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면 모든 게 OK?
이러한 경험 탓에 인간의 일차적 욕구를 거의 충족한 오늘날의 한국인은 우리 사회를 부당한, 정의롭지 못한, 공정하지 않은 것으로 가득 찬 사회로 인식한다. 우리의 부모가 관행적으로 했던 수많은 일이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공정함에 위배되고 정의로움을 위협하는 행위가 돼버린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앞서 설명한 가족 확장성이나 관계주의를 강조하는 한국인의 특성 때문에 오늘날을 사는 우리는 정의롭지 못한 행동에 더욱 격렬한 비난을 쏟아낸다. 부정부패나 불공정한 행동을 단지 규범이나 법규를 위반한 것이 아닌, 가족을 배신하거나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배반한 패륜적 행동으로 인식하는 측면이 있다.
한국인의 이런 특성은 어찌 보면 미래의 우리 사회를 세계에서 유례없는 속도로 정의롭고 공정하게 바꾸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기현상을 만들어내듯.
정의와 공정성, 공평함, 투명성을 추구하는 시대적 변화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다만 반론의 여지가 거의 없고 절대선처럼 보이는 사회적 가치를 아무런 대가 없이 공짜로 얻을 수는 없다.
흔히 사회적 정의를 절차적 공정성을 통해 찾으려고 노력한다. 너무나도 다양한 요인이 영향을 미치는 복잡한 사회에서 미래를 예측한다거나 절대적 정답 혹은 궁극의 선을 확신하기 힘들 때 절차적 공정성이 해법으로 여겨지곤 한다. 절차적 공정성은 정해진 규칙과 규정대로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원칙을 적용할 때 실현된다고 일반적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어떤 사회적 문제가 일어났을 때 우리는 사건이 일어난 과정이 규정대로 진행됐는지, 원칙은 지켜졌는지 우선적으로 확인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감동시키는 세상의 이야기는 대부분 절차적 공정성을 뛰어넘어서 (혹은 무시해서) 정해진 규정대로 하지 않은 결과다. 규정에 따르면 무너진 건물 잔해에 깔린 사람을 포기하고 나와야 하는데, 규정을 무시하고 목숨을 걸면서 생명을 구하는 소방관 이야기(영화에서는 대부분 조난자를 구하고 자신도 살아남는다)가 대표적이다.
점수 매기기 딜레마

탈출해야 한다는 규정을 무시하고 사람의 목숨을 구한 소방관 이야기는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앞에서 본 소방관, 공무원, 판사의 사례는 절차적 공정성을 무시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더 큰, 또 다른 측면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명문화한 절차나 규칙 대신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암묵적 가치를 따른 것이다. 정의로움과 절차적 공정성은 이렇듯 늘 함께하진 않는다. 때로는 충돌할 수도, 때로는 독립적일 수도 있다.
절차적 공정성과 공평함, 투명함을 중시하다보면 정당화할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는 것만 강조하는 폐해가 생긴다. 그때그때 다르거나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는 규정과 규칙은 존재하기 어렵다. 규칙과 원칙은 예측 가능하고 평가 가능하며 객관적으로 구성하게 돼 있다. 또한 직접 관찰할 수 있거나 수치화할 수 있는 것으로 구성되게 마련이다.
우리 사회가 학벌과 ‘스펙’에 목을 매고, 수학능력시험에 목숨을 걸고, 토플이나 토익 점수에 매달리고, 쓸데없는 수치와 보고서에 매달리는 까닭도 절차적 공정성에 부합하기 위해서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수많은 판단과 의사결정 및 선택의 과정을 세분화해 평가 기준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대학을 평가할 때도, 교수를 평가할 때도 측정 가능한 요인을 선정해 그것을 수치화하고 수치의 조합으로 점수를 매긴다. 정부가 구성한 온갖 위원회도 평가 수치를 만들어내는 일을 한다. 위원들이 주관적으로 평가하더라도 결과는 늘 점수로 제시된다. 공정성을 담보할 숫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창의성, 잠재력을 강조한다. 기업의 신입사원 공채나 대학 입시, 교수 채용에서도 스펙이나 업적이 아닌 창의성과 잠재력을 최우선하는 게 좋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공정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입시나 채용 과정에서 불공정하거나 정당하지 않은 일이 생기면 처벌하겠다는 경고도 잊지 않는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강조한다. 눈에 보이는 빤한 스펙은 무시하라고. 장난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