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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획정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 23

전략과 일관성 부재로 변죽만 울린 노태우·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

  • 유호열 고려대 교수·북한학 yoohy@korea.com

전략과 일관성 부재로 변죽만 울린 노태우·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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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노 대통령은 하계 올림픽 개최국의 위상에 걸맞게 1988년 7월7일 남북한 교역 문호개방 등 6개항으로 된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했고, 10월4일 국회 국정연설을 통해 남북 정상회담 및 남북간 불가침선언을 체결할 것 등을 제안했다. 이어 1989년 9월11일 정기국회 개회식에서 노 대통령은 특별연설을 통해 새로운 통일방안인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제창했다. 이는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과정 및 통일의 방식을 제시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통일방안이었다.

공동체 통일방안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추구한 7·4남북공동성명의 기본정신을 계승하면서 남북대화 추진과 상호 신뢰 회복을 당면 과제로 상정했다. 이 방안에 따르면 남북한의 대화가 순조롭게 진행돼 상호 적대감이 사라지고 신뢰가 구축되면 남북한은 공동으로 민족공동체 헌장을 채택하게 된다. 민족공동체 헌장에 의해 남북 정상회담, 남북 각료회의 및 남북평의회를 구성해 남북연합을 출범시키고, 남북평의회에서 통일헌법을 제정하면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국가를 이룩한다는 것이 공동체 통일방안의 주요 내용이다.

과거 남한의 통일방안이 냉전시대의 대결과 경쟁의 산물로 선언적 의미가 강한 것이었다면,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남북한과 같이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체제간 통합을 위해 우선 상호 신뢰를 쌓고 가능한 분야에서부터 협력을 확대함으로써 민족공동체를 구축해 향후 명실상부한 통일을 달성한다는 탈냉전시대에 걸맞은 진일보한 현실적인 방안이라 할 수 있다.

노태우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전향적인 대북정책과 통일방안 제창에 대한 북한의 사정은 다소 복잡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동서 냉전의 틀이 허물어지기 시작하고 동유럽, 소련,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이 개혁·개방을 적극 추진하는 것과 달리 북한은 이데올로기의 순수성을 고수하며 김일성·김정일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남한이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성공리에 개최해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대폭 강화하면서 북방정책을 적극 추진해 소련, 중국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과 관계 정상화에 힘쓰는 동안 북한은 1989년 세계 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는 등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럼에도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에 이어 1990년 10월 동독이 서독에 편입됨으로써 이룩된 독일의 통일은 북한 지도부로서는 6·25전쟁 이후 최대의 충격이자 위기로 다가왔다. 북한 당국으로서는 급변하는 탈냉전의 정세 속에서 동요하는 엘리트들을 진정시키고 각종 사상교양사업을 강화하는 등 체제 결속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러한 수세적인 정책만으로는 분단이라는 특수상황에 놓인 북한 체제의 안정을 보장할 수 없었다.

따라서 북한 당국은 남한의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전향적으로 7·7선언을 발표하고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제창한 노태우 정부의 진의를 알아볼 필요성을 느꼈으며 이를 통해 한반도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는 데 심혈을 기울이게 됐다. 이러한 의도에서 북한은 1988년 8월 남북 국회회담을 시작으로 남북 고위급회담, 체육회담, 적십자회담 등 각종 남북대화에 임하게 됐다.

북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응수

남북 국회회담을 위해 양측은 3차례 준비접촉(1988.8.19~8.22)과 수석대표접촉(1988.8.24), 이어 7차례 후속 준비접촉(1988.8.26~1990.1.24)을 했다. 그러나 북한측이 회담 외적 문제에 대해서만 집중 거론함으로써 국회회담은 판문점에서 준비접촉만 10차례 개최된 후 중단됐다. 반면 강영훈 총리가 남북간 문제를 포괄적으로 협의·해결하자고 제의(1988.12.28)한 총리회담은 고위급회담이라는 명칭으로 성사됐다.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 양측의 총리를 대표로 하는 고위급회담의 경우 8차례 예비회담(1989. 2.8~1990.7.26)을 거쳐 서울과 평양을 번갈아가며 총 8회 본회담이 개최(1990.9.4~1992.9.18)됐다.

노태우 정부 출범 후 남북대화가 재개된 후 1990년 9월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 양측의 총리를 대표로 하는 고위급회담이 개최됐다. 남북 고위급회담이 성사되기에 앞서 북한은 노태우 대통령의 7·7 특별선언에 대해 1988년 11월7일 두 개의 조선 반대 및 외국군 철수 보장 등을 내용으로 하는 ‘포괄적 통일방안’을 제의했으며 1990년 5월24일 김일성 주석은 시정연설을 통해 조국통일 5개 과제를 제시하기도 했다.

나아가 동독이 서독에 편입, 통일독일이 출현하는 상황에서 김일성은 1991년 신년사를 통해 1990년대식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제시했다.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제시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과 비교할 때 1990년대식 방안은 남북 자치정부에 국방·외교 등 더 큰 권한을 부여하는 방식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고 할 수 있는데, 역시 북한이 처한 수세적 상황을 십분 감안한 제안으로서 남북 고위급회담 진행과 맞물려 북한의 협력적 자세를 뒷받침하는 조처였다.

남북 고위급회담은 한-소 수교와 한-중 관계 개선, 독일 통일 등 주변 환경이 급변하고 나아가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상황에서 전개됐다. 특히 남북 고위급회담은 4차회담(1991.10.22~ 10.25) 이후 북한측의 적극적인 태도 변화와 한반도 핵부재선언 등으로 급진전하면서 사상 처음으로 남한과 북한의 정부 대표가 서명하는 남북 기본합의서를 채택(1991.12.13)했고,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1991.12.31)을 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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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호열 고려대 교수·북한학 yoohy@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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