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와 사주의 이종접합이란 서양과 동양, 디지털과 한자, 현대와 고대, 기계와 운명, 인간이 만든 기계와 하늘의 별, 수학과 희로애락의 접합을 의미하는 것이니 어찌 볼 만한 게임이 아니겠는가. 바다에서도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지점에 고기가 많이 모이듯, 돼지고기와 새우젓이 만날 때 시너지 효과가 나듯, 격투기도 ‘동종 격투기’보다 ‘이종 격투기’가 재미있듯, 서로 다른 것이 만날 때 창조적인 작업이 이뤄진다. 무엇이든지 이종이 만나야 스파크가 튀는 법이다. 문제는 이종 간에는 접합이 어렵다는 점이다. 양쪽을 모두 알고 소화해야만 소통이 이뤄지고 접합이 가능하다. 하지만 양쪽을 모두 알기란 쉽지 않다.
교장 자리와 바꾼 메모리 장치
필자는 수년 동안 이런 ‘이종접합’ 분야의 고수를 추적해왔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컴퓨터를 아는 사람은 사주를 모르고, 사주를 아는 사람은 컴퓨터를 모른다. 완전히 ‘따로국밥’이었다. 그러던 차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고수를 만났다. 찾고 보니 직업이 고등학교 교사다. 전주공고에서 컴퓨터를 가르치는 구암(九岩) 김상숙(金相淑·61) 선생이다. 환갑을 지나고 2년만 있으면 정년퇴직을 하는 ‘수월치 않은’ 연세임에도 컴퓨터 전문가라고 하니 의외였다. 컴퓨터 전문가 하면 청바지에 헝클어진 고수머리 그리고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20대 젊은이를 연상하다가 환갑 넘은 양반을 대하고 보니 고정관념이 흔들렸다.
첫대면에서 눈에 띄는 패션이 하나 있었다. 줄에 매달아서 목에 걸고 다니는 사각형의 금속 장치였다. 크기는 가로 2cm, 세로 4cm 정도에 재질은 스테인리스였다. 반짝반짝 빛이 난다. 자세히 살펴보니 흔히 ‘USB’라고 불리는 메모리 장치 아닌가.
-왜 USB를 항상 목에 걸고 다니는가.
“저장할 수 있는 용량이 2기가바이트다. 요즘 나온 메모리 용량 가운데 가장 큰 장치다. 가격도 대략 25만원쯤 하니 비싼 편이다. 이거 하나만 가지고 다니면 어디서든지 컴퓨터에 연결해 그 사람의 사주를 볼 수 있다. 생년월일시를 찾아야 하는 만세력(萬歲曆)도 필요없다. 내가 만든 사주 프로그램을 모두 여기에 집어넣었다. 그 사람의 생년월일시만 아라비아 숫자로 입력시키면 대체적인 성격은 어떤가, 재물운은 어떤가, 부부·가족관계는 어떤가, 초년운·중년운·말년운은 어떤가를 대강 파악할 수 있다. 성냥갑 크기의 이 메모리 하나만 들고 다니면 어디 가서든지 굶어 죽지는 않는다.”
-무협지에 보면 무림의 비급(秘핞)이라는 게 있다. 무협지의 주인공들은 천신만고 끝에 이 비급을 손에 넣는다. 선생이 지금 목에 걸고 다니는 2기가바이트짜리 USB는 무림의 비급과도 같다. 이걸 완성하는 데 몇 년이나 걸렸는가.
“한 20년 걸렸다고 봐야 한다. 내가 역술을 공부하기 시작한 해가 1986년이다. 현재 버전이 Ver5.47이다. 5.47의 의미는 547번 수정·보완했다는 것이다. 만들어놓고 보완할 사항이 발견되면 다시 시스템을 뜯어고친다. 얼마간 운용해보면 다시 미비한 점이 발견된다. 그러면 또다시 고친다. 이렇게 해서 현재까지 547번을 고쳤다. 물론 앞으로도 이 보완작업은 계속될 것이다. 이 세상에 완벽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Ver5.47쯤은 돼야 쓸 만하다. 국내에서 만들어진 역술 프로그램 가운데 5.47까지 나온 것은 현재 없는 것으로 안다. 그야말로 내 나름의 20년 내공이 축적된 것이다. 20년 동안 이거 만드는 데 신경을 쓰느라고 승진도 하지 않았다. 내 또래라면 학교에서 교감이나 교장을 해야 하지만 나는 아직 평교사로 있다. 2기가바이트짜리 USB하고 교장 자리를 바꾼 셈이다.”
‘무림의 비급’ 펼칠 때
-동료들은 승진했는데, 자신만 평교사로 남아 있으면 여러모로 착잡한 심정이 되지 않겠는가. ‘홀로 남은 자’의 후회나 설움 같은 것은 없는가.
“나는 내 인생에서 최선을 다해 이 작업을 했다. 그런 만큼 후회는 없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내 운명이고 팔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 정도의 정교한 역술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은 세계에서 내가 유일하다고 생각한다. 이 자부심 하나가 그동안의 내 인생을 보상해주고도 남는다. 동양의 육십갑자와 주역에 근거를 둔 역술 프로그램이 유통되는 곳은 한자문화권인 한국·중국·일본 세 나라다. 일본이나 중국의 역술 프로그램을 둘러보아도 아직 초보 수준이다. 이들 국가에서 5.47 정도가 등장하려면 한참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본다. 앞으로 중국, 일본에 내 프로그램을 수출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5.47 정도를 만들어놓고 보니 오히려 정년이 기다려진다. 정년이 되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지 않은가. 비로소 나의 또 다른 인생이 시작되는 셈이다. 정년 이전이 전반전이었다고 한다면 이후는 후반전이다. 후반전이 오히려 드라마틱할 것 같다. 정년 후에는 이 ‘무림의 비급’을 활짝 펼칠 때가 도래하는 것이다. 나는 25평 임대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돈도 거의 없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내 얼굴이 밝지 않은가! 믿는 것은 비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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