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돌하르방, 볼리비아 티와나쿠 석상, 칠레 서쪽 이스터 섬의 모아이 석상.
- 바닷길로 2만5000km나 떨어진 곳의 석상들이 이상하게 닮아 있다.
- 우연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문명을 전파한 흔적일까.
- 신대륙과 구대륙 간 문명 전파의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 안데스 자락의 코카인이 이집트 미라에서 발견되고, 남태평양의 닭이 남미로 전해졌다.
- 학자들은 그 옛날, 바다를 통해 전 세계로 문명을 전파한 이들은 항해술에 능했던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인이라고 추측한다.
1 볼리비아 티와나쿠의 엘 프레일레 2 제주도 돌하르방 3 4 발리 석상
티와나쿠는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즈에서 72km 떨어진, 해발고도 3850m 고원지대에 위치해 있다. 티와나쿠에는 잉카 문명 이전인 기원전 1500년부터 기원후 1200년까지 문명이 존속했다고 전해진다.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두 조각상이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다. 제주도와 티와나쿠는 무려 2만5000km나 떨어져 있다. 그것도 육로가 아닌 바닷길로. 그러나 만약 이 유사성이 어떤 문화적 전파에 의한 것이라면 얘기가 복잡해진다. 누군가 바다를 통해 이들 두 지역을 오갔다는 것인데, 솔직히 말해 상상하기 어려운 가정이다.
페루에서 제주로?
제주 돌하르방이 언제부터, 또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선 알려진 바 없다. 제주도 자생설, 몽골 기원설, 인도네시아 기원설 등이 거론될 뿐이다. 만약 돌하르방이 티와나쿠 석상과 관련이 있다면 그것은 인도네시아 기원설과 무관하지 않다.
조철수 전 히브리대 교수는 2000년 10월 ‘신동아’에 기고한 글 ‘메소포타미아 신화는 남방 해상로를 거쳐 전해졌다’에서 인도네시아 발리 섬의 석상이 제주 돌하르방과 매우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구체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한양대 명예교수인 고고학자 김병모다.
그의 책 ‘김병모의 고고학 여행’에 따르면 돌하르방은 적도 해류와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우리나라에 전파됐다. 인도네시아 발리 섬의 베사키 사원 석상이 그 기원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이스터 섬의 모아이 상과의 유사성도 지적하면서 제주도를 중심으로 한 석상 문화는 환태평양에서 동지나해로 연결되는 해양 문화가 한국에 전파된 결과라고 추정했다. 그의 주장을 도식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페루(잉카 문명) → 이스터 섬 모아이 석상 → 인도네시아 발리 섬(베사키 사원 석상) → 필리핀 → 제주도 돌하르방.’
김병모의 문명 전파론은 토르 헤위에르달의 이론에 근거한다. 헤위에르달은 기원후 500년경에 신석기인들이 페루에서 폴리네시아(오세아니아 동쪽 해역에 분포하는 수천 개 섬)로 이주해 왔으며, 이들이 이스터 섬과 파카린, 마르케사스 군도 등에 잉카풍(風)의 석상 유적을 만들어놓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잉카 유적과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는 타이티와 사모아의 계단형 피라미드 역시 이들의 흔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후 연구에서 폴리네시아인들이 남미가 아닌 동남아시아에서 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언어학적으로나 유전학적으로 남미보다는 동남아시아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이는 남미에서 남태평양으로 문명이 전파됐다는 이전의 학설과는 다른 결론이었다.
어쨌건 남미와 동남아시아가 서로 문명을 주고 받았다는 증거는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티와나쿠 유적 연구에 50년을 바친 독일계 볼리비아 학자 아르투르 포스난스키는 “티와나쿠의 엘 프레일레 입석 조각상이 손에 쥔 것이 인도네시아식 단검인 크리스와 흡사하다”며 문명 전파 가능성을 제기했다. 대규모 인적 이동은 아니었다 해도 남미의 문물이 태평양 도서지역에 전파됐을 가능성은 있다는 것이다.
이집트의 코카인
1992년, 독일의 병리학자인 발라바노바는 기원전 1000년부터 기원후 400년 사이에 만들어진 이집트 미라 9개의 머리카락, 피부, 뼈에 포함된 성분을 조사한 뒤 놀라운 사실을 발표했다. “모든 샘플에서 코카인과 카나비노이드 성분이 검출됐고, 8개 샘플에서는 니코틴도 검출됐다”는 내용이었다.
카나비노이드나 니코틴은 구대륙에도 잘 알려져 있던 물질이라 놀라울 게 없었다. 하지만 코카인은 달랐다. 코카인 성분을 가진 코카 나무는 오직 남미 안데스 지역에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남미의 코카인이 어떤 방식으로든 태평양을 건너 이집트로 전파됐다는 강력한 증거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집트학 학자나 다수의 역사학자는 발라바노바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들은 발라바노바가 미라들을 모두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발라바노바는 기원후 1100~1300년 수단 지역에서 만들어진 130여 구의 이집트 미라에서도 코카인과 니코틴 성분이 검출됐다고 발표하면서 자신의 주장에 더 힘을 실었다. 그의 연구결과가 사실이라면, 이것은 3000여 년 전에 이미 구대륙과 신대륙 간에 인적 교류, 나아가 무역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의미 있는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이와 관련, 실험 고고학자인 존 콜즈의 주장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그는 기원전 2600년경 고대 이집트가 이미 대양 항해기술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한 사람이다. 기자의 대피라미드 옆 지하에서 발견된 체옵스왕의 배가 그 증거라고 했다. 길이가 43m에 달하는 이 배는 콜럼버스가 탔던 산타마리아 호보다 2배나 크다. 콜즈는 이집트인들이 이 배를 타고 대양 항해에 성공했다고 믿었다.
대체 역사학자 앤드루 콜린스는 ‘기원전 600년경 파라오 네코의 명령에 의해 홍해에서 출발해 아프리카 대륙을 한 바퀴 돌아 지중해로 오는 장장 2만5000km의 항해가 이루어졌다’고 적혀 있는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주목한다. 기록에는 “당시 이런 항해를 이집트인들 스스로는 할 수 없었고 대신 ‘페니키아 사람들’이 수행했다”고 돼 있다. 이를 근거로 콜린스는 페니키아인들이 대서양을 횡단해 남미 대륙으로 갈 수 있었고 거기서 코카인을 들여왔다는 가설을 내놨다.
터키 네발리 코리 신전과 돌기둥 석상(위), 볼리비아 티와나쿠 석상
신대륙과 구대륙 간 문물 교류의 흔적은 이밖에도 많다. 1532년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처음 페루에 도착했을 때, 잉카 문명의 일상과 종교 의식에서 닭은 이미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닭이 남미의 태평양 연안 지역을 제외한 북아메리카나 남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는 점이다. 그렇다면 페루의 닭은 어디서 온 것일까.
뉴질랜드 오클랜드대에서 인류학을 전공한 엘리자베스 스토리는 칠레에서 발견된 닭뼈의 유전자 형질 조사를 통해 칠레의 닭이 폴리네시아에서 옮겨졌다는 것을 밝혀냈다. 중요한 건 그 시기가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보다 100년 이상 빨랐다는 사실이다.
고구마도 마찬가지다. 폴리네시아에서 고구마는 매우 중요한 작물이다. 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정복자들이 폴리네시아에 고구마를 전파했다는 게 그동안의 정설이었다. 알려진 것처럼 고구마의 원산지는 아메리카다. 그런데 중앙 폴리네시아 쿡 군도의 한 섬에서 탄화(炭化)한 고구마가 발견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당시 발견된 고구마는 분석 결과 기원전 10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됐다. 대체 이 고구마는 어디서 온 것일까.
불머라는 학자는 검은가슴물떼새를 의심했다. 이 새가 아메리카의 고구마 씨앗을 폴리네시아에 퍼뜨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퍼스글로브라는 학자는 캡슐에 담긴 고구마 씨앗이 남미에서 폴리네시아까지 태평양을 횡단해 운반되었다는 가설을 내놨다. 그러나 둘 다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주장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고구마가 사람에 의해 운반됐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서가 나타났다. 언어학적 추정이었다. 폴리네시아에서 고구마는 ‘쿠말’ 또는 ‘쿠마르’로 발음되는데, 이는 페루(퀘추아어 방언)나 에콰도르 원주민이 고구마를 부르는 말과 똑같다.
만약 사람이 고구마를 옮겼다면 그들은 대체 누구였을까. 남미 사람이었을까. 아마도 헤위에르달은 ‘그렇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대양 항해에 능했던 민족은 폴리네시아인들이었다. 그들은 1000km 거리의 대양을 10일 안에 항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폴리네시아인들은 멜라네시아(오스트레일리아 북동쪽 남태평양의 섬들)에서 기원전 2500년경에 남태평양의 피지, 사모아 섬까지 진출했고, 기원전 500년 전후로 이스터 섬에 정착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사실이라면, 온갖 작물의 씨앗과 가축까지 실어 나른 문명의 대이동이었다. 이들은 매우 계획적으로 이동했으며 몇 단계를 철저하게 준비해 매우 안전한 이동 경로를 택했다. 계획 이주였던 셈이다.
터키 네발리 코리 돌기둥 석상(위), 볼리비아 티와나쿠 석상 조각
인도네시아人과 수메르 신화
터키 동부의 아나톨리아 고원지대에 위치한 네발리 코리에서 최근 기원전 8000년경에 건설된 신전 유적이 발견됐다. 그런데 대체 역사학자 앤드루 콜린스는 이 신전의 형태와 여기에서 발견된 돌기둥 석상이 티와나쿠의 태양신전, 돌기둥 석상과 너무나 유사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직사각형의 광장, 이를 둘러싼 담장과 돌기둥, 두 손을 앞에 모으고 있는 석상의 모습이 똑같았다. 어떻게 신대륙인 볼리비아(티와나쿠)의 유적과 구대륙 터키(네발리 코리)의 유적이 똑같은 걸까.
티와나쿠 신전의 건축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기원전 1만5000년에 건설됐다는 주장도 있고, 기원전 9300년에 건설됐다는 주장도 있다. 미국의 고고천문학자 닐 스티데는 기원전 1만년이라고 주장했다. 네발리 코리의 신전은 티와나쿠 석상보다 나중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학계에선 판단한다. 두 신전의 유사성이 문명 전파의 결과라는 데는 이견이 거의 없다. 그럼 문명을 전파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동안의 정설은 폴리네시아인들의 조상들이 기원전 6000년경 중국 남부에서 타이완으로 이주했고, 다시 기원전 4500년에서 기원전 3000년 사이에 타이완에서 멜라네시아(오스트레일리아 북동쪽 남태평양의 섬들)로 이동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이론이 최근 뒤집혔다. 유전학적 조사에 의하면 폴리네시아인들의 조상은 중국인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인이다. 따라서 기원전 8000년 이전에 누군가가 신대륙과 구대륙을 연결하는 문명 전파에 간여했다면 그들은 인도네시아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토대로 관련 분야 연구자인 찰스 피어스는 기원전 1500년경의 코카인 무역을 인도네시아의 스파이스 군도에 사는 동남아시아인들이 주도했다고 주장했다. 고도의 항해술을 자랑하던 인도네시아인들이 오랫동안 해상 무역 네트워크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인들의 역사는 기원전 5만년 이전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로 인류가 대이동할 때 시작됐다. 많은 사람이 따뜻하고 자원이 풍부한 지금의 인도네시아 지역인 순다 지구(인도네시아 발리, 우붓, 롬복, 길리 3개 섬)로 몰렸다. 물론 지금은 이 지역 대부분이 바닷속에 잠겨 있다.
半人半魚가 상징하는 것
인류학자 스테판 오펜하이머는 저서 ‘동쪽의 에덴’에서 근동의 고대 문명 기원을 순다 지구에서 찾는다. 그의 유전자 분석에 따르면 이곳의 민족이 빙하기 말기에 근동 지역과 터키 네발리 코리 지역까지 진출했다는 것이다. 그는 수메르 문명의 배경도 그곳이라며 에덴 동산이 순다 지구에 존재했다는 혁신적인 주장을 폈다. 그는 수메르 신화와 거의 동일한 전설들이 동남아시아에 존재하며, 특히 순다 지구의 대규모 쓰나미에 대한 기억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대홍수의 전설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수메르의 신들을 나타내는 조각상들의 타투 형식이 인도네시아의 그것과 흡사하다고 지적한다. 그뿐 아니라 수메르 유적의 가장 오래된 층에서 발견된 몇몇 유물은 사실상 동남아시아의 유물과 동일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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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 신화에서 인류에게 문명을 전해준 이들 문화영웅은 오안네스라는 반인반어(半人半魚)로 묘사된다. 반인반어는 항해 민족을 상징한다. 물고기 비늘로 장식된 의복을 걸친 점에서 엘 프레일레(볼리비아 칼라사사야 유적의 석상)와 동일한 모티프를 갖는다. 네발리 코리가 깊은 산악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발견된 석조상에는 해양 생물의 상징이 새겨져 있다. 결국 가장 오래된 인류 문명은 해양을 지배한 존재들, 이른바 해양왕들에 의해 최초로 전해졌음을 암시한다.
고대 이집트 신화는 태양의 배를 타고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대항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금까지 신화학자들은 태양의 배 운행이 천체로서 태양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해왔다. 하지만 이 신화가 태양을 좇아 세상의 끝까지 항해했던 고대 해양왕들의 행적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을까. 고대 이집트의 대표적인 신 오시리스는 세상 끝까지 가서 문명을 전파한 문화영웅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사실 그 존재는 오안네스와 다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