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호

난임전문의 이성구의 ‘수태이야기’

‘헬조선’이어서 애 안 낳는다고?

  • | 이성구 대구마리아병원장

    입력2018-05-09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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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신조어가 범람한다. 신조어 중에는 아기자기하고 어여쁜 것도 많다.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 나포츠(Night +Sports), 포미족(자신을 위해 투자와 소비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 존버족(어떤 상황이든 일단 버티고 보자), 롬곡옾높(‘폭풍눈물’을 180도로 뒤집은 단어) 등은 들을 만했다. 하지만 마냥 웃기만 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말도 많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쳤다) 같은 표현을 들으면 어른으로서 걱정이 앞선다. 희망만으로도 배고프지 않을 청춘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다 싶어서다. 하긴 그래도 한국에서 유행하는 최고의 비극적 표현인 ‘헬조선’만 하겠는가. 

    ‘헬조선’은 조선에 지옥을 뜻하는 헬(Hell)을 붙인 합성어로 ‘지옥과 같은 한국 사회’라는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일본의 한 게시판에서 한류 열풍에 반발하는 사람들 사이에 한국을 비하하는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 사고, 사회 부조리 기사를 소개하며 ‘한국은 이토록 살기 힘든 지옥(Hell) 같은 나라’라고 표현했다. 

    부지불식간에 국내에도 퍼졌다. 사실 밀레니얼 세대(1980~2000년대 초반 출생)는 어느 세대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졌고 교육의 혜택을 받았지만 청년실업, 부의 양극화, 낮은 행복지수, 높은 자살률 등 그들이 처한 현실은 녹록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 여파인지 젊은 부부들 사이에 “미래가 없고 희망 없는 ‘헬조선’에서 자식을 꼭 낳아야 하나?”라며 딩크족(출산 거부)을 선택하는 이가 적지 않다고 한다. 생명 잉태의 최전선에 살고 있는 난임의사로서 한숨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작금의 현실이 너무 팍팍하다고? 글쎄다. 먹고살기 힘든 걸로 치자면 과거만 하겠는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전시된 공무원 월급명세서를 참고하면, 1970년 기준으로 시골 공무원(35세 기준/8급) 한 달 봉급이 1만6210원(실수령액 1만3805원)이었다. 참고로 당시 공무원 봉급은 직책수당을 포함해 4420~3만80원(현 9급 1호봉 134만6400원~1급 23호봉 624만2100원)이었다고 한다. 

    말이 나왔으니 따져보자. 당시 평균 출산율(4.53명)로 계산하면 가장 한 명이 거느리는 식솔이 족히 네다섯은 되었을 것이다. 오로지 밥만 먹던 시절에 6인 가족이 한 달에 쌀 40kg은 족히 먹었을 텐데, 1970년 쌀 한 가마니(80kg) 값이 5784원이었다. 그러니 월급을 받으면 제일 먼저 쌀과 연탄(1970년/장당 18원)부터 샀다는 말이 이해될 정도 아닌가. 요즘 병장 월급이 40만5700원이라지만 1970년에는 900원이었다. 



    내 집 마련은 또 어떤가. 서울 시내 기준으로 땅값이 평당 20만~30만 원(1970년대 초반)이었다니 한 달에 몇만 원 버는 박봉 인생에 집 한 채 사려면 얼마나 허리띠를 졸라야 했을까. 돌이켜 보면 내가 받은 인턴 월급이 28만 원(1987), 대기업에 입사한 친구들이 36만 원(1988년 기준)을 받던 시절이다. 1980년 기준 서울시내 사립대학 등록금이 37만 원선이던 걸 감안하면 부모들이 먹고살면서 자식 둘셋 공부시키려면 허리가 휘고 등골이 빠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식이 희망의 미래였기에 애들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고 말하던 부모들이었다. 자식 중 누구라도 아프면 병원비를 마련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구상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 만한 건강보험이 1975년에 시작되었지만 전 국민이 혜택을 받기 시작한 건 1989년부터였으니. 

    과연 한국이 ‘헬조선’인가? 지난 30년간 한국의 산업화는 눈부신 업적을 이룩하다 못해 천지가 요동해 개벽했을 정도다. 1990년대 이후 태어난 요즘 젊은이들은 죽었다 깨나도 알 수 없겠지만, 베이비부머 세대는 ‘한강의 기적’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며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한국이 ‘헬조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 세계에서 최하위권 점수를 받고 있는 출산율(OECD 224개국 중 219위)과 행복지수(최하위권)만 빼면 그 어떤 평가에서도 상위권에 속한다. 

    삶의 질을 측정하는 지표인 유엔개발계획(UNDP)의 인간개발지수(HDI)는 기대수명, 교육수준, 보건, 복지 등으로 구성해서 통계를 내는데, 한국은 세계 188개국 가운데 18위(2017)였다. 미국이 10위, 중국은 90위라는 걸 감안하면 한국은 선진 민주 복지 국가라고 자부해도 될 정도가 아닌가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한국인이 세계여권(passport) 파워랭킹에서 비자 없이 입국할 수 있는 나라 199개국 중에서 여권지수가 싱가포르와 함께 공동 1위(2위는 독일과 일본, 중국 65위)를 차지했다. 또 한국은 224개국 중 수출 5등, 국가저축률(개인, 기업, 정부 포함)에서 181개국 중 10등, 평균수명은 224개국 중 12등이다. 

    소득 분배 수준을 보자. 소득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 계수(0에 가까우면 평등하고 1에 가까우면 불평등) 랭킹에서 한국은 세계 149개국 중에서 소득 분배가 가장 고른 그룹(평등도 세계 11위)에 속한다. 놀라운 사실은 한국이 미국과 영국, 일본은 물론이고 공산권인 중국과 베트남보다 더 평등하다고 평가받았다는 것이다. 이래도 한국이 ‘헬조선’인가? 

    불과 1세기 전에 서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신동훈 서울대 의대 교수는 “경복궁 앞에서 추출한 조선시대 흙에서 1g당 최고 165개의 기생충 알이 나왔고 평균 35개 알이 검출되었다”며 인분에 의한 흙의 오염도를 설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당시 조선을 여행한 미국인 언더우드 부인은 ‘조선견문록’(1895)에서 “한양은 골목길 사방에 집집마다 버린 분뇨와 하수 때문에 도랑은 오물이 넘쳐흘러 지독한 냄새가 났으며 조선의 여인네들은 이 도랑에서 야채를 씻어 먹었다”라고 했을 정도다. 서울 시내가 온통 인분의 구린내와 지린내로 진동했다는 얘기다. 당시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24세(유아사망률 포함)인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누구든 해외에선 애국자가 된다. 유럽을 여행해보면 유료 공중화장실에 줄을 서서 “천국 다음에 한국”이라는 말을 하는 이들을 자주 볼 수 있다. 한국이 좋은 이유는 셀 수도 없이 많다. ‘지옥(Hell)조선’이라서 애 낳기 싫다? 정말 이기적인 궤변이자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 따져보면 부모가 자식에게 해줘야 할 것은 돈보다는 사랑이다. 자식에게 금수저를 물려주지 못해 출산을 포기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은 스스로 만들 수 있다. 나를 쏙 빼닮았지만 나보다 더 나은 자식을 바라보는 일은 최고의 보람이며 행복이다. 부모의 잃어버린 꿈의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고 있는 대견한 자식을 이렇게 살기 좋은 대한민국에서 한 명 이상 낳아봐야 하지 않겠나.


    이성구
    ● 1961년 대구 출생
    ● 서울대 의대 졸업
    ● 서울대병원 산부인과 전공의
    ● 대구마리아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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