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호

사막에 난로 팔고 아프리카에 스키 팔고

‘수출한국’ 첨병 종합상사맨의 추억

  • 최호열 기자 | honeypapa@donga.com

    입력2014-12-23 13: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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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년 정부 ‘수출진흥대책’으로 본격화
    • 당시 최고 신랑감…대기업 직원 1.5배 월급
    • 적대국? 전쟁터? 돈 냄새만 나면 달려간다
    • 기술 없어도 “배우면서 만들겠다” 배짱 설득
    사막에 난로 팔고 아프리카에 스키 팔고
    드라마 ‘미생’이 화제다. 직장인들의 서글픈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 재미와 공감, 감동을 줬기 때문이다. ‘미생’에 등장하는 직장인은 종합상사 영업사원들이다. 주인공이 근무하는 영업3팀은 중고 자동차를 수출했다가 이란산 원유를 수입하는가 하면 라면, 휴대전화 등 매번 새로운 품목을 다룬다.

    하지만 실제로 종합상사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이제 그런 종합상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수입을 담당하는 부서와 수출을 담당하는 부서가 따로 있고, 수출도 철강이면 철강, 플랜트면 플랜트 등 팀별로 전문화했다는 것. 그들은 “드라마 ‘미생’에서처럼 한 팀에서 이것저것 파는 것은 1990년대 이전 이야기”라고 했다.

    이야기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전개하려 가상의 종합상사 영업팀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1970~80년대 종합상사맨들은 ‘미생’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일을 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꿨고,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라면 오지, 사지(死地)에 뛰어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제는 ‘전설’이 된 옛 상사맨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나, 바이어 만나야 돼”

    종합상사는 1975년 정부의 종합무역상사 육성방침에 따라 등장했다. 1973년 1차 오일쇼크 영향으로 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이 급격히 둔화하고 보호무역주의가 강해지면서 수출이 큰 타격을 받았다. 획기적인 수출진흥 대책이 절실했고, 그 대안의 하나가 종합무역상사였다. 세계 최초의 종합무역상사는 1600년 영국 동인도회사로 알려졌고, 일본은 1873년 미쓰비시상사를 설립했다. 대규모 자본력을 가진 무역업자를 뜻하는 종합상사는 원래 돈이 되는 거라면 뭐든 다 하는 회사였지만, 우리나라는 제도를 만들 때부터 수출에 방점을 뒀다.



    1975년 하반기부터 세계경기가 오일쇼크의 영향에서 벗어나면서 종합상사는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 시간이 갈수록 각 그룹을 대표하는 회사로 자리 잡아갔다. 여기엔 상사맨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들은 5대양 6대주 지구촌 구석구석을 누비며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을 내다 팔았다. 수출 한국의 첨병이었던 셈. 이들이 있었기에 한국의 비약적 성장이 가능했다.

    1970~80년대 ‘종합상사맨’은 젊은이들에게 선망의 직업이었다. 당시 대기업 공개 채용 공고에 정장을 차려입고 007 가방을 든 남자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 아래에 서 있는 사진이 들어갔을 정도였다. 그 시절 종합상사에서 근무했던 박주원(65) 씨는 “그땐 종합상사에 다닌다고 하면 최고의 신랑감으로 꼽혔다. 그만큼 종합상사에는 유능하고 젊은 인재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종합상사 직원이 아니면 해외 나가는 건 꿈도 꾸기 어려운 시대였다. 같은 대기업이라도 종합상사 직원 월급이 더 많았다. 내 기억에 50% 정도는 더 많았다.”

    ‘수출’이라면 모든 게 해결되던 시절이라 종합상사맨들의 위세는 대단했던 모양이다. 통행금지를 어기거나 경범죄로 경찰서에 끌려갔더라도 “내일 아침 해외에서 온 중요한 바이어를 만나야 한다”고만 하면 풀려났다고 한다. 바이어를 접대하다보니 그룹 임원이나 갈 수 있는 고급 술집도 수시로 드나들 수 있었다.

    이들이 취급하는 품목은 바늘부터 선박까지 가리지 않았다. 최초의 종합상사인 삼성물산도 이쑤시개, 비누, ‘이태리타월’ 등을 팔면서 시작했다. 가발, 기성복, 완구, 식기류, 운동용구 등이 초창기 주요 영업 품목이었다. 한약재도 수출했다. 자동차용 배터리가 주요 중화학제품이었을 만큼 품목이 부족했지만 종합상사맨들은 열심히 팔았다.

    세계지도 놓고 “여기 가보자”

    당시 영업전략은 ‘무조건 나가고 보자’는 식으로 단순했다. 현대종합상사 상무를 지낸 강정식 씨는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보다가 그냥 ‘여기에 가보자’ 해서 나가는 식이었다”며 웃었다. 한 달 일정으로 출장을 갔다가 현지에 1년 넘게 머무는 일도 잦았다. 18박19일 동안 10개국을 돌아본 적도 있다. ‘돈 냄새’가 나면 미국, 일본, 유럽, 동남아는 물론 아프리카, 중남미의 오지, 심지어 적대국이나 전쟁터에도 달려갔다. 강 전 상무는 브루나이 유전을 따내려 현지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가 식인종(?) 마을에 갇힌 적도 있다고 했다.

    1973년 29세에 삼성물산 런던 지사장이 된 김재우(71) 한국코칭협회 회장은 1975년 중동지사장으로 발령을 받고 레바논 베이루트로 향했다. 당시 중동은 석유파동으로 원유값이 4배나 뛰어 돈이 흘러넘쳤다. 거기서 뭐든 팔아보라는 게 회사의 지시였다. 하지만 국교수립도 안 됐고 환경도 열악해 월급도 제때 전달되지 않았다.

    “생활비가 다 떨어졌지만 돈을 빌릴 데가 없었다. 길을 가는데 미국계 은행이 눈에 띄었다. 서울의 삼성물산 본관 1층에 있는 것과 같은 은행이었다. 무작정 들어가 지점장을 만나 ‘나는 삼성물산 직원이다. 회사에서 월급 송금처리가 늦어져 돈이 없다. 삼성물산 본관에 당신네 은행 지점이 있으니 그곳에 연락해 내 신분을 확인하고 1만 달러를 빌려달라’고 했다. 지점장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며칠 후 돈을 빌려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이 일을 계기로 지점장과 친해진 그는 지점장에게 이 은행에서 신용장을 개설한 무역상 명단을 받아 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영업을 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이름도 잘 모르는 나라, 들어본 적도 없는 회사로부터 물건을 사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그렇게 6개월쯤 지났을 무렵, 한 무역상이 지나가는 말로 “군복을 만든 경험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때 삼성그룹의 제일모직은 원단을 만드는 회사로 군복 완제품을 만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역상에겐 무조건 ‘우리 본사에 군복 전담과까지 있으니 걱정마라’고 큰소리쳤다. 베이루트에 있는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사무실에 군복이 몇 벌 굴러다니는 걸 본 기억이 났다. 그걸 가져다 샘플이라며 보여줬다. 군복을 살펴본 무역상은 마음에 들었는지 사우디아라비아 군부의 군복 납품 담당자를 연결해줬다.”

    한 벌에 12달러씩 3만 장을 계약했다. 부임 후 첫 계약이었다. 이를 계기로 사우디 군부에 287개 품목을 수출해 연매출 1억 달러 실적을 올리게 됐다. 인연이 이어져 시리아에도 야전점퍼를 600만 달러어치나 팔았다.

    그뿐 아니다. 그 후 바레인에서 활동할 때 이라크에도 팔 게 없을까 살펴보려고 여권도 없이 수차례 이라크에 밀입국했다. 걸리면 감옥행은 물론이고, 국교수립도 안 된 상태인 데다 이란과 전쟁 중이어서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생사의 갈림길

    사막에 난로 팔고 아프리카에 스키 팔고

    종합상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미생’.

    “그렇게 이라크 상인들과 안면을 넓혀가던 중 사담 후세인 군부에서 ‘무기를 사고 싶다’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본사에 연락했더니 국방부 직원과 안기부 요원이 날아왔다. 이들과 함께 이라크로 협상을 하러 갔는데,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를 자동차로 통과해야 하는 위험한 순간이었다. 그걸 뚫고 갔더니 이라크 부총리가 직접 나와 당시 우리나라에서 생산하는 가장 큰 무기였던 155mm 곡사포를 요구했다. 미국의 동의 아래 2000만 달러어치를 수출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무기 수출이었다. 이 거래를 계기로 양국이 수교까지 갔으니, 내가 꽤 기여한 셈이다.”

    서울산업진흥원(SBA) 해외수출전문위원으로 활동하는 김달호(70) 씨도 전쟁터에서 ‘무역 신화’를 일궜다. 1980년 1억 달러를 수출한 공로로 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즐기는 수출 돈 버는 무역’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한 그는 지금도 전 세계를 돌며 자신의 영업 노하우를 전수한다.

    “삼성물산에서 일하던 1976년 리비아 트리폴리 지사장으로 발령받았다. 우리와 국교 수립도 안 됐을 뿐 아니라 북한과 더 가까웠다. 게다가 카다피 혁명정부 시절이라 반미시위가 잦았고 치안도 불안했다. 언제 북한 공작원에게 납치될지, 언제 시위대가 집이나 사무실로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감을 안고 지내야 했다. 반미시위가 한창 심할 때는 외국상사 직원들은 다 빠져나가고 달랑 혼자 남은 적도 있다. 풍토병에 걸린 부하 직원이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도 겪었다. 그렇다고 영업을 안 할 수는 없었다. 매일같이 수입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들을 드나들며 팔 만한 물건이 없는지 고민했다.”

    ‘북극 에스키모인들에게 냉장고를 파는 게 진짜 세일즈맨’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그는 반대로 사막에 난로를 판 것으로 유명하다. 리비아는 국토의 90%가 사막이다. 흔히 ‘사막’ 하면 덥다고만 생각하지만 밤엔 꽤 춥다. 특히 겨울은 우리나라 초겨울 날씨와 비슷하다. 그는 카다피 정권이 사막에 사는 주민에게 난로를 배급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입찰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처음 계약한 게 720만 달러어치였다.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1억 달러가 넘는 액수다. 컨테이너 273개 분량의 막대한 양이었다. 납기를 맞추기 위해 당시 난로 제조사들이 총동원됐다. 난로를 대한항공 화물기에 실어 날랐는데, 우리 국적 항공기가 처음으로 리비아로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착륙 허가가 나지 않아 마지막까지 고생했다. 그 뒤 3년 동안 난로만 약 2000만 달러어치를 팔았다.”

    그는 매년 1억 달러어치 이상의 물품을 리비아에 수출했다고 했다.

    “양말부터 선박까지 팔 수 있는 것은 다 팔았다. 껌도 연간 수십만 달러어치를 팔았다. 스테인리스 양식기, 찻잔 세트, 의류가 특히 잘 나갔다.”

    위험을 무릅쓰고 영업을 하다보면 때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일 때도 있다. 박찬법 아시아나그룹 고문도 그랬다. 금호실업에 근무하던 1970년대 레바논에 갔을 때다. 베이루트 시내에선 기독교 민병대와 이슬람 민병대가 교전을 벌이며 대치했다. 현지 주재원과 함께 식사를 하러 영국 식당으로 향하던 그는 갑자기 얼큰한 음식이 생각나 길 건너 스페인 식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스페인 식당에서 수프를 막 한 숟갈 떠먹으려는 순간, ‘꽝’하는 폭발음과 함께 바로 눈앞에 있던 영국 식당이 통째로 날아갔다. 폭탄테러였다. 한순간의 선택이 생과 사를 갈랐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게 상사맨들의 불문율이었다. 박찬법 고문은 금호실업에 근무하던 1975년, 국제박람회 참석을 위해 이란에 머물다 본사로부터 한 통의 전문을 받았다.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 있는 바이어가 철근 1만t을 구매하겠다고 하니 가서 계약을 체결하라는 내용이었다. 그에겐 사우디아라비아 비자가 없었다. 비자를 받으려면 몇 달을 기다려야 했다.

    그는 사우디 항공사 기장의 도움을 받아 무작정 비행기를 탔다. 하지만 중간 기착지인 리야드에서 불법 입국 혐의로 체포돼 감옥에 갇혔다. “제다를 거쳐 베이루트로 갈 예정이어서 비자가 없어도 되는 줄 알았다”고 우긴 끝에 기장에게 여권을 맡기는 조건으로 제다행이 허용됐다. 겨우 바이어를 만나 2500만 달러짜리 계약을 성사시켰지만 이번에는 사우디를 어떻게 빠져나오느냐가 문제였다. 사정을 알게 된 바이어가 외무성에 선처를 부탁해 베이루트로 강제출국당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현대종합상사 이사를 지낸 정동학 씨는 인도에 철강을 수출했다. 그러다 1984년 인도 정부가 주화(鑄貨)를 입찰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때까지 한국은 해외에 돈을 수출한 사례가 없었다. 그래도 무작정 입찰에 참여하기로 하고 내부 관계자를 통해 정보를 빼내는 한편 인도 실무진에 대한 로비에 들어갔다.

    “입찰 성공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소전(정식 주화를 인쇄하기 전 상태) 샘플을 보여줬다. 당연히 퇴짜를 맞았다. 동전 옆면을 보면 우리나라 주화는 줄무늬만 있는데 인도 주화는 무늬가 들어가 있어 만들기가 쉽지 않다. 주화 제조업체에서도 못 하겠다고 몇 번이나 포기하려는 것을 설득해 겨우 기준에 맞춰 입찰에 참여했다. 결국 우리가 20만 달러어치 정도를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정식으로 공급할 주화의 샘플을 만들어야 하는데 도저히 그 기준에 맞출 수 없었다. 그가 묘안을 짜냈다. ‘현지 샘플 승인’이라는 명목으로 인도 조폐청장과 전문기술자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그들로 하여금 직접 우리 기술자들에게 제조기술을 가르치도록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기준에 맞춰 공급할 수 있었고, 이 일을 계기로 기술이 쌓여 더 많은 종류의 인도 주화를 수주하게 됐다. 그 액수가 수천만 달러에 달했다.

    고정관념을 뒤집어라

    김달호 전문위원은 오늘을 살아가는 직장인들도 종합상사맨의 자세로 고정관념을 뒤집고 시장을 보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고 조언한다.

    “아프리카에 스키 장비를 수출한다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모로코에 스키장이 여러 개 있다. 실제 스키 장비 수출도 이뤄진다.”

    현대중공업에서 선박 파는 업무를 맡아 하다 종합상사맨이 된 강정식 전 현대종합상사 상무도 고정관념을 뒤집어 성공한 사례다.

    “1973년부터 시작된 석유파동으로 계약됐던 선박 수출조차 취소되던 시절이었다. 뭔가 대안이 필요했다. 미국을 살펴보니 대형 건물 공사, 고속도로 확장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때 우리에겐 배를 만들려고 쌓아둔 철강이 많았다. H빔 같은 철 구조물을 만들어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작정 덤벼들어 뉴올리언스 미시시피강 철교 2개 공사에 들어가는 철 구조물 수출에 성공했다. 이후 휴스턴 컨벤션센터, 시카고 스타디움 공사의 철 구조물 납품권도 따냈다.”

    미국에서 영업을 하던 그는 멕시코만에서 석유를 시추하는 해양플랜트를 보게 됐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철로 만든 구조물이니 우리가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당시 해양플랜트는 미국 회사들이 독점했다. 석유 시추는 중동뿐 아니라 인도 봄베이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서도 이뤄졌다. 마침 말레이시아의 유전회사에서 해양플랜트 입찰 공고가 났다. 입찰서류로 뭘 만들어야 하는지, 가격 견적을 어떻게 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도전에 나섰다.”

    회사에 손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해당 부서에서 산출한 가격에 50%를 더 얹어 입찰가격을 써냈다. 그런데도 미국 회사들이 제시한 가격의 절반밖에 안 됐다. 가격경쟁력이 있다는 걸 확인한 강 상무는 유전회사에 “우리에게 기술을 가르쳐주면서 만들면 너희는 건설비용을 낮출 수 있어 서로 이익 아니냐”고 설득했다. 그렇게 수주에 성공하자 일감이 몰려왔다. 지금도 해양플랜트는 우리나라 주요 수출 업종 중 하나다.

    물론 수주가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다. 강 전 상무는 “처음엔 담당자들이 만나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일이 있든 없든 자주 찾아갔고, 갈 때마다 여비서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액세서리나 초콜릿을 선물하며 환심을 샀다. 그렇게 친해지니까 여비서가 면담 약속을 잡아주기도 하고, 중요한 입찰이 있을 때 정보를 슬쩍 흘려주기도 했다. 문전박대하던 담당자도 나중엔 ‘차나 한잔 하자’며 마음의 문을 열었다”고 노하우를 들려줬다.

    김달호 전문위원도 나름의 영업 노하우 한 가지를 들려줬다.

    “아랍어를 어느 정도 배우고 리비아에 갔다. 하지만 거래 파트너와 협상할 때는 무조건 영어로만 했다. 그들은 내가 아랍어를 모르는 줄 알고 협상 중에도 자기네끼리 아랍어로 의견을 조율하곤 했다. 상대방의 의도를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도 바로 대처할 수 있어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었다.”

    着眼大局 着手小局

    한국무역협회 자료에 따르면 종합무역상사가 국내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75년 9%에서 1980년대엔 30%대로, 1999년엔 51%까지 증가했다. 1980년대에는 동남아, 중동, 중남미 기업인들이 ‘한국 종합상사를 배우자’며 우르르 방한하기도 했다.

    하지만 종합상사의 질주는 거기까지였다. 이후 종합상사들은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기업 환경이 급변했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재벌의 계열분리가 이어지고, 남은 계열사들도 자체 해외 네트워크를 확충하면서 직접 수출을 챙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인터넷 등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종합상사의 가장 큰 장점이던 ‘정보력 우위’를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규모가 작은 회사들도 종합무역상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수출입하기 시작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전체 수출에서 종합무역상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2~3%까지 낮아졌다.

    결국 정부는 대외무역법을 개정하고 2009년 종합무역상사 제도를 폐지했다. 중소기업 수출을 지원하는 전문무역상사 제도가 운영되지만 그 규모는 종합무역상사보다 작다. 기존 종합무역상사 7곳(삼성물산, GS글로벌, 대우인터내셔널, 효성, LG상사, SK네트웍스, 현대종합상사)도 수출입 업무보다는 자원개발 등 사업 다각화를 통해 활로를 모색한다. 대우인터내셔널은 석유·가스 등 자원개발, 발전투자(IPP)와 같은 인프라 사업에 중점을 둔다. SK네트웍스는 석탄광물 사업에서 석유제품 판매(주유소), 자동차 경정비(스피드메이트), 패션 사업, 호텔 사업까지 전개한다. 종합상사가 아니라 ‘종합사업회사’로 변신한 것.

    하지만 종합상사맨들의 도전 정신은 성공신화를 꿈꾸는 많은 이의 가슴에 귀감으로 새겨져 있다. 평생을 종합상사맨으로 산 김재우 한국코칭협회장은 “종합상사맨의 자세는 바둑을 두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착안대국 착수소국(着眼大局 着手小局).’ 바둑을 둘 때 눈은 반상 전체의 큰 형국을 보고, 돌을 놓을 때는 눈앞의 작은 형세를 정확히 살피는 것처럼 영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달호 전문위원은 “종합상사맨들이 그랬듯이 지금도 도전하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요즘 취업이나 재취업이 어렵다고 하는데, 청년이든 중년이든 국내만 보지 마라. 해외 나가면 할 게 많다. 특히 코스타리카 같은 중미 지역은 기회의 땅이다. 용기만 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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