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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아버지들

“진정한 孝는 經世濟民” 실천으로 불 밝힌 實學

‘모두의 아버지’ 이익

  •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진정한 孝는 經世濟民” 실천으로 불 밝힌 實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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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호 이익이 지닌 근검과 절약의 미덕은 학문마저 변화시켰다. 꼼꼼하고 알뜰하며 부지런한 아버지이던 그는 평생을 한결같이 백성의 생계를 걱정했다. 그런 헤아림은 훗날 실학의 집대성으로 이어졌다.
“진정한 孝는 經世濟民”  실천으로 불 밝힌 實學

성호 이익 초상.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당파 싸움은 밥그릇 싸움이다. 벼슬자리는 적은데, 한자리 하고 싶은 사람은 많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사상도 이념도 다 중요하지만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의식(衣食)이 족해야 예의를 안다”는 옛 말씀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치가 깃들어 있다. 이익은 그 이치를 자신의 삶에 적용했다. 세상을 운영하는 근본 가치로도 이해했다.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이익은 누구보다 꼼꼼하고 알뜰하며 부지런한 살림꾼이었다. 불행히도 그는 일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백성의 생계를 걱정했다. 훗날 다산 정약용은 이익을 사숙(私淑)해 실학을 집대성했다. 그런 점에서 이익의 뜻이 세상으로부터 영영 버림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꼿꼿하고 단정한 풍모

이익의 언행을 전하는 글은 여럿이다. 조카 이병휴가 쓴 ‘가장(家狀)’도 있고, 제자 윤동규의 ‘행장(行狀)’도 있다.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의 ‘묘갈명(墓碣銘)’ 등도 전한다. 이런 글들을 두루 참고해 ‘아버지 이익’의 모습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보자.

“경기지방의 관찰사가 되어 여러 군현(郡縣)을 순행하게 되자, 나는 길을 돌아서 첨성리(瞻星里, 현재의 경기 안산시)에 있는 선생의 댁을 방문했다. 당시 선생은 81세셨다는데, 처마가 낮은 허름한 지붕 아래 단정히 앉아 계셨다. 선생의 눈빛은 형형하여 쏘는 듯했고, 성긴 수염은 길게 늘어져 허리띠까지 닿을 듯했다.”

노년에 이르기까지 이익은 이처럼 누구보다 건강하고 단정한 학자였다. 채제공의 방문기는 이어진다.

“절을 올리기도 전에 내 마음속에는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가까이 다가가서 모습을 뵈었더니, 화평하고 너그러우셨다. 경전(經傳)에 관해 설명하실 때는 고금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내가 전에 알지 못한 말씀을 해주셨다.”(채제공 ‘묘갈명’)

어릴 적부터 이익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 조카 이병휴의 말에 따르면 “선생은 얼굴이 반듯하고 키가 훤칠했다”고 한다.(이병휴 ‘가장’) 유달리 눈이 컸고, 살찐 편도 아니었다. 노년에도 이익은 자세가 늘 꼿꼿해 굽은 데라곤 조금도 없었다고 한다.

이익이 평생 스승으로 여긴 이는 16세기의 대학자 퇴계 이황이다. 이익도 이황처럼 밥을 먹을 때 수저 소리가 나지 않게 했고, 세수할 때도 물방울 하나 튀지 않게 조심했다. 서찰엔 반드시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그는 퇴계의 저서를 샅샅이 검토하고 그 언행을 조사해 ‘이자수언(李子粹言)’이라는 책자로 만들어두고 일일이 실천에 옮겼다(이병휴 ‘가장’).

이익은 키가 크고 몸이 날씬했고, 서글서글하면서도 광채가 나는 눈동자를 지녔다. 그 언행은 퇴계 이황을 그대로 닮아 조그만 빈틈도 없었다(윤동규 ‘행장’). 한눈에 대학자의 기상이 절로 드러나는 큰 인물이었다.



黨禍로 집안 초토화

그럼에도 이익은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했다. 당쟁 때문이었다. 그의 부친 이하진은 숙종 때 사헌부 대사헌까지 지냈다. 남인의 중진이던 이하진은 남인의 영수 허목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데 연로한 허목이 조정을 떠나자 위기가 찾아왔다. 반대파인 노론은 이하진을 평안도 운산군으로 유배 보냈다. 1681년 이익은 그 유배지에서 출생했는데, 안타깝게도 부친은 곧 병사했다.

이익이 스물다섯 살 되던 해(1706) 또다시 집안에 불운이 닥쳤다. 둘째 형 이잠은 한 장의 상소를 올려 경종(당시엔 세자)의 보호를 주장했다. 그러자 노론은 사건을 확대시켜 이잠을 역적으로 몰았다. 이잠은 혹독한 고문 끝에 죽고 말았다. 결국 이익은 당쟁으로 말미암아 의지할 곳을 모두 잃어버렸다.

아버지를 여읜 데 이어, 어린 시절 철석같이 믿고 의지하던 형마저 잃자 이익은 절망했다. 그는 온종일 집안에 머물며 근신하고 은거할 뿐,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았다(윤동규 ‘행장’).

멸문지화를 입었으나 삶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집안을 재건할 책무를 느꼈다. 처음 결혼한 고령 신씨는 곧 사별했고, 재혼한 사천 목씨는 그의 뜻에 잘 맞았다. 그들 부부는 살림에 힘써 집안의 질서를 잡았고 슬하에 1남 1녀를 뒀다.

늘그막에 얻은 아들 이맹휴(1713~1751)는 이익에게 큰 보람이었다. 문과에 장원급제한 이맹휴는 30대에 벼슬이 예조정랑에 이르렀다. 학문에도 출중해 이익의 후계자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명이 짧았던지 3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아들의 사후, 이익은 조카 이용휴와 어린 손자들에게 기대를 걸었다. 이미 그가 노년에 한참 접어들었을 때의 일이다.

젊은 시절부터 이익은 유달리 살림살이에 마음을 썼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가난해도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살림살이를 돌보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여기는 경향마저 있었다. 그래서 한번 빈곤의 늪에 빠지면 영영 헤어나지 못했다. 이익은 이런 세태를 수긍하지 못했다.

둘째 형 이잠까지 목숨을 잃자 집안 살림은 몹시 궁핍해졌다. 그러자 20대 중반의 이익은 스스로 집안 경영을 떠맡았다. 그는 어머니 안동 권씨에게 살림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애썼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그것이 이익이 생각하는 효성이었다.

이익은 집안에 규약을 정해두고 타인의 물건을 빌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도움 요청에 함부로 따르지도 않았다. 오직 자신의 땅에서 농사지어 얻은 수확량을 헤아려, 많든 적든 그것을 안배해 자급자족했다(윤동규 ‘행장’).



규약 정하고 살림 일으켜

그는 농사일에 익숙한 노복(老僕)에게 논과 밭을 전적으로 맡겼다. 살림 밑천인 노복을 학대하지 않았고, 정해둔 규칙대로 대우했다. 그러자 노복들도 힘을 다해 부지런히 일했다. 경영에 효과가 났던 셈이다. 이런 식으로 한 해 두 해 지낸 결과, 이익의 살림살이는 만년에 이르러 상당히 넉넉해졌다. 그는 가난을 극복하고, 생계의 안정을 회복했다.

“내가 선생의 문하에 수십 년을 출입했지만, 노복을 꾸짖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선생은 노복을 형제나 친척과 똑같이 어루만지고 보살피셨다. 부지런히 일하고 충성을 다한 노복이 사망하자 찾아가서 곡을 하셨다. 또한 집에서 기르는 개가 죽으면 묻어주게 하셨다. 매사에 내 마음의 인(仁)을 확대하여 남에게까지 닿게 하시는 법이 이와 같으셨다.”(이병휴 ‘가장’)

이익은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사 외에도 뽕나무를 심어 기르고 목화 농사도 지어 옷감을 자급했다. 과일나무를 심어 제사 용도에 충당했다. 그는 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모든 살림살이에서 사치는 극도로 배격됐다. 평소 밥상에 올리는 반찬 가짓수도 규칙을 정해 최소로 줄였다. 제사상에 올리는 제물도 소량의 깨끗한 음식으로 충분했다. 기름지고 넉넉한 상차림은 용서되지 않았다. 제아무리 귀한 손님이 찾아와도 반찬을 더 놓지 않았다. 손님의 신분 고하에 관계없이 상차림은 늘 똑같았다. 특별한 이유  없이 닭과 개를 잡아먹는 일도 없었다. 부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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