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정환 씨와는 역할을 어떻게 나눴나요.
“정환이가 주로 시어머니 역할을 맡고 있어요. 잔소리, 쓴소리를 전담하죠. 저는 운동장에서 선수들을 이끌고요. 운재 형이 없을 때는 정환이가 킥 연습도 시켜요. 서로 워낙 친해서 그런지 지금까지 정환이, 운재 형과 별 마찰이 없었어요. 힘들 때는 소주 한잔 기울이며 서로 위로도 해주고요.”
▼ 청춘FC가 어떻게 마무리되기를 바랍니까.
“아주 다양한 그림을 그려보고 있어요. 선수들을 챌린지리그 이상의 팀으로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예 이 선수들을 한 팀으로 만들어 K3나 내셔널리그에 들어가게 하면 어떨까. 다시 말해 청춘FC란 팀을 실제로 창단하는 거죠. 다만 경제적인 부분이 중요하기에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어요. 저는 선수들을 잘 가르치고, 정환이는 밖에서 돈을 모아오면 될 것 같은데(웃음)…. 이따금 상상해보는 그림이에요.”
▼ 아까 말한 것처럼 이을용 코치의 ‘청춘’도 만만치 않은 고난의 연속이었잖아요.
“강릉상고(현 강릉제일고)를 졸업하고 울산대 체육학과에 입학했는데, 축구팀 선배랑 치고받고 싸우다 제 성질을 못 이겨서 짐을 싸들고 나온 거예요. 그러고는 충북 제천의 친구 집으로 향했어요. 돈이나 벌겠다는 생각으로 ‘서울회관’이라는 나이트클럽에서 일했습니다. 알려진 것처럼 웨이터 생활을 한 건 아니고요, 업소에서 이런저런 심부름하며 허드렛일을 도왔죠. 그러다 우연히 그 업소를 방문한 축구인이 저를 알아보고는 울산대 최만희 감독님에게 전화를 한 거예요. 어느 날 감독님이 서울회관에 딱 나타나셨더라고요. 무진장 혼난 뒤 다시 울산대로 끌려갔죠.”
▼ 붙들려가선 잘 버텼나요.
“웬걸요. 얼마 안 있어 또 정신 못 차리고 팀을 뛰쳐나왔습니다. 8개월쯤 질풍노도의 시간을 보냈어요. 친구랑 대구로 내려가 가스 배관 줄을 만드는 공장에 취직한 적도 있고, 공사판에서 막노동도 하며 돈을 벌었어요. 공사판 일이 수입이 꽤 괜찮았거든요. 하루 일당이 그때 돈으로 6만 원이나 되고 그것도 현찰로 바로 손에 쥐여줬으니까. 돈을 아끼려고 역전 화장실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이현창…감독이 아닌 아버지

이을용은 “미생 축구인들의 감독을 맡아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렇게 방황하고 있을 때 손을 잡아준 분이 당시 한국철도 감독을 맡고 계시던 이현창 선생님입니다. 강릉상고 시절, 강릉으로 전지훈련차 오셨다가 제가 뛰는 걸 관심 있게 지켜보셨다고 해요. 울산대에서 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저를 찾아다니셨더라고요.
결국 이 감독님 덕분에 한국철도에 입단해 실업팀 생활을 했습니다. 감독님은 보일러도 안 들어오는 차가운 숙소에서 혼자 생활하는 제가 안쓰러워 김치며 이불, 전기장판 같은 걸 챙겨다 주시기도 했습니다. 당시 한국철도에서 월급을 80만 원 정도 받았는데, 그 돈을 제게 안 주시고 따로 관리하시다가 제가 상무로 갈 때 통장에 넣어 건네주셨어요. 통장에는 1000만 원이 훨씬 넘는 거액이 들어 있었어요. 그 통장을 받아들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분은 감독님이 아니라 아버지셨어요.”
이을용은 한국철도에 입단한 뒤 축구가 재미있어졌다고 한다. 축구하는 걸 즐기게 되면서 도망가고 싶은 생각도 사라졌다. 그러나 나이트클럽에서 일한 탓에 주변의 유혹이 끊이질 않았다. 특히 ‘조직세계’에선 이을용에게 계속 ‘러브콜’을 보냈다. 축구에 빠진 이을용은 그들의 손짓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만약 이현창 감독이 이을용을 찾아내지 않았다면 지금의 이을용은 없었을 것이다. 그 자신의 말마따나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계속 ‘하류인생’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 이현창 감독과는 지금까지 인연을 맺고 있다면서요.
“죽을 때까지 모셔야 할 은사님이에요. 최근까지 K3리그 이천시민축구단 감독을 하셨는데, 올해 그만두신다고 하더군요. 제가 부산에서 카파 풋살팀을 운영하고 있거든요. 그곳에서 총감독을 맡아주실 것을 부탁드렸습니다. 용돈벌이밖에 안 되지만 이젠 연세가 있어 예전처럼은 활동하기 어려우시거든요. 그래도 가만히 계시면 답답해하실 것 같아 부산으로 모시려고요(웃음).”
▼ 한국철도에서 뛰다가 1998년 부천 SK에 입단했어요. 한때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던 사람으로선 엄청난 반전이네요.
“한국철도 들어가서 뛰다가 이듬해 군에 입대했어요. 동기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 제대했고요. 그때 정환이가 부산 대우로얄즈, 저는 부천SK에 입단했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축구를 했던 것 같아요. 새벽 훈련을 거르지 않고 매일 나갔습니다. 프로가 됐으니 돈도 벌어야 하고, 어려운 집안을 경제적으로 도와야 하는 부담도 있었죠. 솔직히 제가 프로에 갈 거라곤 자신할 수 없었어요. 나라는 선수를 과연 어느 팀에서 뽑아줄까 싶었죠. 그래도 운 좋게 2순위로 부천SK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이을용은 데뷔 첫해 33경기에 출장해 3득점을 올렸다. 국가대표 데뷔전은 1999년 3월 브라질과의 친선경기였다. 이후 꾸준히 대표팀에서 활약하며 2002년 한일월드컵 대표 선수로 뽑혔고, 폴란드전에서 나온 황선홍의 왼발 발리골, 미국전의 안정환 헤딩골을 어시스트했다. 3, 4위전으로 치른 터키전에선 프리킥골을 터뜨리며 축구팬에게 짜릿한 전율을 안겼다. 이을용은 2004년 아시안컵을 거쳐 2006 독일 월드컵을 마치고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 ‘월드컵’ 하면 어떤 기억이 떠오르나요. 월드컵에서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는지도 궁금하네요.
“대표팀 생활을 11년 했는데, 가장 기억나는 순간이라면 아무래도 2002년 월드컵이겠죠. 그때 히딩크 감독님도 스타였고, 대표팀 선수들도 죄다 스타플레이어였잖아요. 지금도 미국전 때 페널티킥 실축은 큰 아쉬움으로 남아요. 그래서 욕도 많이 얻어먹었지만(웃음)…. 대표팀 선수들도 한국이 월드컵 4강까지 오르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어요. 경기를 치를수록 체력이 고갈됐는데, 이상하게 신바람이 나더라고요. 솔직히 한국이 홈어드밴티지를 본 부분도 있었잖아요.”
▼ 히딩크 감독에 대한 추억도 많겠네요.
“그럼요. 축구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분이죠. 귀네슈 감독을 비롯한 명장들은 비슷한 면이 있더라고요. 선수들을 심리적으로 안정시키고, 선수들이 가진 능력을 120% 뽑아내는 능력이 있어요. 히딩크 감독님은 선수를 보는 눈이 탁월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김남일, 박지성, 이천수 같은 스타플레이어들이 탄생했잖아요. 지성이는 선수들 사이에서 ‘빠꾸’로 불렸는데…. 이유요? 몰라요. 그냥 ‘빠꾸’라고 부르면 지성이가 쳐다봤으니까(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