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는 날이 있으면 잃는 날도 있는 법. 오늘도 많은 이를 한숨짓게 만드는 주식투자와 선물거래처럼, 식민지시대 초기자본주의는 한 꺼풀만 벗기고 나면 투전판과 크게 다르지 않은 미두시장을 인천에 만들어 팔도의 ‘꾼’들을 끌어 모았다. ‘고위험 고수익’의 이 제로섬 게임에서 투자하는 족족 대박을 터뜨려 신(神)으로 추앙받던 청년갑부 ‘반지로’. 그러나 순간의 판단착오로 전재산을 날리고 나이 서른에 중풍을 얻어 “쌀값이 오른다”고 중얼거리며 시장을 전전하다 생을 마감하는데….
반복창의 흥망성쇠를‘김복천’이라는 가명으로 기술한 ‘삼천리’1929년 7월호의 ‘백만장자가 몰락한 신화’와 인천의 미두취인소(작은 사진).
인천에서 출발한 임시급행열차가 경성역에 도착하자, 이번엔 대기하고 있던 수십대의 자동차가 하객을 맞았다. 당시 서울 시내에 운행 중이던 자동차는 다 합쳐도 200여 대에 지나지 않았다. 인천에서 출발한 하객들은 신발에 흙 한 번 안 묻히고 결혼식이 열리는 장곡천정(長谷川町·지금의 소공동) 조선호텔까지 갈 수 있었다. 자동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선 조선호텔 앞 태평통(태평로)의 풍경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장관이었다.
화려한 결혼, 초라한 최후
‘미두왕’ 반복창과 ‘원동(원서동) 큰 재킷’ 김후동의 결혼식은 오전 11시30분 조선호텔 대연회장에서 화려하게 거행되었다. 요시마쓰 인천부윤이 몸소 축사까지 낭독한 반복창의 결혼식은 유럽의 왕실 결혼식을 방불케 할 정도로 호화로웠다. 결혼식 당일 비용만 3만원(현재가치 30억원)에 달했다. 이날 반복창의 결혼식은 20여 년 후까지 조선을 대표하는 호화 결혼식으로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김팔연 : “서울서 결혼식을 호화롭게 한 이가 누구일까?” 복혜숙 : “반복창일걸. 본명보다 반지로(潘次郞)라는 일본 이름이 더 유명하지요. 미두를 해서 30만원인가 하는 거금을 벌었는데 부자가 되고나서 처음 한 일이 큰집 짓고 좋은 색시 얻어서 장가든 것이었어요. 인천 해안에다가 아방궁 같은 큰집을 짓고 신부를 골랐는데 인천이 좁다고 서울에 올라와서 여학교를 죄다 뒤졌거든. 그중에서 경성여자고보에 다니는 김후동이란 처녀를 골랐다는구만. 김후동이가 누군가 하니 저 유명한 ‘원동 재킷’의 언니였지요. 나도 보았는데 얼굴이 그냥 꽃이에요. 참말 미인이거든.” 이서구 : “그렇지. 나도 보았는데 선녀 같았어요. 그 여자가 조선서 처음으로 치마 끄트머리에 수를 놓아 입었지. 그 여자가 시작이었어. 김후동은 바이올린도 잘했지. 반복창의 결혼식은 인천서 신사 다수를 초청해 조선호텔에서 거행했는데 인천부윤이 축사도 하고 떠들썩했었지.” (‘장안 재자가인, 영화와 흥망기’, ‘삼천리’ 1939년 1월호) |
1921년 5월, 조선 초유의 호화 결혼식을 올린 반복창은 그로부터 18년 후인 1939년 10월 인천 송림리(송림동) 나무집 곁방에서 불혹의 나이에 초라하게 세상을 떠났다. 반복창이 죽은 날은 마침 인천 미두시장이 문을 닫기 직전이어서 또 한 번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미두로 흥망성세를 다 맛본 풍운아 반복창이가 미두시장과 함께 저세상으로 가버렸다”고.
사십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전 인천 경제력의 30%나 차지하던 조선취인소 인천미두부는 청산시장(淸算市場)으로서 앞으로 십여 일만 지나면 조종(弔鐘)을 울리게 된다. 인천에 미두시장이 생긴 이래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던 미두왕으로 한때 그 이름을 떨친 반지로도 사십 평생을 미두시장과 떨어지지 못하더니 미두시장의 조종과 함께 지난 18일 오전 8시 세상을 떠났다. 반지로는 오십만원이란 거대한 돈을 미두시장의 방망이 소리 한 번에 주머니에 넣었다가 또 한 번의 방망이 소리에 오십만원은 간 곳이 없어지자 정신병에 걸려 이십년 동안이나 신음을 하면서도 바람과 추위를 피하지 않고 며칠 전까지도 미두시장을 기웃거렸다. 반지로가 미두시장과 같이 세상을 떠나게 되니 그와 미두시장과의 인연은 죽음까지도 함께하게 된 셈이다. (‘취인소와 함께 사라진 인천의 반지로’, ‘조선일보’ 1939년 10월23일자) |
당시의 미두시장 입회장면을 묘사한 ‘동아일보’1939년 11월9일자 기사와 이를 풍자한 만화(위).
반복창은 인천에 미두시장이 개설된 지 4년 후인 1900년, 강화도 이방(吏房)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지방관아의 실무책임자였던 만큼 어린 시절 반복창은 풍족한 환경에서 지냈다. 그러나 1910년 강제합방 이후 부친이 직장을 잃자 반복창의 가정은 급속히 기울었다. 호구지책으로 부친은 장사를 시작했지만 손대는 족족 큰 손해를 보았다.
거듭되는 사업실패로 화병까지 얻은 부친은 반복창이 열두 살 되던 해에 빚만 잔뜩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현직에 있을 때 부친에게는 의형제까지 맺은 절친한 친구가 여럿 있었다. 하지만 부친이 아전에서 쫓겨나고 사업에 실패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자, 그 많던 친구 중 어느 누구도 반복창의 가족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부친을 잃은 슬픔에 잠길 틈도 없이 열두 살 소년 반복창은 생활전선으로 내몰렸다. 강화도에서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배를 타고 인천으로 나가 아라키(荒木)라는 일본인 집에 아이 돌보는 하인으로 들어갔다.
아라키 중매점의 ‘반지로’
개항 직후 화륜선을 몰고 인천으로 건너온 아라키는 한강 수로를 따라 인천과 한양을 오가면서 곡물을 운송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 인물이었다. 1896년 인천에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미두시장)’가 들어서자 ‘아라키중매점’이라는 미두 중매점을 차렸다. 오늘날로 치면 ‘취인소’는 선물(先物)거래소, ‘중매점’은 선물회사에 해당한다.
미두시장은 쌀과 콩을 현물 없이 10%의 증거금만 가지고 청산거래 형식으로 사고팔던 곳이다. 처음에는 쌀 외에도 콩, 면화, 명태 등이 거래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쌀 한 품목만 남았다. 기간을 두고 쌀을 거래하는 시장이라고 해서 ‘기미(期米)시장’이라고도 불렀다. 미두시장에서 현물거래가 이뤄지는 쌀도 있었지만, 전체 거래량의 0.5%에도 못 미쳤다. 원래는 미곡의 품질과 가격의 표준화를 꾀하기 위해 설립된 시장이지만 실제로는 공인된 ‘도박장’처럼 운영됐다.
미두의 최소 거래단위는 100석이었다. 쌀을 사거나 팔려면 중매점에서 ‘미두통장’을 개설해 10%의 증거금을 예치해야 했기에 미두를 하려면 최소한 100원은 있어야 했다. 그때 돈 100원이면 평범한 월급쟁이 두세 달치 봉급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거래를 체결한 당월 말에 청산하는 ‘당한(當限)’, 다음달 말에 청산하는 ‘중한(中限)’, 다음다음달 말에 청산하는 ‘선한(先限)’ 세 가지 형태의 거래방식이 있었는데, 거래는 가격의 변동폭이 큰 ‘선한’에 집중됐다.
결제일에는 쌀과 현금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차액만큼 현금을 주고받는 것으로 청산이 이뤄졌다. 결제일이 되기 전이라도 쌀값이 등락해 증거금이 10%에 못 미치면 부족한 만큼 채워넣어야 했다. 만일 채워넣지 못하면 다음날 반대매매로 청산됐다. 가령 쌀 100석을 300원의 증거금으로 석당 30원씩에 샀다면 쌀값이 3원만 오르내려도 두 배를 벌거나 깡통을 차게 되는 전형적인 ‘고위험 고수익’ 거래였다.
열두 살 소년 반복창은 아라키의 집에서 아이를 보면서 그 자신도 자랐다. 그렇게 2년을 지낸 후 반복창은 아라키중매점의 ‘요비코(呼子·미두 시세를 전하는 아이)’로 들어갔다. 열네 살 소년 요비코 반복창의 주 임무는 중매점에 모여 앉은 미두꾼에게 인천과 오사카의 미두시세를 소리를 질러 전달하는 것이었다.
미두시세는 그해 농사의 풍흉(豊凶), 날씨, 거래량, 정치, 경제적 변인 등에 두루 영향을 받았지만, ‘오사카도지마취인소(大阪堂島取引所)’의 미두시세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다. 조선산 쌀의 가장 큰 소비지가 일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인천과 오사카 사이에는 전화선이 깔리지 않아 모든 연락은 전보를 통해 이뤄졌다. 미두 거래는 오전에 열리는 전장(前場)에서 10회, 오후에 열리는 후장(後場)에서 7회로 하루에 총 17번 이뤄졌는데, 쌀값이 오르다가도 오사카 시장에서 쌀값이 떨어졌다는 전보가 날아오면 다음 거래에서는 상승세가 꺾이기 일쑤였다.
거래 성립을 알리는 딱딱이 소리 한 번에 기백, 기천원이 오가는 곳이 미두시장이었다. 미두꾼에게 시세를 외치고 다니면서 반복창은 언젠가 자신도 미두로 일확천금을 하겠다는 꿈을 키워갔다. 철들면서 보고들은 게 미두뿐이다 보니 반복창에겐 미두가 세상의 전부였다. 아라키는 먹는 것 자는 것 제하고 반복창에게 월급조로 한 달에 6원씩 주었다. 터무니없는 박봉이었지만 미두 밑천이라 생각한 반복창은 허투루 쓰지 않고 악착같이 모았다.
밑천만 있다고 미두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반복창은 일과가 끝나면 괘선(罫線·그래프)을 그려가며 밤을 새워 그날그날의 시세를 연구했다. 보통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한 그였지만 독학으로 일본어를 깨쳤고 경제학사 뺨칠 만큼 해박한 경제지식을 쌓았다.
1918년, 아라키는 열아홉 살 반복창을 ‘바다지(場立·중매점의 시장대리인)’로 발탁했다. 축하의 의미로 ‘지로(次郞)’라는 일본식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반복창은 아이 돌보는 하인으로 들어간 지 6년 만에 아라키중매점의 2인자 ‘반지로’로 꿈에도 그리던 미두시장에 데뷔했다.
아라키의 협잡과 파산
반복창이 ‘바다지’로 승진한 직후 4년을 끌어오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전후복구 사업이 본격화하자 일본 경제는 유례없는 대호황을 누렸다. 소득이 늘어나 쌀의 소비가 증가한데다 그해 가을 흉년이 들어 쌀값이 폭등했다. 시세변동이 거의 없어 한동안 소강국면을 보이던 미두시장이 갑자기 후끈 달아올랐다.
선물시장인 미두시장은 어차피 ‘제로섬게임’이었다. 쌀값이 오르거나 내리거나 딴 사람의 이익과 잃은 사람의 손해를 합치면 결과는 언제나 ‘0’이었다. 오르고 내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변동폭이 얼마나 큰지가 중요했다. 쌀값의 폭등세나 폭락세는 그만큼 ‘대박’과 ‘쪽박’의 가능성이 커짐을 의미했다.
하루 사이에 쌀값이 10원씩 20원씩 오르내리자 노름판은 더 커진 셈이었다. 인천미두취인소에서 하루에 백만 석의 거래량을 넘긴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미두판의 호황은 굉장했다. 구름같이 금시 잡힐 듯 잡힐 듯이 눈앞에서 뻔히 보이는 황금을 못 잡는 수만의 팔도(八道) 미두꾼의 안색은 창백해져 갔다. 하루 열일곱 번이나 바뀌는 미두시세에 미두꾼의 마음인들 얼마나 초조했으랴. (‘흥망의 환무 반세기(5)’, ‘동아일보’ 1939년 11월16일자) |
최소 거래단위가 100석이었던 만큼, 쌀값이 하루에 10~20원씩 오르내린다는 것은 미두시장에 참가한 사람은 하루에 최소 1000~2000원씩 따거나 잃었다는 말이다.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하루에 ‘최소’ 1억~2억씩 따거나 잃은 셈이다. 100~200석 단위로 거래하는 ‘마바라’(잔챙이 미두꾼)가 그럴진대, 천석 만석 단위로 거래하던 큰손들은 어떠했겠는가. 시세 변동을 알리는 딱딱이 소리 한 번에 미두꾼들은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했다.
투기적 거래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던 아라키가 하늘이 내린 이 기회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화륜선을 부리던 뱃사람이었던 만큼 아라키는 천기(天氣)를 잘 보았다. ‘천기상장(天氣相場·날씨 시세)’이라는 미두 용어가 있을 만큼 비가 오고 안 오고는 미두시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1년 중 ‘천기상장’이란 미두꾼이 한몫 보는 대목인데, 아라키는 비 오고 안 오는 천기를 잘 보는데다가 바다 생활을 오래한 만큼 그 성질이 자못 대담무쌍해서 여름 한철 천기상장은 가위(可謂) 독무대로 휘저었다. 그러나 비 오고 안 오는 것이 시세와 전혀 상관없는 봄 겨울 시세를 천기를 본다고 맞출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여름철 천기상장 맞추던 대담함으로 봄겨울 시장에 들이덤볐으니 그것이 어림이나 있겠는가. 팔면 오르고 사면 떨어져 나중에는 증거금이 부족해 야단이 났다. (‘미두꾼의 흥망성쇠기’, ‘조광’ 1939년 9월호) |
파산 위기에 몰린 아라키는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19년 1월, 3개월간의 폭등세를 멈추고 쌀값이 폭락하자 ‘쌀값은 결국 오를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아라키는 반등에 대비해 투기적으로 쌀을 매수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쌀값 폭락세는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어리석은 조선인들. 오냐, 그래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보자!’
아라키는 쌀값이 떨어지면 사고, 또 떨어지면 더 사는 식으로 ‘매수’에 돈을 걸었다. 만석씩, 이만석씩 사다 보니 어느덧 매수해놓은 쌀이 10여만석에 달했다. 혼자서 10만년은 족히 먹을 수 있는 쌀을 매수해놓고 쌀값이 반등하기를 초조히 기다렸지만, 쌀값은 찔끔 오르다가 크게 떨어지기를 거듭했다. 매시간 전보로 날아오는 오사카 미두시세도 절망적이기만 했다.
‘당대 최고의 호화 결혼식’이었던 반복창과 김후동의 혼인을 풍자한 만화.
손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자 아라키는 평소 친분이 두터운 오사카도지마취인소 직원에게 전보를 쳤다.
‘시세와 상관없이 무조건 올랐다고 타전해주게.’
전보 시세조작은 당시 인천 미두시장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던 일이었다. 아라키의 조작으로 오사카에서 쌀값이 오르든 내리든 인천에는 오사카의 쌀값이 올랐다는 전보가 날아왔다.
아라키는 거짓 전보로 협잡을 하여 인천 시장을 통으로 삼키려는 불타는 야심에 자꾸만 샀다. 진인사 대천명이란 이에 적용될 문구이런가. 인천 시세는 거짓 전보에도 아랑곳없이 떨어지기만 했다. 인천 시장의 미두꾼들은 아라키가 사면 팔고 또 사면 또 팔았다. 아라키는 억센 미두꾼들에게 여지없이 패배했다. 오사카의 거짓 전보도 보는 체 마는 체 인천 시세는 자꾸 떨어지기만 했다. 인천 미두꾼들의 줄기찬 매도 공세로 도리어 인천 시세가 오사카 시세를 끌어내렸다. (‘흥망의 환무 반세기(5)’, ‘동아일보’ 1939년 11월16일자) |
교활한 일본인 미두꾼에게 연전연패하던 조선인 미두꾼이 오랜 만에 거둔 호쾌한 승리였다. 하지만 ‘승리의 감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승리는 거뒀으되 딴 돈을 받을 수 없게 된 탓이었다. 아라키는 인천미두취인소 이다(飯田) 사장과 결탁해 현찰 대신 수표로 증거금을 예치했다. 물론 아라키의 수중엔 수표를 결제할 현찰이 없었다. 마지막 기대를 걸었던 전보 조작까지 실패하자 아라키는 취인소에 예치한 180만원 상당의 수표를 부도내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어차피 미두 대금은 거래 쌍방이 직접 결제하는 것이 아니라 취인소를 거쳐서 결제됐기 때문에 ‘매도’에 투자한 미두꾼들은 아라키가 도주하든 자살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취인소에 비싼 수수료를 괜히 내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 발생했다. 자본금이 고작 4만5000원에 불과한 인천미두취인소가 아라키가 부도낸 돈 180만원을 메워넣을 방법이 없었던 것이었다.
미두시장은 부득이 문을 닫게 되었다. 실컷 잃다가 좀 따면 이 꼴이니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앉은 미두꾼의 마음은 얼마나 타고 아팠을 것인가. 원통한 나머지 인천 바다에 투신자살한 사람까지 있었으니 자기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생긴 재앙(自作之孼)이라기보다 신문화에 짓밟힌 과도기 조선의 인적 희생으로서 애처로운 비극이었다. (‘흥망의 환무 반세기(5)’, ‘동아일보’ 1939년 11월16일자) |
아라키의 180만원을 포함한 300여 만원의 부도수표를 떠안은 인천미두취인소는 3·1운동으로 어수선하던 1919년 3월 영업정지를 당했다. 이다 사장을 비롯한 10여 명의 취인소 간부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도주한 아라키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오사카 미두시장을 기웃거리다가 빼돌린 재산마저 모조리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에 돌아갔다.
당시 조선은 인구의 80%가 농민인 농업국이었다. 원활한 경제운영을 위해서는 쌀값을 전국적으로 균일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었는데, 쌀의 공정시세를 결정하는 곳이 바로 미두시장이었다. 방만한 경영으로 파산지경에 이르렀다고는 하나 총독부로서도 이제 막 달아오른 미두시장을 폐쇄상태로 놔둘 수는 없었다. 1919년 6월, 영업정지 석 달 만에 미두시장은 자본금을 100만원으로 늘려 다시 문을 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 미두시장이 다시 열릴 날만 학수고대하던 팔도의 미두꾼들은 다시 인천으로 몰려들었다. 청산대금을 결제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금융사고를 낸 지 불과 석 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파리떼처럼 모여든 미두꾼 중 누구도 주문을 내면서 돈을 못 받을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확천금의 꿈에 취해 목청껏 ‘얏다(판다)’ ‘돗다(산다)’를 외쳤다. 중매점에 죽치고 앉은 각양각색의 미두꾼들 사이에 이제 막 소년티를 벗은 앳된 얼굴의 청년이 있었다. 반복창이었다.
‘미두신(米豆神)’ 반지로
중매점 주인 아라키가 180만원의 거금을 부도내고 야반도주했던 것은, 반복창이 중매점을 대리해 취인소에 나가 중매점으로 들어온 매매주문을 넣는 ‘바다지’ 생활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이었다. 벼락출세를 즐길 여유도 없이 실업자로 전락한 것이었다. 게다가 도망간 주인 탓에 미두시장마저 문을 닫았다. 배운 기술이라곤 미두가 전부였는데, 직장도 잃고 이직할 기회마저 박탈당한 것이었다. 실업자가 된 반복창은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미두시장이 열리길 고대했다.
반복창의 부인 김후동과 그의 아들딸. ‘동아일보’1926년 1월22일자에 실린 사진이다.
큰 손해도 없이, 그렇다고 큰 이익도 보지 못한 채 6개월이 흐른 1920년 1월, 몇 달 동안 지루한 보합세를 이어가던 쌀값이 갑자기 치솟기 시작했다. 아라키를 도산시킨 ‘1918년 겨울장’보다 더 큰 장이었다. 쌀값은 하루에도 몇 원씩 화끈하게 오르내렸다. 큰 규모의 중매점은 하루 수수료가 만원을 넘길 정도로 거래량이 폭증했다.
‘칼 물고 뜀뛰기’ 하는 것 같은 위험천만한 투기장에서 반복창은 연전연승의 신화를 이어갔다. 한 섬에 55원씩 1만섬을 사서 73원씩에 팔아 한 번 거래로 18만원을 벌기도 했다. 마치 귀신이 붙은 것처럼 맞추기를 몇 달. 반복창의 재산은 어느덧 40만원으로 불어났다. 한 달 월급이 5~6원에 불과하던 요비코가 하루아침에 백만장자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천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 천지가 온통 반복창 이야기로 들끓었다.
알 수 없는 것은 운명의 신의 조화라. 반지로는 이상하게도 팔아도 먹고 사도 먹고 거짓말같이 시세를 잘 맞췄다. 날이 가고 달이 가는 동안에 그가 출입하는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과 조선은행 인천지점에는 각각 20만원씩 거금이 예금되었다. 그를 따르는 부하가 매일 30~40명에 달해 그를 미두신(米豆神)으로 추대했다. 그래서 그는 고향 강화도에 가 산도 사고 전답도 사며 인천 부도정(敷島町·지금의 중구 선화동)에 있는 일본인 창기도 조건 없이 여덟 명이나 속신(贖身·양민으로 만듦)시켜 주었다. (‘나르는 새도 못 따르던 지난날의 반지로’, ‘매일신보’ 1930년 2월15일자) |
스물한 살 청년 반복창은 미두꾼으로 나선 지 1년 만에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까지 ‘미두계의 패왕’으로 이름을 떨쳤다. 반복창이 중매점에 나타났다는 소식만 들려도 미두시세가 몇 원씩 오르내렸고, 그가 한번 팔고 사면 오사카 미두시장 시세까지 출렁거렸다.
득의양양해진 반지로는 인천 외리(용동)에 400평 집터를 사고 20만원을 들여 조선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서양식 저택을 지을 계획을 세웠다. 굽어보면 인천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올려다보면 만국공원(지금의 자유공원)이 펼쳐지는 인천 최고의 집터였다. 땅 사고 도면 그리고 지반 다지는 데만 9만원을 들였다. 어른 키 두 배는 됨직한 높고 튼실한 돌담이 완공되어 갈 때쯤, 반복창은 저택의 안주인을 찾아 나섰다. ‘미두신’으로 추앙받던 반복창이 배우자로 간택한 여성은 ‘미의 여신’으로 추앙받던 ‘원동 큰 재킷’ 김후동이었다.
‘원동 재킷’
김후동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느 곳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미인이었다. 반복창과는 동갑이었지만 살아온 환경은 너무 달랐다. ‘돈’과 ‘미모’라는 확실한 경쟁력이 없다면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부부였다. 김후동은 경성여고보에 다닐 때는 바이올린 연주를 잘해 음악회 독주를 도맡아했다. 얼굴이 꽃같이 아름다운데다가 치마 끝자락에 수를 놓아 입고 다녀 뭇 남성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가는 곳이면 어디든 꽃다발과 연애편지를 든 남학생들이 쫓아다녔다.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협박도 무수히 받았다.
미인이라 하면 얼굴만 고와서 되는 것이 아니요 태도만 어여뻐서 되는 것도 아니다. 얼굴과 태도가 다 맞아야 비로소 미인 소리를 듣는 것이다. 세상에는 그런 완벽한 미인이 드물어서 얼굴이 예쁘면 대개는 미인이라 한다. 그러나 처녀시절 김후동 씨야말로 얼굴과 태도와 수족까지 어디 한군데도 빠지지 않는 미인이었다. 발뒤꿈치까지 끌리는 그의 검고 윤기 있는 머리는 그의 아름다움을 돋우었다. (‘반복창 씨 부인 김후동 씨’, ‘동아일보’ 1926년 1월22일자) |
여고보까지 졸업한 미모의 신여성이 보통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한 미두중매점 요비코 출신 졸부와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욱이 김후동은 ‘원동 재킷’ 김화동의 언니였다. 김후동의 명성은 기껏해야 서울 학생들 사이에서나 알려졌을 뿐이지만, 김화동의 명성은 조선 팔도에 자자했다. 김후동이 지역구 명사였다면 김화동은 전국구 명사였던 셈이다. 김화동이 그처럼 유명해진 것은 미모도 미모려니와 1921년 1월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스캔들’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원동 재킷’김화동과 그녀의 정조를 유린한 박석규.
여학교를 졸업한 후, 이화학당에 들어갈 생각도 해보았지만, 자기보다 어린아이들 밑에 들어가서 배우는 게 창피하기도 하고 아니꼽기도 해서 그만두었다. 공부하지 않는 것은 좋았지만 집안에 처박혀 빈둥거리자니 갑갑증이 생겼다. 아침 밥 숟가락을 놓으면 김화동은 놀거리를 찾아 서울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연애를 상징하는 자줏빛 재킷을 걸치고, 연녹색 치마에 붉은 해당화빛 단을 대어 입고, 좀 갸름하고도 고와보이는 어여쁜 얼굴을 화려하게 단장하고, 옆으로 넘긴 트레머리에 일부러 두세 줄 머리털을 이마 앞으로 넘겨놓고, 굽 높은 구두를 발끝으로 디디고, 가는 허리를 맵시 있게 가누면서 아장아장 걸어가는 모양은 목석의 심장이 아닌 이상 누구이든지 그 요염한 아리따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점점 그가 아리땁다는 소문과 늘 속 빈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다닌다 하는 풍설이 점점 널리 퍼진 결과 원동에 사는 재킷 입고 다니는 어여쁜 여학생이라 하면 어지간한 사람은 거의 다 짐작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원동 ‘재킷’의 애사(1)’, ‘조선일보’ 1921년 1월23일자) |
김화동의 바깥출입이 잦아질수록 ‘원동 재킷’이란 명성도 높아만 갔다. 김화동이 대문을 나서면 미모에 넋을 잃고 막무가내로 구애하는 순진한 남학생, ‘학생 밀매음’이라 단정하고 돈으로 정조를 사고자 하는 호색한, 일부러 툭 건드려 보는 불량청년, 어디서 구했는지 사진기를 들고 나타나 사진을 찍자 하는 한량 등 각양각색의 남자들이 달려들었다. 대문 앞에는 날이면 날마다 연애편지가 수북이 쌓였다. 김화동이 다니는 교회에는 반갑지 않은 가짜 신도가 들끓었다. 그러나 김화동은 그런 관심이 전혀 즐겁지 않았다. 그에겐 사랑을 바칠 남자가 아니라 도쿄 유학을 보내줄 남자가 필요했다.
김화동은 무엇보다도 돈 있는 남자! 자기를 도쿄 유학생으로 만들어줄 남자를 애타게 기다렸다. ‘사랑 구걸 편지’ 속에서도 천마디의 사랑한다는 사연보다 돈이 많으니 일본에 같이 가자는 한마디의 사연을 기다리고 고대했으나, 그를 사랑한다는 청년 중에는 그러한 팔자 좋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원동 ‘재킷’의 애사(3)’, ‘조선일보’1921년 1월25일자) |
1920년 봄 동대문 밖 이근호 남작의 별장에 ‘삼성무극교’라는 사이비 종교단체가 문을 열었다. 삼성무극교는 별장에다 ‘어린 벗’이란 잡지사와 정동양행이라는 여성의류업체까지 차렸다. 김화동은 정동양행에서 일하는 친구의 추천으로 ‘어린 벗’의 부인기자로 들어갔다. 일본 유학을 가겠다는 헛된 꿈을 접고 기자 일에 재미를 들이려 할 때, 자기를 추천해준 친구가 정신이 번쩍 드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참 세상에 별일도 많더라. 우리 집에 뚜쟁이가 찾아와서 그러는데 일본 도쿄에서 유학하고 있는 어떤 청년이 인물 곱고 재주 있는 여학생을 구하는데 마음만 맞으면 일본에 데려가서 같이 공부를 하겠다더라.” 이 소리를 들은 김화동은 가라앉으려던 가슴이 다시 뒤숭숭해졌다. “애 그러면, 그 뚜쟁이 집은 어디야?” 물으니 친구는 “뚜쟁이를 찾아가고 싶은가 보구나. 그렇지만 그 남자 돈은 있어도 품행은 썩 좋지 못하다더라”며 까르르 웃었다. (‘원동 ‘재킷’의 애사(5)’, ‘조선일보’ 1921년 1월27일자) |
김화동은 친구에게 주소를 얻어 뚜쟁이를 찾아갔다. 뚜쟁이는 일본대학에 유학 중인 전라도 정읍의 유명한 재산가 박석규가 참한 신붓감을 찾고 있다며 그의 사진까지 꺼내 보여주었다. 김화동은 박석규가 한 번 결혼했다가 상처했다는 말에 마음이 꺼림칙했지만, 찬밥 더운밥 따질 처지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뚜쟁이는 김화동에게 30원을 쥐어주며 사진을 찍어오라고 했다. 사진을 찍어 편지와 함께 일본으로 보내니 얼마 후 박석규가 답장을 보내왔다. 마음에 드니 일본으로 건너오라며 ‘친절하게도’ 100원짜리 지폐까지 함께 보냈다.
김화동은 다니던 잡지사에 사표부터 내고 도항 수속을 밟았다. 일본에 건너가려면 무엇보다도 여행증명서가 필요했다. 그러나 김화동처럼 여행목적이 불분명한 사람에게는 좀처럼 여행증명서를 교부하지 않았다. 고심 끝에 김화동은 평소 친분이 있는 총독부 관리에게 찾아가 “모교의 추천으로 관비유학생에 선발되었는데,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관리는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여행증명서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했다.
김화동은 교부받은 여행증명서와 박석규가 보내준 100원을 모친과 언니에게 보여주며 관비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 유학을 떠난다고 말했다. 1920년 7월, 김화동은 가족들의 축하를 받으며 꿈에도 그리던 일본으로 떠났다. 김화동이 일본으로 떠난 후 김후동은 감사 인사차 동생의 모교를 찾아갔다. 동생의 은사로부터 ‘김화동을 관비유학생으로 추천할 의사도, 추천한 일도 없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김후동은 동생이 모친과 자신을 속인 것을 깨달았다. 경찰에 요청해 동생의 소재파악에 나섰지만, 비극을 막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감언이설로 김화동을 일본에 불러들인 박석규는 김화동이 일본으로 건너오자 단지 욕정을 푸는 대상으로만 대했다. 결혼을 하거나 공부를 시켜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한 달간 욕정을 한껏 풀고는 싫증난다며 다른 여성을 찾아 집을 나갔다. 얼마 후 혼자 남겨진 김화동에게 박석규의 조카가 찾아왔다.
“나의 당숙은 본시 한 여자를 데리고 석 달을 못 사는 사람이고, 고향에는 정식 아내와 아들까지 있으니 하루 속히 당숙의 품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겁니다.” (‘원동 ‘재킷’의 애사(9)’, ‘조선일보’1921년 1월31일자) |
김화동은 피눈물을 흘리며 도쿄를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귀향 경비는 박석규가 구애할 때 사준 시계와 반지를 팔아 마련했다. 모친과 언니에게는 박석규와 한집에서 산 것은 사실이지만 결단코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았다고 둘러댔다. 그러나 한 달 남짓 지나자 김화동의 배가 불러왔다. 모친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며 가기 싫다고 버티는 김화동을 억지로 등 떠밀어 박석규에게 돌려보냈다.
두 번째로 박석규를 찾아간 김화동은 “생사를 그대에게 맡기고자 한다”고 말했다. 박석규는 냉소를 지으며 “그처럼 호기 있게 가더니 다시 온 이유가 무엇이오. 바라건대 이 어리석고 못난 박석규보다 더 나은 사람을 구해 재미나게 사시오”하고 말했다. 치욕을 당한 김화동은 “내가 할 일이 없어서 다시 찾아온 줄 아오. 내 몸에는 그대의 혈육이 자라고 있으니 이 일을 어찌할 것이냐”며 꾸짖었다. 박석규는 독기를 품은 웃음을 지으며 “툭하면 서방을 내버리고 달아나는 계집이 밴 자식을 세상에 제 자식이라고 믿을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오. 공연히 사람을 괴롭히지 말고 그대가 밴 아이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편안히 사시오”라 말할 뿐이었다. (‘원동 ‘재킷’의 애사(11)’, ‘조선일보’ 1921년 2월2일자) |
미두시장의 폐해를 다룬 ‘반도시론’1918년 11월호의 ‘백해무익한 인천미두취인소를 폐지하라’.
‘원동 재킷’ 김화동이 유산한 지 불과 석 달 후, ‘원동 큰 재킷’ 김후동은 미두왕 반복창과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2등석 특별열차를 대절하고, 서울 시내에 돌아다니는 자동차 3분의 1을 동원한 초호화판 결혼식이었다. ‘원동 큰 재킷’의 결혼식에 초대된 하객들 모두 ‘원동 재킷’이 지난 여름 한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형만한 아우 없다’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돌담 안의 네 칸짜리 움막
1921년 5월 반복창은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였다. 400원 밑천으로 40만원 재산을 일구기까지 그가 들인 시간은 고작 1년 남짓이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스물두 살 청년이 앞으로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둘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재산을 1000배나 불린 것은 행운이 따랐다 쳐도,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 온다한들 자기가 갈고 닦은 실력이면 1년에 10배씩은 불릴 자신이 있었다. ‘천천히’ 1년에 10배씩만 불려 나가도 3년 후면 조선 최고, 10년 후면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천 외리에 짓고 있는 저택의 돌담 공사도 거의 끝나가고 조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도 아내로 얻었다.
그러나 결혼 직후 인생계획을 ‘조금’ 수정할 일이 생겼다. 1920년 1월 큰 장이 시작된 이래로 1년 반 동안 단 한 번도 시세예측에 실패한 적이 없던 그가 실패를 경험한 것이었다. 손실을 입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이 구겨진 게 문제였다. 반복창은 그동안의 교만을 반성하고 초심으로 돌아가 매도와 매수에 신중을 기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신중에 신중을 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측은 자꾸만 빗나갔다. 사면 떨어지고 팔면 올랐다. 1921년 한 해 동안에만 10만원 상당의 손실을 입었다. 현금 흐름이 좋지 않아 집 공사도 잠시 중단시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반복창은 인생계획이 1~2년쯤 늦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듬해 더 큰 손실을 보았고, 그 이듬해에는 완전히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인천 외리에 짓고 있던 저택의 규모도 조정이 불가피해졌다.
인천 외리에 짓던 반지로의 집은 실패를 볼 때마다 설계를 줄이고 줄이다가 나중에는 소위 만리장성 같다는 굉장한 돌담과 사백 평의 커다란 집터에 지어진 집은 네 칸짜리 움막이 되어버렸다. (‘눈물과 웃음의 40년사’, ‘조선일보’ 1939년 5월14일자) |
1923년 생계마저 어려워지자 반복창은 아라키가 그랬던 것처럼 특단의 대책을 세웠다. 한창때 그를 ‘미두신’으로 추앙하며 따르던 부하가 30~40명에 달했지만, 실패를 거듭한 이후에는 정우석, 박용하 둘만 남았다. ‘신’이 그처럼 처참하게 무너졌는데 ‘사제’라고 무사할 리 없었다. 세 사람이 남은 돈을 다 합쳐도 최소 거래 단위인 100석을 살 수 있는 밑천조차 마련할 수 없었다. 재기하려면 어떻게든 투자자를 찾아야 했다.
천안군 동리 김세제는 군수를 지내면서 십여 년 전 약 오십만원의 재산을 모았다. 그러나 김세제의 아들 김동한은 호세이대학까지 졸업한 지식인이지만 세상 물정에 어두운 까닭에 일찍이 무뢰한의 유인에 빠져 약 이십육만원을 낭비했다. 미두로 거액의 손실을 본 정우석과 박용하는 반복창과 공모하여 김동한을 찾아가 인천에서 미두취인을 하면 일확천금을 할 수 있다고 권유했다. 자금은 현금이 아니라도 상관없고 그의 부친 김세제의 약속어음만 있으면 되는데 약속어음을 발행할 때 쓸 도장은 새로 새기면 된다고 교사했다. 마침 금전이 필요하던 김동한은 호쾌히 승낙하고 4월11일 아침에 인천에 도착했다. 반복창 일당은 미리 계획한 대로 김동한을 아리타(有田初吉)가 경영하는 ‘기쿠모도’(菊筏登)란 요릿집에 데리고 가서 술과 기생으로 온갖 유흥을 제공했다. 이튿날 13일에는 김동한이 위조한 김세제의 악속어음 이만원으로 기타지마(北島)중개점에서 미두통장을 개설했다. 기타지마중개점은 신용이 불확실한 약속어음만으로는 증거금이 될 수 없다고 추가로 오천원을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약 10일간 통장은 반복창이 보관하고 그 사이 김동한이 다른 데로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집 한 채를 오십원에 세내 일본 게이샤 지요(千代)와 동거시켰다. 반복창은 미두거래를 하려면 현금 이만오천원이 필요한데 달리 구할 방법이 없다며 친모 명의의 외리 가택을 김동한에게 팔만오천원에 사라 하되 대금은 현금이 아니라도 김세제의 약속어음으로 결제해도 된다고 했다. 팔만오천원의 약속어음을 받고 매매계약을 맺은 후 가등기만 하자고 해 수속을 마쳤다. 처음 의도했던 미두취인은 유명무실로 돌아가고 또 집을 사면 이만오천원을 대겠다고 한 것도 거짓말로 드러났다. 한편으로 유흥비의 독촉은 심해져서 지난 10일에 반복창 일당은 인천을 떠나 서울 관훈동 김동한의 첩 집으로 피신했다. 그동안 김동한과 반복창 일당이 쓴 유흥비가 모두 일만여 원에 달해서 요릿집 주인 아리타로부터 결국 고소를 당했다. (‘투기업자 말로, 반복창의 대사기’, ‘매일신보’ 1923년 5월26일자) |
1923년 5월 사기혐의로 구속된 반복창은 같은 해 10월 보석으로 풀려났다. 실형을 선고받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미두 자금을 대줄 투자자는 영원히 찾지 못했다. 밑천이 없어 미두시장에 참여할 수 없게 된 이후에도 반복창은 미두시장 근처를 기웃거리며 ‘합백꾼’들과 어울렸다. ‘절치기’라고도 부르는 합백은 많으면 1~2원, 적게는 10~20전씩 걸고 쌀값이 오르는지 내리는지를 맞추는 ‘사설 미두’였다. 한때 미두왕으로 군림했던 반복창은 한동안 ‘합백 대장’으로도 이름을 떨쳤다. 한번 거래로 18만원을 벌던 반복창으로서는 너무나 초라한 영락이었다.
‘원동 큰 재킷’ 김후동의 처지가 ‘원동 재킷’ 김화동의 처지보다 나았을 때는 결혼 직후 몇 달간뿐이었다. 신혼의 단꿈이 채 깨어지기도 전에 반복창은 무일푼으로 전락했다. 김후동은 자신이 반복창의 백만금 재산에 눈이 멀어 결혼한 것이 아님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무일푼으로 전락한 반복창에게 세 아이를 낳아주어야 했고, 결혼 생활 재미가 어떠냐는 질문에는 애써 행복한 척 표정을 관리해야만 했다.
투기의 말로
벌써 김후동 씨는 두 아이의 어머니요, 며칠 안 돼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된다. 들으니 그의 남편 반복창씨가 미두에 많이 실패하여 부부끼리 여러 가지 근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돈이란 세상에 돌고 도는 것이니 잃은들 얻은들 무엇이 그리 신통하리오. 오직 신통한 것은 두 사람 사이의 맺힌 세 개의 사랑의 열매인가 하노라. “어머니 된 감상 말이에요?” 하고 그는 그 애교 있는 얼굴에 웃음을 듬뿍 띠면서 “아이 낳기 전에는 남편이 제일인 것 같더니 아이 낳은 후부터는 남편보다 아이들이 더 소중하고 사랑스럽습니다. 처녀 시절에는 자식이 무엇이 그리 중할까 그랬더니 막상 낳고 보니깐 그렇지 않아요.”하고 사랑스러운 아들딸을 양쪽에 앉히고 이리보고 저리보고 앉았다. 그의 얼굴 가운데는 어머니로서의 만족한 빛이 가득했다. (‘반복창씨 부인 김후동씨’, ‘동아일보’ 1926년 1월22일자) |
김후동은 “남편보다 아이들이 더 소중하고 사랑스럽다”고 말한 바로 그 이듬해 반복창에게 세 아이를 모두 맡기고 이혼했다. 반복창은 미두로 돈도 잃고, 청춘도 잃고, 아내까지 잃고 나서도 미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거듭된 실패와 상실감으로 나이 서른에 중풍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고 정신마저 이상해졌다. 지팡이 없이는 걷기조차 힘든 불구자가 되었지만 매일같이 미두시장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쌀값이 오른다” “쌀값이 떨어진다”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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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이 3년째에 접어든 1939년, 일본은 쌀을 전수물자로 분류하고 쌀과 쌀값을 정부에서 직접 관리하기로 결정했다. 쌀의 공정시세를 결정하는 미두시장의 기능이 유지되기 어려워진 것이었다. 반복창은 1938년 10월18일 세상을 떠났고, 미두시장은 그로부터 20일 후인 11월7일 이 땅에서 영영 사라졌다.
반복창도 죽고 미두시장도 사라졌지만, 이 땅에는 여전히 무수히 많은 ‘반복창’이 살아 있고 무수히 많은 ‘미두시장’이 성업 중이다. 반복창은 미두시장에서 가장 극적인 승리를 맛본 진정한 미두왕이었지만, 그런 반복창조차 부를 누린 시간은 2년에 불과했다. 오늘날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