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나항공의 ‘스타 얼라이언스’ 공식 가입을 앞두고 전세계 14개 회원사 사장들이 모여 가진 기자회견에서 박찬법 사장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지난 2월17일 서울 조선호텔).
내가 사회에 첫발을 내딛던 1960년대 말은 젊은이들이 직장을 구하기가 요즘처럼이나 어렵던 시절이다. 당시 우리나라 산업계는 성숙 산업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걸음마 상태였기 때문이다. ‘수출해야 산다’는 절박한 구호가 일반론이던 그 시절, 나는 무역업무를 배울 요량으로 금호타이어의 전신인 삼양타이어에 입사했다. ‘수출입국’이라는 국가적 슬로건 아래 수출을 하는 사람이 마치 국가유공자처럼 대접받던 때다.
1972년부터 본격적인 수출업무에 종사하게 됐는데, 그 무렵 종합상사는 거의 만물상 수준이었다. 산업화 초기다 보니 ‘폼 나는’ 품목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당시 수출상품 중에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볏짚머리’다. 농촌에서 나오는 볏짚의 머리 부분을 모아 브러시로 만든 것인데, 일본의 제사공장에서 이것을 누에고치 실타래로 썼다. 그때 일본에선 탈곡작업이 완전히 기계로 이뤄져 볏짚머리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덕분에 1000달러어치의 볏짚을 팔았다.
“수출 안 하는 품목을 물어보시죠”
또 하나는 ‘아구’라는 생선이다. 요즘은 수입해서까지 먹는 형편이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먹지 않고 버렸다. 그런데 일부 선진국에서 이를 ‘몽크피시(monkfish)’라 부르며 즐겨 먹는다는 얘기를 듣고, 전북 군산 등지에서 아구를 수집해 프랑스 등지로 내다팔았다. 그 무렵 친지 한 분이 “자네 종합상사에 근무한다고 들었는데, 무얼 수출하는가?” 하고 물으셨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뭘 수출 안 하는지를 물어보시는 게 낫겠습니다.”
수출 전선도 ‘전선(戰線)’이다. 그곳에도 총성과 포연이 있다. 물론 때로는 장미꽃도 피어오른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지난 시점에도 외국 바이어들 중 상당수는 한국을 동족상잔의 포화가 가시지 않은 폐허의 나라로 기억하는 이가 많았다. 덕분에 일종의 ‘동정표’도 얻곤 했다. 특히 비즈니스 세계에서 만난 한국전 참전 용사들의 환대와 우정은 각별했다.
미국의 시계회사 엘진(Elgin)에서 앤티크(antique) 스타일의 벽시계를 만들기 위해 목재로 된 케이스를 필요로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시카고로 달려가 담당 부사장을 만났다. 한국전 참전용사인 그는 내가 어려운 여건의 나라에서 온 청년이라고 격려하며 적극적으로 도와줘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선박편으로 한 달이나 걸려 수송된 벽시계 케이스가 태평양을 건너는 사이 온·습도 조절이 안돼 뒤틀리는 바람에 전량 클레임을 당하고 말았다. 나는 클레임에 따른 비용부담보다 거래선에서 보여준 호의에 신뢰로 화답하지 못한 점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1970년대 후반 레바논의 베이루트 시내에선 기독교 민병대와 회교 민병대가 교전을 벌이며 대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리엔 총알이 날아다녀도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대로 굴러가야 했다. 당시 베이루트엔 우리 직원 한 사람이 주재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이 친구와 함께 점심을 먹으려고 영국 식당으로 갔다가 갑자기 얼큰한 음식이 먹고 싶어 그 옆에 있는 스페인 식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바로 그날 우리가 처음 들렀던 영국 식당이 폭탄테러로 잿더미가 됐다. 순간의 선택이 명줄을 쥐락펴락한 것이다.
공항에서의 총격전도 잊혀지지 않는다. 회교 민병대가 계류장에 주기중인 이집트 항공기와 승객을 납치하고 경찰과 대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워낙 오래 대치하다 보니 승객들이 조심스럽게나마 이동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총격전이 벌어졌다. 머리 위로 총알 날아다니는 소리가 귀를 찢는 듯하더니 범인들은 순식간에 현장에서 모두 사살됐다. 요즘 젊은이들 중에 전쟁터로 출장가겠다는 이가 있을까. 영악하긴커녕 무모할 만큼 고지식했던 청년 시절, 그래서 겁없이 목숨을 내놓고 다니던 시절의 웃지 못할 삽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