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호

부하는 왜 게으르고 무능할까? 십중팔구 당신 탓!

  • 허태균 |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입력2015-02-23 15: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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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랫사람이 열심히 일하지 않는가. 그래서 당신이 모든 것을 챙기는가.
    •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진지하게 고민하라.
    부하는 왜 게으르고 무능할까? 십중팔구 당신 탓!
    여러 사안에서 정부의 무능이나 부적절한 대응과 관련한 국민의 비난이 높았는데도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심지어 세월호 침몰사고 때와 그 대처 과정에서 어처구니없는 허술함이 드러났어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부동의 지지율이 최근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다. 1월 말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취임 이후 최초로 지지율이 30% 밑으로 내려앉았다.다수의 전문가가 지지율 하락과 관련해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는데,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집권 초기부터 정부와 정치권은 물론이고 청와대 인사들마저 대통령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불만이 쏟아졌다. 소통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국무회의나 각종 행사에서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대통령과 ‘말씀’을 받아 적는 관료들의 모습이 구설에 올랐다. 이러한 광경은 권위주의를 거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실용주의를 강조한 이명박 전 대통령을 기억하는 국민에게 박근혜 대통령이 구시대적 리더십을 지녔다는 인상을 줬다.

    지난 대통령선거 때 박근혜 후보를 찍은 국민은 이런 형태의 리더십을 지지하지 않았으나 ‘원칙’을 지키고 ‘신중함’을 유지하면서 ‘국정 장악력’을 유지하려면 불가피하게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한동안 이해해준 것 같다. 국민이 정부와 공무원, 정치인을 워낙 신뢰하지 않는 터라 선거 때의 약속과 원칙을 지키려면 대통령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지시하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한심한 추종자’를 원하는가



    그런데 국민의 이해와 인내심이 이제 한계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 주변에서 갖가지 스캔들이 난무하고, 대통령의 눈과 입이 몇몇 측근에게 장악됐다는 느낌이 들면서 국민은 ‘이건 아니다’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국민이 측근 몇 명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경질과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이 문체부 국장과 과장 인사를 직접 챙겼다는 보도가 있었다. 한 일간지 칼럼에는 대통령 명의로 보내는 조화에 대한 얘기가 실렸다. 정부 고위인사가 상을 당했는데, 조화를 보낼지 말지를 대통령이 직접 결정한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국민에겐 대통령이 아주 사소한 일까지 직접 결정하는 것처럼 비칠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이 근무 시간이 끝난 저녁은 물론이고 주말에도 관저에서 보고서만 읽는다는 소문을 떠올려보면, 조화까지 직접 챙기는 게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론부터 말하면 ‘너무 열심히 일하는’ ‘항상 진지한’ 그래서 ‘모든 것을 챙기는’ 리더는 게으르고 근시안적인 부하직원을 둘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만약 일국의 대통령이 이 같은 성향의 리더라면 정치인과 공무원, 더 나아가 국민은 다들 ‘한심한 추종자’가 될 수밖에 없다.

    같은 강연 비싸게 듣기 

    착각과 관련된 내용을 담은 책이 2012년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된 후 필자의 이름이 세상에 조금 알려졌다. 학교, 기업, 공공기관에서 강연할 기회가 많아졌고, 강연료도 학자 중에선 최고 수준으로 올라갔다. 강연 청탁을 자주 받다보니 출강을 요청한 기업이나 기관의 성격을 파악하는 노하우를 익히게 됐다.

    강연을 요청하는 직원이 결정권을 가졌는지 살펴보면 된다. 최고경영자(CEO)나 고위 임원이 직접 강연을 요청하는 때는 예외로 하자. 과장급이나 평사원이 연락해오는 경우 그 사람이 결정권을 가졌는지, 아닌지에 따라 행동이 확연히 다르다. 어떤 직원은 특정 날짜에 강의가 가능한지, 강연료가 얼마인지만 묻고 통화를 끝낸다. 다수의 학자에게 전화를 걸어 강연 가능 여부와 강연료만 알아낸 뒤 보고하면 상사가 그중 한 명을 낙점하는 것이다. 이처럼 결정권이 없는 직원들은 내게 강연해달라고 간절하게 요청하지 않으며, 일정이 맞지 않으면 조정해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강연료를 깎아달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필자는 이런 직원들의 전화는 건성으로 받는다. 요청한 날짜에 선약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약속을 잡기도 한다. 강연료를 일부러 비싸게 부른 적도 있다. 왜 그랬을까.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 중에서 낙점을 받아야 상황은 누구에게나 유쾌하지 않다.

    반대로 어떤 직원은 강연을 꼭 해달라고 매달린다. “훌륭한 강의로 알고 있다”면서 “다른 사람은 안 된다”고 말한다. 일정이 안 맞는다고 하면 조정해 보겠다고 제안한다. 그러면서 강연료를 물어본다. 회사에서 책정한 강연료가 부족할 경우에는 “어떻게 안 되겠느냐”고 읍소한다. 때로는 곧바로 강연료를 조금 올리면서 협상을 시도한다. 그렇게 매달리면 명색이 교수인데 강연료가 낮다는 이유로 거절하기는 힘들다. 이럴 때는 평소보다 낮은 강연료를 감수하거나 심지어 선약을 취소하면서까지 출강하기도 한다. 그 직원이 필자를 강연자로 초청하려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성의 없는 직원과 최선을 다하는 직원의 차이는 무엇일까. 결정권이다! 전자는 모든 것을 상사가 결정한다. 책임도 상사가 질 것이다. 직원은 정보를 모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전달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누가 낙점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꼭 와달라고 읍소하거나 강연료를 낮춰달라고 매달릴 까닭이 없다. 그냥 받아 적어서 보고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상사로부터 거의 전권을 위임받은 직원은 결과물에 책임을 진다. 당연히 최고의 강사를 초빙하려고 노력한다. 최적의 강사는 강연료가 높게 마련이어서 예산 범위에서 해결하고자 읍소도 하는 것이다. 필자의 경우 직원의 태도가 전자일 때보다는 후자일 때 출강을 결심하게 된다. 그것도 더 낮은 강연료를 받고.  

    쥐나 사람이나 똑같다!

    많은 리더가 부하직원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면서 그들을 독려할 목적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더 꼼꼼하게 챙기려 한다. 그 결과 사소한 결정도 리더가 행사하면서 부하직원들은 그저 시키는 일만 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권력의 적절한 분산은 리더십의 요체다. 결정권을 나눠주면 부하직원은 열정을 갖고 알아서 일한다. 결정권을 주는 것은 단지 일을 더 열심히 하게 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조직원들의 업무 만족도와 정신건강, 행복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결정권은 ‘통제감’과 직접 연결된다. 내가 하는 행동을 스스로 결정해서 원하는 사건과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인식이 통제감이다. 통제감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동물이 추구하는 본질적 욕구 중 하나다.

    하나의 전기 쇼크 시스템에 쥐 두 마리를 묶어놓고 전기 쇼크가 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 연구가 있다. 두 마리 쥐는 같은 시스템에 연결돼 있으니 전기 쇼크의 강도, 시간, 양은 동일하다. 다만 두 마리 쥐는 통제감에서 차이가 있었다. 한 쥐는 전기 쇼크가 시작되면 앞에 있는 버튼을 눌러 충격을 멈추게 하는 결정권을 가졌다. 반면 다른 쥐에겐 그런 버튼이 없었다. 두 쥐가 똑같은 전기 쇼크를 받았는데도 버튼을 누를 수 있던 쥐가 그렇지 않은 쥐에 비해 스트레스가 낮고 정신건강 상태가 좋게 나타났다.

    이 연구 결과는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고통 받느냐 고통 받지 않느냐와 같은 객관적 사실과 무관하게 결정권을 가졌다는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심지어 쥐한테도 그렇다는 얘기다.

    무기력의 원인

    부하는 왜 게으르고 무능할까? 십중팔구 당신 탓!

    박근혜 대통령이 1월 15일 2015년 정부업무보고경제혁신 3개년 계획Ⅱ에서 수첩을 보고 있다. 박 대통령의 수첩은 만기친람 리더십의 상징이다.

    인간은 결정권, 통제감을 획득하려다 ‘착각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일례로 주사위 2개를 던져 특정 숫자가 나오면 이기는 룰의 게임을 할 때 다수의 사람이 이상한 행동을 한다. 작은 숫자가 나와야 하는 상황에서는 주사위를 살살 던지고, 큰 숫자가 나와야 할 때는 주사위를 강하게 던지는 경향이 있다. 살살 던지면 작은 숫자가 나오고, 세게 던지면 큰 숫자가 나온다? 말도 안 되는 짓이지만 다수가 그렇게 한다. 운마저 통제하려는 인간의 바람이 ‘착각적 통제감’을 만들어낸 것이다.

    사례 하나를 더 들어보자. 로또가 주택복권보다 중독성이 더 강하다. 왜 그럴까. 번호를 직접 고르기 때문이다. 복권 번호를 내가 결정하건, 남이 골라주건, 정해진 번호를 받건 당첨 확률은 같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번호를 직접 고르기를 선호한다. 왜? 자신이 당첨 번호를 맞힐 수 있다는 착각적 통제감 때문이다. 당연히 턱도 없는 착각이다. 착각적 통제감은 인류의 보편적 특성으로 모든 인간에게서 날마다 수많은 상황에서 일어난다.  

    통제감은 실제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지와 무관하게 인간의 사회 적응에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다. 통제감을 느끼지 못하면 무기력증이 나타난다. 다수의 사람이 결과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순간만 보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미래를 보면 결과보다는 결과의 해석이 더 중요하다. 미래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각되는 수반성(contingency)’이다. 특정한 요인이나 행동에 따른 결과가 인과적으로 연결됐는지가 그것이다. 즉, 실패하더라도 왜 실패했는지 아는 것(혹은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성공하더라도 왜 성공했는지 아는 것(혹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패/성공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

    부하는 왜 게으르고 무능할까? 십중팔구 당신 탓!

    시대 변화에 따라 바람직한 리더의 모습도 바뀐다.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하고 싶어 하지만, 왜 성공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성공이 반복되면 성공을 위해 앞으로 할 일이 사라진다. 근거 없는 실패만큼이나 근거 없는 성공도 나쁜 일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성공이 반복되더라도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근거 없이 반복되는 실패가 가져오는 무기력감은 더 설명할 것도 없다. 삶의 한 영역에서 형성된 무기력은 삶의 다른 영역으로 퍼져나간다.

    결정권을 갖지 못한 직원은 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인지하지 못할뿐더러 조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수반성을 지각하지도 못한다. 이들이 갖는 무기력증은 조직 내에서의 다양한 업무와 활동뿐 아니라 심지어 조직 밖의 다양한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결정권과 통제감에 대한 욕구는 한국인에게서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서양인과 동양인을 비교한 서구의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동양인은 대체로 비슷한 성향을 가졌다고 한다. 일본인과 서양인을 비교한 연구 결과를 가지고 한국인을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다. 하지만 한국인의 눈에 한국인과 일본인은 너무나도 다르다. 일본인의 눈에도 마찬가지다.

    너무도 주체적인 한국인

    한국인과 일본인은 특히 주체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일본인에 비해 한국인은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판단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자율성에 대한 욕구가 강한 것이다. 한국인은 이미 정해진 대로, 다시 말해 타인이 정한 대로 조용히 따라가기보다는 스스로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해 존재감을 확인하고 드러내기를 좋아한다. 이런 한국인에게 ‘그냥 정해진 대로 하세요’라는 말은 시비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한국의 건설 현장에선 설계도, 규범, 원칙보다 경험 많은 십장의 판단이 중요하고 실제로 십장에게 상당한 결정권이 주어진다. 십장에게 권한을 주지 않으면 현장에서 문제가 일어난다. 현장주의, 유연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주체적인’ 것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자율권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한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앞서 설명했듯 자율권과 결정권이 없으면 무기력해진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서양인은 주체성이 강하기에 당연히 자율권과 결정권을 가지려 한다. 이 같은 이유로 서구 사회는 분권화가 이미 생활화해 있어 상대적으로 낮은 직위의 직원들도 자율적인 결정권을 가졌다.

    극단적인 예가 미국에 입국할 때 가장 먼저 만나는 출입국관리 담당 직원이다. 이들은 학력이 별로 높지 않은, 제복을 입은 말단직원에 가깝다. 그런데도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국인의 입국 여부를 결정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물론 기준과 원칙이 있지만, 위험해 보이거나 불법체류할 것 같은 인상을 받은 것만으로도 외국인을 괴롭힐 수 있다. 완전히 주관적이면서 자율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흑인 용의자를 총기로 사살한 백인 경찰관들 때문에 미국 사회가 몸살을 앓고 있다. 유사한 사건이 반복되는 데다 가해 경찰관 대부분이 처벌을 받지 않기에 반발이 거세다. 미국의 사회 시스템이 경찰관들의 총기 사용과 관련해 상당한 자율권을 부여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용의자를 향해 총을 쏴야 한다고 판단할 권리는 현장의 경찰관에게 있다는 대원칙이 존재한다. 

    반면 한국인은 주체성이 강한데도 그것에 걸맞은 자율성을 누리지 못해왔다. 개인에게 자율성을 부여할 만큼 사회적 신뢰도가 높게 형성되지 못했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한국인의 심리적 특성에 어울리는 자율성을 부여받지 못하는 상황인 터라 급격하게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일본인은 커다란 조직의 톱니바퀴 같은 존재로 완결성을 추구하지만, 한국인은 그런 상황을 재미없어한다. 한국인에게 신바람 나는 조직과 환경은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곳’이다. 부하직원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모든 것을 챙기려 하는가. 그것이 옳은 방법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게으르고 무능한 리더가 되라?

    우리는 질곡의 근대사를 보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냈다. 경제 발전을 이루는 과정에서 노동의 가치를 특히 강조했다. 성실, 근면, 조직을 위한 무조건적 희생, 봉사와 충성 등이 한국 사회 발전의 원동력 구실을 했다. 국가의 리더를 비롯한 모든 국민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노력했기에 이뤄낸 발전이다.

    부하는 왜 게으르고 무능할까? 십중팔구 당신 탓!
    허태균

    1968년 출생

    고려대 심리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 문학석사(일반심리학)·노스웨스턴대 철학박사(사회심리학)

    저서 : ‘가끔은 제정신’


    경제 발전 과정에서 남보다 더 교육받고 전문성을 갖춘 소수의 리더는 그들을 따르는 사람에게 모범을 보여야 했다. 책임감을 가졌으며, 더 열심히 일하고, 모든 것을 챙기고, 앉으나 서나 뭔가를 하는 모습을 이상적 리더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변했다. 조직은 복잡해지고 거대해지고 체계화했다. 소수의 리더가 아닌 다양한 전문가가 각자의 영역에서 책임감과 자율권을 갖고 일하는(일해야 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어쩌면 좀 더 게으르고 무능한(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나 게으르고 무능한 척하는) 리더가 등장해 더 많은 한국인이 주체성을 마음껏 발휘하며 살아가는 환경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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