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호

내세에 보고 싶은 사람

  • 일러스트·박진영

    입력2006-02-02 16: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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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세에 보고 싶은 사람
    지리산에서 세상을 떠난 시인 고정희가 평소 자주 쓰던 말 중 “바닷물 맛을 알기 위해서 바다 전체를 삼킬 필요는 없다. 단지 한 컵만 마셔보면 안다”는 게 있었다. 어떤 사물의 실상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의 지극히 작은 일부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 으레 던지는 말이었다. 그녀가 그런 소리를 할 때마다 옆에서 짓궂게 “아니다. 바닷물의 맛을 알기 위해서라면 한 컵도 필요 없다. 손가락 끝에 찍은 한 방울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정정해줬지만, 그녀는 시인답게 ‘바닷물 전체와 한 컵’이라는 계량화된 선명한 대비가 마음에 들어서인지 끝내 ‘한 컵’을 고수했다.

    살다 보면 고정희 식의 ‘바닷물 한 컵’에 해당하는 사물을 대하고 혼자 놀랄 때가 있다. 공산국가 중국이 나라를 개방한 직후 옌볜지방을 여행하다가 만난, 과거 공산당 간부를 오래 지낸 사람에게서 “맑스를 보러 갈 때”라는 말을 들었던 것과 같은 경우다.

    “나도 이젠 맑스를 보러 갈 때가 된 모양이오.”

    이 말을 한 분은 조선족인 공산당 간부였는데, 그는 약속시각을 깜빡 잊는 바람에 약속 장소에 늦게 와서 사과하던 중 무심코 그런 소리를 꺼냈다. 상황이나 문장의 앞뒤 문맥으로 보아서 듣는 즉시 그 뜻을 충분히 짐작했다. 맑스는 죽은 자, 그러니까 “맑스를 보러 갈 때가 되었다”는 것은 ‘죽을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미 알아듣긴 했지만 굳이 확인해보니 역시 짐작대로였다. 그 사회에서는 전부터 “나도 이젠 죽을 때가 되었다”는 말을 “나도 이젠 맑스를 보러 갈 때가 되었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일종의 관용어법처럼 굳어졌다는 설명이었다.



    그 말은 문자 그대로 ‘전체 바닷물의 맛을 알게 하는 한 컵’에 해당했다.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유물론자인 공산주의자들이 죽은 뒤의 세상을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하기야 내세에 대한 확신에서가 아니라 그저 관용적인 군말로 쓰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그런 말이 일반화된 사회라는 것은 확실히 증명된 셈 아닌가.

    우리 사회에서는 전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 터라 더욱 큰 충격을 느꼈다고도 할 수 있다. 그건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노인들이 간혹 “나도 이젠 조상님들을 보러 갈 때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어법이다.

    ‘아, 여기는 참으로 정치적인 사회이구나!’

    그런 탄식이 절로 떠올랐다. 중국은 사람들이 내세에서 보고 싶은 인물로 하필 정치사상적 지도자를 꼽는 사회임이 그 한마디 군말에서 선연하게 드러났다.

    ‘맑스’는 우리식 표기법에 따르면 ‘마르크스’인 공산주의의 창시자다. 지난 세기 독일에서 부유한 유대인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헤겔 좌파 학문을 시작해 평생을 공산주의 이론을 세우는 데 바친 사상가로 말년에는 혹독한 빈궁 속에 살다 65세 때인 1883년에 죽은 인물이다. 내가 그의 사망연도까지 기억하는 것은 ‘망명지인 영국에서 살 때 입던 옷을 저당 잡혀 외출을 못하는 일이 흔했고, 때로는 종이가 떨어져 저술을 중단했을 정도로 가난에 시달리다 65세에 책상에 앉은 채 숨을 거두었다’는 그의 기이한 최후 때문이다. 어떻게 책상에 앉은 채 숨을 거둘 수 있을까. 그의 최후는 저술가의 한 사람인 내 마음 깊은 곳을 후비는 아픔을 느끼게 한 정경이었다.

    아무튼 우리 사회에서는 저승 또는 내세에 만날 사람으로 ‘조상님’을 떠올릴 때, 그들은 마르크스를 떠올리며 살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공산당 지도자들은? 예를 들어 그 유명한 ‘레닌’은? 돌연 궁금증이 일어 물어본 결과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아, 아니오. 그런 경우에 ‘레닌’은 전혀 거론하지 않습네다. 그저 ‘맑스를 보러 갈 때가 되었다’고만 말하지요.”

    “중국의 지도자들은 전혀 말하지 않고 오로지 ‘맑스’만 거론합니까?”

    “아, 예. 중국 지도자도 거론합네다. ‘맑스’ 대신 대개 ‘호요방(胡耀邦)’을 말하지오. ‘호요방을 보러 갈 때가 되었다’고 하는 겁네다. 또 더러 ‘주은래’를 거론하기도 하지요. ‘주은래를 보러 갈 때가 되었다’고 말이지오.”

    “‘모택동’은요?”

    “아, 굳이 ‘모택동’ 주석을 거론하는 일은 없습네다.”

    그때만 해도 ‘주은래’는 꽤 알았지만 ‘호요방’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지 못했던지라,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죽은 뒤까지 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꼽혔는지 궁금했다. 그 이유를 물어봤더니 즉각 대답이 돌아왔다.

    “호요방 동지는 유능하고 청렴한 지도자였습니다.”

    중국 국민이 호요방의 진가를 확실하게 안 것은 천안문 사태 때였다고 했다. 당시 천안문 광장에 익명의 대자보들이 마구 나붙어 숨겨져 있던 국가 지도자들의 비리와 치부가 모두 공개됐다. 국가를 영도하면서 오류를 범한 지도자들, 각종 비리나 이권에 개입한 지도자들, 자신은 비리에 직접 손대지 않았지만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직책이나 업무 또는 이권상의 각종 특혜를 준 지도자들, 국가 지도자들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저지른 각종 비리와 부패가 모두 대자보에 기록돼 나붙었다. 그리하여 지도자 본인의 비리는 물론 친척들의 비리까지 모두 밝혀지면서 모택동을 포함하여 거기 안 걸린 지도자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오로지 호요방만 본인은 물론 가족이나 친척들까지 아무런 비리에도 관련되지 않고 흠없이 깨끗했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들이 ‘죽어서 보러 갈 인물’을 선택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절로 알 수 있었다. 같은 공산주의 지도자라 할지라도 살아 있을 때 권력을 크게 누린 지도자, 아무리 명성이 높다 해도 비리와 관련된 부패한 지도자는 일절 거론되지 않는 것이다.

    ‘유능과 청렴.’

    공산당 간부로 활약했던 노인이 과거 자신들의 사회가 사랑한 정치 지도자인 ‘호요방’이란 인물의 장점으로 든 두 덕목은 비상한 감명을 주었다.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에서 가장 먼저 꼽히는 것이 정치다. 정치인들이 문자 그대로 ‘유능과 청렴’을 갖춘 사람들이라면 그 사회는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인가. 중국의 고사 중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苛政猛於虎)’는 것이 있다. 학정(虐政)을 일삼는 벼슬아치가 다스리는 지방을 떠나 차라리 호랑이에게 사람이 물려 죽는 호환(虎患)이 잦은 고장으로 피난 가는 여인이 남긴 말이다. 그 고사가 절로 그런 어법과 연결돼 떠올랐다.

    나는 귀국한 이래 주변 사람들에게 죽은 뒤 ‘내세에서 보고 싶은 사람’은 누구냐고 더러 물어보았다. 대답은 여러 가지였으나 예상대로 한국 정치 지도자의 이름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올해는 지난해 못지않게 다사다난한 한 해가 될 것이다. 더욱이 내년의 대선(大選)을 앞두고 시행되는 5월의 지방선거로 정치판이 뜨겁게 달아오를 것이다. 앞으로 이 나라의 정치를 담당하겠다고 나서는 분들에게 묻고 싶다.

    내세에 보고 싶은 사람
    宋友蕙
    ●1947년 서울 출생
    ●서울대 간호학과, 한신대 신학과 졸업, 이화여대 석사(사학)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중편소설로 등단
    ●작품 : 소설집 ‘눈이 큰 씨름꾼 이야기’‘스페인춤을 추는 남자’, 산문집 ‘서투른 자가 쏘는 활이 무섭다’, 장편소설 ‘저울과 칼’‘투명한 숲’‘하얀 새’ 등


    “당신은 얼마나 유능하고 청렴합니까?”

    이제, 선거철을 맞아 자신의 직업을 ‘정치가’로 정하고 그 뜻을 이루겠다고 정계에 달려드는 이들에게 한 가지 뜻을 더 세우기를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한국인이 내세에도 보고 싶은 사람’이 되겠다”는 뜻을 함께 세워 달라는 것이다. 그런 뜻을 지닌 정치인이 늘어날수록 우리 사회는 모든 구성원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더 빨리 거듭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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