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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는 성수동 구두거리

“탠디? 다른 데는 더 심해” “사태 해결? 이제 시작일 뿐”

  •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분노하는 성수동 구두거리

  • ● 해마다 추락하는 수제화 공임
    ● 하루 종일 해도 월 200만 원 벌기 힘들어
    ● 젊은 인력 유입 없어 50대도 ‘젊은이’
    ● 백화점, 홈쇼핑 수수료 안 내리면 제화업계 미래 없다
[조영철 기자]

[조영철 기자]

“탠디는 그나마 일해 먹을 만한 집이야. 다른 브랜드보다 500원이라도 더 줘요. 이번에 거기서 난리가 나 그렇지. 다른 데는 더 심해.” 

“A, B, C, 지금은 망한 D 이런 놈들이 더 나쁘지. 일은 일대로 시키면서 아주 ‘양아치짓’까지 해요.” 

“그렇지, 그렇지. 탠디는 최소한 굽은 안 싸잖아. A 구두는 전부 굽을 싸서 일하기가 아주 나쁜데 그런 거 시켜놓고 돈은 탠디보다도 헐하게 줘.” 

5월 10일 오후, 서울 성동구 성수동 한 고깃집에 제화기술자 세 명이 둘러앉았다. 큰형은 1950년생으로 1963년부터 구두를 만들었다. 다른 두 명은 각각 1954년 태어나 1968년부터 올해까지 꼭 50년째 구두 일을 하는 중이다. 세 명이 몸담은 일터는 모두 ‘우리나라 제화산업의 메카’로 통하는 성수동에 있다. 이들 손끝에서 금강, 미소페, 탠디, 에스콰이어, 엘칸토 등 국내 유수 브랜드의 수제화가 만들어졌고, 백화점 홈쇼핑 개별 매장 등에서 팔려나갔다. 그들에게 ‘탠디 사태’에 대한 의견을 물은 참이었다.


‘탠디 사태’가 알려준 제화 산업 현주소

‘탠디 사태’는 4월 26일 유명 브랜드 탠디 구두를 만들어온 제화기술자들이 서울 관악구 본사를 점거한 채 ‘공임(제작비) 켤레당 2000원 인상’ 등을 요구하며 시작한 농성을 일컫는 말이다. 시위 참가자들 입에서 “한 켤레 수십만 원씩 하는 구두를 만들어도 기술자에게 돌아오는 돈은 6500원에 불과하다” “탠디가 2011년 이후 8년 동안 공임을 단 100원도 올려주지 않아 힘들다” 등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면서, 제화산업 종사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아졌다. 

공장이 멈춰 서고 기술자들이 본사를 점거하자 탠디 측도 공임 인상 의사를 내놨다. 그러나 인상액을 500원 → 650~700원 → 800원 등으로 ‘찔끔찔끔’ 올려 제시하면서 농성은 20일 넘게 이어졌다. 10일 오후는 이 지난하던 싸움이 끝을 향해 달려가던 중이다. 양측이 ‘공임 1300원 인상, 특수공임 별도 지급’ 등의 내용에 합의했음을 공식 발표한 건 11일 오전 1시를 넘긴 시각. 그러나 10일 오후부터 이미 성수동 제화업계 사람들 사이에서는 “조만간 ‘탠디 사태’가 끝난다더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성수동은 우리나라 최대 제화 산업 집적지다. 지하철 2호선 성수역을 중심으로 남녀 수제화 생산업체 및 원부자재 유통업체 수백 곳이 밀집해 있다. 서울시는 관내 구두제조업체의 약 40%가 성수동에 몰려 있는 것으로 추산한다. 이곳에서 일하는 제화업계 종사자도 줄잡아 수천 명이다. 이들에게 ‘탠디 사태’는 초미의 관심사였고, 구두 공장과 매장뿐 아니라 거리 곳곳에서도 이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나 많은 이가 실명 인터뷰는 꺼렸다. 한 제화기술자는 “여기 있는 공장 대부분이 유명 구두 브랜드 하도급업체다. 언론에 얼굴이 나가면 본사에서 ‘이 사람 일하는 공장 어디야? 다음 달부터 물량 주지 마’ 할 수도 있지 않겠나. 그러면 나뿐 아니라 동료들까지 어려워진다”고 했다. 

이에 익명을 전제로 이야기를 들었다. 고깃집에서 이뤄진 대화도 3명의 기술자 이름과 그들이 비판하는 업체명을 밝히지 않기로 했다. 취재에 응한 ‘성수동 사람’ 상당수가 공통적으로 한 얘기는 “이번 일로 탠디가 몰매를 맞았는데, 다른 업체들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였다. 이제 다시 고깃집으로 돌아가보자. 

A사 제품은 구두 굽을 싸서 일하기 힘들다는 게 무슨 말씀인가요? 

“왜 그 여자 구두 보면 굽을 가죽으로 한 번씩 싸놓은 것들 있잖아요. 그게 꽤 번거로운 작업이에요. 신경을 기울여야 해서 한 켤레 완성하는 데 시간이 한참 더 걸린다고. 우리처럼 켤레당 돈을 받는 처지에서는 그게 다 돈인 거야. 그런데 그런 디자인의 구두 제작을 맡기면서 공임은 한 켤레에 6000원 줘요.” 

이번에 문제가 된 탠디보다 500원이 적네요. 

“그러니까 이게 아주 고약하다고. B는 더해. 거기는 한 켤레 만들면 5300원밖에 안 줘요. 그리고 우리가 옛날에는 회사에 소속돼 일을 했는데, 2000년 넘어서면서부터 다들 개인사업자 아니면 프리랜서가 됐잖아. 그러면 그 공임에서 3.3%가 또 세금으로 빠진다고요. 일은 본사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데 세금은 우리가 내고, 4대 보험도 안 되고. 이런 놈의 일이 세상에 어디 있어.”


“일하다 다치면 ‘모가지’ 잘려요”

성수동 제화기술자들은 성수기에는 피로회복제에 의지해 하루 종일 일한다. [조영철 기자]

성수동 제화기술자들은 성수기에는 피로회복제에 의지해 하루 종일 일한다. [조영철 기자]

소줏잔이 돌면서 목소리가 커졌다.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도 했다. 

“거 예전에 우리 같이 일하던 OO이 있잖아요. 걔가 구두 만드는 거 때려 치우고 ‘노가다’를 시작했는데 거기는 밥도 사주고 4대 보험도 해준대요. 다치면 산재 처리도 해준대. 우리는 밥도 우리 돈으로 사 먹어, 일하다 다치면 돈도 못 받아. 이게 뭐하는 거요?” 

“일하다 다치면 돈 못 받는 걸로 끝나나. ‘모가지’가 잘리지. 며칠만 쉬어 봐요. 당장 자리 뺄 테니까. 우리 공장 사장이 쉰둘인가 먹었는데, 엊그제 예순일곱 잡수신 분을 잘라버렸어요. 일하는 게 마음에 안 든대. 그래도 찍소리 하나 못 하고 짐 싸서 나가야 되는 게 이 동네예요. 그러고 보면 진짜 노가다가 낫지.” 

“갑질이 갑질을 낳고, 그게 또 다른 갑질을 낳고 그러는 거 같아. 우리 공장에서는 A사 일을 주로 맡아서 해요. 그런데 대금을 어쩌다 한 번씩 상품권으로 주는 거야. 사장이 그거 받아오면서 우리 앞에서는 욕을, 욕을 하는데 본사에 대고는 말도 못해요. ‘그거 처리할 능력이 안 되면 우리도 ‘오더’ 못 주지’ 그럴 거니까.” 

“이 동네에는 이름만 사장이지 정작 집에 들고 가는 돈은 제화기술자랑 별반 다르지 않은 사장이 꽤 돼요. 본사에서 하도 제조원가를 ‘후려치니까’ 켤레 당 몇 천 원씩 안 남는다더라고. 거기서 공장 임차료 내고, 전기료 내고 하다가 열 받으면 또 자기 아래 있는 사람들한테 화풀이하는 거지.” 

성수동 한 구두공장에서 만난 E씨(40)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그는 1950년 태어나 17세 때부터 구두를 만들기 시작한 제화기술자의 아들이다. E씨 아버지는 30년 넘게 제작 현장에서 일하다 2000년대 중반 공장을 차렸다. 온라인 쇼핑몰, 로드숍, 시장 등에서 판매하는 이른바 ‘비메이커’ 제품을 만들었는데 한때는 제화기술자를 15명 둘 정도로 제법 잘됐다. 2009년 E씨가 당시 다니던 건설업체 일을 힘들어하자 아버지는 “남 밑에서 고생하지 말고 아버지 공장을 물려받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게 E씨가 성수동에 들어온 계기다. 그는 직접 구두를 만들지 않고 현장 관리 업무를 했다. 

“그런데 저 합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장이 어려워지기 시작했어요. 구두 유통 환경이 달라진 거죠. 예전에는 중소규모 온라인 쇼핑몰이 많았는데, 언제부턴가 소수만 살아남아 몸집을 불려갔어요. 그러면서 ‘갑질’이 시작됐죠. 납품을 하려면 마진을 턱없이 낮춰야 했어요. 대기업이 운영하는 홈쇼핑 업체는 수수료를 40%까지 받아요. 백화점보다도 더 높죠. 그런 유통 채널이 활성화되면서 로드숍은 거의 다 망했고, 시장은 외국산 저가 제품이 장악하고…. 나중에는 구두 한 켤레 만들어봐야 마진이 2500~3500원 수준으로 떨어지더라고요. 그거 받아서는 우리 식구가 살 수가 없죠. 결국 아버지는 스스로 공장 문을 닫았고, 지금은 다시 ‘남의 공장’에서 제화기술자로 일하고 있어요.” 

바로 그 공장에 E씨도 취업했다. 현장 관리자 역할이다. 구두 제작 공정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뉜다. 가죽을 디자인에 맞춰 자르고 박음질해 신발 윗부분을 만드는 ‘갑피’, 그리고 갑피 아래 밑창·굽·깔창 등을 붙여 구두를 완성하는 ‘저부’ 공정이다. E씨는 갑피와 저부 공정이 매끄럽게 돌아가도록 돕고, 중간중간 필요한 다른 일도 한다. 이날은 인터뷰 틈틈이 B브랜드 상표 천을 구두 바닥에 붙였다. 

“저도 구두 만드는 법은 다 아는데 여기 일하시는 분들만큼 잘하지를 못해요. 제가 성수동에서 본 가장 젊은 제화기술자가 48세예요. 10대 때 시작해 40~50년씩 구두만 만드신 분이 수두룩하죠. 이탈리아 같은 데서 태어났으면 ‘장인’이라고 좋은 대접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여기서 공임 몇천 원씩 받으며 하루 종일 일하고 계시니…. 한마디로 미래가 없어요.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이 안 들어오는 거고요. 성수동에서는 50대 중후반까지 청년입니다.” 

E씨는 “처음 나한테 이 길을 권했던 아버지가 요즘엔 자꾸 ‘미안하다’고 하신다. 나도 고민이 많다. 9년이나 해온 일이니 계속 하기는 하는데 매순간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한다”고 털어놓았다.


50대가 ‘청년’ 소리 듣는 사회

성수동 한 구두공장 작업대 풍경. [조영철 기자]

성수동 한 구두공장 작업대 풍경. [조영철 기자]

‘성수동 사람들’은 제화기술자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 시기를 1990년대 후반부터로 본다. 1970~80년대까지는 ‘기술자’ 대접을 받았고 소득도 ‘일반 회사 부장 정도’는 됐다. 이후에도 먹고살고 자녀 키우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고 한다. 최소한 IMF 외환위기가 오기 전까지는 대형 제화업체에 고용돼 ‘노동자’로 일할 수 있었다. 그러면 4대 보험에 가입하고 자녀 학자금과 퇴직금 등도 받았다. 그러나 2000년 접어들면서부터 대형 업체들이 ‘소(小)사장제’를 도입해 제화기술자들이 사업자등록을 내게 했고, 금세 이것이 업계의 상식이 됐다. 켤레당 헐값의 공임을 받으며, 소득을 높이려면 쉴 새 없이 일해야 하는 삶으로 접어든 것이다. 

성수동 고깃집에서 만난 64세 제화기술자는 “제화 시장엔 성수기 비수기가 뚜렷하다. 3~5월, 9~11월이 일이 많을 때인데 그때 돈을 벌어놓아야 일감이 적을 때도 살아남을 수 있다. 그래서 봄가을이면 오전 5시 반 첫차를 타고 공장에 나간다. 하루 18~19시간씩 일하는 거다. 그래봐야 하루 수입이 10만 원 좀 넘는다. 구두를 50년간 만들었는데 20대 아르바이트생이 받는 최저임금(시간당 7530원)도 못 되는 돈을 벌고 있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2015년 서울연구원이 발간한 ‘광복 70년, 서울은 어떻게 변했을까?’ 자료를 봐도 제화업계의 ‘상전벽해’를 생생히 느낄 수 있다. 1948년 제화공 임금은 10.7원으로 회사원(9.3원)이나 공무원(4.4원)보다 많았다. 그러나 2014년에는 사무종사자(회사원, 공무원) 평균 월급이 301만 원인 반면 ‘섬유 및 가죽 관련 기능 종사자’ 월급은 183만 원으로 완전히 역전된다. 

성수동에 있는 또 다른 공장을 찾았다. 각각 수십 년씩 구두를 만들어온 3명이 공동 창업 형태로 차린 곳이다. 그중 한 명인 홍노영(56) 씨는 2007년부터 2013년까지 탠디에서 일한 제화기술자다. 사업자등록을 내고 켤레당 3.3%씩 세금을 납부했지만, 실상은 노동자와 다를 바 없이 일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가죽과 화학물질을 만져가며 쉼 없이 구두를 만들었다. 그는 “거기서 일하는 동안 2년에 한 명꼴로 동료가 죽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다들 ‘여기서 이렇게 일하는데 몸이 멀쩡할 리가 있나’ 하고 혀를 찼다”고 했다. 이에 대해 탠디 측은 “자체 조사 결과 2007~2013년 사이 사망자는 한 명뿐이며 사망 원인과 작업장 환경 사이의 인과관계도 확인된 바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홍씨 얘기는 다르다. 그는 ‘저 죽음이 내게 닥치면 어쩌나’ 걱정하고 만성통증에 시달리면서도 일을 쉬거나 작업시간을 줄여달라고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던 중 동료 한 명이 간암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분이 퇴사를 결정하면서 사장한테 ‘여기서 10년 넘게 일했으니 퇴직금조로 얼마쯤 줄 수 없느냐’고 했어요. 당장 살길이 막막해져 치료비에라도 좀 보태려고 한 거죠. 사장이 ‘무슨 퇴직금이냐’고 펄쩍 뛰더라고요. 그걸 옆에서 보는데 ‘이건 뭔가 문제가 있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건 뭔가 잘못됐다”

홍씨는 2014년 동료 9명과 함께 탠디를 상대로 퇴직금 소송을 냈다. 탠디는 국내 유명 로펌에 소송을 맡기고 ‘이들은 모두 개인사업자’라고 강변했지만, 법원은 2016년 홍씨 측 손을 들어줬다. 이들이 노동자와 다름없이 일했음을 인정하고 1인당 1152만~4598만 원씩 퇴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홍씨는 이 ‘싸움’이 제화업계 동료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상황은 오히려 나쁜 쪽으로 흘러갔다. 탠디는 제화기술자들과 직접 계약하는 대신 중간에 하도급업체를 세웠고, 노동 여건은 악화했다. 

구두 아래 쿠션을 깔거나 앞코에 장식을 다는 등 까다로운 작업을 할 때 추가로 지급하던 이른바 ‘특수공임’을 없앤 것도 한 사례다. 이번에 탠디 본사 점거 농성을 한 제화기술자들은 공임 인상과 더불어 ‘특수공임 별도 지급’을 요구했다. 제화기술자들은 “법원이 9명에게 퇴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뒤 탠디가 그 지출을 메우려고 남은 사람들을 더욱 심하게 몰아붙였다”고 주장했다. 

탠디를 떠난 뒤 홍씨가 시작한 것이 바로 이곳, 성수동 공장 일이다. 그는 “솔직히 말하면 벌이는 탠디에 있을 때만 못하다”고 했다. 

“구두 브랜드와 디자인에 따라 공임이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켤레당 5500~6000원 어간입니다. 우리 셋이 일을 나눠 하니까 하루에 공동으로 70켤레는 만들어야 인당 13만 원 정도씩 버는 겁니다. 그만큼 작업을 하려면 숙련된 기술자라도 하루 종일 일해야 해요. 보통 오전 6시 40분쯤에 모여서 오후 9시 정도 집에 들어가죠. 주말 빼고 20일 일하면 월급이 250만 원 안팎인데 거기서 임대료 내고, 전기료 내고…. 정말 힘들어요.” 

홍씨는 인터뷰를 하면서도 손으로는 쉴 새 없이 B브랜드 여성 샌들에 들어갈 지퍼를 손질했다. 또 다른 공장에서 만난 60세 제화기술자는 “요즘 대형 업체들이 인건비가 저렴한 해외로 물량을 많이 돌리면서 제화업계 성수기가 상대적으로 짧아졌다. 일감이 줄어드니 공장들끼리 덤핑 경쟁을 벌인다. 전에는 켤레당 6000원 안 주면 안 하던 일도 한 공장에서 ‘5800원에 하겠다’고 받아가면 옆 공장에서 ‘5600원에 해주겠다’며 빼앗아가는 판이다. 그러면서 서로 다 아는 사람들끼리 의가 상하고, 성수동 바닥이 사분오열됐다. 제화업체들은 여기저기 비교해가며 ‘땅 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수입을 늘려간다. 반면 제화기술자 중 3분의 1은 신용불량자일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탠디 사태가 해결됐다고요? 이제 시작에 불과해요. 공임 조금 올려준 걸로 이 문제가 끝나지 않습니다. 탠디를 점거한 사람들은 회사 측에 공임 인상과 더불어 ‘소사장제 폐지와 직접 고용’도 요구했어요. 이번에 그 부분이 합의되지는 않았지만, 지금 성수동에 있는 사람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탠디 사태’를 보면서 이쪽에서도 행동을 준비하기 시작한 사람이 적잖을 겁니다.” 

이 제화기술자가 한 얘기다. 5월 11일 성수역 앞에서는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 등이 주최한 ‘제화노동자 결의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정기만 제화지부 지부장은 “하루 8시간 잠을 자고, 8시간은 볼일을 보고, 8시간 일해야 최소한 사람답게 산다”고 외쳤다. 단상에 오른 한 제화기술자는 동료들 앞에서 “우리 이제 첫차 타고 출근하지 말고, 막차 타고 퇴근하지 말자. 인간답게 살려면 우리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들은 앞으로 연대해 공동의 목소리를 내기로 결의했다. ‘탠디 파업’은 끝났지만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제화기술자들의 싸움은 이제 시작인 셈이다.


신동아 2018년 6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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