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천암 방조제로 난 길을 따라 땅끝마을로 내달리던 중, 길 옆 갈대숲에 똬리를 틀고 있던 짐승과 눈이 마주쳤다. 긴 목을 꼿꼿이 세우고 취재차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녀석의 정체를 확인하고자 길을 되돌렸다. 어디였던가. 놈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갈대숲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데 한 마리 날짐승이 푸드득 날갯짓을 한다. 잿빛 몸에 군데군데 검은 줄무늬가 있는 새, 재두루미였다. 천연기념물로 해남 철새도래지에서도 매년 20여 마리밖에 볼 수 없는 희귀조다.
땅끝마을의 일몰을 보기에 앞서 ‘어부사시사’의 작가 고산 윤선도의 자택인 녹우당(사적 167호)을 찾았다. 해남 윤씨의 종가로 아직도 종손이 살고 있는 이곳은 남도 전통가옥의 옛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한참 개보수중이어서 진면목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대둔산을 배경으로 아름드리 고목 사이에 정숙한 조선여인이 앉은 자태처럼 차분하게 자리잡은 고택을 보노라니 들떴던 마음이 착 가라앉는 듯했다.
해남에서는 어느 길로 달려도 땅끝마을로 통한다. 일몰을 보기 위해 달려간 땅끝전망대, 바닷바람이 매서웠지만 일몰을 보기 위해 찾아온 연인, 가족으로 사방이 소요하다. 다도해 사이로 떨어지는 해는 장관이다. 붉은 기운이 연보라색으로 변하더니 마침내 시린 푸른색으로 바닷속으로 사라지면서도 해는 자신의 위엄을 알리고 있었다.
늦은 저녁식사를 하려 대흥사 입구 한정식집 전주식당을 찾았다. 해남군청이 지정한 우수음식점인 이곳의 주 메뉴는 표고버섯전골과 표고전. 전골에서 표고를 건져 시금털털한 묵은 김치에 싸서 먹는데, 어울릴 것같지 않은 두 음식의 조화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30가지 이상의 반찬이 순차적으로 나오는데 표고의 은근한 맛과 남도 젓갈의 짭짤하고 칼칼한 맛에 취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과식을 하고 만다. 주인 김성환씨는 “남도음식의 특징은 정성이다. 밑반찬부터 표고요리까지 엄격하게 관리하는 것이 맛의 비법”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은 대둔산 산행으로 시작했다. 대둔산 정상에서 다도해 일출을 보기 위해서였다. 다도해에서 뜨고 지는 해였지만 일출의 감동은 일몰의 그것과는 다른 장쾌함을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