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12월3일 한국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당시 임창렬(가운데) 경제부총리가 IMF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위기를 가장한 축복?
일부 언론에서는 금융위기(외환위기와는 다소 다르다)의 비상벨을 울렸지만 이것 또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은 적었다. 고위 관료들은 IMF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역설적으로 외환위기가 어떻게 발전해나갈지 오히려 알지 못했다. 그들은 한국 정부가 일정한 쿼터 범위 안에서 수시로 돈을 빌리고 갚아왔던 것 같은 종류의 ‘자금지원’ 프로세스 정도로 외환위기를 해석하고 예상해왔다. 약간 귀찮은 절차일 뿐, 우리가 주체적으로 감당해낼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나라 경제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을 외환위기요, ‘IMF 사태’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바로 그 때문에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느니 안했느니 하는 논란이 생겨난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며 울먹이는 독자의 전화가 신문사 편집국에 밀려들면서 외환위기의 막이 올랐다. 가혹한 기업 구조조정이 진행됐다. ‘위기를 가장한 축복’이라는 말에서 표현되듯이 외환위기는 낡은 경제구조를 해체하고 한국의 경제 구조가 선진화하는 데 일조했다고 봐야겠지만 10년이 지난 지금껏 후유증도 적지 않게 남겼다.
김대중 정부의 등장도, 노무현 정부의 등장도 어찌 보면 외환위기 과정이 낳은 반작용이며 반동적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한국적 산업발전 전략’이 정면에서 부정당한 바탕 위에서 과도한 급진적 금융개방 과정이 강제됐고, 그것에 대한 사회적 거부반응은 선진화 개혁이 아닌 보수적 좌파 정권을 창출한 원동력이었다.
외환위기로부터 지금까지의 정치 과정을 정리한다면 이념적 스펙트럼은 말 그대로 극과 극을 오갔다. 급진적 시장개혁과 그것에 대한 평등·분배주의적 반동의 힘이 대립하고 투쟁하며 자리를 바꿔타고 있다.
지식계급 또한 분열되어 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동은 노무현 대통령이 스스로 신자유주의 좌파라고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언급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여전히 안개 속에 가려져 이념적 혼란만 부채질한다. 어느 세력이든 우리 안의 문제 원인을 외환위기와 그것에 따른 급격한 구조조정과 사회 변동에 돌리는 버릇에 익숙하다. 미국은 악의 세력으로 부상했고 신자유주의도 도마에 올랐다. 이른바 시장경제론자와 분배론자 간에 기나긴 투쟁의 막이 올랐다.
극좌와 극우의 동거
금융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2006년 말 급류를 탄 한미FTA 협상 과정을 추적하던 한 대학교수는 필자에게 “미국은 왜 금융개방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요구하지 않는가”라며 의문을 표했다.
실로 우스꽝스러운 질문이다. 한국의 주요 상업은행 대부분이 이미 외국인 소유로 넘어간 지 오래다. 그들의 현지 영업에 적지 않은 애로로 작용하는 국책 산업은행(그것도 파생상품이라는 극히 제한적인 분야에서)을 통제하고 제어하는 정도밖에 남은 것이 없다. 미국의 금융관련 요구는 금융당국의 행정지도와 간섭을 줄여달라는 것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금융당국의 구두지시를 없애달라는 것은 내국 관할권의 문제일 뿐 개방 협상의 주제도 아니다. 지식인조차 이런 지경으로 금융을 이해하고 있으니 외환위기 이후에 한국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두고 그토록 논란만 무성한 것이다. ‘참여정부’의 성격도 오리무중이고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는 이도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