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호

‘대안교과서-한국 근·현대사’ 30가지 오류

‘영친왕은 고종 7남(→4남)’ ‘1961년(→1960년) 4·19 민주혁명’…

  • 이경남 한국발전연구원장 kdrc90@unitel.co.kr

    입력2008-07-08 18: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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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3월 ‘교과서포럼’은 3년여에 걸친 집필 끝에 기존 교과서에 대항하는 ‘대안교과서-한국 근·현대사’(기파랑)를 펴냈다. 이 교과서가 출간되자 “대안교과서는 또 하나의 편향”이라는 주장이 일면서 교과서와 학자 간 대립 양상이 심화됐다. 이와 함께 대안교과서에 잘못된 기술이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한국발전연구원 이경남 원장은 “좌편향된 교과서가 대안교과서에 의해 바로잡힌 것에 기쁘지만, 크고 작은 30개의 잘못된 부분을 발견했다”며 ‘신동아’에 그 내용을 보내왔다.
    ‘대안교과서-한국 근·현대사’ 30가지 오류
    한국의 근대사와 현대사를 올바르게 기술하려는 ‘교과서포럼’의 값진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이뤄 지난 3월 하순에 ‘대안교과서-한국 근·현대사’가 간행됐다. 그동안 왜곡된 사관(史觀)과 의도적으로 좌편향된 붓장난에 의해서 형편없이 일그러졌던 우리 근·현대사가 이 대안교과서에 의해서 바로잡히는 실마리를 얻게 됐으니 참으로 경하해 마지않을 일이다.

    이 책자에 대한 기대감이 컸던 만큼, 이에 정비례해 단숨에 통독한 독후감은 한마디로 흡족한 희열(喜悅)이었다. 교과서포럼의 집필진과 편집진의 노고에 따뜻한 인사를 보낸다.

    하지만 세상사에는 ‘옥의 티’가 있게 마련이라고 했다. 통독을 하면서 띄엄띄엄 의문부호로 표시해둔 것이 기십 군데에 달하고 보니, 그 사안의 경중을 그냥 흘려버리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아 정오표(正誤表)로 정리해봤다. 역사교과서의 생명은 ‘진실된 내용’과 ‘정확한 표현’에 있는 것이므로 거기에 저촉되는 오류에 대해서는 엄정한 지적이 불가피한 일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제시하는 내용은, 사항마다 대안교과서의 해당 쪽(p)’을 표시하고, 문제가 되는 문장을 예시한 다음, 무엇이 왜 틀렸는지를 바로잡는 ‘정오(正誤)풀이’의 순서로 기술했다.

    아래 30군데 정오 풀이가 모두 적절한 지적이라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대안교과서-한국 근·현대사’가 상처 입을 일은 아니다. 합당한 지적이라면 재삼판(再三版)부터 개정함이 마땅하며, 그로써 ‘티를 씻은 옥’으로 더 빛날 수 있을 것이다.



    ‘기습점령’ 아닌‘고난의 전투’

    [p.64] 러일전쟁, 일본의 승전

    러시아의 입장은 만주를 점령하고 한국을 남북으로 분할해 북부를 중립지대로 설정한다는 것이었다. 타협이 결렬되자 일본은 1904년 2월에 러시아가 조차하고 있던 랴오둥(遼東) 반도의 뤼순(旅順)을 기습적으로 공격, 점령했다. 이어 한국을 통해서 북진한 일본 육군이 만주로 진격해 1905년 3월 펑텐(奉天)전투에서 러시아 육군에 승리했다.

    正誤 풀이 러일전쟁 전개과정을 기술함에 있어서 사실과 맞지 않은 대목이 보인다.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1904년 2월10일, 일본 육군이 랴오둥 반도에 상륙한 것은 5월5일이다. 러시아군의 뤼순요새를 여러 차례 대공격했으나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며 번번이 실패했고, 일본군 사령관(乃木希典 대장)의 두 아들이 전사할 정도로 악전고투였다. 그러다가 해가 바뀐 1월에 겨우 점령했으니 개전한 지 거의 1년 만에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고난의 전투’에 대해 ‘기습점령’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는다.

    [p.69] 애국계몽운동

    신민회는 국민교육을 독립운동의 기초로 중시해 1907년 오산학교와 대성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이동녕(李東寧) 등을 만주에 파견해 독립군 기지를 창건하는 운동을 벌였다.

    正誤 풀이 오산학교(五山學校)는 남강(南岡) 이승훈이 1907년 7월 평양에 나갔다가 안창호의 애국연설을 듣고 크게 감동해, 그해 12월24일 그의 고향(평안북도 정주군 오산)에 현판을 내걸며 설립한 중학교다. 대성학교(大成學校)는 1908년에 안창호의 발의로 평양에 설립한 중학교다. 안창호는 신민회의 주창자였고 이승훈도 신민회 회원이었으므로 두 학교가 신민회와 유관하다고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신민회가 그들 학교를 직접 설립, 경영한 듯한 표현은 해석상의 비약이다. 안창호가 미국으로 망명 출국함으로써 대성학교는 문을 닫게 됐고, 신민회가 일제 탄압으로 해체된 이후에도 오산학교는 그 명맥을 연면히 이어간 사실 등도 이를 뒷받침한다.

    [p.70] 1915년 내외의 철도망

    경의선(京義線) 철도의 주요 통과 역명(驛名)을 서울~평양~진남포~용암포~신의주라고 표기했다.

    正誤 풀이 경의선은 서울~신의주 사이의 철도선이며 지도에서 평양 다음으로 ‘진남포’라고 표기한 것은 잘못이다. 그 지점은 ‘신안주(新安州)’라고 표기해야 합당하다. 진남포는 지리상 평양의 서남쪽에 있는 항구이며 경의선이 통과하지 않는다. 8·15해방 이후 ‘진남포’를 ‘남포’라고 호칭한다.

    [p.80] 일본 제국주의의 전개

    ‘대안교과서-한국 근·현대사’ 30가지 오류

    대안교과서는 백범 김구에 대해 “105인 사건으로 17년을 선고받았다”고 기술했으나, 그 사건은 ‘105인 사건’이 아닌 ‘안악사건(安岳事件)’이다.

    1937년 일제는 중국 본토를 대상으로 중국과 전면전에 들어갔다. 그 연장선에서 일제는 동남아로 진출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 구(舊) 제국주의 국가들과 충돌했다.

    正誤 풀이 일제(日帝)는 1941년에 태평양전쟁을 도발해 동남아지역의 필리핀(미국), 말레이·버마(영국), 베트남(프랑스) 등을 점령했다. 그러나 벨기에는 관련이 없었다. 인도네시아를 영유했던 네덜란드라고 기술해야 맞다. 벨기에의 식민지는 동남아에 없었으므로 1945년 9월2일 일본 항복 조인식에 전승국들인 미·영·중·소·불·캐나다·호주·뉴질랜드 및 네덜란드 등 9개국 대표는 참석했으나 벨기에는 당사국이 아니었다.

    영친왕은 고종의 넷째아들

    [p.81] 동화와 차별 사진 설명

    고종의 일곱째아들로 조선왕조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과 일본 황실 출신의 아내 이방자(李方子, 나시모토 마사코).

    正誤 풀이 조선왕조 제26대 국왕인 고종황제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다. 맏이는 숙빈 이씨 소생인 완화군(完和君)으로 12세 때에 요절했다. 둘째가 민(閔) 왕후 소생인 순종(純宗, 제27대 황제)이고, 셋째는 숙빈 장씨 소생인 의친왕(義親王 堈)이며, 넷째가 순빈 엄씨 소생인 영친왕(英親王 垠)이다. 영친왕을 고종의 ‘일곱째아들’이라고 함은 착오다.

    [p.84] 토지조사사업·토지신고

    총독부는 소유권자로 하여금 정해진 기한에 소유지를 해당 면에 신고하도록 했다. 대부분의 토지가 기한 내에 신고됐으며, 대체로 소유권자가 신고한 대로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이것은 조선왕조시대부터 토지에서 사실상의 사유재산권이 성립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유권 분쟁은 대부분 구황실 소유였다가 1908년 국유지로 편입된 토지에서 일어났다. 농민들은 그 토지가 원래 조상이 개간하거나 매입한 토지라고 주장했다. 총독부는 농민의 주장에 근거가 있을 때는 농민의 소유로 판정했다. (토지신고)총독부가 신고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한국 농민에게 신고를 강요하고, 전체 토지의 40%에 달하는 무신고지가 발생하자 국유로 몰수했다는 기존의 주장은 원래부터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正誤 풀이 예시한 문장뿐만 아니라 ‘토지조사’사업을 기술한 전체 문맥에 있어서 일제·총독부의 수탈적 정책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고, 토지조사사업이 ‘선의에 의해 완선완미하게 시행된 듯이’ 기술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온당한 평가인지 의아하다.

    [p.113] 3·1운동의 배경과 준비

    1919년 1월 상하이의 신한청년단은 파리 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고, 김규식(金奎植)을 대표로 파견했다. 국내에서는 기독교계의 이승훈, 천도교계의 손병희와 최린, 불교계의 한용운, 문화계의 최남선, 송진우(宋鎭宇) 등의 지도자들이 도쿄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고 국내에서도 독립선언을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正誤 풀이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고 김규식 대표를 파견한 단체는 ‘신한청년단(靑年團)’이 아니라 ‘신한청년당(靑年黨)’이었다. 국내에서는 문화계의 최남선, 송진우(宋鎭宇) 등의 지도자들이라고 했으나 송진우(宋鎭禹)가 바른 표기다.

    [p.113] 3·1운동의 전개

    1919년 3월1일 오후 2시 민족대표 33인은 서울시내의 음식점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경찰서에 출두해 투옥됐다.

    正誤 풀이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다음 경찰당국에 그 취의(趣意)를 당당히 통고함으로써 긴급 출동한 경찰에 연행되어 투옥된 것이 진실이다. ‘경찰서에 출두해’라는 표현의 사전적 의미는 ‘잘못을 시인하고 몸소 나감’이 되므로 33인의 의연하고 당당했던 행적에 대한 올바른 설명이 아니다.

    김구, ‘안악사건(安岳事件)’에서 17년형 선고

    ‘대안교과서-한국 근·현대사’ 30가지 오류

    지난 3월 열린 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한국 근·현대사’의 출간 기념 기자회견.

    [p,119] 김규식 사진 설명

    1935년 김원봉 등과 민족혁명당을 조직했으며,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이 되어 김구 주석과 함께 광복군 양성에 힘썼다.

    正誤 풀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에 약헌 개정(개헌)으로 주석(主席)지도체제로 전환하고 김구(金九)를 주석으로 선임했으나 ‘부주석’직제는 두지 않았다. 김규식은 1942년 10월에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보선되고 선전부장에 피임됐다. 그가 임시정부 부주석이 되기는 1944년 2월에 헌법 개정으로 부주석 직제가 마련되면서부터다. 다만 김규식은 1935년에 결성된 민족혁명당의 주석이 되기는 했다. 당시 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 권외에 머물러 있었다.

    [p.126] 만주사변과 이승만의…

    1931년 9월 일본 관동군은 류타오후(柳條湖) 만주철도 폭파사건을 빌미로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키고.

    正誤 풀이 만주사변 폭발 지점의 한자(현지)표기는 ‘柳條湖’가 아니라 ‘柳條溝’이다.

    [p.129] 김구 사진 설명

    김구(1876~1949)… 1910년 신민회에 참가하고 1911년 105인 사건으로 1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14년에 출옥했다.

    正誤 풀이 백범 김구가 일제 법정에서 징역 17년형을 선고받았다는 사건은 ‘105인 사건’이 아니라 세칭 ‘안악사건(安岳事件)’혹은 ‘안명근(安明根)사건’이다. 김구가 신민회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나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모의 혐의로 안명근·김구·김홍량 등 황해도(주로 安岳)지방 민족지사 40여 명이 경무총감부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안명근은 무기징역, 김구·김홍량·한순직·이승길 등은 15년 징역, 기타 피고인들도 10~3년 징역형에 처해졌다. 엄청난 중형(重刑)이었다.

    한편 ‘105인 사건’이란 세칭 ‘신민회사건’이라고 하여 ‘안악사건’과 비슷한 무렵(1911년)에 서북지방 인사 수백명이 체포됐다가 122인이 제1심에서 기소되고, 그중 105인이 실형을 선고받음으로써 세칭 ‘105인 사건’이라고 불렸다. 피고인들은 모두 상고해 제2심에서 6인(윤치호·이승훈·양기탁·안태국 등)에게만 징역 4년이 선고되고 나머지 99인은 무죄 석방됐다.

    105인 사건은 주요 피고 6인만이 4년 징역인 데 비해 안명근·김구·김홍량 등 안악사건의 주요 피고인들은 무기징역~15년 징역을 선고받은 사실과 안명근·김구·김홍량 등의 이름이 105인 사건 피고인 명단에 없다는 사실 등이 두 사건이 별개 사건이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김구는 2차 감형으로 1915년에 가석방됐다.

    War는 ‘전쟁성’ 아닌 ‘육군성’

    [p.129] 충칭임시정부와 광복군

    1936년 임시정부의 김구(金九) 주석은 조소앙(趙素昻)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결성했다.

    正誤 풀이 임시정부에 주석(主席)제가 제정되기는 1940년 10월 약헌 개정에서 비롯됐다. 그러므로 1936년에 ‘김구 주석’이라는 표기는 사실 착오이며 국무위원이라고 해야 옳다. 또한 한국국민당은 1935년 11월에 조직됐다.

    [p.137] 38도선의 획정

    그러자 소련은 미국과 맺은 얄타협정에 따라서 서둘러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했다. 소련군은 만주에서 북한으로 신속히 진입했다.

    正誤 풀이 소련군은 1945년 8월9일에 대일전에 참가하면서 만주와 북한지역에 진입했다. 그러나 앞의 예시문에 따르자면 만주에 주둔 중이던 소련군이 북한으로 진격했거나, 만주를 먼저 점령한 다음 그 여세로 북한에 진입했거나 등으로 읽힌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소련군 극동군 사령부에서는 만주에 대하여 2개 방명군으로 진격하는 것과 동시에 별도의 공격제대(攻擊梯隊, 제25군)를 북한 라진(羅津)과 청진(淸津)으로 진입시켰던 것이다.

    ‘대안교과서-한국 근·현대사’ 30가지 오류

    6·25 한국전쟁 시 북한으로 내려온 중공군 한인부대는 2개 사단이 아닌 3개 사단, 약 5만명이었다.

    [p.137] 38도선 획정 경위

    8월 10~11일 심야에 소집된 미국 워싱턴의 국무, 전쟁, 해군 3성 조정위원회(SWNCC)에서 러스크(Dean Rusk) 대령과 본스틸(Charles Bonesteel) 대령은 될 수 있으면 한반도 최북단에 군사분계선을 설정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正誤 풀이 한반도의 북위38도선 분할안을 획정한 미국의 SWNCC를 한국어로 ‘국무, 전쟁, 해군 3성 조정위원회’라고 기술한 데는 오역(誤譯)이 있다. SWNCC는 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의 머리글자 약어인데 State는 미국 국무성, War는 ‘전쟁성’이 아니라 ‘육군성’이며, Navy는 해군성을 지칭한다. 그중 육군성을 ‘전쟁성’이라고 오역한 것이다. 참고로 미국 육군성의 온전한 표기는 the War Department이고, 영국 육군성은 the War Office라고 한다.

    [p.143] 제헌의회 의원들의 출신

    전체 209명 가운데 민족운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69명이었다. 3·1운동이 35명으로 가장 많았고, 신간회가 14명, 만주독립군과 동북항일연군이 10명, 학생운동·청년운동·노동운동이 20명이었다.

    正誤 풀이 제헌의회 의원 가운데 ‘만주독립군과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출신이 10명’이라 함은 해괴한 사실 오인이다. 특히 동북항일연군(총사령관, 중국인)은 1933년 중국공산당에 의해 창설된 동북인민혁명군이 1936년에 발전적으로 개편돼 공산무장부대들을 망라한 조직으로, 중국인과 한인공산주의자들이 그 구성원이었다.

    김일성과 최용건, 김책, 최현 등도 그 하급 단위부대 간부진이었다. 일본 관동군의 줄기찬 토벌로 동북항일연군은 양(楊) 총사령이 사살되는 등 거의 괴멸됐으며, 1941년에 김일성과 잔여 소규모 부대원은 소련령 하바로프스크로 패주해 중국인들과 함께 ‘88여단’에 편입됐다. 이처럼 괴멸된 공산무장부대 출신자들 일부가 대한민국 제헌의회에 진출했다는 기술은 이론상으로 맞지 않으며 실제로 그러한 사례도 없었다.

    [p.150] 전쟁 직전의 동북아 정세

    중국은 북한의 요청에 따라 중공군(中共軍)에 편입됐던 한국인 2개 사단, 약 3만 명을 북한으로 보냈다. 이 부대는 원래 1942년에 결성된 조선의용군이었다.

    正誤 풀이 6·25 한국전쟁을 앞두고 중공에서 북한으로 이동한 한인부대는 2개 사단이 아니라 3개 사단, 약 5만명이었다. 중국인민해방군의 한인 제164사단은 북한으로 입국해 북한인민군 제5사단으로, 제166사단은 제6사단으로, 독립제15사단은 제12사단으로 각기 개편돼 남침 준비 인민군을 대폭 증강했다.

    한편 이 3개 사단은 1942년에 결성된 ‘조선의용군’은 아니었다. 당초의 조선의용군은 조선독립동맹(獨立同盟)계로 전체 규모가 1개 연대 미만이었으며, 일본이 항복한 이후인 1946년부터 국공내전(國共內戰)이 격화되자 중공군 점령지역(주로 만주와 화북)에서 한인들을 징모해 공산계열 3개 사단을 급조했던 것이다.

    최초 경제인 단체는 ‘한국경제인협회’

    [p.166] 일본과의 갈등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1951년 10월 미국의 주선으로 한국과 일본의 첫 예비회담이 열렸다. 그전 1952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은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이승만라인)을 발표했으며, 8월부터 ‘이승만 라인’내에 들어온 일본 어선을 나포하기 시작했다.

    正誤 풀이 예문은 2개의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간에 있는 ‘그전’이라는 단어가 해괴한 어구다. ‘그후’의 오기(誤記)인가?

    [p.172] 1950년대 농촌생활

    1958년 하버드대학의 지원을 받아 고황경(高皇京) 등 한국의 대표적인 사회학자들이 농촌 주민의 가족생활 실태를 조사했다.

    正誤 풀이 여성운동가이고 교육자였던 고황경의 한자 이름은 高皇京이 아니라 高凰京이다. ‘임금 皇’ 아닌 ‘봉황새 凰’이 맞다.

    [p.183] 미숙한 경제정책

    군사정부는 경제의 안정과 발전에 기업의 도움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부정축재자의 처벌을 완화했다. 기업가들은 전국경제인연합회(全國經濟人聯合會, 약칭 전경련)를 결성하고 울산공업센터의 건설에 필요한 외자 도입에 나서는 등.

    正誤 풀이 5·16 쿠데타 후 1961년 9월에 최초로 창립한 경제인단체는 ‘한국경제인협회’(회장·李秉喆)였다. 그 후 ‘한국경제인연합회’로 개편됐다가 다시 오늘의 ‘전국경제인연합회’로 개칭됐다.

    0 하나 빠뜨린 쌀 총생산량

    [p.185] 정치세력 교체

    5·16쿠데타 이틀 뒤인 5월18일, 장면 총리가 사임을 발표하고 있다(왼쪽). 이원집정부제 정부의 다른 한 축인 윤보선 대통령은 5월19일에 한 하야 발표를 이튿날 번복했다가, 이듬해 3월 결국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야당 지도자가 됐다.

    正誤 풀이 제2공화국 헌법상의 권력구조는 순수한 내각책임·의원내각제였다. ‘이원집정부제(二元執政府制) 정부의 다른 한 축인’ 윤보선 대통령이란 표현은 잘못된 서술이다.

    [p.213] 녹색혁명… 도표 설명

    한국의 쌀 생산은 1960년대까지 총생산량이 20만t을 조금 넘는 수준에서 정체상태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의 보급에 따라 총생산량은 1977년 40만t을 초과하여 최고수준에 이르렀다. … 이후 총생산량은 정체하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줄어들어 30만t 이하로 내려갔다.

    正誤 풀이 한국의 쌀 총생산량을 표기함에 있어서 ‘몇 10만t’수준이라는 기술은 중대한 오류다. 예문에 보이는 1960년대까지 20만t은 200만t으로 정정해야 맞고, 1977년의 40만t은 400만t으로, 1980년대 후반부터 30만t 이하는 300만t 이하 등으로 수정해야 마땅하다. 도표를 포함해 모두 한 자리 숫자를 빼먹은 계산착오다.

    [p.238] 민족예술의 성립과 변질

    그들에게 1961년의 4·19민주혁명은 1894년의 동학농민봉기와 역사적 맥락이 동일한 사건이었다.

    正誤 풀이 4·19민주혁명은 1961년이 아니라 1960년에 일어났다. 1961년에는 5·16쿠데타가 발생했다.

    [p.278] 북한 현대사 연대표[p.278] 북한 현대사 연대표

    1950년 6·25전쟁 도발, 1951년 중공군 개입.

    중공군의 한국전쟁 불법 개입은 1951년부터가 아니라 전년도인 1950년 10월부터였다.

    [p.280] 소련군의 진주와 북한

    뒤이어 5도 행정위원회가 설립되고 산하에 이북5도의 행정을 총괄하는 10개 행정국이 창설되었다. 그와 동시에 조선공산당 조선분국이 창립되어 오늘날 조선노동당의 전신이 되었다.

    正誤 풀이 조선공산당은 1945년 9월11일 서울에서 박헌영(朴憲永) 총비서 중심으로 재건됐다. 공산당의 ‘일국일당(一國一黨) 원칙’에 따라 평양에서는 동년 10월13일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北朝鮮分局)’이 창설됐으며 10월23일에 서울 중앙당으로부터 분국 승인을 받았다. 이 북조선분국은 얼마 후 북조선공산당으로 개편됐고 1946년 8월에는 연안파(延安派) 조선신민당과 합당해 북조선노동당으로 탈바꿈한다.

    [p.280] 소련군의 진주와 북한

    사진 설명에서 평양 군중대회에 스티코프 장군과 함께 등장한 33세의 김일성

    正誤 풀이 평양 군중대회(1945.10.14)에 나온 소련군 장성은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과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 민정사령관 로마넨코 소장 등이었다. 스티코프 장군은 당시 소련 극동군 연해주 군사회의 정치위원으로 있었으며, 1946년 3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수석대표로 나오면서부터 공개적으로 모습을 보였다.

    “황장엽 출생지는 평안남도”

    [p.281] 스탈린의 노라가 된 한반도 북부

    소련군은 식량뿐만 아니라 함흥, 원산 등 공업지역의 공업시설과 민간인의 재산을 강탈하기도 했다. 특히 신의주, 원산에서 벌어진 북한 주민의 저항을 기관총 사격 등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북한 주민은 전례 없는 공포사회를 체험했다.

    正誤 풀이 해방 후 북한 각지에서 발생한 여러 반공 저항투쟁 가운데 특히 규모가 크고 격렬했던 것은 신의주 학생 반공의거사건과 함흥 학생 반공의거사건이었다. 예시문에서 ‘특히 신의주, 원산에서 벌어진…’은 ‘특히 신의주(1945.11.23), 함흥(1946.3.13)에서 벌어진’이라고 기술함이 더 적절하다.

    [p.282] 토지개혁과 분단

    토지개혁을 시행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사실상 북한지역을 통치하는 단독정부였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1월 도·시·군 인민위원 선거를 거쳐 1947년 3월 북조선인민위원회로 명칭을 바꿨다.

    正誤 풀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2월8일에 발족했으며 이전에 선거를 실시하지 않았다. 그해 11월3일에 도·시·군 단위 제1차 인민위원회 선거가 있었으며 1947년 2월20일에 북조선인민위원회로 바뀌었다.

    [p.289] 황장엽 1925~

    ‘대안교과서-한국 근·현대사’ 30가지 오류
    이경남

    1929년 황해도 안악 출생

    평양사범대 국문학과 중퇴

    신태양사 편집장, 현대경제일보 편집국장, 동화연구소 소장

    現 한국발전연구원장, 시인

    저서 : ‘비서학 노트’ ‘이 역사의 순간들’ ‘현대사 인물 연구’ ‘큰 역사에 바치는 작은 증언’ 등


    함북 주을 출생, 1952년 소련에 유학했다. 1954년 10월 김일성종합대학 철학강좌장이 되었고…1965년 김일성대학 총장에….

    正誤 풀이 북한노동당 국제담당비서였다가 1997년에 한국에 귀순한 황장엽(黃長燁)의 출생지가 함북 주을(朱乙)이라는 것은 근거가 없다. 그 자신이 회고록에서 밝혔듯이 1922년 평안남도 강동군(江東郡) 만달면 출생이며, 소련 유학은 1949년부터였고, 1963년에 김일성대학 총장이 됐다.

    [p.292] 수령유일체제와 가계우상화[p.292] 수령유일체제와 가계우상화

    ‘금강산 바위에 새겨진 김일성 찬양구호’라는 사진 설명.

    正誤 풀이 금강산 큰 바위에 새겨진 김일성 찬양 글귀는 ‘찬양구호(口號)’가 아니라 북한에서 오랫동안 널리 보급된 ‘김일성 장군의 노래’의 가사(李燦 작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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