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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맹장 척준경, 두만강 건너가 여진軍 격파하다

고려-거란-송-서하 4國정립

  • 백범흠|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맹장 척준경, 두만강 건너가 여진軍 격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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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 동북 9성을 쌓다

여진족은 발해가 멸망한 후 요나라에 예속돼 공물(供物) 납부 등 각종 부담을 졌다. 완안부가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한 것으로 볼 때 여진족은 동족 의식을 갖고 고려를 대한 것으로 보인다. 금사(金史)에 따르면 금나라 시조 완안 아골타의 조상 함보(函普)는 고려(또는 신라) 출신이라 한다. 

12세기 들어 영가, 우야소 등이 이끄는 완안부족 침입이 잦아지자 고려는 1107년 윤관을 총사령관으로 해 여진 정벌을 시작했다. 여진 정벌에 동원된 병사는 총 20만 명에 달했다. 맹장 척준경을 선봉으로 한 윤관의 군대는 여진군을 격파하고 함흥평야로부터 두만강 이북 280㎞(700리)의 지린성 옌볜자치주 둔화에 위치한 선춘령에 이르는 점령지역에 아홉 개 성(윤관의 9성)을 축조했다. 20만 대군을 동원해 함흥평야와 그 부근만을 빼앗았다는 일부의 주장은 논리적 모순이다. 고려는 이 ‘동북 9성’을 오래 지키지 못했다. 완안부 세력이 날로 강성해졌기 때문이다. 완안부에는 영가, 우야소, 아골타, 오걸매 등 영걸(英傑)이 잇달아 출현했으며, 이들은 요나라와 고려의 행정력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지린성 동남부와 두만강 유역에 이르는 지역의 퉁구스계 부족을 결집해나갔다. 

거란(契丹), 서하(西夏), 윈난의 대리(大理) 등 새외민족 국가의 흥기(興起)로 인해 송나라 영토는 당나라 전성기에 비해 절반가량 축소됐다. 서하(탕구트) 민족주의자 경종 이원호(1003~1048)는 서하문자를 창제케 했으며, 1038년 송나라에 대한 조공을 중지하고, 황제를 칭했다. 그러자 송(宋) 인종은 50만 대군을 동원해 서하(西夏) 정벌을 시도했다. 1040년부터 3년간 서하와 송나라 간 여러 차례 전쟁이 벌어졌다. 1040년 서하는 산시성 옌안(延安)을 공격했으며, 싼촨커우(三川口) 전투에서 송군(宋軍)을 전멸시켰다. 인종은 범중엄(范仲淹)과 한기(韓琦) 등을 서하 전선에 파견해 서하의 장안(시안) 공격을 저지하게 했다. 그러나 송군(宋軍)은 다음 해 벌어진 하오수이촨(好水川) 전투와 이어 벌어진 딩촨(定川) 전투에서도 패배했다. 범중엄과 한기는 결국 방어에 치중하는 전술을 채택해 서하의 공세를 겨우 막아냈다.


왕안석 신법과 宋 당파싸움

서하도 송과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경제교류 단절로 어려움을 겪었다. 1042년 서하가 강화를 요청했으며 송나라는 이를 받아들였다. 1044년 양국은 ‘경력(慶曆)의 조약’을 체결했다. 서하가 송에 신하의 예를 취하는 대신 송은 매년 은 7만2000냥, 비단 15만3000필, 차 5만 근을 서하에 바친다는 것이 요지였다. 서하는 비단길을 통한 동서교역을 매개하는 한편, 한때 간쑤와 신장 지역으로까지 세력을 넓혔다. 닝샤(寧夏)의 인촨(銀川)을 중심으로 농경과 유목 문화가 결합된 수준 높은 서하문화가 탄생했다. 

송나라는 군사적으로는 취약했으나 경제적으로는 활력이 넘쳤다. 송은 거란과 서하에 매년 막대한 조공을 바치고 평화를 샀다. 돈을 주고 산 평화는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송나라는 조공을 내고도 거란과의 북부전선 및 서하와의 서부전선에 엄청난 수의 수비병을 주둔시켜야 했다. 엄청난 액수의 조공과 군비 부담으로 인해 경제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경제를 회복시키려면 새로운 정책 도입이 필요했다. 

왕안석이 도입한 신법(新法)은 기울어가는 송나라 경제를 회복시키고자 고안된 정책이었다. 신법의 핵심은 정부가 영세민에게 저리(低利)로 융자하는 정책으로 청묘법(靑苗法)이라 불렸다. 신법은 빈농과 소상인에게 큰 도움이 됐다. 만성 적자를 보이던 재정이 흑자로 돌아섰으며 막대한 잉여까지 축적했다. 하지만 신법은 형세호(形勢戶)로 불린 호족(豪族)에게는 타격을 주었다. 정부가 저리로 융자해줌에 따라 더는 빈농과 소상인을 대상으로 고리(高利) 이자놀이를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신법은 호족 출신이 주류를 이루던 사마광, 구양수, 소식, 정호 등 구법파(舊法派) 관료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이해관계 차이와 함께 나중에는 개인적 감정까지 개입돼 격심한 당파 싸움으로 변질됐다. 예술가 기질의 무능한 휘종(徽宗)이 행정능력은 뛰어나나 신념도 절조도 없는 인물인 재상 채경(蔡京)과 환관 동관(童貫) 등을 기용하면서 상황은 악화됐다. 채경은 구법파 고태후(高太后) 집권기에는 신법을 폐지했다가 휘종 등 신법파가 집권하자 이번에는 폐지된 신법을 기를 쓰고 부활시키는 등 무절조(無節操)의 극치를 보인 인물이다. 

당대 최강대국 거란에서도 당파싸움이 벌어졌다. 거란의 당파싸움은 정체성 문제에서 비롯해 감정 대립으로 비화했는데, 나라의 활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송나라에 휘종과 채경, 동관이 있었다면, 요나라에는 천조제(天祚帝)와 야율을신(耶律乙辛), 소봉선(蕭奉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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