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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壯觀)은 깨진 기왓장과 똥거름에 있더라”

“장관(壯觀)은 깨진 기왓장과 똥거름에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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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암의 전진은 광적(狂的)이었다. 1780년 7월9일 요양을 떠나 심양, 북진을 거쳐 십삼산까지 일주일 동안 말을 타고 600리가 넘는 거리를 이동했다. 그런 중에도 어느 한 곳에 잠시 머물 때면 몸을 쉬게 하지 않고 뜬눈으로 밤을 꼬박 지새우며 청나라 문물을 샅샅이 살폈다. 허세욱 교수는 2006년 11월22일부터 25일까지 정 많고 호기심 많은 연암의 뒤를 쫓았다.
“장관(壯觀)은 깨진 기왓장과 똥거름에 있더라”

허세욱 교수가 뒤쫓을 연암 박지원의 연행도.

여기 600리는 줄곧 일망무제의 벌판, 연암은 벌판의 짜릿한 전율을 체험했다. 그 전율의 내원은 두 가지. 하나는 지리요, 다른 하나는 역사다. 지리가 준 전율은 무한한 지평선에서의 직관이다. 수레바퀴 같은 붉은 해가 수수밭에서 솟았다가 수수밭으로 슬금슬금 잠기는 그 장엄한 허무를 맛보는가 하면 지평선 위로, 가는 말과 오는 수레 그 점점한 동체가 인상에 심겨 있었고, 고만고만 옹기종기 움직이지 않는 집들을 햇볕 속에 늘어선 깃털로, 절간 앞의 당간을 바다의 돛대로 보는 그러한 시각들이다.

역사가 준 전율은 좀더 앙칼졌다. 요양을 떠나던 날, 아침 연기가 흩어지는 요양성 밖 평원을 보면서 연암은 이렇게 감탄했다.

“어허 참! 여기가 바로 영웅들이 백병전을 벌이던 곳!(噫! 此英雄白戰之地也)… 천하의 안위가 예로부터 여기 요동벌에 달렸거늘(天下安危, 常係遼野) 요동벌이 조용하면 나라 안의 풍진이 일지 않을지요, 요동벌이 소란하면 천하의 병마들이 쇠북을 울릴지다(遼野安, 則海內風塵不動, 遼野一擾, 則天下金鼓互鳴)… 그래서 여기는 중국이 필사코 지키려는 땅이렷다((此所以爲中國必爭之地).”

연암의 7월10일자 일기의 한 대목을 절록(節錄)해보았다. 읽기에 섬뜩했다. 섬뜩한 것은 연암이 중국의 마음을 짐짓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암이 심양에서 분명한 톤으로 ‘심양은 본디 조선의 땅이다(瀋陽, 本朝鮮地), 혹자는 한(漢)나라가 사군을 둘 때 낙랑이 다스리던 곳이라고 했으나, 위·수·당 때는 고구려에 속했던 곳(或云漢置四郡, 爲樂浪治所, 云魏隋唐時屬高句麗)이다’라고 밝힌 만큼 일기의 행간에는 우리 고구려가 평양 천도를 단행한 427년 당시 바로 이 벌판에서 쇠북을 울리다가 호시탐탐 동진하는 수·당에 밀려 결국 남쪽으로 떠밀린 역사를 회고한 것이다. 그 천도와 함께 북으로는 요하 상류(시라무렌강), 서로는 대릉하 하류까지 뻗었던 고구려가 범의 울부짖음과 용의 틀임을 접었던 곳이다.

수레와 다리에 눈이 휘둥그레



그러한 ‘필쟁지지(必爭之地)’를 지나서 닿은, 연행의 최북단 심양은 더구나 굴욕의 땅이요 선망의 땅이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하고, 우리의 진품을 조공으로 빼앗기고, 우리의 왕자를 인질로 잡혔던 그 침략의 총 지휘소였고, 연암이 이틀 밤이나 꼬박 뜬눈으로 탐문한 골동품가게 예속재나 비단 점방 가상루 같은 부상(富商)이 즐비했던 곳이다.

연암이 배배 뒤틀린 현장이었다. 연암은 야간 통행금지가 엄격했던 행궁의 소재, 심양의 밤을 “누가 나를 찾거든 뒷간에 갔다 해라” 하며 슬며시 숙소를 이탈해 샅샅이 뒤져보았다. 그는 오로지 실학의 기지개를 켜고 있는 청나라의 머리와 가슴을 열어보고팠던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꼭두새벽 세수하고 머리 빗는 일마저 귀찮을 만큼 연암은 지쳤다. 심양을 구경하고 떠나던 날, 그는 말안장 위에 받침대를 깔고 좌우로 하인 창대와 장복이의 부축을 받으면서 드르렁드르렁 도적잠을 잘 만큼 곤했다.

연암이 야간 구경을 나선 것은 다만 지식욕 때문만이 아니었다. 광적인 정열의 투신이었다. 연암의 이렇듯 광적인 정열은 자칫 북학을 향한 단순 논리나 편향 논리로 비치기 쉽다. 그러나 그의 논리는 균형 잡혀 있다. 실학만으로 눈이 어두운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부(富)를 위한 물량에 급급하지도 않았다.

연암은 심양의 문명, 특히 수레를 보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퀴의 높이가 팔꿈치까지 닿는 태평거나 수레 채를 겨드랑이에 끼고 미는 독륜거 등을 보곤, 수레는 뭍에 다니는 배요 움직이는 방이라고 치켜세우는 한편 우리 조선에는 아직도 수레란 것이 없음을 통탄했다. 수레를 말한 김에 연암은 불 끄는 수레 수총차(水銃車)를 비롯해 당나귀가 끌면서 곡식을 찧는 맷돌, 수레를 써서 가루를 치는 체, 고치실을 뽑는 이륜(二輪) 소차(?車)를 신기하게 소개한 나머지 따로 ‘거제(車制)’란 글을 써서 부록했다.

또 이 지방 건설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심양에서 영안교(永安橋)까지 그 진흙 수렁에다 나무를 엮어 200여 리의 다리를 놓은 공법 말이다. 먹줄을 친 듯 정일(精一)한 솜씨라고 극찬했다. 그것은 백성이 수렁을 걷지 않게 하는 배려요, 지방 관가의 재정적 과시였다. 연암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따로 ‘다리(橋梁)’란 글을 쓰면서 ‘다리들은 모두 성문 같은 무지개’라고 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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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욱 전 고려대 교수·중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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