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퍼 전 공정에 사용되는 불화수소, 90% 이상 일본 의존
포토레지스트 수출 규제, 시스템반도체 양산화에 큰 타격
러시아산 불화수소?…“품질 보증 힘들다”
외국 회사와 케미컬 소재 합작회사 세우는 것도 방법
WTO 제소, 판결까지 3~4년 걸려 효력 미미
먼저, 고순도 불화수소와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 웨이퍼(반도체칩의 기본이 되는 판) 공정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소재다. 불화수소는 거의 전량을, 포토레지스트는 전체 물량의 90%를 일본산에 의존하고 있다. 포토레지스트는 빛을 조사(照射)하면 화학변화를 일으키는 수지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보유하고 있는 두 소재의 재고량은 최대 2~3개월치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그 안에 새로운 수입처를 찾지 못하면, 현재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반도체는 두세 달 뒤 쓰레기로 전락할 수도 있다. 불화수소와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 공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사용되고, 중간에 기계를 세울 수도 없는 상황이다. 반도체 제작에 안정적인 재료 공급은 ‘생명’과도 같다.
재고는 두 달치, 웨이퍼 공정은 3개월 이상 걸려
반도체 등 주력 수출 상품 부진 여파로 올해 1분기 경상수지가 6년 9개월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딜라이트에 전시된 반도체 웨이퍼. [뉴스1]
일본 기업 스텔라케미파, 모리타화학공업 등이 글로벌 공급량의 90% 이상을 책임지고 있다. 국내에서는 솔브레인, 이엔에프테크놀로지, 후성기업, 원익머트리얼즈 등이 일본에서 원재료를 수입해 합성·정제 작업을 거친 뒤 한국의 반도체 회사들에 납품한다. 하지만 이는 일본에서 조달하는 것과 같은 고순도 불화수소는 아니다. 반도체에는 순도에 따라 각기 다른 수십 가지의 불화수소가 사용된다.
문제는 하나의 웨이퍼가 완제품으로 탄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3개월 이상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재고가 두 달치 있다고 해도 그사이 재료가 채워지지 않으면 제품 완성이 불가하다. 업계 한 관계자는 “반도체는 중간에 장비 전원을 끄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장비를 초기화할 경우 경제적 손실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도체 공장은 24시간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포토레지스트는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시스템 반도체에 쓰이는 EUV(극자외선)용 포토레지스트와 메모리 반도체 중 D램에 쓰이는 ArF(불화아르곤) 포토레지스트, 낸드플래시에 사용되는 KrF(불화크립톤)용이다. 이 중 EUV용 포토레지스트에 대해서만 수출 규제가 적용되고 있다. 나머지 ArF·KrF용 포토레지스트도 수출 규제 품목에 포함돼 있기는 하지만 실제 수출 승인은 예전과 같은 속도로 나고 있다. 현재 국내 기업들이 생산하고 있는 제품 대부분이 메모리 반도체라는 점에서 포토레지스트 수급 부족으로 인한 생산 차질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EUV용 포토레지스트가 삼성전자가 개발 중인 시스템 반도체(비메모리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소재라, 수출 규제가 장기화할 경우 한국 반도체 산업은 중장기적으로 힘들어질 수 있다. EUV 공정은 기존 ArF 공정보다 더 세밀한 반도체 회로 패턴을 그릴 수 있어 반도체 성능과 효능 등을 높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메모리 반도체 중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세계 1위인 대만 TSMC는 이미 지난 4월부터 7나노(㎚) EUV 라인 양산을 본격화했다. 올 하반기에 출시될 아이폰에 들어가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A13을 7나노 EUV 공정을 통해 생산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역시 7나노 EUV 공정으로 생산한 AP를 올 하반기 출시 예정인 ‘갤럭시노트’ 등에 탑재할 계획이다. 현재 화성 S3 라인에서 EUV 기반 공정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데, 한창 건설 중인 화성캠퍼스 EUV 전용 라인을 2020년부터 본격 가동한다는 구상. 시장조사업체인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 1분기 세계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가 점유율 48.1%로 1위를 달리고 있고, 삼성전자가 19.1%로 그 뒤를 쫓고 있다. 현재 7나노 이하 파운드리 미세공정은 삼성전자와 TSMC만 가능하다.
시스템 반도체 양산 발목 잡는 포토레지스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일본 출장을 마치고 7월 12일 서울 강서구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고 있다. [뉴스1]
이 부회장은 출장 엿새 만인 7월 12일 귀국했다. 요미우리·니혼게이자이 등 일본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EUV용 포토레지스트를 만드는 일본 JSR의 대주주인 ‘브리지스톤’ 경영진을 비롯해, 불화폴리이미드 소재를 만드는 스미모토화학의 자매사 미쓰이스미토모은행(SMBC) 경영진 등을 만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삼성전자는 이번에 규제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품목에 대해서도 해당 소재 업체들에 e메일을 보내 안정적인 납품을 부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 따르면 이 회장의 일본 출장 후 삼성전자는 일본 소재 회사의 해외 공장에서 우회적으로 긴급 물량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는 ‘임시 처방’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못 된다.
수출 규제 마지막 품목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 제조에 필요한 핵심 소재다. 불소처리를 통해 열 안정성과 강도 등의 특성을 강화한 폴리이미드(PI)필름으로 종이처럼 말 수 있는 ‘플렉시블 OLED’용 패널에 사용된다. 또한 스마트폰과 TV용 LCD(액정표시장치), 휴대전화용 인쇄회로기판(PCB), 반도체 패키징, 3D프린팅 소재 생산에도 필요하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일본 업체가 세계시장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필요 물량의 84.5%를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이 물질의 수입이 막혀버리면 세계시장에서 TV용 OLED 패널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LG디스플레이와 스마트폰용 OLED 패널 1위 업체인 삼성디스플레이가 타격을 입게 된다. OLED 패널 공급이 막히면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사업과 LG전자의 OLED TV 사업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원재료 공급처 바꿨다가 제품 결함 날 수도”
현재 가장 중요한 문제는 수출 규제 품목 3가지가 어느 선까지 대체 가능한지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에 따르면 대체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본 의존도가 100%가 아닌 만큼 지금 이 순간도 미국과 중국, 유럽 등지에서 일부가 수입되고 있다. 문제는 물량 자체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다른 나라에서 수입해오는 물량이 있긴 하지만, 거래처가 일본 수입량을 대체할 수준이 못 된다. 단기간에 현지 생산량을 늘리기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 대만 등과 불화수소의 수입량 확대를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최근 러시아가 우리 정부에 불화수소 공급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됐지만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은 “기업에 직접 제안한 게 아니라 섣불리 뭐라 말하기 어렵다”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또한 아직까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러시아산 불화수소를 사용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는 “러시아산을 썼을 때 공정에 결함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원재료 공급처를 바꾼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아주 미세한 차이가 엄청난 결함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검증되지 않은 업체의 물건을 덥석 받아 쓰기는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설령 러시아산 불화수소를 들여온다 하더라도 까다로운 품질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 특히 불화수소는 독성이 있는 민감한 물질이라 테스트 기간만 2개월이 넘게 걸린다. 러시아는 “일본보다 더 순도 높은 불화수소를 공급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지만 업계는 “마냥 신뢰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LG디스플레이는 최근 불화수소를 기존 일본산에서 국산으로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국내 A기업의 불화수소 제품을 선정해 안전성 테스트 작업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테스트 기간은 한 달 정도로 잡고 있으며, 추후 안전성이 확보되면 곧바로 생산 공정에 사용한다는 방침이다. A기업은 불화수소의 원료인 중국산 형석이나 추출물을 직접 수입해 가고 과정을 거친 뒤 국내 기업들에 판매해왔다.
무엇보다 디스플레이 공정에 쓰이는 불화수소는 반도체만큼 고순도가 요구되지 않아 국산화에 유리하다. 업계 한 관계자는 “나노 반도체 공정에서는 ‘파이브 나인(99.999%)’급 이상의 고순도 불화수소를 써야만 수율(생산량 대비 결함 없는 제품 비율)이 높아지는데, 디스플레이는 그 기준보다는 조금 더 낮아도 상관없다. 덕분에 소재 선택의 폭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설명했다.
중소기업이 생산 물량 늘리는 건 위험
LG그룹을 시작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주요 IT기업들은 일본산 소재 의존도를 낮추는 작업에 속도를 낼 전망이다. 당장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수입 대체선 물색도 시급하지만, 그와 함께 반도체 소재 국산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요구가 일고 있다. 일각에서는 “아직까지 일본의 기술력을 따라잡기 힘들다”는 회의론이 나오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하다”고 판단하는 이들도 있다.이주완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일본 기업과 국내 중소기업을 비교해서 그렇지, 우리나라도 대기업이 뛰어들면 기술력 극복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연구위원은 “이번에 문제가 되고 있는 소재는 시장 자체가 너무 작아서 그동안 대기업이 뛰어들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과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는 만큼 대기업이 나서서 ‘반도체 소재의 국산화’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단, 중소업체가 이번 일본의 규제를 기회 삼아 갑자기 생산 물량을 늘리는 건 다소 위험할 수 있다. 일본의 무역 규제가 완화될 경우 품질이 우수한 일본 제품으로 회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 연구위원은 “결국 국내 대기업이 미국·유럽 등의 외국 케미컬 회사와 합작 회사를 세우는 게 최선일 수 있다”고 밝혔다. 이 경우 합작회사는 특정 화학소재를 국내 대기업에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어 수익성이 보장돼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현실화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한일 갈등 장기화하면 중국이 최대 수혜
문재인 대통령이 7월 10일 청와대 충무실에서 열린 ‘경제계 주요인사 초청 간담회’에 참석해 일본의 반도체 관련 수출 규제 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뉴시스]
만약 한국이 일본에 반도체 완제품을 수출하지 않는 방식으로 ‘맞보복’을 할 경우 일본 역시 피해가 예상된다. 하지만 그 수치가 우리나라에 비해 매우 미미하다. 심지어 한국의 보복이 강화될수록 일본의 GDP 감소 폭은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경엽 연구위원은 “한국 기업을 대체하는 일본 기업이 증가하기 때문”이라며 “일본을 향한 보복 조치는 피하는 게 맞다”고 밝혔다.
한일 간 반도체 갈등이 장기화할 경우 어부지리를 챙길 나라도 있다. 최대 수혜국은 중국. 현재 중국은 ‘반도체 굴기’를 표방하며 반도체 ‘국산화’를 위해 오는 2025년까지 약 170조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반도체를 제조할 때 조달하는 소재와 장비의 자급률을 현행 20%에서 70%까지 높인다는 게 핵심이다. 중국은 세계 최대 반도체 소비국으로 메모리 반도체는 100%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중국 국영 반도체 기업인 칭화유니그룹은 지난 6월 메모리 반도체 D램사업 진출을 공식 선언했다. 소재는 물론 완제품인 D램까지 한국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국내 기업들이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소재나 장비 제조를 등한시한 채 반도체 공정 기술에만 집중해온 것과 달리, 중국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는 속셈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중국이 반도체 국산화에 성공할 경우 그동안 한국과 일본이 주도하던 전기·전자산업도 중국에 주도권을 빼앗길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와 관련해 논의되는 ‘WTO 제소’ 방안은 피해 최소화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현실적인 방안이 되기 힘들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일본의 중국 희토류 소송처럼 WTO로 가면 우리가 이길 여지가 있지만 문제는 시간”이라며 “WTO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판결까지 3~4년은 족히 걸릴 것이고, 그사이 일본과의 관계는 더욱 틀어져 우리 산업계가 입을 피해만 눈덩이처럼 커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꼬인 실타래를 풀 방법은 “외교적 타협밖에 없다”는 게 학계와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산업무역 구조상 한국이 일본을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없는 상황에서 맞대응 전략은 피해야 한다. 대화 의제를 발굴해 한일 간 정상회의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