것이다.

    바꾸어 말해 한국의 민주화과정에는 그만큼 시민사회의 힘이 강했고 그 역할이 컸다. 특히 80년대 전체에 걸쳐 한국의 정치변화가 보여준 격렬함과 역동성은 강력하고 권위주의적인 국가와 이에 의해 일방적으로 지배받기를 거부하는 시민사회가 성장하고 활성화되면서 빚어낸 충돌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는 바로 ‘국가에 반(反)하는 시민사회’로 규정할 수 있다.

    민주화는 이러한 국가-시민사회 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1987년 이후 진행된 민주화는 국가-시민사회 양자간에 부분적 ‘융합’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융합이란, 권위주의 하에서 국가가 통제, 침투, 동원, 포섭 등의 방법으로 시민사회 위에 군림하면서 지배해 온 관계에서 국가의 힘이 약화되면서 역으로 시민사회가 국가에 대해 침투, 이익 표출, 영향력 행사 등을 하게 됨으로써 양자간의 상호연계 및 의존도가 높아진 현상을 일컫는다. 물론 국가의 민주적 개방은 아직 부분적이기 때문에 양자의 관계는 ‘부분적’ 융합으로 제한되지만, 이러한 변화는 민주정부로 등장한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정부하에서 상당부분 진척되어 왔다.

    국가와 정치사회의 분리

    그런데 국가-시민사회의 적대적 대립관계가 일정부분 해소된 상황에서, 우리는 시민사회와 정치사회 간의 마찰 및 괴리라는 새로운 문제에 부딪히고 있다. 이번 시민사회의 공천반대운동은 그 대표적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즉 공천반대운동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갈등에 의해 빚어진 운동이 아니라 정치사회와 시민사회 사이의 균열이 만들어낸 사건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민주화 운동과 그 성격을 달리한다.



    여기서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개념에 비해 덜 익숙한 ‘정치사회’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정치사회는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독자적 층위를 일컫는데, 일반적인 의미에서 정치권, 정치영역을 뜻한다. 그것은 시민사회의 정치적 표출 정도로 범주화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사회를 독립적인 층위로 보는 핵심적인 이유는 정치사회가 국가와는 별개의 층위로 존재하면서 시민사회에 대해 뚜렷한 자율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사회가 자율적이라 함은 그만큼 시민사회와 괴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민주화의 지체 내지는 불완전함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자율성을 갖는 정치사회는 1980년대 후반 민주화와 더불어 강화되었고, 특히 김대중 정부에 이르러 더욱 강고해졌다.

    정치사회의 자율성은 자율적인 정치엘리트들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즉 정치사회를 자율적이게 하는 중심요소는, 시민사회의 민주적 요구와 지식정보화시대의 변화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든간에 이로부터 격리된, 그들 스스로의 권력과 이익을 추구하는 자생적이고 자율적인 정치엘리트 카르텔의 존재인 것이다.

    지난날 권위주의 시기 이른바 ‘TK’라는 집단의 존재가 그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국가권력의 핵심이었고 또한 정치사회의 지배엘리트들이었다. 이들이 국가, 정치사회, 시민사회의 주요 전략적 입지와 지위를 장악하면서 국가를 통치했던 것이다. 즉 국가와 정치사회의 중심은 중첩되어 있었고 국가가 위계적으로 정치사회를 관장하였다. 따라서 국가와 정치사회는 그 층위가 따로 존재한다 하더라도 분리되기 어려웠다. 사실 과두적 정치엘리트 카르텔은 권위주의 정치의 ‘상표’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시민사회로부터 자율적인, 국가-정치사회를 장악한 과두엘리트 카르텔의 해체 없이 민주화는 달성될 수 없을 것이다. 민주화를 가져온 시민사회의 성장은 구체제를 뒷받침한 과두엘리트 카르텔과 양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자랑하는 김대중 정부하에서 일어난 일은 자못 흥미롭다. 김대중 정부는 호남이라는 장기간 소외된 지역에 중심 지지기반을 가진 결과, 시민사회에서 헤게모니를 갖지 못하였고, 자민련과 연합하고서도 의회의 다수를 점하지 못할 만큼 취약한 소수정부로 출발하였다.

    김대중 정부 2년여 동안 우리가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정부는 대통령의 법적 권한으로 국가기구로서의 행정부를 관리할 수는 있었지만 과거와는 달리 정치사회 위에 군림할 수는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경상북도에 지역적 기반을 둔 옛 민정계와 경상남도에 기반을 갖는 옛 민주계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야당인 한나라당은 군부 권위주의의 중심세력과 민주화세력 간의 연합이라는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지역이 일차적 균열선이 되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 용이하게 수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이 여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 이념과 보다 더 친화성을 가지고, 우리 사회 기득권층의 중심부를 구성하면서 기득이익을 더 많이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헤게모니를 공유하는 공통의 기반을 갖는다.

    정치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해 생긴 김대중 정부의 취약성은, 이념적 거리가 가장 멀다고 할 수 있는 자민련과의 공동정부 구성이라는 내적 요인에 의해 더욱 심화된다. 결국 국민의 정부는 정치사회에서 헤게모니를 갖는 야당에게 둘러싸인 약한 정부의 모습을 갖는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국가와 정치사회의 분리일 뿐만 아니라 양자 사이의 힘의 교착상태로 특징지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 교착상태가 가져오는 결과는 개혁의 지체 내지는 지지부진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개혁대상인 정치사회가 스스로를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난제 중의 난제인 정치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매우 어려운 조건을 동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사회의 ‘실패’에 대한 문책

    민주화는 여러 수준과 계기를 거치면서 진행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민주화는 일반적으로 민주적 헌법과 선거를 중심으로 한 제도적 공고화로부터 출발하여, 정당과 이익집단의 역할을 중심으로 한 대표체계 수준의 공고화로, 그리고 주요 정치집단들의 민주적 행위규범의 내면화라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은 두 번째라 할 대표체계의 공고화도 이루지 못한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대표체계의 저발전은 주로 세 가지 정치적 실천에 의해 대표의 실패를 가져옴으로써, 정치사회를 시민사회로부터 분리시킨다.

    첫째, 한국의 정당과 정치인들은 정당간 경쟁에서 민주적 게임규칙과 행위규범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정당정치가 생산적 정치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정쟁과 이전투구의 정치를 가져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정치 목표가 시민사회의 유권자들에게 호소하기 위한 정책프로그램과 이념 개발이 아닌, 오로지 권력 획득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다수에 의한 수의 권력을 확보하려는 투쟁으로 나타날 때, 민주적 경쟁은 권력의 사투장(死鬪場)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 정당의 내부 민주주의의 결여이다. 한국 정당의 내부구조는 마치 재벌기업을 닮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정당의 오너가 공천권을 포함한 정당의 운영에 대해 절대권을 갖는 철저한 보스중심체제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정당의 이러한 수직적 위계구조하에서 당원이나 시민사회의 요구를 반영할 하의상달의 메커니즘은 기능할 수 없으며, 대중정당으로 발전하기도 어렵다.

    셋째, 정당과 정치인들이 비록 권력과 이권을 둘러싸고 정쟁을 일삼으면서도 그들 공통의 기득이익을 수호하는 데는 즐겨 야합함으로써 시민사회에 대한 정치사회의 자율성을 높이려 든다는 것이다. 국민여론과 총선시민연대의 공천반대운동에 밀려 입법이 무산되었지만, 지난 1월 여·야가 합의했던 선거법 개정안만큼 이를 잘 말해주는 것은 없다. 개정입법안은, 민주주의의 발전과 정치적 안정을 가져올 수 있는 능률적인 대표체계는 어떤 것이어야 하며, 시민사회를 어떻게 대표할 수 있고, 세계화가 주도하는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정당과 대의기구가 어떻게 대응해야만 하는가를 핵심내용으로 하는 정치개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시민사회에 대한 대표성을 높이고, 시민들의 정치참여의 폭을 넓히며, 새로운 신생정당의 원내진입을 가능케 해야 한다는 개혁입법의 정신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이었다. 법개정에 임한 정치인들을 계도했던 정신은 그들의 기득권 유지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요컨대 위에서 말한 것들은, 국민의 ‘대표’인 정치인들이 그들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들과의 관계를 전치시켜 스스로가 시민사회로부터 자율적인 주인으로 역할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요소들이다. 그것은, 정치체제가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조건하에서도 정치인들이 민주적 경쟁규칙에 따라 정치시장에서 경쟁하지 않고 그들의 기득이익을 유지하며 정치사회의 엘리트가 될 수 있는 메커니즘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공천반대운동은 정치사회의 실패에 대해 시민이 정치사회 밖에서, 즉 시민사회에서 그들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겠다는 결의가 전면적으로 폭발한 결과라고 정의할 수 있다.

    ‘포괄적’ 시민운동

    시민사회란 국가와 개인, 국가와 시장사이에 존재하는 그리고 국가로부터 일정한 자율성을 갖는 중간층위로 이해할 수 있다. 자율적 결사체, 이익집단과 사회운동은 시민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표출이며 그 중추적 구성요소가 된다. 이에 더하여 한 사회가 시민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제3의 요소, 즉 공공성이라는 요소가 필요하다. 이를 가능케 하는 핵심적 요소는 민주적, 공적 규범을 습득하고 실천하는 시민적 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볼 때 한국의 시민사회는 시민운동, 사회운동을 통하여 스스로를 표출해 왔다는 두드러진 특징을 갖는다. 한국 사회의 정치변화와 민주화과정은, 밑으로부터 대중이 주도하는 운동을 통하여 시민사회가 활성화되고, 이러한 밑으로부터의 운동에 힘입어 시민권이 확대되고 공적 영역이 형성되어온 한국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한국의 시민사회와 사회운동은 1990년대를 전후로 한 시점으로부터 민주주의와 탈냉전이라는 새로운 조건하에서 커다란 변모를 경험한다. 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이 현저하게 약화되는 사회운동의 탈(脫)급진화와 정치중심적 성격의 퇴조, 특수전문적 시민운동의 성장에 따른 운동의 다원화, 다양화가 이 시기 변화의 특성이라 하겠다.

    탈급진화는 민중운동과 노동운동을 제외한 모든 자율적 결사체의 존재와 필요성이 과소평가되었던 시기로부터, 다양한 자율적 결사체가 속출하고 그 필요성이 증대하는 시기로 전환하는 과정에 나타난 가장 특징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사회운동의 전환기 내지 구조조정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운동의 성격을 살펴보는 데는, 이 시기로부터 사회운동의 중심이 되어 일해 왔던 두 시민단체인 ‘경실련’과 ‘참여연대’의 특성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 단체는 이슈의 측면에서 볼 때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포괄적 시민운동’(catch-all move ment associ ation)’의 성격을 갖고 있다. 시민사회운동이 발달한 다른 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시민운동의 일반적 형태는 단일 이슈 중심의 특수한 문제영역과 이익범주에서 운동이 발생하고 단체가 조직된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수적인 면에서는 이러한 단체가 대부분이라 하겠다.

    그러나 시민운동의 중심을 이루는 이들 두 단체의 활동영역은 단일 이슈에 한정하지 않고, 우리 사회의 주요한 문제영역을 포괄한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정향을 지니면서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문제영역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다. 물론 이 단체들이 처음부터 포괄적 시민운동을 지향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운동의 정치적, 사회적 환경이 운동의 성격을 그러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했고, 결국 한국시민운동의 하나의 특성을 만들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시민운동이 이러한 특성을 갖도록 만든 정치적 환경은 무엇인가. 필자는 그 해답을 정당의 실패, 곧 대표의 실패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들 두 단체의 성장이 90년대 민주화와 궤(軌)를 같이하는 것임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민주화는 대표체계의 일대 혁신을 가져올 수 있는 계기였다. 그러나 1987년 민주적 개방 이래 한국의 민주화는 2000년 벽두인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주적 대표체제를 제도화하고 새로운 민주적 리더십을 형성하는 데 실패했다. 민주화는 오랜 권위주의 체제가 사회의 여러 수준에서 만들어놓은 적폐물인 부정부패의 청산, 정경유착의 고리 단절, 탈권위주의화와 정치개혁, 관료개혁, 사법개혁 등 민주화를 위한 수많은 개혁이슈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체제 변화가 아니더라도 외부환경 변화와 국내사회 변화로 인하여 재조정해야 할 정책들, 즉 신자유주의적 개방압력, 노동문제, 환경, 통일문제 등 엄청난 개혁이슈들을 쏟아냈다. 민주화와 지속적인 경제적, 사회적 발전과 분화에 의해 시민사회는 팽창했으며, 개혁요구는 민주화를 향한 열기가 큰 것만큼 드높았다. 시민사회는 팽창했고 정치적, 사회적 요구는 증가했지만, 정치사회는 도덕성의 상실과 무기력, 정쟁과 무능력으로 그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양자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정치사회에 대한 불신, 정치무관심과 냉소주의의 증대는 위험수위를 넘어선 지 오래다. 수많은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제도권 정당들에 대한 낮은 지지율 및 무당파(無黨派)의 증가와 같은 지표는 이미 한국 정치의 위기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시민사회 성장의 결과물

    이런 상황에서 누가 시민을 대표할 것인가? 정치사회에서 정당이 못 한다면 시민사회에서 시민운동이 이 공간을 채울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정황하에서 시민운동이 준정당기능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시민운동은 도덕성을 가지며, 전문지식을 가지며, 인적 자원을 가짐으로써 그리고 시민들의 요구를 대변함으로써 시민들의 욕구에 대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정당이 시민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인재들을 육성할 아무런 능력도 자원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이 시민단체들이 국가의 정책부문과 정당에서 필요로 하는 인적 충원의 중요한 저수지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이치다.

    총선시민연대의 공천반대운동이 지역분할구도에 기초한 투표행태를 바꿈으로써 총선을 한국 정치의 구조변화로 이어갈 대변혁의 계기로 만들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이미 정치사회는 물론 사회 전체에 준 충격만 하더라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대사건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렇듯 대사건을 만드는 데 성공한 요인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이, 좋은 시점을 택하고 전략을 잘 수립한 활동가들의 유능함이 가져온 결과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시민들이 그 운동을 열렬하게 지지하고 그에 대거 가세했다는 점이다. 즉 그것은 시민사회의 성장과 사회변화의 결과물인 것이다. 이 간단하고도 단순한 사실은 정치인들에 의해 자주 오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격렬하게 시민단체들을 반격의 표적으로 삼는 동안, 그들은 이 운동을 뒷받침한 사회변화의 크기와 깊이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정치의 민주화과정에서 4·19세대, 6·3세대, 3선개헌 반대 투쟁세대들의 역할은 실로 컸다. 그럼에도 87년 6월항쟁세대가 가장 크고도 강력한 세대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통속적으로 ‘386세대’라고 하지만 6월항쟁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있었던 사회집단은 이보다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 민주화혁명을 가져왔던 이들은 지금 사회 초년병으로 각 부문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이들이야말로 한국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사회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이들은 정치에서 벗어나 생활 영역으로 물러났다. 민주화를 이루어냈던 운동세력은 민주적 제도화가 이루어지면서 정치의 중심으로부터 퇴장하고 정당과 제도권 정치인들이 이를 대체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90년대의 민주화 시기는 정당의 실패, 대표의 실패 시기이기도 하였기에, 이들 민주화 세대는 정치에 참여하기에는 너무 젊고 정치에 관심을 갖기에는 너무 실망한 나머지 정치 무관심층의 중심이 되어 정치의 배면으로 사라졌다. 90년대 이후 각종 연구조사는 이들의 절반이 투표라는 공적 행위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투표율의 지속적 저하경향에서 나타나듯이, 무관심과 무당파적 정향을 보이는 중심적 사회집단이 된 것이다.

    여기에 97∼98년 IMF위기라는 국난사태가 개입된다. 모든 부문에서 총체적 개혁이 요구되었고, 이에 따라 설령 미진하거나 퇴행하거나 또는 현재 진행중이라 하더라도, 금융개혁, 행정부개혁, 재벌개혁, 교육개혁 등이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개혁이 가장 절실한 정치는 그 대상에서 제외된 듯 아무런 가시적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

    따라서 공천반대운동이 마치 6월항쟁이 재발되는 듯한 위세로 탄력을 받게 된 시기가, 여야의 선거법개정안이 그들 스스로의 권익을 온존하려는 정치적 야합으로 판명된 시기와 때를 같이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를 계기로 새로운 세대들의 정치개혁에 대한 욕구가 폭발적으로 분출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압도적 다수도 공천반대운동을 지지하고 나서게 되었다. 여러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시민들의 지지 정도는 이 운동이 일종의 사회적 합의로 등장했음을 말해준다.

    이번 공천반대운동 과정에 시민운동과 시민사회의 광범한 시민들이 결합하는 것을 이해하려면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 간의 다이내믹스를 보는 눈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이번 운동은, 부패하지 않고 민주적 법규와 규범을 실천하고 준수하느냐 하는 민주주의의 절차적 규범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즉, 시민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규범과 국민의 대표들이 실제로 실천하는 민주주의의 규범을 어떻게 일치시킬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공정한 경쟁이 가능한 정치시장을 형성함으로써 시민사회에 대한 정치사회의 대표성을 확대할 것인가, 또한 어떻게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확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심이었으므로, 민주주의의 절차성 문제를 핵심과제로 제기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국민의 도덕성에 대한 의식은 주로 절차적 정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 도덕성에 대한 예민함은 한국 정치문화의 핵심 요소를 이룬다. 4·19, 그리고 6월항쟁과 같이 한국사의 중요한 대사건과 민주화운동은 모두 이러한 절차적 민주주의를 핵심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문제가 중심이슈로 등장할 때는 시민사회에서 광범한 호응을 얻기가 쉬웠다. 정치문화와 시민의 정치의식에 있어서 절차적 민주주의는 움직일 수 없는 규범으로서 확실히 정립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공천반대운동은 기본적으로 절차적 규범을 중심으로 한 것이지만, 동시에 구조적이고 실질적인 측면을 포괄하고 있다. 무엇보다 운동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사회전반에 대한 개혁적 요구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절차적 개혁뿐만 아니라, 정치개혁, 재벌개혁, 행정개혁, 금융개혁, 노동개혁, 복지개혁 그리고 환경, 교육, 문화 모든 부문에서 민주화, 탈냉전, 세계화에 대응할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개혁의 요구인 것이다.

    따라서 운동이 요구하는 대상은 단지 정치사회의 정당과 정치엘리트를 향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개혁을 추진하여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할 책임을 위임받은 정부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이는 한국사회의 기득권 엘리트층에 반하는 도전이며 요구라고 하겠다.

    표면적으로 공천반대운동은 과거에 볼 수 있었던 정치적인 운동이며 전형적인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운동은 과거의 시민운동과는 질적으로 상이한 요소를 포함하면서 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시민운동의 시발로 이해할 수 있다.

    앞에서 공천반대운동의 중심 지지층이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지지하였던 젊은 세대라고 말한 바 있다. 이들 세대는 계급, 부문, 전문직업 등의 기능적 이익범주 집단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집단이다. 이들은 교육을 통해 머리로만 민주적 가치와 규범을 배운 것이 아니라 체험 속에서 민주주의를 내면화한 집단이다.

    하지만 그들의 사회생활은 다양한 직업 속에서 원자화, 다원화되었고 그들의 삶의 양식은 세계화 시대의 삶의 양식으로 변모되었다. 이런 조건에서 누가 어떤 메커니즘을 통하여 이들을 공통의 정치적 대의와 가치로 묶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 공간이다. 정치사회는 정당과 정치엘리트집단에게, 그리고 지배적 담론을 생산하고 전파하는 거대 언론매체에게 선점되어 있으며, 시민사회 역시 기득권층에 의해 정치적 표출이 매우 어려운 조건이라 할 때, 사이버 공간은 그에 진입하는 어떠한 문턱도 존재하지 않는, 따라서 어떠한 헤게모니적인 담론도 지배적 영향을 끼치기 어려운 자유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이버 공간과 ‘문화이동’

    더욱이 사이버 공간은 담론의 생산과 정보의 습득이 일국의 국경 내에 한정된 협애한 것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국경을 뛰어넘는 실로 광역의 존재인 것이다. 세계화는 경쟁적 세계시장의 효율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의 확산으로 상징되어 왔으며, 이로 인해 시민사회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세계화는 민주주의의 원리와 충돌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실제로 사실이라 하겠다.

    그러나 통신기술의 발전을 수반하는 세계화는 그것이 가져오는 비민주적 또는 반민주적 요소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요소를 포함하기도 한다.

    세계화는 두 가지 점에서 민주주의의 가치와 규범과 친화성을 갖는다. 하나는 수단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용적인 것이다. 수단적인 것은 새로운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위한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사이버 공간을 제공하며, 내용적인 것은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민주주의의 가치와 규범이 이들 세대들이 갖고 있는 민주화운동의 한국적 경험과 친화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공천반대운동은 세계화의 충격을 양면으로 흡인한, 즉 인터넷이라고 하는 통신기술상의 혁명과 민주주의 가치의 보편성을 흡인한, 80년대에 민주화를 경험한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 의해 만들어진 매우 새로운 형태의 시민운동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공천반대운동의 중심세력이 80년대에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세대라고 할 때 이들이 새로운 기성세대로 자리잡으면서 우리 사회에는 일종의 ‘문화이동’이 진행되고 있다. 젊은 세대, 특히 80년대 민주화를 경험한 세대들은 앞선 세대들과는 엄청나게 다른 삶의 경험을 갖고 있다. 더욱이 이념적 스펙트럼 위에서 상이한 변화의 경로를 제시할 채널이 존재하지 않는 한국적 조건에서 세대의 중요성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 세대가 개혁적, 진보적 정당이 수행해야 할 일을 대리수행해야 할 경우가 많다. 그들은 분명 민주화를 중심에서 경험한 세대들로 위계적 질서와 권위주의를 생래적으로 수용할 수 없으며, 세계화와 과학기술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며, 이데올로기적으로 열린 세대이다.

    이들이 주도하는 공천반대운동이 집권당에 비해 자민련과 야당에 더 비판적이라는 사실이, 시민운동에 대한 비판자들이 말하듯이 시민운동과 현 정권 사이에 어떤 ‘음모적인’ 거래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현 집권세력이 권위주의하에서 장기간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었던 호남지역에 기반을 두면서 군부 권위주의세력과 투쟁했던 사실로 인하여 정치사회의 기득권층보다 덜 부패하고 개혁적일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현 정부와 민주화세력은 상대적인 친화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게 사실이다.

    사실 이들 젊은 민주화 세대의 강렬한 변화에 대한 욕구가 97년 현정부의 집권을 가져온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양자의 친화성이나 시민사회 민주화세력의 정부에 대한 지지는 정부가 개혁적이라는 조건 아래서 유지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정치엘리트가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함은 물론 현정부 역시 그들의 요구를 충분히 대변해 주지 못한고 믿기 때문에 시민운동에 지지를 보내주고 있는 것이다.

    시민운동의 민주개혁과정에 대한 개입은, 민주개혁의 지체라는 한국적 상황의 산물 못지않게,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에 내장된 한계와 모순 때문에 필요하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현대 민주주의는, 주권자인 국민이 스스로를 대표하지 못하고 선거에 의해 선출된 대리인을 통하여 자신을 대표할 수밖에 없는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사실은 두루 아는 바다. 이러한 주인-대리인 관계는 자칫 현실 정치에서 주인-대리인 역할의 전도라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즉, 개인으로서의 정치가, 조직으로서의 정당이 주권자인 시민을 대표하고 공적 기능을 수행하는 민주적 헌법기관으로서의 역할보다는 정치사회에서 또 다른 사적 기관, 또는 스스로를 대표하는 정치계급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그것이다.

    이러한 역할전도현상이 심화될 경우 대의제 민주주의는 형해화할 수밖에 없다. 정치사회가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할 때, 주권자로서의 시민사회는 대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정치엘리트에게 그 책임을 요구, 추궁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에 내재한 딜레마와 우리 사회에서 대표의 실패가 가져온 민주정치의 위기상황을 타개하는 데 시민사회의 기여는 크다고 하겠다.

    ‘결사체적 민주주의’라는 대안

    나아가 이번 공천반대운동은 민주주의의 공고화 과정에서 미진한 국가의 개혁적 역할을 보완하는 의미를 지닌다. 한국의 민주화는 일차적으로 아래로부터 시민사회의 힘을 통하여 이행의 실마리를 열고 추동되었지만 위로부터의 민주화를 통하여 제도화되었다. 이는 사회의 여러 부문에서 구체제와의 연속성을 크게 유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치사회와 마찬가지로 국가기구 또한 구체제와 커다란 연속성을 갖는다. 민주화 이후 두 민선정부인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는 공통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한편으로 그들은 보수세력과 연합하지 않는 한 안정적 정부를 구성할 수 없었던 외적 제약을 가지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적 자원과 국정운영의 노하우를 갖지 못함으로써 개혁추진에 한계를 드러내는 내적 제약을 안고 있는 것이다. 총선시민연대의 운동 대상이 된 정치개혁은 일차적으로 정부의 개혁의제 위에 있었다. 정치개혁의 실패는 정부의 정치 개혁의 실패와 정치사회의 개혁거부의 결합이 빚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번 총선시민연대의 운동은 정부가 할 수 없었고, 또 하지 않았던 개혁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고 이를 대신 수행하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가 홀로 민주개혁을 성취하기 어려운 구조적 제약이 존재한다. 민주화는 국가부문과 정치사회부문뿐만 아니라 전사회적 과정이며, 다층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헌법, 대의제도, 그리고 주요 정책을 민주적으로 전환하고 사람을 바꾸는 것만으로 민주주의가 공고화하는 것은 아니다. 공적 기구를 위임받은 사람들의 가치, 태도, 행태가 민주적으로 바뀌어야 하고, 또한 사적 부문과 대중들의 가치정향과 행위규범 역시 민주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제도, 사람, 의식 등에 걸친 광범한 개혁과제를 국가만이 할 수는 없다. 민주화는 사회 전체의 분자적 과정이므로 시민사회가 이 과정에 참여하지 않는 한 민주화는 불가능하다. 이는, 한국 사회가 시민사회가 되지 않는 한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총선시민연대 운동의 가장 큰 의미는, 시민 스스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천하고 정치의식을 가지며 정치참여의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일깨우고, 이를 통해 한국사회를 시민사회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사실상 민주주의를 공고화하고 민주주의의 질을 향상하는 데 시민사회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앞에서도 민주주의의 딜레마를 말했지만, 국가-정치사회는 시민사회로부터 일정한 자율성을 획득하면서 엘리트 카르텔을 형성하고 스스로의 제도적 이익을 추구하기 쉽다. 그러므로 이들 구조 내에서 행위하는 엘리트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외부로부터 주인-대리인 문제를 해소할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 힘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서 시민사회로부터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필자는 여기에서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시민운동의 역할정립을 위한 한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결사체적 민주주의(associative demo-cracy)’를 발전시키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계층, 부문, 전문직종 등의 각 범주에서 활동하는 사적 특수이익집단에 공익적 역할을 부여하는 일이 필요하다.

    하나의 사적 이익결사체는 비(非)국가 조직이지만 조직 가맹원들의 이익을 독점적으로 대변하고 그들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재화와 서비스 또는 지위를 제공함으로써 조직원들의 행위에 영향을 끼치고 이를 통제할 수 있다. 이 구조하에서 국가는 이러한 조직행위를 인가하거나 보조금을 주는 유인책을 사용함으로써 사적 결사체들에게 어떤 공적 기준을 부과하며 공익적 기능과 책임을 행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즉 자율규제기능을 갖는 결사체에 국가의 공익적 기능과 역할을 이양함으로써 국가에 집중되는 공적 이익과 관련된 역할과 책임의 하중을 줄여 이를 하향분산하는 일이 가능한 것이다.

    제2의 시민

    필립 슈미터와 같은 정치학자는 사적 이익결사체가 사적 이익을 추구하되 스스로를 규율하면서 공적 기능을 갖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이를 ‘사적 이익정부’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가 제시하는 한 가지 구체적인 방안은 ‘제2의 시민(secondary citizens 또는 organizational citizens)’ 개념과 이로부터 이끌어내는 결사체 육성을 위한 ‘바우처(voucher)’제도다.

    이는 국가가 국민의 세금으로 정당의 건전운영과 발전을 위해 보조금을 지급하는 원리를 이익집단의 발전을 위해 적용하는 것이다. 먼저, 이익집단발전법 같은 것을 통해 국민들이 약간의 세금을 내도록 하여 발전기금을 설립하고, 시민 개개인에게는 일정한 기간동안 사적 결사체를 지원할 수 있도록 일정수의 바우처를 발급한다. 그리고 시민들은 그들의 대의에 일치하거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운동단체나 이익단체를 선정해서 바우처를 기부하며, 정부는 그들 단체에게 바우처 수에 따라 기금을 배분하는 것이다.

    반면, 단체들은 이러한 공적 기금을 받는 대가로 정부(법)가 부여하는 제한들, 즉 단체장의 민주적 선정, 재정의 투명성, 비영리행위 등과 같은 요구조건을 수용해야 한다. 이러한 제약을 원치 않는 단체는 기금을 받지 않으면 된다.

    제1의 시민이라는 말은 없지만, 시민 개개인에게 부여되는 투표권은 제1의 시민권을 뜻할 것이다. 투표권의 확대와 더불어 국가나 정치사회의 수준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해왔듯이, 시민사회의 수준에서 개개시민이 그들의 이익, 요구, 대의를 대변할 수 있는 자율적 집단을 조직하거나 지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것은 시민권의 확대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는 그 주체를 일컬어 제2의 시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공적 기능을 갖는 사적 이익집단은 시민의식과 민주교육의 산 교육장이 될 것이다.

    그 동안 개혁을 말할 때 그것은 주로 선거법, 정당, 국회기능, 행정개혁과 같은 구체적인 정치제도나 국가기구를 그 대상으로 하거나 재벌, 금융제도, 공공부문 개혁과 같은 시장원리에 기반한 경제개혁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사적 결사체가 민주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틀을 마련하는 일은 미래의 정치적, 사회적 개혁의 중심 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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