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짜 명성황후 사진이 어느 것인지 증언해줄 수 있는 대한제국 황실가계 내 인물로 순종의 부인 순정효황후 윤비와 고종의 형수인 흥친왕비, 그리고 순종의 동생 영친왕 등이 있다. 그러나 윤비는 1966년, 영친왕은 1970년, 흥친왕비는 1974년에 각각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해외에서 명성황후의 (것으로 알려진) 사진이 발견돼도 정작 이것을 보고 “맞다”고 해줄 사람이 없어 논란은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궁녀 사진이 교과서에
1970년대 초까지는 별 이견 없이 사진 A1, A2, A3, A4가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통했다. 하지만 그 권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주로 해외에서 들어온 몇몇 사진 탓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B1, B2, B3, B4 등이다.
일군의 사람들이 A1~4가 틀리고 B1~4가 맞다고 주장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에 ‘문명개화(?)한 서양 사회가 제시한 새로운 사진’이라는 점이 외형적 위세를 뽐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A1~4의 여인이 권위 있는 관복이 아니라 조촐한 평복 차림인 탓에 일국의 왕비 같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가지 근거 모두 부실하다. 당시 우리보다 선진화한 서양 사회라고 해도 그들의 구한말 선교사나 교육자, 여행가가 국내의 쟁쟁한 정치가, 사학자, 언론인보다 조선의 사정에 정통하다고 볼 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왕비가 평상복을 입은 채 사진 찍는 것은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평상복을 입었으니 왕비가 아니다’는 주장은 근거 없는 폄훼일 뿐이다. 평복 차림의 고종, 순종, 그리고 사대부 관리들의 사진 자료가 다수 남아 있으므로 이 점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B1~4가 명성황후 사진으로 주장됐다가 사그라진 것은 무엇보다도 사진 속 여성의 의상이 궁녀나 상궁의 복장(B1, B2, B3), 또는 이국인의 낯선 복장(B4)이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왕비가 무슨 비상사태가 아니고서야 사진을 찍으면서 궁중녀의 옷을 입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다. 그런데도 1975년 한 언론인이 해외에서 도서 한 권을 발견하고는 그 안에 실린 사진(B1)을 명성황후라고 소개하고, 몇몇 역사학도가 틀림없는 명성황후라고 맞장구치는 바람에 B1은 1977년부터 국정교과서에 실렸다. 1990년대가 돼서야 “사진 속 여성은 궁녀”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교과서에서 삭제됐다.
B2와 B3도 비슷한 사정으로 명성황후 진짜 사진 후보군에서 탈락했다. B4는 복장, 헤어스타일, 얼굴 생김새 등이 도무지 한국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다. 게다가 외국인들이 주장하는 명성황후의 사진이나 세밀초상화(사진을 토대로 그렸거나 해당 인물을 본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린 그림) 속 명성황후 모습은 각각 다르다. 그것들 중 어느 두 개라도 같거나 비슷한 것이 없다는 사실은 그들의 정보가 제한적이고 부분적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필자는 A1~4가 명성황후의 진짜 사진이라고 본다. 위에서 언급했듯 구한말 평상복 차림의 사진이나 초상화는 신분 계층을 가리지 않고 흔하게 발견된다. 왕비라고 해도 사적 공간에서는 관례복보다는 평상복 차림으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을 것이다. 더구나 흰색 평복은 일상적으로 입는 옷일 뿐, 우리가 지레 연상하는, 속죄할 때 입는 특별한 소복(素服)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A1~4를 명성황후의 진짜 사진으로 판단하는 이유는 이러한 유추해석에만 그치지 않는다. 필자는 20여 년에 걸쳐 이와 관련한 자료를 추적해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4가지 결정적 근거를 찾아냈다.
첫째,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이 1910년 2월에 출간한 책 ‘독립정신’ 초간본에 대원군, 고종, 명성황후의 사진이 실렸다. 명성황후 사진 아래에는 ‘명셩황후’라고 적혀 있다. 이 사진이 현재까지 발견된 명성황후 얼굴에 관한 가장 오래된 고증 기록이다. 구한말에 조선인이 쓴 책에 아무 사진이나 게재했겠는가.
게다가 이승만이 어떤 인물인가.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익히고 독립협회 등을 통해 조선 근대화운동의 선봉에 선 인물이다. 당시로는 매우 드물게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고종을 비롯한 권부 실세와 직간접적으로 교류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가 당대 사회 지도층의 여러 가지 면모에 어두웠을 리 만무하다. 더욱이 출판사 대동신서관을 설립해 ‘독립정신’ 출판에 협력한 31명의 동지가 하나같이 명성황후의 얼굴을 모른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