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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號 70돌

“좌파는 데모할 때 왜 태극기 안 드나”

‘보수우익 야전사령관’ 장경순 전 국회부의장

  • 최호열 기자 │honeypapa@donga.com

“좌파는 데모할 때 왜 태극기 안 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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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대한민국 정통성 훼손 더는 좌시 못해
  • ● ‘예비군법’ ‘월남 파병’ ‘고속도로 건설’ 날치기 통과 보람
  • ● 애국운동과 치매 아내 간병이 天命
광복 70주년을 맞는 장경순(94) 자유수호국민운동 상임의장의 감회는 남다르다. 그가 걸어온 길 자체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말에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광복군에 참여한 그는 6·25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대한민국을 지켜냈는가 하면, 5·16군사정변에 참여해 혁명정부의 농림부 장관을 지냈다. 민정 이양 후에는 10대까지 5선 국회의원을 지내며 최장기간(1963~1971년)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1980년 신군부의 정치 참여 요청을 거절하고 야인으로 돌아가 전직 국회의원들로 이뤄진 대한민국헌정회 회장을 맡는 등 국가원로로 지내온 그는 2002년 자유수호국민운동을 결성하며 보수우익의 선봉에 나섰다.

지금도 보수우익 집회에선 그의 사자후 연설이 빠지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도 뒷짐 지는 법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노무현 정부 시절 전시작전권 이양을 주도했던 김장수 전 국방부 장관을 청와대 안보실장에 임명하자 군 장성 출신 모임인 성우회 총회에서 김 실장의 제명을 요구하는가 하면, 2014년 6월 문창극 총리지명자가 역사관 시비로 청문회장에 서지도 못한 채 낙마하자 홀로 광화문 사거리에서 여야 국회의원들을 규탄하는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유도 공인 10단

서울시 중구 다동 사무실에서 만난 장 의장은 94세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했다. 포병장교 출신이라 일찍 청력을 상실해 보청기를 끼지만 의사소통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60~70년 전의 일도 날짜와 관련자 이름을 세세히 언급할 정도로 기억력도 좋았다. 건강은 문제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도 시비 거는 불량배 한둘 정도는 가볍게 메다꽂을 수 있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대한유도협회는 2004년 그에게 공인 10단을 수여했다. 유성(柔星·유도의 별)으로 불리는 10단은 세계적으로도 몇 명 안 된다. 한국인 중 생존한 10단은 장 의장과 미국에 거주하는 이방근 씨, 김정행 대한체육회장뿐이다. 셋 중에서 장 의장이 가장 먼저 10단 반열에 올랐다.

▼ 광복은 어디서 맞았나.

“일제 말에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일본을 위해 싸울 수는 없었기에 동료들과 함께 탈출해 독립군에 가기로 계획을 세우고 기회를 엿보던 중, 중국 안후이성 광더에서 광복을 맞았다. 우리는 즉시 상하이로 가서 광복군에 합류, 학도병과 징병으로 끌려온 조선인 1500여 명을 규합해 ‘광복군 잠편지대(暫編支隊)’를 만들어 이끌었다.”

▼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은.

“학도병과 광복군 잠편지대에서 소대장을 한 경험이 있어 1948년 육사 7기로 특별 입교해 소위에 임관했다. 당시 중대장이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그 뒤에도 인연이 이어졌다.”

“여기서 주저앉을 겁니까”

“좌파는 데모할 때 왜 태극기 안 드나”
▼ 5·16군사정변에도 참여했는데.

“1961년 5월 15일 박 장군이 급히 만나자고 해서 갔더니 딱 한마디 했다. ‘내일 거사다.’ 평소 함께 나라 걱정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 말뜻을 금세 알아들었다. 그래서 ‘그럼 저는 조국을 위해 뭘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장도영 장군을 설득해달라’고 하더라. ‘알았다’고 하고, 집합 장소인 미도호텔로 갔다. 거사를 내게 직접 말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지만, 그전에도 몇 차례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했었다.”

그는 5·16의 숨은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미도호텔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급히 모두 집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가니까 심각한 표정으로 ‘괜찮으니 신발 신은 채 그냥 들어오라’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거사가 발각됐다고 했다. 모두 아무 말을 못했다. 그때 내가 ‘그렇다고 여기서 주저앉을 겁니까. 그냥 갑시다’ 하며 일어서자 박 장군도 결심을 굳히고 따라 일어섰다. 그렇게 역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도 당시 내 선택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혁명정부에서 농림부 장관을 지냈다. 별명도 ‘농림부 장관’이었을 만큼 농촌 현실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특히 산림녹화사업의 초석을 다졌다. 당시 전국의 산이 풀 한 포기 없는 민둥산이었다. 국회의원 시절엔 새마을금고 사업을 주도해 전국에 확산시키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린 공산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고, 국민을 배불리 먹게 해주고 싶은 열정뿐이었다. 국회부의장을 하면서 야당 지도부에게 자주 한 말이 있다. ‘개인보다는 당, 당보다는 나라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게 애국이다. 국회부의장으로 있으면서 야당이 반대하는 법안을 딱 세 번 날치기 통과시켰다. 하나는 예비군법이다. 언제 북한이 쳐들어올지 모르니 안보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월남 파병과 고속도로 건설도 야당이 반대했지만 밀어붙였다. 지금 보라. 두 가지 모두 우리나라가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는 데 결정적 토대가 되지 않았나.”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함께하자고 권유했지만, 그는 거절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헌정회와 국가원로회의에 참여하는 정도였다. 1991년 사회 각계 원로와 지도자 33인으로 창립한 국가원로회의는 현재 강영훈, 서영훈, 이현재, 정원식, 이수성, 이한동 전직 국무총리를 비롯해 김재순 전 국회의장, 백선엽 전 합동참모본부 의장, 이상훈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로라하는 원로 400여 명이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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