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이 반드시 옳다고 볼 수는 없다
책 ‘절반의 인민주권’이 중요한 이유
네 사람이 모여도 파벌이 생긴다
민주당이 만든 ‘검찰 대 국민’ 구도
익숙한 대의명분 ‘노무현 트라우마’
윤석열 대통령이 5월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엄수된 ‘제42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유족 등 참석자들과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제20대 대선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이재명 민주당 대선후보에 고작 0.73%포인트 차로 앞섰다. 임기 막바지에도 문재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40%를 웃돌았다. 심지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 대한 지지율 혹은 기대치와 역전하는 기현상을 보이기까지 했다. ‘미래 권력’이 ‘과거 권력’보다 인기가 없는, 우리 헌정사를 통틀어 유례가 없는 일이다.
판세가 달라졌다.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가 자신의 국회의원 지역구이던 인천 계양을 선거구를 떠나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했고, 해당 지역구에 이재명 전 후보가 전략 공천됐다. 명분 없는 출마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이재명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다른 후보들을 지원하기 위해 이곳저곳 전국으로 지원 유세를 다녔다.
상황은 그의 기대와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다. 이재명 본인은 2016년, 2020년 총선에서 모두 고배를 마셨던 윤형선 국민의힘 후보와 여론조사상 박빙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설령 이긴다 해도 대선후보의 체면을 심각하게 구기는 모양새다. 이재명에게는 상처뿐인 영광, 혹은 영광조차 없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
다른 지역에서도 민주당은 고전하고 있다. 송영길은 서울시장 선거에서 열세를 보이고 있고, ‘민주당 강세 지역’으로 평가받던 경기지사 선거도 혼전 양상이다.
만약 한 달 전이었다면 국민의힘이 대승했을 경우를 ‘이변’이라 칭했어야 했다. 지금은 민주당이 체면치레를 하면 이변이라고 해야 할 상황이 됐으니 그야말로 반전이다.
선거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정치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선거철을 전후로 늘 받는 비슷한 질문이 있다. ‘이 선거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숙달된 정치평론가들은 이런 질문을 받으면 몇 개의 정해진 모범답안을 내놓는다. ‘민심에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다’ ‘통합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여야가 협치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 등등.그런데, 민심이란 무엇인가? 앞서 말했듯 이번 지방선거를 6월 1일이 아니라 5월 1일에 치렀더라면 그 결과는 매우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 전반적으로 민주당에 유리하게 해석될 수 있는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다. 한 달 새 선거 분위기가 바뀌었고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불과 한 달 사이에 오가는 여론, 혹은 민심을, 어떤 절대적인 당위나 가치 평가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런 회의적 생각은 필자가 방금 혼자 떠올린 것이 아니다. 선거가 끝날 때면 여야를 막론하고 원치 않는 성적표를 받아든 정치인 혹은 지지자들이 늘 내뱉는 말이다. 선거에서 이긴 쪽은 위대한 민심을 찬양한다. 반대로 선거에서 진 쪽은 ‘국민의 평균 수준은 수능 5등급’(국평오)이라는 둥, ‘국민이 XXX’라는 둥, 특정 연령대가 XXX라는 둥, 온갖 수사를 동원해 바로 그 민심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드높인다.
이번 지방선거 결과를 놓고도 같은 목소리가 불거져 나올 것이다. 봄이 오면 날이 따뜻해지고 가을이 되면 서늘해지는 것처럼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민심’이라는 절대적 판단 기준을 상상한다거나, 그리하여 선거에서 이긴 쪽은 민심을 등에 업고 절대적 정당성과 권력을 획득하는 반면 진 쪽은 그 어떤 항변도 할 수 없다고 단정 짓는 것은, 모두 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한 생각이다. 민심은 절대적이지 않다. 심지어 반드시 옳다고 볼 수도 없다. 좋은 정치가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E. E. 샤츠슈나이더의 통찰
정치란 무엇인가? 민심을 받들어 국가를 통합하는 것인가? TV 토론에 나온 정치인이 달달 외우고 있을 법한 모범답안이다. 하지만 현실의 정치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정치를 올바로 이해하고 분석하고 개선하려면 그런 당위론적이고 도덕적인 관념을 잠시 내려놓아야 한다. 대신 정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데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미국의 정치학자 E. E. 샤츠슈나이더가 쓴 ‘절반의 인민주권’은 그래서 중요한 책이다. 샤츠슈나이더는 로버트 달과 더불어 미국 정치학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로버트 달은 미국 헌법이 제시하는 가치가 현실에서 구현되지 않는 것을 비판하는, 말하자면 이상주의적 성향을 보여준다. 반면 여기서 우리가 참고할 샤츠슈나이더는 현실주의자다. 이데올로기적 접근을 접어둔 채 현실의 민주주의를 이론화하고자 노력했다.
샤츠슈나이더에 따르면 아무리 좋은 정치 제도가 도입되고 훌륭한 정치인들이 출현한다 해도 세상은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갈등이란 다수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점심 메뉴를 정할 때에도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네 사람이 모여도 그 속에서 파벌이 생기곤 한다. 한국의 청년들은 리그 오브 레전드(LOL)라는 게임을 통해, 고작 다섯 사람으로 이루어진 조직 내에서도 얼마나 많은 갈등이 발생할 수 있는지 매일 몸으로 겪으며 배운다. 현실뿐 아니라 가상세계에서도 사람이 모이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정치가 등장한다. 정치란 갈등을 관리하는 기술이다. 한 사회 내에 존재하는 수많은 갈등 중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고, 우선순위를 부여해 사회가 공동체로 존속하게 하며 갈등의 에너지를 긍정적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다. 혹은 최소한 사회가 파괴되지 않도록 충격을 흡수하는 역할을 정치가 수행한다. ‘절반의 인민주권’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
“현대사회라면 어디에서나 무수히 많은 갈등이 잠재되어 있지만, 오직 몇몇 갈등만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갈등의 수를 줄이는 일은 정치가 수행하는 핵심적인 기능이다. 정치는 갈등들 간의 지배와 종속을 다룬다. 민주주의 사회가 존속할 수 있는 이유는 수많은 잠재된 갈등들에 대해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갈등을 관리하기 때문이다.”
호남 차별과 5·18 문제
샤츠슈나이더는 “남부의 보수주의자들이 가난한 백인들을 자신들의 휘하에 묶어두기 위해 인종적 적대를 이용한 경우나, 1890년대 급진적 농민 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지역 갈등 구도를 이용한 경우”의 사례를 제시한다. 계급적 갈등이 불거지는 시점에 그것을 인종이나 지역 등의 갈등으로 치환한 나쁜 경우다. 한국의 경우에는 이촌향도로 인해 도시로 유입된 농촌 인구에 대한 차별 및 노동 착취 등이 문제가 되자, 그 중 가장 유입 인구가 많은 호남인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지역감정’을 만들어낸 것이 유사한 사례로 꼽힐 수 있겠다.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호남 대 비호남’의 구도는 보수 정당에 주어진 필승 카드처럼 여겨졌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이어진 지방선거와 총선에서 민주당이 연승을 거두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민주당이 ‘호남 대 비호남’의 갈등의 선을 ‘민주 대 반민주’ 혹은 ‘민주화 세력 대 수구 보수 세력’으로 새롭게 정립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호남인에 대한 차별, 멸시, 배척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인 중 상당수, 특히 중도층에게 더는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 됐다. 호남 차별을 주장하거나 묵인하는 이들은 5·18을 일으킨 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도덕적 비난이 쏠리면서, ‘민주화 세력 대 수구 세력’의 구도는 보수 정당에 불리한 방향으로 작동하게 됐다고 말할 수도 있다.
과연 호남을 ‘텃밭’으로 취급하는 민주당의 장기 지배 체제가 호남인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도움이 됐을까? 그렇게 보기 어렵다는 비판이 지난 대선 과정에서 다각도로 제기됐다. 하지만 전국 단위 정치를 놓고 볼 때, ‘호남 대 비호남’의 갈등 구도가 유권자들에게 옳지 못한 것으로, 달리 말해 선호할만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호남인의 소외심을 자극하는 외부의 압력이 사라져야 내부로부터의 변화도 수월해질 테니 말이다.
‘호남 대 비호남’의 갈등 구도가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점은 보수 정당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던 일이다. 하지만 행동을 통해 갈등 구도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필요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힘 의원 대부분을 이끌고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했던 것을 떠올려 보자. 윤석열 이전에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또한 무릎을 꿇고 광주의 문을 두드렸다.
이로 인한 효과는 분명하다. 국민의힘이 먼저 광주에 사죄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호남 대 비호남’이라는 기존의 대립 구도가 와해된다. 국민의힘은 ‘군사독재 세력의 후예’라는 멍에를 벗어던진다. 한때는 보수정당의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필승 카드였지만 지금은 외려 역습의 빌미가 되고 있는 호남 차별과 5·18 문제를 대통령이 집권 초기에 정면 돌파했다.
그런다고 ‘호남 대 비호남’의 갈등 구도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온갖 문제가 단번에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호남의 저개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각도의 고민과 국가적 노력도 필요하다. 중요한 건 윤석열의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식 참석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한국 사회를 수십 년 간 지배했던 갈등의 축을 어떻게 허물어뜨렸는지,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일이다. 이렇게 보수 정당의 정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완고한 소수파들의 낡은 갈등 구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총괄선대위원장(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후보)이 5월 20일 인천 계양구 귤현동 일대를 돌며 유세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윤석열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민주당은 이른바 ‘검수완박’이라는 것을 강행하기 시작했다. 대선이 끝나기 전까지는 별 말이 없더니, 갑자기 검찰 수사권을 완전히 빼앗는 것을 골자로 한 법안을 밀어붙였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하기 위해 민주당 의원 한 사람이 탈당해 무소속 행세를 한다거나, 국회의장이 ‘회기 쪼개기’를 통해 야당의 필리버스터를 무력화하는 등, 입법부가 부릴 수 있는 온갖 ‘꼼수’가 총동원됐다.
대체 이렇게까지 무리수를 두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민주당 출신의 양향자 무소속 의원은 4월 20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검수완박을 처리하지 않으면 문재인 청와대 사람 20명이 감옥 갈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물론 민주당은 이런 주장을 일축하면서 익숙한 대의명분을 내세웠다. 민주당의 열성적 지지층, 특히 40대 남성 유권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말하자면 ‘노무현 트라우마’를 건드린 것이다.
‘노무현 트라우마’가 만들어내는 갈등의 축은 분명하다. 국민이 투표해서 뽑은 정치권력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한국 현대사 흑막의 자리에 ‘검찰’을 놓고, 그 검찰의 힘을 빼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다. 한마디로 ‘검찰 대 국민’의 구도를 만드는 것이다. 검찰은 나쁘다. 그러니 검찰이 민주당 정치인을 수사하고 기소하는 것은 부당하다. 행정부를 빼앗겼지만 아직 수중에 입법부가 남아있으니 급하게 법을 만들어서라도 검찰의 힘을 빼야만 한다.
이러한 시각은 적어도 민주당의 강성 지지층에게는 진리로 여겨진다. 문제는 국민 전체에 그리 큰 설득력을 지니는 관점이 아니라는 데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검사, 특히 문제가 되는 특수부 검사를 만날 일이 없다. 검수완박은 ‘노무현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는 민주당 핵심 지지층을 벗어나면 그야말로 ‘남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지난 대선에 출마했던 이재명이 민주당의 ‘텃밭’으로 여겨지는 인천 계양을에 출마하고, 계양을에서 3선을 한 송영길은 서울에서 시장직에 도전하고 있다. 민주당에서 그 어떤 공약과 비전을 제시해도, 국민에게는 이번 선거를 앞둔 민주당의 핵심 어젠다가 검수완박, 혹은 ‘이재명 일병 구하기’로 보일 수밖에 없다.
국민 상당수가 관심이 없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더라도 자신들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몇몇 정치인의 구명 활동에 선거 전체가 끌려 들어가는 것은 매우 치명적이다. 이 또한 정치에서 보편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샤츠슈나이더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모든 패배한 정당·대의·이익은 기존의 노선을 따라 계속 싸움을 벌일 것인지 아니면 낡은 싸움을 포기하고 새로운 연합을 형성하고자 노력할 것인지 결정해야만 한다. 여기서 가장 우려스러운 사태는 기존의 싸움을 계속하려는 완고한 소수파들이 어리석게도 낡은 갈등 구도를 동결시켜 영원히 고립된 소수파로 남게 되는 경우다.”
어떤 갈등을 취할 것인가
4월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396회 국회(임시회) 1차 본회의에서 검찰청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이 가결되고 있다. 사진은 박수치는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들. [사진공동취재단]
하지만 그런 가능성을 과대평가하지는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설명했던 이유 때문이다. 정치는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갈등 중 무언가를 취하고 버리는, 어떤 갈등을 앞세워 다른 갈등을 치유하거나 무마하거나 덜 심각한 것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그러한 갈등의 선은 쉽게 그어지지도 바뀌지도 않는다. 하물며 당사자가 스스로의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자신들과 소수의 지지층만 열광하는 특정한 갈등에 집착하고 있는 한, 정치적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일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번 선거가 끝난 후,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어느 진영에서건 ‘민심’을 찬양하거나 개탄하는 뻔한 소리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치 산타할아버지처럼 정치인들의 속마음을 읽어내어 착한 아이에게는 상을 주고 나쁜 아이에게는 벌을 주는 그런 ‘민심’은 세상에 없다. 우리는 다양한 생각과 이해관계와 삶의 목표를 지닌 개별적 존재다. 우리 스스로도 완전하거나 전적으로 선량하지만은 않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는 수많은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정치의 역할은 그런 국민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이해한 후 더 나은 갈등의 선을 제시하는 데 있다. 이번 선거 역시 정치 본연의 일을 더 잘 수행한 이들이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