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호

1·21 이틀 후 푸에블로호 나포, 휴전 15년 만에 전쟁 먹구름

“박정희 목 떼러 왔다!”

  • 오세영│역사작가, ‘베니스의 개성상인’ 저자│

    입력2010-09-02 15: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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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년 1월21일 밤 9시30분. 31명의 군인이 이열종대로 보무당당하게 청와대 코앞의 세검정길로 들어섰다. ‘훈련 후 귀대 중인 국군 방첩대’로 자처한 이들의 실체는 “박정희의 목을 떼러 온” 북한 특수부대 124군 부대원들. 이들이 촉발한 1·21사건은 피아 간 5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토벌전으로 이어지고, 불과 이틀 후엔 동해에서 미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군에 나포되면서 한반도는 휴전 15년 만에 다시 전면전의 위기로 치달았다. 북한의 전매특허인 ‘벼랑 끝 전술’은 이 무렵 첫선을 보이는데….
    1·21 이틀 후 푸에블로호 나포, 휴전 15년 만에 전쟁 먹구름

    수도경비사령부 요원들이 생포된 김신조와 함께 사살된 124군 부대원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있다.

    1968년1월18일 새벽 2시 임진강 고랑포.

    철조망에 바짝 붙어 있던 한 무리의 남자들이 갑자기 납작 엎드렸다. 철조망을 절단하다 실수로 절단기를 떨어뜨린 것이다. 소리를 들은 걸까. 서치라이트가 이쪽으로 향했다. 다행히 경계병이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움직여서는 안 된다. 31명의 무장 침투조와 안내원은 숨을 죽이고 살을 에일 듯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강기슭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부동자세로 한 시간 이상 버틸 수 있게끔 훈련을 받은 자들이다.

    30분이 지나자 안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이 사라진 것이다. 철조망을 뚫은 무장 공작원들은 소리를 죽이며 천천히 전진했다. 적진을 돌파할 때는 부대와 부대의 경계면을 노리는 것이 상식이다. 양쪽 모두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 31명의 북한 공작원이 노리는 코스는 한국군 25사단과 미군 2사단의 전투지경선에서 미군 쪽으로 300m 향한 곳. 딱 한가운데보다는 상대적으로 경계가 허술한 데다 한국인을 구별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미군 쪽으로 조금 처진 쪽이 가장 취약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고랑포에서 더 하류로 내려가면 해수의 역류로 임진강이 겨울에도 결빙하지 않는 때가 있다. 그래서 침투조는 미군과 한국군의 전투지경선에 있는 얼어붙은 고랑포를 침투지점으로 선택한 것이다.

    최근에 한국군은 휴전선 전 구간을 신형 철조망으로 교체했지만, 미군은 구형 철조망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미군은 철조망을 교체하는 대신 베트남전쟁에서 효능을 보인 전자감응기에 의존키로 했다. 그러나 베트남과는 달리 겨울이 몹시 추운 한국에서는 전자감응기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북한 공작대는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결빙했다고 하지만 아직 사람이 지나갈 만큼 단단히 얼지는 않았다. 위장용 흰 붕대를 머리에 감은 공작원들은 얼음에 바짝 엎드려 아주 조심스럽게 기어갔다. 얼음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에 간이 콩알만해졌지만 모두 무사히 임진강을 건넜다. 여기서부터 공작원들은 안내조 없이 행동해야 한다. 안내조는 31명의 공작원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 뒤 온 길로 되돌아갔다.



    “동 트기 전에 법원리까지 이동한다.”

    대장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대원들에게 신속히 이동할 것을 지시했다.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청와대. 청와대를 기습해서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는 것이 목표다. 공작원들은 배낭을 챙겨 들고 일어섰다. 연속된 긴장과 살을 에일 듯한 추위로 기진맥진했지만 계획에 맞추려면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1967년에만 170회 넘게 무력충돌

    전쟁이 남긴 상처는 컸다. 수많은 사상자를 낳았고 한반도는 폐허로 변했다. 남과 북 모두에 피해복구는 최우선 과제였다. 먹고살기 급한 상황에서 인권이며 민주는 뒷전이었다. 자연스럽게 이승만과 김일성은 권력을 강화해갔고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독재권력을 장악하게 됐다.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격화된 동서진영의 냉전도 그들이 독재권력을 강화하는 데 한몫을 했다. 남과 북은 냉전의 최전선에서 첨예한 대립을 이어갔다. 누가 먼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설 것인가. 단기전에서는 통제경제가 빛을 발하게 마련이다. 남한보다 먼저 피해복구를 마친 북한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북한이 일사천리로 재건을 추진하는 동안에 4·19와 5·16을 겪으며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대한민국은 베트남전쟁을 통해 역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달러는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기틀이 됐고, 브라운 각서에 따라 육군 17개 사단과 해병대 1개 사단의 장비가 현대화하면서 크게 기울었던 군사력 격차도 많이 해소됐다.

    북한은 베트남전쟁을 기대와 초조의 두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기대는 미국이 아시아에서의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철수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데 기인한 것이고, 초조는 남한이 빠른 속도로 쫓아오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북한은 남한이 더 쫓아오기 전에, 그리고 미국이 베트남전쟁의 수렁에서 허덕이고 있을 때 결판을 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포성이 멎은 지 15년 세월이 흐른 한반도를 향해 다시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196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북한은 대대적으로 도발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휴전선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이어졌고 총성이 그치질 않았다. 1967년 1년 동안 남과 북은 무려 170여 차례에 걸쳐서 무력충돌을 빚었다. 이틀에 한 번꼴로 교전을 벌인 셈이다. 충돌은 전방 경비병들의 단순한 총격전으로 끝나지 않았다. 1967년 1월19일에는 고성 앞바다에서 조업하는 어선들을 보호하던 대한민국 해군 당포함이 북한 해안포의 공격을 받고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군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1967년 4월에 7사단 포병대가 북한을 향해 무려 585발의 포격을 가했다. 비무장지대에서의 소규모 총격전이 발단이 되어 급기야 사단 포병대가 화력을 총동원해 북한 지역을 맹폭한 것이다. 언제 어디서 전면전으로 번질 충돌이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휴전선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학자들 중에는 1967년부터 1969년까지를 ‘제2차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는데, 해군 함정이 침몰되고 포격이 이어졌다면 전쟁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소총에는 소총, 대포에는 대포. 동부전선에서 남과 북이 일촉즉발의 대규모 공방을 벌이고 있는 동안 서부전선에서는 소규모 도발이 주로 미군에게 집중됐다. 미군들을 전사시켜 미국민의 전쟁 혐오증을 자극하려는 의도였다. 가뜩이나 미국에서는 베트남전쟁에 지친 사람들이 아시아에서 미군이 철수하기를 요구하며 격렬하게 시위를 하고 있었다. 1968년으로 접어들면서 베트남에서의 열전과 한반도에서의 냉전이 동시다발적으로 전쟁에 지친 미국민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北, 대남침투용 특수부대 창설

    중앙정보부 강인덕 분석과장은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나중에 초대 통일원 장관이 되는 강인덕 과장은 해병대 정보장교로 근무하다가 능력을 인정받아서 중앙정보부로 옮겨 대북정보 분석을 관장하고 있었다. 강 과장은 지난해(1967년) 말에 대통령과 국방장관, 중앙정보부장, 합참의장과 3군 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이 참석한 자리에서 ‘최근 북한의 대남침투에 관한 분석-북한의 동계 게릴라 침투 예상 보고’를 브리핑한 적이 있다. 브리핑은 북한이 신년(1968년) 초에 무장 게릴라를 남파할 조짐이 있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었다. 그 결과 1968년 1월6일 원주 1군사령부 회의실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위시해서 군 주요지휘관과 경찰, 검찰, 도지사 등 각급 기관장이 참석한 안보회의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그때까지 중앙정보부에서 맡던 대간첩작전 주도권을 합동참모본부로 이관하라고 지시했다. 물론 대간첩작전 주도권이 합동참모본부로 이관됐다고 해서 중앙정보부의 책임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여전히 정보수집과 분석은 힘들고 중요한 직무였다.

    강인덕 과장은 자신의 분석을 자신하고 있었다. 북한은 1967년 4월에 대남침투를 목적으로 특수부대 ‘정찰국’을 창설했다. 정찰국장 김정태는 6·25 때 전선사령관을 지낸 김책의 아들인데, 북한 군부에서 강경파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최근에 체포된 간첩들을 신문한 결과 북한이 동계 게릴라전을 획책할 것이란 정황이 포착되고 있었다.

    정녕 미국은 마오쩌둥의 말대로 종이호랑이에 불과한 존재일까. 도도한 자세로 밀어붙이는 북한과 점점 저자세로 변하는 미국. 대한민국은 속앓이를 하며 양자의 밀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북한에서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을 돌려보내는 대가로 도주 중인 124군 부대원들의 무사 귀환을 요구할 것이란 어처구니없는 소문도 나돌았다.

    어수선한 가운데 수색전은 계속됐고 124군 부대원들은 잇달아 토벌됐다. 1월31일까지 1명이 생포되고 27명이 사살됐다. 무장간첩의 총인원은 31명. 아직 3명이 남았지만 비상상태를 마냥 끌고 갈 수는 없다. 대간첩작전본부는 일단 수색작전을 종결짓기로 했다.

    작전이 전개되는 동안에 아군도 23명이 전사하고 52명이 부상했다. 민간인도 7명이 죽었다. 적지 않은 피해였다. 행방이 알려지지 않은 3명의 124군 부대원 중에 1명은 나중에 양주에서 시체로 발견됐지만 두 명은 끝내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였다.

    1968년 1월31일은 그해의 음력 설날이다. 베트남은 전쟁 중에도 구정에는 휴전을 하는 전통이 있다. 그런데 북베트남군과 베트콩(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협정을 어기고 대대적으로 ‘구정 공세’를 감행하며 미국을 몰아붙였다. 한반도와 베트남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미국을 조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아시아의 전쟁은 아시아인들에게!”

    미국에서 반전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암살당할 뻔했는데도 미국이 북한에 질질 끌려 다니며 허둥대는 모습을 보며 한국민은 비로소 자주국방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됐다. 영화 ‘실미도’를 통해 잘 알려진 684부대는 그때 124군 부대에 대항해서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조직된 부대다.

    그러나 자주국방을 이룰 때까지는 싫든 좋든 미국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이번에는 한국이 미국을 압박할 차례다. 한국은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당시 한국은 베트남 파병이라는 확실한 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세계 4번째로 팬텀 전폭기 보유

    1·21 이틀 후 푸에블로호 나포, 휴전 15년 만에 전쟁 먹구름

    박정희 대통령이 1968년 2월 초 북한의 1·21 청와대 기습 공격과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직후 존슨 미국 대통령에게 즉각적인 보복을 요구하며 보낸 서신.

    1968년 2월11일 청와대.

    박정희 대통령은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사이러스 반스 특사를 상대하고 있었다. ‘파월(派越) 한국군 철수’라는 엄포는 즉각 효과를 발했고, 존슨 행정부는 박 대통령을 달래기 위해서 급히 특사를 파견한 것이다. 파월 한국군 철수 외에 한국군의 단독 북진도 충분히 미국을 긴장시킬 수 있는 카드였다. 물론 한국군은 단독으로 지속적인 전쟁을 벌일 능력은 없지만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미국도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다.

    “북은 나를 죽이려 했소!”

    박정희 대통령은 격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미국이 브라운 각서를 성실히 이행하지 않으면 베트남에 파병한 전투병력을 철수시킬 것임을 분명히 했다. 당시 한국이 베트남에 파병한 육군 2개 사단과 해병대 1개 여단은 미군에게 너무도 절실한 존재였다. 반스 특사는 당시로서는 거금인 1억달러의 추가 군원(軍援)을 약속했다. 베트남 파병은 또 한번 효자 노릇을 했다.

    군장비 현대화는 모든 군의 숙원사업이다. 미국이 1억달러 추가 군원을 약속하자 각군은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서 치열한 로비를 펼쳤다. 육·해·공군은 각기 시급한 현안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해병대라고 사정이 다를 리 없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결심은 확고했다. 공군 전력의 현대화를 최우선 과제로 꼽은 것이다. 1969년 8월29일. 6대의 F4D 팬텀 전폭기가 태평양 1만2000km를 가로질러 대구 기지에 도착했다. 그렇게 되어 한국 공군은 베트남 참전용사들의 고귀한 희생의 대가로 미국과 영국, 이란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최강의 전폭기 팬텀을 보유하게 됐다. 250만명의 향토예비군이 조직된 것도 그때의 일이다. 그러면서 한참 기울었던 남과 북의 군사력 균형이 어느 정도 엇비슷해졌다.

    일단 저질러놓고 떼를 써라!

    1968년 11월2일 경북 울진군 고포 해안.

    어둠이 깔린 해안에 고무보트가 당도하더니 수십명의 무장군인을 내려놓았다. 잠시 지형지물을 살피던 그들은 곧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10월30일 원산을 출발한 124군 부대 120여 명은 8개 조로 나뉘어 삼척과 울진 해안에 상륙했다. 또다시 무장병력이 남파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은 1·21사건과 달랐다. 대규모 병력이 해상을 통해 침투했고, 서울 대신 울진과 삼척, 봉화와 정선 등 오지를 목표로 택한 것이다.

    124군 부대원들은 산간부락 주민들을 모아놓고 사상교육을 시켰다. 해방구를 설정하고 장기투쟁에 들어가겠다는 것으로 6·25전쟁 전의 빨치산을 재현한 것인데, 북한 지도부는 여전히 남한 주민들의 인민봉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대하던 인민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학살이 자행되면서 적개심만 심고 말았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다 죽은 이승복 소년의 일도 이때 발생했다. 울진과 삼척에 침투한 124군 부대원들은 해를 넘기기 전에 거의 다 사살되면서 막을 내렸다. 울진·삼척 침투는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도 변한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각주구검(刻舟求劍)의 우를 범한 꼴이었다.

    그런데 북한은 정말로 아직도 남한 주민들의 봉기를 통한 적화통일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혹시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닐까. 북한 전문가들은 관심을 가지고 상황을 지켜봤고, 해가 바뀌어 1969년이 되면서 의문이 풀렸다. 1969년 1월에 김일성은 민족보위상 김창봉과 대남사업국장 허봉학, 그리고 정찰국장 김정태를 극좌강경파로 몰아 숙청했다. 대남공작 실패에 따른 책임을 물은 것인데, 민족보위상 김창봉은 김일성의 동생으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을 맡고 있던 김영주와 ‘포스트 김일성’을 다투던 실세였다.

    그렇게 되면서 휴전을 전후해 몰락한 남로당과 1958년의 종파투쟁으로 뿌리가 뽑힌 연안파와 소련파에 이어 군부의 강경파마저 깨끗이 제거되어 이제 누구도 김일성의 권좌에 도전할 수 없게 됐다.

    김일성은 1973년 남북대화를 위해 평양을 방문한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1·21사건에 대해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과의 뜻을 전달해줄 것을 당부하면서 1·21사건은 자기도 모르게 강경파들이 꾸민 짓이라고 했다. 1·21사건이 숙청의 명분이 됐음을 밝힌 것이다.

    1·21 이틀 후 푸에블로호 나포, 휴전 15년 만에 전쟁 먹구름
    오 세 영

    1954년 충남 홍성 출생

    경희대 사학과 졸업

    1993년 역사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으로 글쓰기 시작

    저서 : ‘만파식적’ ‘화랑서유기’ ‘창공의 투사’ ‘소설 자산어보’ ‘구텐베르크의 조선’ 외


    북한은 1968년 12월23일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을 판문점을 통해 돌려보냈다. 뚝심 있게 몰아붙인 끝에 미국으로부터 영해를 침범했다는 사과를 받아낸 것이다. 푸에블로호 납치는 사실 현지 지휘관들의 판단에 의한 우발적인 사건이었다. 자칫 큰 위기를 자초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핵 항공모함이 원산 앞바다에 출동하는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미국을 밀어붙이면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일단 일을 저질러놓고 떼를 쓰면 상대는 양보하게 돼 있다.

    북한은 벼랑 끝 전술의 유혹으로 빠져들었고, 그것은 또 한 차례 거대한 폭풍을 몰고 왔다.

    그리고 1968년이 미국 대통령 선거의 해라는 사실도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공화당 후보로 유력시되는 리처드 닉슨은 벌써부터 닉슨 독트린-‘아시아 문제는 아시아인에게’-을 내세우며 베트남에서 철수할 뜻을 비치고 있었다. 북한으로서는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은 좋은 기회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에서 긴장을 야기시키면 효과는 배가될 것이다. 그래서 강 과장은 정찰국 소속 특수부대가 동계침투를 감행할 것이라 판단하고 줄곧 상황실에서 밤을 새우다시피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본래 겨울은 게릴라전을 수행하기에 불리한 계절이다. 몸을 숨길 곳이 마땅치 않은 데다 식량조달도 힘들다. 게릴라는 녹음이 우거진 여름에 산악지대로 침투하는 것이 정석이다. 그러니 동계침투라면 산간벽지보다는 도시를 노릴 확률이 높다. 그래서 강 과장은 북한 특수부대가 서부전선을 뚫고 서울로 침투할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그즈음 정부 당국은 북한 특수부대의 침투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최종 목표가 청와대라는 사실과 그들이 시간당 10km를 주파하는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강 과장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날이 바뀌어 1월20일 토요일이 됐고 시침은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도 그냥 넘어가려나. 그는 그만 퇴근하기로 하고 몸을 일으켰다.

    ‘청와대 기습 후 당일 귀환’

    1월19일 오전 5시경에 1차 집결지인 법원리에 도달한 124군 부대 소속 무장 공작원 31명은 그곳에서 하루를 쉬며 소진된 기력을 회복했다. 민족보위성 정찰국장 김정태가 서울 기습을 목표로 창설한 124군부대의 당초 목표는 청와대를 비롯해 미국대사관과 육군본부, 사상범들이 수감된 서울교도소와 서빙고 간첩수용소 등 6곳을 동시에 습격하는 것. 그렇지만 무리라는 판단에 따라 목표를 청와대 한 곳으로 한정했다. 그러면서 남파 인원도 76명에서 31명으로 축소됐다.

    전원 함경도 출신으로 구성된 31명의 124군 부대 공작원은 황해북도 사리원의 인민위원회 청사를 청와대로 꾸미고 맹훈련에 돌입했다. 그리고 남파 직전에 전원 군관으로 특진되는 영예를 누렸다. 그들을 훈련시킨 교관 우명환은 3년 전 송추유원지에서 고정간첩과 접선하려다 전향한 고정간첩이 고발하는 바람에 체포될 뻔했지만 도주에 성공했고, 총에 맞아 삐져나온 창자를 움켜잡고 5일 만에 임진강을 건너 복귀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강도 높은 훈련을 마친 31명의 124군 부대원은 각자 AK소총 1정에 실탄 300발, TT권총, 대전차용 수류탄 2발과 방어용 수류탄 10발씩으로 무장하고 남쪽을 향해 출발했다.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단검도 1자루씩 휴대했음은 물론이다. 1월17일 새벽에 북한군 최남단 초소인 연천군 매현리에 도착한 124군 부대원들은 그곳에서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철조망이 신형으로 교체되기 전에는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배를 타고 해안으로 침투하는 것은 더 쉬웠다. 당일치기 공작을 의미하는 ‘당야공작’은 남파 공작원들 사이에서 소풍에 비유되기도 했다. 그래도 한겨울에 서부전선으로 침투하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몰아치는 추위로 124군부대원들의 체력은 급격히 소모됐다.

    법원리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124군 부대원들은 다시 이동할 채비를 서둘렀다. 시계는 어느덧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계획은 21일 20시를 기해 청와대를 기습하는 것. D데이를 21일로 잡은 것은 그날이 일요일이라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 머무를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계획은 순식간에 기습을 끝내고 차량을 탈취해서 당일 북으로 귀환하는 것. 강도 높은 훈련과 치밀한 예행연습을 거친 124군 부대원들은 자신감에 넘쳤다.

    “어…!”

    그때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 출발하려는 그들 앞에 나무꾼 행색의 민간인 4명이 불쑥 나타난 것이다. 124군 부대원들은 26사단 마크가 붙은 국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나무꾼들은 검정색 운동화와 AK47 소총을 든 그들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봤다. 무사히 군사분계선을 통과한 124군 부대원들은 처음으로 돌발상황에 직면했다.

    게릴라전에서 침투 중에 우연히 만난 상대는 적군이건 민간인이건 죽이는 것이 원칙이다. 민간인 4명을 죽이는 것은 124군 부대원들에게는 일도 아니다. 문제는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것이다. 발각되지 않으려면 제법 깊숙이 땅을 파고 매장해야 하는데, 지칠 대로 지친 상황에서 별다른 도구도 없이 언 땅을 파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잠시 고심하던 대장은 무전을 쳐 상부의 의견을 구하기로 했다. 신속히 답신이 들어왔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들이 가진 음어표로는 도무지 해독이 되질 않았다. 저들을 어찌 처리할 것인가. 전전긍긍하는 가운데 시간은 자꾸 흘러 해가 지려 하고 있었다. 빨리 결론을 내리고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 대장은 할 수 없이 투표에 부치기로 했다. 살려주자는 쪽으로 결과가 나왔다. 시간도 없는 판에 고생해서 언 땅을 파기 싫었던 것이다.

    124군 부대원들은 나무꾼 형제에게 “신고하면 곧 따라 내려올 우리 후속부대에 처형당할 것”이라 겁을 주기도 하고, 또 손목시계를 풀어주면서 그들을 구슬려 돌려보낸 뒤 서둘러 다음 집결지로 이동했다.

    30kg 군장 메고 시속 10km 이동

    그것은 임무 실패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말았다. 124군 부대원들은 강도 높은 훈련으로 기습과 경계, 그리고 탈출에서는 최고의 베테랑이지만 돌발적인 상황에 기민하게 대처하는 능력은 부족했다. 그것은 어쩌면 급조된 유격대의 한계일 수도 있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때 해독이 되지 않은 답신의 내용은 ‘원대복귀’였다. 상부에서는 124군 부대원들이 처한 상황과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귀찮은 데다 통신이 원활치 않았기에 그리 결정한 것이지만, 나무꾼 형제를 살려준 것은 그들이 신고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중에 울진과 삼척에 대거 침투한 공작원들이 오지에 해방구를 만들려 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남파공작원들은 남의 노동자, 농민들이 자신들을 해방군으로 환영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나무꾼 형제는 마을로 돌아온 즉시 경찰서에 신고했고, 124군 부대는 군사분계선을 넘은 지 하루 만에 정체가 파악되고 말았다. 나무꾼 형제들이 현지 경찰에 신고한 시각은 오후 9시. 대간첩작전본부인 합동참모본부에는 자정 무렵에 보고가 들어왔다. 그리고 강인덕 과장이 무장 침투조가 남파됐다는 보고를 받은 것은 새벽 2시경. 마침내 우려하던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기습의 생명은 은밀이다. 정체가 탄로난 기습 공작원들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124군 부대원들은 예정된 종말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법원리를 출발한 그들은 서울을 향해 급속행군에 들어갔다. 그들은 미타산과 앵무봉, 노고산, 진관사를 거쳐 북한산으로 이어지는 코스로 남행을 했는데, 30kg의 장비를 지니고서도 시속 10km라는 놀라운 속도로 이동했다. 신고를 받은 군경이 출동했을 때는 이미 저지선을 돌파한 다음이었다.

    124군 부대원들의 최종 집결지는 북악산 팔각정 부근. 그곳에서 야영을 하고 다음날(21일) 오후 8시에 청와대를 기습할 계획이었다. 예정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한다. 거듭된 행군과 체감온도가 영하 20℃에 이르는 추위로 기력이 많이 떨어졌음에도 강행군에 들어갔다. 합동참모본부에 보고가 들어갔을 때 그들은 이미 앵무봉을, 그리고 중앙정보부에 보고됐을 때는 벌써 노고산을 통과하고 있었다. 오전 9시경에 보고를 받은 김성은 국방장관이 곧장 청와대로 달려가고 서울 일원에 갑호비상이 발령됐을 때 124군 부대원들은 북한산 비봉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북악산이 아니로군.”

    산 아래를 내려다보던 대장의 얼굴에 당혹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것 같습니다.”

    지도와 지형을 대조하던 부대장 김춘식도 표정이 흐려졌다. 서둘렀던 탓에 124군 부대는 북악산이 아니라 북한산에 당도한 것이다. 부대원들은 여기서 또 예상치 못한 상황에 봉착했다. 아직 시간은 있다. 북악산으로 이동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여기 매복해 있다가 청와대로 향할 것인가.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상황을 가정한 침투기습 공작은 이렇게 또 한 번 삐걱거리게 됐다.

    124군 부대원들은 그냥 여기에 있다가 어두워지거든 작전을 개시하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비상이 걸린 것으로 봐서 나무꾼 형제들이 신고를 한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훤한 대낮에 눈 쌓인 계곡을 행군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리고 나흘간의 강행군으로 부대원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대장은 북한산 승가사 부근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예정에 없던 상황과 두 차례 조우했지만 그때껏 검문을 한 번도 받지 않았던 124군 부대원들은 기습을 자신하고 있었다.

    하산 후 보무당당하게 청와대行

    124군 부대원들이 북한산 승가사 부근에서 휴식에 들어가 있을 무렵에도 대간첩본부는 여전히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신고에 의하면 무장공비들은 법원리를 19일 오후 8시에 출발했다. 그런데 24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종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예비사단까지 동원해서 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무장공비의 행방은 오리무중.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당시 수도권을 관장하던 6관구 사령관은 김재규 중장. 청와대 외곽 경비를 담당하는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은 전두환 중령. 그리고 30대대 작전참모는 장세동 소령이었다. 나중에 10·26과 12·12의 주역들이 머리를 맞대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송추유원지를 수색하던 부대에서 무장공비들의 것으로 보이는 탄창과 음식물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송추유원지는 북한산 북쪽자락이다. 설마 벌써 그곳까지 이동했단 말인가. 당시 한국군은 완전무장한 병력의 산악행군은 아무리 빨리도 시속 4km를 넘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작전을 세우고 있었다.

    군 지휘관들은 정보의 신빙성에 의문을 표했다. 무장공비들이 벌써 거기까지 진출했을 리 없다고 판단한 것. 그렇지만 김성은 국방장관은 생각을 달리했다. 6·25 때 해병대 지휘관으로 그 지역에서 전투를 한 그는 그곳 지리에 정통했다. 어쩌면 무장공비들이 이미 차단선을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고 봤다. 정말로 무장공비들이 차단선을 빠져나갔다면 큰일이다. 청와대 경비를 책임지는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제외하면 마땅히 출동시킬 병력도 없다. 김성은 장관은 급히 채원식 치안국장에게 연락했다. 급한 대로 경찰을 출동시키기로 한 것이다.

    터질 듯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20일이 저물고 운명의 21일이 밝았다. 124군 부대원들은 숨을 죽이고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어둠이 내리면 작전이 개시될 것이다. 추위에 긴장으로 심신이 극도로 지쳐 있지만 그래도 하루를 쉰 덕분에 어느 정도 피로를 회복했다.

    마침내 짧은 겨울 해가 서산으로 기울면서 서울에 다시 밤이 찾아왔다. 대장은 시계를 들여다봤다. 21일 오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행동에 들어갔다. 오후 9시30분경에 하산을 완료한 124군 부대원들은 세검정으로 통하는 도로로 접어들었다. 이제부터는 몸을 숨길 필요가 없다. 한국군 방첩대원 행세를 하며 청와대로 접근하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이열종대를 유지하며 보무도 당당하게 청와대를 향해 걸어갔다. 사기는 여전히 높았고 임무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침투조가 청와대 경비병력을 제거하고 탈출조가 탈출 차량을 노획하는 동안에 습격 1조는 박 대통령이 있는 2층을, 습격 2조는 부속실인 1층을, 습격 3조는 경호실을, 습격 4조는 비서실을 기습해서 몰살시킬 것이다. 계획대로 움직이면 3~4분 내에 충분히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

    “민주경찰이 사람을 쳐?”

    1·21 이틀 후 푸에블로호 나포, 휴전 15년 만에 전쟁 먹구름

    1968년 1월21일 교전 끝에 체포된 김신조.

    습격 2조 조장으로 1층 기습을 맡은 김신조 소위는 잔뜩 긴장해서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르는 조원들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안심시켰다. 같은 날 소위로 임관됐지만 하전사 경험이 있는 김신조와 달리 조원들은 군대 경력이 없는 자들이었다. 124군 부대원들 중에서 유일한 생포자인 김신조는 나중에 목회자가 되어 신앙인의 길을 걷는다.

    세검정길을 따라 걷던 그들은 경찰 검문을 받았지만 당황하지 않고 방첩대 소속임을 내세워 간단히 따돌려버렸다. 자유당 시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특무대의 후신인 방첩대는 경찰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군 정보기관이었다. 청와대는 이제 몇 분이면 당도하는 거리에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북한 무장간첩에게 피살될 수도 있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124군 부대가 자하문에 이르러 경찰이 다시 검문을 하고 나섰다. 대장은 계속해서 훈련을 마치고 귀대하는 방첩대라고 둘러댔지만, 종로경찰서 소속의 박태안·정종수 두 형사는 전처럼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리 방첩대라고 해도 갑호경계령이 선포된 상황에서 검문도 제대로 하지 않고 통과시킬 수는 없었다.

    “그럼 우리 부대까지 따라와!”

    대장은 그 말을 남기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갔다. 실제로 방첩대 본부가 부근에 있어서 따라오라는데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낌새가 수상하지만 그렇다고 비무장 형사 둘이서 저 많은 인원을 대적할 수도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장이 지원병력을 대동하고 달려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두 형사는 대열의 후미에 선 부대장 김춘식을 붙잡고 이런저런 얘기를 걸며 시간을 끌었다.

    두 형사의 바람이 통한 것일까. 헤드라이트 불빛이 이리로 달려왔다.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병력을 인솔하고 달려온 것이다. 대장은 다시 방첩대를 들먹이며 허세를 부렸지만 최 서장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청와대가 코앞이다. 종로경찰서는 청와대의 외곽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데 지금은 갑호비상이 내려진 마당이다. 나중에 김신조는 강하게 버티고 선 최 서장을 보며 처음으로 공작이 실패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진술했는데, 124군 부대로서는 세 번째, 그리고 최대의 난관에 봉착한 셈이다.

    그대로 밀고 나가려는 124군 부대원들과 절대로 통과시키지 않으려는 종로경찰서 경찰관들 사이에 밀고 당기는 몸싸움이 벌어졌다. 공갈이 먹혀들어가지 않으면 먼저 친 사람이 당황하게 마련이다. 124군 부대원들은 완강한 제지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야! 민주경찰이 사람을 쳐?”

    그때 누가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순간 경찰관들의 얼굴빛이 싹 변했다. 분명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때까지 진짜 방첩부대원들이 경찰을 우습게 보고 행패를 부리는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던 경찰관들도 이제 상대의 정체를 확실하게 파악했다.

    “수류탄이다!”

    비명과 동시에 사람들이 일시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곧이어 요란한 폭음이 일고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상황이 벌어지면서 124군 부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공작이 실패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박정희의 목을 떼러 왔다”

    일대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최규식 서장은 현장에서 전사했고 마침 다가오던 시내버스를 지원병력인 줄 알고 공비들이 일제 사격을 가한 바람에 민간인도 여럿 목숨을 잃었다.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에서 계속해서 조명탄을 쏘아올리면서 토벌전이 시작됐다.

    1·21 이틀 후 푸에블로호 나포, 휴전 15년 만에 전쟁 먹구름

    2000년 9월11일 서울 신라호텔 에메랄드룸에서 열린 북측 송이버섯 전달식에서 박재경(오른쪽)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부총국장이 김종환 국방부 정책보좌관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81mm 박격포가 토해내는 조명탄으로 주위가 대낮처럼 환했다. 김신조 소위는 정신없이 내달렸다. 이미 공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탈주계획엔 차량을 탈취해 문산 방면으로 도주하는 것이 불가능하면 일단 비봉 쪽으로 몸을 피하기로 돼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도무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다른 부대원들은 어떻게 됐을까. 각자 알아서 비봉 쪽으로 도주하고 있겠지. 뒤를 돌아보니 습격 2조 조원들이 겁에 질려서 따라오고 있었다. 김신조 소위는 흩어지라고 소리쳤지만 두 조원은 막무가내로 쫓아왔다.

    김신조 소위는 정신을 가다듬고 방향을 가늠해봤다. 추격대가 쫓아오기 전에 빨리 여기를 떠나야 한다. 일단 인왕산 쪽으로 도주하기로 하고 경복고등학교를 향해 몸을 날렸다. 조원들이 뒤를 따랐다.

    그때 총성이 울리면서 조원이 쓰러졌다. 그렇지만 뒤를 돌아볼 틈이 없었다. 김신조 소위는 날아오르듯 경복고등학교 담을 넘었다. 누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왔는데 무장군인 같지는 않았다. 조원이 그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고 수류탄이 터지면서 쫓아오던 경복고등학교 수위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후문으로 향하는데 총성이 일면서 뒤를 따라오던 조원이 쓰러졌다. 이제 혼자가 된 김신조 소위는 경복고등학교를 빠져나와 인왕산 기슭을 향해 내달렸다. 사방에서 총성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지휘계통은 이미 무너졌다. 단신으로 복귀가 가능할까. 자신이 없었지만 가는 데까지 가볼 수밖에 없다. 김신조 소위는 지니고 있던 무기를 전부 내려놓았다. 임무가 실패로 돌아간 마당에 무고한 살상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폭용 수류탄 한 발만 지니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누구냐!”

    그곳에는 이미 잠복병이 배치돼 있었다. 김신조 소위는 반사적으로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런데 잠복병은 혼자가 아니었다. 차량 헤드라이트 불빛이 바위를 비추더니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잠시 후 사격이 멎더니 투항을 권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김신조 소위는 자폭을 결심하고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았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다가오던 수색병들이 놀라서 엎드렸다. 1초, 2초, 3초…. 그런데 수류탄이 터지지 않았다. 불발탄이었다. 수색병이 얼른 달려와서 수류탄을 걷어차고 김신조 소위를 결박했다. 시계는 22일 오전 1시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날이 밝아왔다. 그 사이에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가 4명을 사살했고, 종로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된 김춘식은 몸수색을 하는 과정에서 수류탄이 터지면서 폭사했다. 5명 사살에 1명 생포. 그리고 오후에 북한산에서 다시 1명이 사살됐다. 나머지 무장공비들은 이미 서울을 빠져나간 듯했다. 전방 부대들이 총동원돼 예상 도주로를 차단하고 수색에 들어갔다.

    공포의 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서 국민들은 간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됐다. 생포된 김신조를 통해서 124군 부대의 규모와 침투목적이 밝혀진 것이다.

    “박정희의 목을 떼러 왔다!”

    김신조의 말은 방송을 통해 생생하게 중계됐고 국민은 경악했다.

    토벌전 와중에 푸에블로號 나포

    1968년 1월23일 정오 무렵, 동해 원산 앞바다 40km 해상.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號) 함장 로이드 뷰커 중령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북한 초계정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며 정선을 명하고 있었다. 이틀 전에도 초계정이 근접한 적이 있지만 지금처럼 위협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정확한 위치는?”

    “북위 39도24분, 동경 127도59분 공해상입니다.”

    항해사가 얼른 대답했다. 그렇다면 저들의 지시를 따를 이유가 없다. 뷰커 함장은 북한 초계정을 주시하며 그대로 항해를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몇 차례의 퇴역을 거쳐 재취역한 푸에블로호는 겉보기에는 허술한 중고선이지만, 그 안에는 미국안전기획국(NSA)에서 운영하는 최첨단 통신감청기기가 탑재돼 있다. 1967년 12월에 일본 사세보 항을 출항한 푸에블로호는 북한 영해에 근접한 공해를 오르내리며 북한과 소련, 그리고 중국의 무선을 감청하던 중이었다.

    굉음을 울리며 최신예 MIG21 전투기 2대가 나타나더니 저공비행을 하며 푸에블로호를 위협했다. 아무래도 단순히 시위가 아닌 것 같았다.

    “본부에 긴급 구조요청을 해. 그리고 전속력으로 여기를 빠져나간다!”

    푸에블로호는 서둘러 침로를 변경했지만 최고시속이 12노트에 불과한 푸에블로호는 곧 북한 초계정에 따라잡히고 말았다. 뷰커 함장은 나포에 대비해서 통신장비를 파괴하고 기밀문서를 파기하라고 명령했다. 수병들이 도끼를 들고 통신장비실로 달려갔고 선내는 곧 기밀문서를 소각하는 연기가 자욱했다. 미처 소각하지 못한 기밀문서들은 침강용 백에 넣어서 바다 밑으로 가라앉혀야 한다.

    뷰커 함장이 침강처리가 가능한지 수심을 확인하는데 총성이 울리며 25mm 기관포탄이 날아들었다. 북한 경비정에서 발포한 것이다. 저항할 수단이 전무한 상황이었다. 뷰커 함장은 정선을 명했다.

    북한 수병들이 서둘러 푸에블로호로 넘어왔고 함교문을 거칠게 열며 총을 겨눴다. 뷰커 함장은 순순히 손을 들었고 푸에블로호 승무원 83명은 포로가 됐다. 1968년 1월23일 오후 1시45분. 북부 수도권 일대에서 무장공비 토벌전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 해군 함정이 동해상에서 북한 해군에 나포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장 북으로 쳐들어갈 기세야”

    주한미군사령관 본스틸 대장은 부관에게 러스크 국무장관에게 전화를 연결하라고 지시했다. 찰스 본스틸과 딘 러스크. 우리와는 인연이 깊은 이름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국무부 전쟁국 3부조정위원회 소속이던 두 사람은 38선을 기준으로 남한엔 미국이, 북한엔 소련이 주둔하기로 결정한 장본인들이다.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국무성 중급관리였던 러스크는 장관이 됐고, 대령이던 본스틸은 대장으로 승진해서 주한미군사령관으로 다시 한국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딘, 나일세.”

    러스크 국무장관이 나오자 본스틸 대장은 거침없이 장관의 퍼스트 네임을 불렀다. 역대 주한미군사령관 중에서 가장 파워가 셌던 것으로 알려진 본스틸 사령관 재임시절에는 포터 주한미국대사는 물론 맥나마라 국방장관도 한반도 문제에서 조연으로 밀려나 있었다. 본스틸 사령관은 주요 현안이 발생하면 직접 러스크 장관을 상대했다.

    “정보선이 북한에 나포된 거라면 나도 보고를 받았네.”

    러스크 장관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북한 게릴라 때문에 골치가 아픈 판에…. 한국 쪽 반응은 어떤가? 대사관 보고로는 당장이라도 전쟁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라고 하던데.”

    “한국군 고위 지휘관들은 몹시 흥분해 있네. 당장 북으로 쳐들어갈 기세지. 박정희 대통령도 크게 다르지 않고.”

    본스틸 사령관이 현지의 분위기를 전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해서는 안 된다. 베트남전쟁이라는 수렁에서 허덕이고 있는 미국은 지금 아시아에서 또 다른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다. 더구나 올해는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이고, 지금 미국민들은 아시아에서의 전쟁에 염증을 내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전쟁을 막아야 할 텐데 북에서 대통령 관저 기습을 시도했으니 남한더러 마냥 참으라고 할 수도 없다. 한국군에도 강경파 장군이 많이 있다. 지난해 동부전선에서 충돌이 벌어졌을 때 일선 사단장이 자신의 재량으로 북한에 수백발의 포격을 가한 바람에 전쟁이 벌어질 뻔한 적도 있다. 한국군에 파견된 군사고문들로부터 한국군이 전쟁에 대비해서 군수물자를 비축하고 있다는 보고가 벌써 올라온 상태였다. 본스틸 장군은 돌발적인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일단 한국군에 유류를 공급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려놓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미 해군 정보수집선이 동해상에서 북한에 피랍된 것이다. 미국 처지에서는 청와대 기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큰 사건이었다.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 미 해군 함정이 공해상에서 나포된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通美封南의 원조?

    “우선 푸에블로호가 정말로 공해상에서 나포된 것인지를 확인하고서 승무원들의 안전한 귀환에 최우선을 두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걸세.”

    러스크 장관이 침통한 목소리로 미국에서도 이 사건을 크게 염려하고 있음을 전했다. 푸에블로호가 나포된 수역은 북위 39도25분, 동경 127도54분3초. 해안의 기점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서 공해가 될 수도 있고 북한 영해가 될 수도 있는 애매한 곳이다.

    “현지에서는 어떻게 판단하고 있나?”

    러스크 장관이 북한이 미국과 전면전을 각오하고 시도한 나포냐, 아니면 우발적인 행동이냐를 본스틸 사령관에게 물었다.

    “우리와 싸울 생각까지는 없는 것으로 보네.”

    본스틸 사령관은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북한의 노림수는 대통령선거 해를 맞아서 미국 시민들에게 압박을 가해 아시아에서 손을 떼게끔 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군사적 대응보다는 정치적 해결이 바람직할 것이다. 결국 포로송환이 쟁점이 될 것이다.

    두 사람의 통화가 길게 이어졌다. 그렇지만 북한 게릴라가 대한민국 대통령의 목숨을 노리고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한, 불과 40시간 전의 상황이 두 사람에겐 그리 중요한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다음날 판문점에서 소집된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미국은 공해상에서 해양환경을 조사하던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강제로 끌려갔음을 강력하게 항의했고 승무원과 배의 즉시 송환을 북한에 강력하게 요청했다. 그러나 북한은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를 침범해서 첩보활동을 했다고 완강히 버텼다.

    “푸에블로호는 어디 소속인가?”

    “미 해군 7함대 소속이다.”

    북한 수석대표 박중국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유엔 수석대표 스미스 소장은 엉겹결에 사실대로 대답했다. 북한의 술수에 말려들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유엔군 사령부 소속이 아니니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다룰 사안이 아니다.”

    박중국은 푸에블로호 문제는 군사정전위원회가 아니고 별도의 협상에서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직접 협상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통미봉남(通美封南)’의 원조 격에 해당하는 발언인데, 그렇게 되면 124군 부대는 남과 북의 문제, 푸에블로호는 미국과 북한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북한이 의도하는 바다.

    어쨌거나 80명이 넘는 승무원이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이다. 미국은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면서 31명의 무장 게릴라가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을 기도한 전대미문의 사건은 군사정전위원회에서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다. 한국에선 연일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고 동시에 미국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32년 후 송이버섯 들고 서울로

    앵무봉이 시야에 들어왔다. 박재경은 뒤를 따르는 2명의 조원에게 잠시 쉬어갈 뜻을 비쳤다. 세검정에서 교전을 치른 박재경은 비봉 쪽으로 펼쳐진 포위망을 뚫고 이곳 노고산에 다다른 것이다. 여기에 숨어 있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앵무봉으로 이동한 후 그곳에서 야영을 하고 고랑포 쪽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을 생각이다. 벌써 세 밤이 지났으니 오늘은 1월24일일 것이다. 남파 때에 비해 형편없이 느린 행군이지만 경계망을 뚫고 북상해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다른 부대원들은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여러 명이 사살됐을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총격전이 벌어지는 소리를 수차례 들은 터였다.

    “수색대입니다!”

    조원이 놀라서 박재경을 불렀다. 벌써 여기까지 쫓아왔단 말인가. 박재경은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추며 소총을 겨냥했다. 몸을 숨길 곳이 마땅치 않은 겨울산에 1개 대대는 될 것 같은 병력이 골짜기를 샅샅이 뒤지며 올라오고 있었다.

    광적면 일대를 담당하던 1사단 15연대는 무장공비 3명이 노고산 기슭에 출현했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수색대를 출동시켰다. 연대 병력이 신속하게 포위망을 펼치는 것을 확인한 후에 연대장 이익수 대령은 이들을 생포하기로 하고 투항을 권고했다. 이미 퇴로는 차단됐고 수색대는 20m 전방까지 접근한 마당이었다.

    숨 막힐 듯한 대치가 계속됐다. 박재경은 조원들을 돌아봤고, 그들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서 빠져나가기는 틀린 듯했다.

    죽기를 각오한 124군 부대원들이 AK47 소총을 일제히 발사하자 수색대도 응사에 나섰다. 흙먼지가 일고 총탄이 튀면서 조용하던 노고산이 일시에 전장으로 변했다. 124군 부대원들이 결사항전을 하는 바람에 수색대는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고 현장에서 지휘하던 연대장 이익수 대령도 전사했다.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에 이어 또 고위 지휘관이 전사한 것이다.

    교전 중에 잠시 틈이 벌어진 것을 놓치지 않은 박재경은 죽을힘을 다해 골짜기 아래로 내달렸다. 뒤따르던 조원의 비명이 들렸지만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총탄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발을 헛디딘 것일까. 박재경은 몸이 공중에 붕 뜨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는 골짜기 아래로 사정없이 굴러 떨어졌다. 박재경은 굴러 떨어지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북으로 귀환해야 한다는 일념을 버리지 않았다.

    박재경은 끝내 포위망을 뚫고 북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32년의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서울에 모습을 드러냈다. 2000년 9월11일, 김용순 당 중앙 비서를 수행해서 서울에 온 북한군 총정치국 부총국장 박재경 대장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의 손에는 총 대신 송이버섯이 들려 있었다.

    한국이 꺼내 든 對美압박 카드

    한반도에선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서울 북방은 비상경계령이 펼쳐진 가운데 도주하는 124군 부대원과 추격하는 우리 군이 교전을 계속했고, 동해상에는 핵항모 엔터프라이즈호를 비롯해서 미 해군 구축함 여러 척이 집결해 원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필리핀 기지의 미 공군 전폭기들이 한반도로 이동하면서 북한 폭격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여기에 미국이 전술핵을 사용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더해지면서 세계의 이목이 온통 한반도로 집중됐다. 한반도는 또 한 차례 전쟁에 휩쓸릴 것인가.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미국과 북한은 푸에블로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폴란드에서 비밀 접촉을 가졌다. 미국에 1·21사건은 여전히 뒷전이었다.

    미국은 강경하게 나갔지만 북한은 겁먹지 않았다. 미국의 아킬레스건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트남이라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미국이, 더구나 벌써 레임덕 현상을 보이는 존슨 행정부가 83명이나 포로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강경하게 대처하지 못하리란 것을 간파한 것이다. 북한은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이 영해를 침범했다고 시인한 자백서를 제시하며 미국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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