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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 PD의 지구촌 현장

군부 겨냥한 이슬람 과격파 범행 ‘민주세력’ 대 ‘군부’ 재대결 임박

이집트 관광 한국인 테러사건

  • 김영미 | 국제분쟁지역 전문 PD

군부 겨냥한 이슬람 과격파 범행 ‘민주세력’ 대 ‘군부’ 재대결 임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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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집트에서 벌어진 버스테러 사건으로 한국인 3명이 사망했다. 이슬람 무장단체의 자살폭탄테러로, 이집트의 관광업을 겨냥한 경제범죄였다. 2011년 시작된 ‘이집트 혁명’으로 독재자 무바라크가 축출됐지만, 이집트는 여전히 혼란 속에 있다. 군부와 이슬람세력, 그리고 시민이 갈등을 빚고 있다. 수천 명의 이슬람계 시민이 군부에 학살되는 참상도 벌어졌다. 군부는 이집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이집트의 목줄인 관광업은 부활할 수 있을까.
군부 겨냥한 이슬람 과격파 범행 ‘민주세력’ 대 ‘군부’ 재대결 임박

2월 이집트에서 발생한 버스테러 현장. 40m 밖 호텔 담장이 무너질 정도로 폭발력이 강력했던 테러 현장에서 이집트 경찰관과 주민이 대화하고 있다.

2월 16일, 이집트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타바 국경 지역에 버스 한 대가 들어왔다. 버스가 정차한 곳은 국경 입구의 힐튼 호텔 근처 낮은 언덕. 버스에는 성지순례에 나선 한국인 32명이 타고 있었다. 잠시 후, 20대 남자가 버스의 문 쪽으로 다가왔다. 한국 관광객 인솔자이자 현지 여행사 사장인 제진수 씨는 본능적으로 그를 막았다. 그러나 폭발음과 함께 버스는 화염에 휩싸였다. 이 사건으로 현지 운전기사와 한국인 3명, 그리고 자살폭탄테러를 한 청년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이집트 관광객을 노린 이슬람 무장단체의 자살폭탄테러(지하드)로 밝혀졌다. 현장을 수사한 이집트 경찰 아흐만 압부자드는 “현장에서 허리와 복부가 사라진 범인의 시신이 발견됐다. 테러범은 시나이에 거주하는 21세 청년이며 폭발에 사용된 폭약은 10㎏ 이하”라고 발표했다.

이 사건은 한국뿐 아니라 이집트 사회에도 큰 충격을 안겼다. 이집트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테러가 벌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관광산업이 국가 재정의 90%를 차지하는 이집트에서 관광객이 테러의 대상이 됐다는 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경제와 직결된다. 게다가 이집트의 관광산업 연중 최대 성수기에 벌어져 타격이 더욱 컸다. 사건 이후 수도 카이로의 현지 여행사에는 비상이 걸렸다.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 주변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는 아하마드(42) 씨는 “한국인 테러 사건은 우리 여행업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자살폭탄테러가 벌어지는 나라에 누가 관광을 오겠는가. 사건 이후 세 건의 계약이 취소됐다”며 한탄했다. 필자가 가는 곳마다 한국인임을 알아보는 여행사 직원들은 “미안하다”라는 말을 연발했다. 교통경찰도 “한국인이냐? 사과한다”고 한 손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한국인에게 미안하다”

수도 카이로에서 차로 불과 1시간 거리에 피라미드가 모여있는 세계적인 관광지가 있다. 제4왕조(BC 2575~2565년경) 때 만들어진 3기의 피라미드는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다. 가장 오래된 제4왕조 두번째 왕 케오프스의 피라미드를 비롯해 6기의 피라미드가 한곳에 모여 있다. 피라미드들은 기술적 정교함이나 공법에서 탁월한 걸작품이자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그밖에도 스핑크스, 마스터바 등을 보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 관광객이 몰린다. 이 피라미드 주변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먹고사는 사람이 많다. 입구에는 각종 기념품과 엽서 등을 파는 상인이 북적이고 관광객을 태우고 피라미드 주변과 사막을 도는 낙타몰이꾼들이 진을 친다.

그러나 테러가 발생한 이후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겼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낙타몰이꾼 아부 이슬람(32)은 “아랍이나 이집트인 관광객은 돈을 쓰지 않는다. 낙타는 주로 서구 관광객이 좋아한다. 한창 시즌일 때는 하루에 30명을 태운다. 그러나 요즘엔 하루에 한 건 하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낙타 관광 비용은 기본 1시간에 우리 돈 5만 원 정도다. 그가 말한 대로 이집트의 관광업은 그야말로 위기다. 외국인 관광객이 이집트 사람보다 더 많던 시절은 지나갔다. 이집트는 인구의 10% 정도가 관광업에 종사한다. 호텔과 여행사, 기념품으로 파는 파피루스와 향수 제조업, 운전기사와 택시업 등으로 이집트는 한때 연간 14조 원이 넘는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과거의 영광일 뿐이다. 세계 최고의 관광대국인 이집트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집트 관광업이 몰락한 배경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집트 혁명’이 있다. 2011년 초, 이집트의 소셜네트워크(SNS) 페이스북에 한 청년의 죽음이 화제가 됐다. 부패한 경찰이 마리화나를 거래하는 모습을 유튜브에 올렸다 경찰에게 맞아죽은 28세 사업가 칼레드 사이드의 사연이었다. 한 청년단체가 그를 추모하며 페이스북을 통해 집회를 제안했고 8만5000여 명이 참여 의사를 밝혔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시민혁명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집트 시민들이 만든 ‘우리 모두 칼레드 사이드’란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무려 50만 명이 넘는 가입자가 몰렸다.

이집트 시민들은 수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으로 몰려가 30년간 독재권력을 휘두르던 호스니 무바라크의 퇴진을 요구했다. 시위 과정에서 200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희생됐다. 그러나 결국 시민들은 무바라크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혁명이 성공하자 이집트 국민은 기대에 차 ‘아랍의 봄’이 왔다며 환호했다. 세계 언론 또한 이집트의 민주화 혁명이 시민에 의해 성공한 것을 크게 보도했다.

무바라크 대통령 퇴진 9개월 후, 이집트에서는 30년 만에 자유 총선이 치러졌다. 80%에 가까운 투표율을 보인 이 선거에서 무슬림형제단은 다수당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무슬림형제단은 1928년 이집트의 이스마일파(派)에서 초등학교 교사였던 하산 알반나가 창시한 종교 정치조직이다.

이들은 코란과 하디스를 현대 이슬람 사회의 지침으로 삼는다. 이집트는 물론 수단·시리아·팔레스타인·레바논 및 북아프리카에 급속도로 확산되며 범(汎) 아랍권 이슬람 정치조직화를 선도했다. 이슬람권에서는 영향력이 가장 큰 원리주의 단체였다.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폭력 사용에 반대하지만 실제로는 과격 급진운동을 주도했다.

후세인 배출한 무슬림형제단

1952년 등장한 이집트 혁명정권은 무슬림형제단을 불법 단체로 지목, 공식 정치 활동을 금지시켰다. 그로부터 반세기 동안 무슬림형제단은 많은 지도자가 투옥되고 반역죄로 사형을 받는 등 정권의 거센 탄압을 받았다. 무슬림형제단의 지원을 받는 모임과 정기간행물이 있었지만, 후원자나 조직원의 존재는 거의 비밀에 부쳐졌다. 이들은 비밀리에 후원금을 받아 단체를 유지했고 이들의 사상은 아랍 전역에 걸친 이슬람 운동의 기초가 됐다.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의 탈레반이나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도 이 무슬림형제단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도 이집트에 유학 시절 무슬림형제단 활동을 한 바 있다. 이집트에서의 정권 창출은 무슬림형제단으로서는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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