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호

한국 대학사회의 대혼란 (하)

인문계와 이공계 위기 ‘취업정거장’ 된 대학, 추락하는 교육에 날개는 있나

  • 정정길 울산대 총장 chungkchung@ulsan.ac.kr

    입력2007-07-06 1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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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외 유수 대학원으로 빠져나간 이공계 인재들
    • 국내 대학, 베트남 학생 모시기 경쟁 치열
    • 칸트, 헤겔, 테니슨, 셰익스피어…요즘 대학생에겐 사치
    • 엘리트 교육과 대중교육 사이에서 방황하는 대학
    • 대학 타락 막으려면 대학, 교수, 기업이 머리 맞대야
    한국 대학사회의 대혼란 (하)
    ‘신동아’ 6월호에 등록금을 둘러싼 학생과 대학당국의 갈등이 급격한 대학진학률 상승에서 파생된 문제 중 하나임을 이야기했다. 간단히 정리하면, 대학진학률이 급격하게 상승하면서 대졸자 취업이 과거에 비해 어려워졌고, 취업률 제고를 위한 대학 경쟁력 강화 노력으로 인해 등록금 인상이 불가피한 현실을 검토했다. 이어 대학진학률이 80%를 넘는다는 건 극빈계층을 제외한 모든 국민이 자녀를 대학에 진학시킨다는 것을 의미하고, 최저소득계층이 비싼 등록금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결론적으로 대학에 대한 국가의 대대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번에는 대학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대학원 붕괴, 그리고 이공계와 인문계의 위기를 살펴보려고 한다. 당초 상·중·하 세 차례에 걸쳐 기고할 계획이었으나 중·하에 나눠 쓸 것을 이번 원고에 다 포함시킴으로써 마무리지으려고 한다.

    미국 일류대는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연구업적을 쌓은 우수한 교수진과 시설을 자랑한다. 이 모든 것이 대학 경쟁력 강화를 위한 엄청난 노력의 산물임을 이미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지만, 이런 이유로 많은 이가 미국 유학을 희망한다. 실제로 많은 학생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 중·고등학교나 학부 때 미국 유학을 떠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본격적인 미국 유학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부터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학생들도 나름대로 철이 든 성인이라 부모는 물론 당사자도 커다란 불안감 없이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6월5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한국 학생 유학실태’에서도 특별한 몇 개 대학교를 제외하고는 학부 학생보다 대학원생이 6~7배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대학원의 황폐화

    미국 일류대 대학원은 모든 면에서 세계 각국 유학생을 유치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학생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확보한 명망 높은 교수진, 최첨단 실험기자재 등 연구 및 교육여건이 한국의 일류대와는 비교가 안 된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의 일류대와 대학원은 장학금을 넉넉하게 준비하고 있다. 교수들이 많은 연구를 진행하기 때문에 조교직을 얻기가 쉽다. 또 우수한 대학원생은 교수의 학부 강의를 분담하거나 과제 및 시험지 채점을 맡아 하기도 한다. 교수들이 연구나 대학원 강의에 집중하기 위해 학부 강의를 대학원생에게 맡기는 경우가 적잖다. 아주 우수한 학생의 경우 이런 식으로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장학금을 받는다. 그러므로 미국 일류대 대학원에 진학하면 대체로 처음 한두 해만 학비를 부담하고, 나머지 학기는 학부 학비 걱정 않고 공부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의 우수한 학생들이 미국의 일류대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나려 하는 것이고, 교수들도 그러기를 권한다.



    필자는 서울대 대학원에 우수한 학생이 부족한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미국 일류대 대학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2001년 UCLA, UC버클리, 남가주대(USC), 스탠퍼드대 등 세계 일류대로 알려진 태평양 연안의 대학 4곳을 방문했다. 이들 대학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한 사실은, 한국의 우수한 학생들이 대학원에 대거 모여 있다는 것이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분야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았으나 이공계 대학원에는 한국 학생이 전체 학생의 15~20%를 차지했다. 물론 최근 이들 대학교 대학원생의 70~80%를 중국, 일본, 한국, 베트남, 인도 등 동양계 학생이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 동부나 중부의 다른 명문대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한국 학생의 숫자가 중국이나 일본 학생수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점이다. 중국은 한국보다 인구가 30배 가까이 많고, 일본도 한국보다 인구는 3배, 소득 수준은 2배 가까이 되는 것을 감안하면 한국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이들 세계 일류대에 유학한다는 의미다. 한국은 국가 규모가 작아서 외국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고, 국가가 세계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세계 일류대에서 유학하는 학생이 많아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우수한 학생들이 외국의 대학원으로만 몰려가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도 일으킨다. 국내 대학의 대학원이 황폐해지고 교수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이 대표적이다. 미국과 유럽에 우수한 대학원생을 빼앗긴 국내 대학은 커다란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특히 이공계 대학원의 경우 대학원생의 도움이 교수 연구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기 때문에 대학마다 우수한 대학원생을 유치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대학원 나와도 혜택이 없다

    한국 대학사회의 대혼란 (하)

    지난해 가을, 전국 80여 개 대학교 인문대 학장들이 이화여대에 모여 인문계 위기를 타개할 방안을 모색했다.

    예를 들어 서울대는 2003년부터 베트남의 일류 공과대에서 1년에 20여 명의 대학원생을 스카우트해오는데, 등록금과 생활비 기숙사 등 모든 편의를 학교에서 제공한다. 울산대도 똑같은 조건으로 2003년부터 매년 15~20명의 베트남 학생을 유치한다. 베트남 학생들은 실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근면해 인기가 높다. 베트남에 비해 규모가 작지만, 러시아나 몽골, 중국의 우수한 학생들도 비슷한 대우를 받고 국내 대학원으로 유학 오는 실정이다. 외국 학생을 유치하기 위한 국내 대학간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어 머지않아 이마저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미 베트남의 웬만한 명문대들은 한국의 대학총장들이 너무 많이 찾아오는 통에 콧대가 높아질 대로 높아졌다.

    대학원 붕괴는 이공계 위기, 또는 인문계 위기의 근본원인이 된다. 전부터 심심치 않게 거론되던 이공계 위기가 최근 새삼스럽게 논란이 된 것도 대학원 실험실을 지켜야 할 학부 졸업생들이 국내 대학원에 진학하는 대신 외국, 특히 미국 대학원으로 대거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일류대 졸업생이 외국 대학원으로 진학하고, 그 빈자리를 다른 대학 졸업생이 메우는 현상이 계속되면서 지방대 대학원은 늘 정원을 채우지 못해 고심하고 있다. 정부에서 이공계 대학원생을 지원한다는 취지로 시작한 BK사업이 일부 우수 대학원을 우선적으로 지원하면서 지방대는 더 큰 타격을 입었다. 더욱이 정부가 평생교육 차원에서 수도권에 대학원대학교가 설립될 수 있도록 한 뒤로 지방대 대학원이 더 곤란해졌다.

    대학원을 나와본들 학부 졸업생보다 더 나은 대우를 보장받지 못하는 것도 대학원이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물론 평생교육 차원에서 대학원에 진학하는 사람은 많다. 직장에서 인사상 혜택을 주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중·고등학교 교사가 대학원 석사 수준의 전문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야간에 수업하는 특수대학원에 진학하기 때문에 전일제 수업을 하는 일반 대학원생과 사정이 다르다.

    교수직이나 연구원직은 대체로 석사 이상의 학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연구소 연구원직과 대학 교수자리는 극히 한정돼 있다. 더욱이 최근 들어 이공계 연구소와 연구요원의 숫자가 감소했다.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국책연구소가 연구원 인력을 감축했고, 일반 기업도 여기에 가세했다. 이러한 연구직 규모 축소는 이공계를 크게 위축시켰다.

    진퇴양난 인문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학진학률이 급속하게 상승하면서 대학은 계속해서 팽창했다. 그에 따라 필요한 연구요원과 교수 숫자도 늘어나 대학원을 졸업하면 연구원이나 교수가 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 신입생 숫자가 감소하면서 이런 호시절이 막을 내렸다. 그로 인해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분야가 인문계다.

    인문계의 위기는 대학원생의 공급과잉이 심각해지면서부터 나타났다. 대학이 팽창하던 시절에 학부를 졸업한 많은 학생이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런데 이들이 졸업할 무렵 대학이 팽창을 멈춰 공급과잉 우려가 나타났지만, 이를 간파하지 못한 학생들이 대학원으로 계속 밀려들었다.

    대학교수가 선비의 표상으로 인식되는 한국 사회풍토가 대학원 진학을 부채질한 측면도 있다. 인문계 졸업생은 전통적으로 중·고교 교사직을 선호했는데, 박사학위를 취득하면 대학교 교수직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인문계 학생이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학위를 획득하려 했다.

    인문계는 보통 문학, 사학, 철학 분야를 가리킨다. 이 분야는 이공계(공과와 자연과학계열)나 사회계(정치 경제 경영 사회 행정 등)와 달리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갈 만한 자리가 연구소나 대학 외에는 거의 없다. 학부 졸업생이 선택할 수 있는 범위도 다른 분야에 비해 턱없이 좁다. 이러한 점들이 인문계 위기를 부채질한다. 인문계는 영어나 중국어 같은 일부 어문계열을 제외하고는 취업이 잘 안 된다. 대졸자 취업이 전반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 학생들은 취업이 잘 안 되는 분야를 기피한다.

    그런데도 대학이 팽창할 때 많은 대학에서 인문계를 신설하거나 확대하는 바람에 인문계 위기가 더 악화됐다. 어느 인문계 교수가 한탄했듯 인문계는 ‘칠판과 백묵만으로’ 가장 값싸게 교육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돼 대학 팽창의 손쉬운 수단으로 활용된 것이다. 물론 인문계 교수들 스스로 반성했듯 실용적인 교육을 시도하지 않고, 상아탑 속에서 아카데미즘을 강조하거나 고고한 선비정신을 지나치게 존중한 것도 졸업생의 취업을 어렵게 만들고 결국 인문계의 위기를 가져온 요인 중 하나다.

    한국 대학사회의 대혼란 (하)

    서울대 이공계 대학 입시설명회 당시 빈 좌석이 많아 이공계 기피 현상을 실감케 했다.

    인문계 학부 졸업생의 취업을 더욱 어렵게 만든 또 다른 풍조가 있다. 요새 젊은이들이 안정된 직장을 선호하는 경향이 그것이다. 인문·사회계열 졸업생의 전유물이다시피 했던 행정고시나 사법고시, 9급 공무원 시험, 교사임용시험이 엄청난 경쟁률을 보이는 것은 여기에 도전하는 인문계 졸업자 수가 급증했을 뿐 아니라 비(非)인문계 졸업자도 대거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 취업과 관련해 인문계를 괴롭히는 문제가 또 있다. 대학 교양과목의 주류를 이루던 인문계 과목이 취업에 유리한 과목들에 의해 밀려나고 있는 것. 이러한 사정은 대학의 본질이 변질되는 중요한 문제로서 최근 대학교육의 큰 딜레마가 되었다.

    대학의 본래 목적

    대학이 처음 생겨날 당시의 목적은 사회의 엘리트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그랬다. 유럽의 각 대학이 귀족을 비롯한 지배계층의 자제를 교육하던 곳이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에 나오는 하이델베르크대학이 좋은 예다. 사서삼경(四書三經) 하나인 ‘대학’의 첫 구절은 “대학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들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나라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양성하는 곳이 대학이라는 것이다. 학교 이름이 소학, 대학 식으로 나뉜 것도 그런 이유다. 소학교나 중학교가 아닌 대학교에서는 사회 각 분야에서 지도적 역할을 할 엘리트를 양성했다.

    밝은 덕이 무엇인지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려면, 역사를 알고 철학을 알아야 하며, 인간의 희로애락을 이해하기 위해 문학도 필수적이다. 인문학이 대학의 기본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한 사회 지도층이 되려면,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야 하기 때문에 아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일상생활에서 남과 다른 고통도 감수해야 한다. 남들이 잘살기 위해서 돈에 매달릴 때도 선비는 혼탁한 사회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고고한 삶을 지켜야 한다. 선비정신이나 아카데미즘은 지도층이 돼야 할 사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동양식 대학은 청렴한 도학자를 키워야 하는 곳이다.

    활짝 열린 대학 문, 대학의 위기

    이러한 선비정신과 아카데미즘은 자연과학이 대학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우주의 움직임과 지구의 위치를 탐구하던 천문학은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와 우주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기에 일상생활과는 거리가 멀었고, 다만 고고한 지식인의 정신활동의 일부였다. 작은 물건의 움직임을 운동의 법칙으로 탐구하던 뉴턴식(式) 물리학도 상품의 생산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하여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고고한 선비정신으로 살아가야 할 사회 엘리트계층의 지식을 함양하는 대학의 중심이 됐다. 선비정신이나 아카데미즘은 자연과학과도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대학 교육이 인간의 일상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지식을 취급하기 시작한 것은 법학, 의학, 공학이 등장하면서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부터 제도론적 통치학이 법가(法家)에 의해 강조되면서, 덕성을 함양해 국가 지도층을 순화시키려는 유가(儒家)와 결별하고 인문학적인 색채를 벗어났다. 서양에서는 르네상스 운동 와중에 현실주의적 정치학이 마키아벨리즘 등에 의해 강조되면서, 형이상학적 정치철학이 아닌 정치생활과 직결된 정치학이 탄생했다. 엔진의 발명과 더불어 시작된 산업혁명이 공학을 물리학으로부터 독립시켜 인간의 물질생활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면서 대학의 중요한 분야로 자리 잡았다.

    대학에서 법학, 의학, 공학이 자리를 확고하게 잡은 뒤에도 한동안 대학 교육은 엘리트를 양성하는 데 주력했다. 법학과 의학은 오랫동안 작은 규모로만 전공자를 양성해 이 분야에 진학하는 것 자체가 사회 지도층으로 부상하는 것이었고, 공학도 한정된 숫자의 엘리트만을 양성해왔다. 그래서 대학의 선비정신이나 아카데미즘은 그 지위를 지켜 나갈 수 있었다. 사회 지도층이라면 어느 분야에 속해 있건 칸트나 헤겔의 사상과 뉴턴의 운동법칙을 논하고 바이런이나 괴테의 글을 읽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됐다. ‘임꺽정’과 ‘레미제라블’을 읽고 주인공의 기구한 운명을 통해 하류층의 고통과 눈물을 이해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엘리트 교육기관으로서의 대학은 정치가 민주화하고 시민의 소득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커다란 도전을 받았다. 학비를 부담할 수 있는 중산층 자녀들이 대학에 입학하기 시작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대학 문은 활짝 열렸다. 그리고 최근 대학진학률이 급격하게 상승하자 대학의 목적 자체가 근본적인 변화를 맞게 됐다. 대학진학률이 상승하면서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이 어렵고, 그렇기에 더욱 대학을 나와야 하는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누구나 대학에 입학하게 되자 사회 지도층을 육성한다는 대학의 전통적인 목적은 의미를 잃었다. 결국 사회 지도층을 육성하기 위해 강조된 아카데미즘과 고고한 선비정신,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인문학과 교양 과목들이 모두 위기를 맞은 것이다.

    엘리트 교육의 몰락

    대학진학률이 20~30%에 머물던 때와 달리 철학이나 역사학 등 인문학의 핵심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힘든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대거 대학에 입학했다. 칸트나 헤겔의 철학은 물론이고 탈현대주의 철학 등은 원래 인류 역사상 가장 우수한 두뇌를 지닌 천재들의 작품이다. 이들 작품의 핵심적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 수준의 지적 훈련과 준비된 학습과정이 필요하다. 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기초이론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상위 20~30%를 제외한 나머지 대학생은 이를 이해할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채 대학에 입학한다.

    여기에 더해 과학기술의 발전과 정보화에 수반돼 새롭게 개척되는 이론들과 쏟아져 들어오는 엄청난 정보를 소화하기 위해 전공 지식도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넓어지고 깊어졌다. 요즈음 대학생은 전공분야의 필수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것만으로도 대학생활이 벅차다. 이리하여 대학생 대부분은 인문학이나 자연과학의 기초이론을 이해할 만한 시간적 여유 없이 대학생활을 하고 있다.

    많은 학생이 다만 취업을 위해 대학에 진학하다 보니 기본적인 지식도 부족한 상태로 입학한다. 도쿄대나 서울대 이공계 신입생 중에 미적분을 모르는 학생이 많다고 하니 그 심각성을 짐작할 만하다. 많은 학생이 대학에서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전달하지 못하거나, 기본적인 영어 문법이나 단어를 모르고 있다가 취업 목적으로 대학에서 공부한다. 과거엔 대학생들이 이러한 기초를 터득하고 입학했거나, 대학에서 별도의 취업준비를 하지 않더라도 졸업 후 직장에서 스스로 터득하는 데 별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요즘 대학생들은 과거의 대학생들이 칸트나 헤겔의 사상을 논하고, 셰익스피어나 테니슨의 작품을 읽었을 시간에 의사소통 능력을 배양하거나 토익이나 토플 준비에 매달린다. 과거의 대학생들은 엘리트 교육을 받았는데, 지금의 대학생들은 취직 교육을 받는다. 영어단어를 더 외워야 하는 학생들에게 영문학은 사치스러운 과목으로 비치고, 의사소통능력을 키우기에도 바쁜 학생들에게 칸트의 도덕론을 가르치는 것은 오히려 부도덕한 일이 된다. 엘리트 교육과 대중교육의 극명한 차이를 과거와 현재의 교양교육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대학교육의 딜레마는 엘리트 교육과 대중교육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비록 대학생에게 취업을 위한 교육을 한다고 해도, 사회 각 분야를 이끌 엘리트를 양성하는 것은 필수적이므로 대학의 어디에선가는 엘리트 교육을 놓지 말아야 한다. 이들 엘리트를 통해 인류 문화가 발전하고, 다음 세대에 전수돼야 한다. 그러므로 한편에서는 과거의 엘리트 교육을 강조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대중교육을 강조한다.

    갈피 못 잡는 대학교육

    이러한 혼란은 대학의 성격이 뚜렷하지 않을 경우 더 심하다. 논리적으로는 사회 각 분야에서 지도적 기능을 담당할 학생을 교육하는 대학은 엘리트 교육을 지향하고, 그렇지 않은 대학에서는 대중교육을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대학의 성격은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 구분되지 않는다. 서울대나 고려대, 연세대 등 세칭 일류대는 엘리트 교육에 치중하고 나머지 대학들은 대중교육을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대학 구분이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 대학입시에서 우수 학생을 차별해 선발할 수 없으면 이런 혼란은 더 심해진다. 그래서 상당수 대학이 엘리트 교육과 대중교육의 갈림길에 서 있다. 대학에 따라 어느 전공이나 학과는 아주 우수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전공이나 학과들도 혼재하는 상태다.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일류대 내부에서도 대중교육이 절실하게 필요한 측면이 있다는 점이다. 첫째, 서울대 같은 한국의 대표적인 대학의 입시제도에도 성적과 별개로 입학할 수 있는 전형이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도쿄대에도 성적이 부진한 학생들이 입학하고 있다. 이들을 위해 보충수업을 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 둘째, 일류대에 입학했다고 해서 모두 취업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기에 일류대에서도 취업에 적합한 대중교육이 필요하다. 사회의 지도층이 되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고 당장은 적당한 곳에 취업해야 하기 때문에 취업준비는 일류대에서도 우선적인 교육목표다.

    취업 기회가 줄어들면서 직장이 신입사원에게 요구하는 조건도 까다로워졌다. 한 자리를 놓고 20, 30명이 몰려드니 기업으로선 좀더 능력 있는 인재를 선택하려 한다. 여기서 능력은 직장 업무에 도움이 되는 어학 실력이나 의사소통 능력, 창의력 및 조직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 등을 가리킨다. 직장의 특성에 따라 요구하는 능력도 다르지만,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대기업이 아닌 일반적인 직장에서는 대체로 인문학적 지식이나 자연과학 기초지식은 사치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특히 대학졸업자가 가장 많이 취업하는 중소기업은 당장 현업에서 써먹을 지식을 필요로 한다. 지금은 업무능력이 좀 떨어져도 5~6년 뒤면 일을 잘할 것 같은 잠재력이 엿보이는 대졸자라면 언젠가 더 나은 직장으로 옮겨갈 게 뻔하기 때문에 중소기업으로선 썩 반기지 않는다. 평생직장 개념이 깨지면서 기업은 당장 일 잘하는 사람을 원한다.

    맞춤형 교육의 맹점

    이러한 요구에 부응해 생겨난 것이 소위 ‘기업 맞춤형 교육’이다. 대졸자 취업이 어려워지면서 산학협동교육이 강조되고, 대학은 기업에서 써먹을 수 있는 실용적인 교육에 소홀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비난은 일면 타당하다. 그동안 대학은 일반적인 이론을 교육했을 뿐 특정 기업이 필요로 하는 구체적인 지식을 가르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교수 자신이 배우고 연구한 부분에만 치중해 교육해온 측면이 있다. 그리고 이 점은 고쳐야 하고, 지금 상당부분 개선되고 있다.

    그러나 특정 기업에서 요구하는 분야만 가르치는 것은 학생의 장래를 위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일반적인 이론을 폭넓게 공부해둬야 언제 어딜 가더라도 무난하게 일할 수 있다. 물론 특정 분야로 진출하면, 직장에 가서 그 분야에 대한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 이러한 부분을 대학에서 모두 준비시키기는 어렵다. 그러니 여기에 필요한 시간과 경비는 직장에서 어느 정도 부담해야 한다.

    덕성을 지닌 미래지도자

    직장에서는 전공분야만이 아니라 언어 능력, 의사소통 능력을 요구한다. 이들 때문에 철학, 역사, 문학, 자연과학의 기초이론 등 과거 엘리트 교육에서 비중을 뒀던 교양과목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소비자 중심주의 바람이 불면서 대부분의 대학에서 학생에게 필수적인 교양과목을 없애거나 선택과목으로 대체했다. 일부 우수한 학생들은 고등학교 때 습득한 수준만으로도 언어과목이나 의사소통 관련 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딸 수 있다. 그래서 우수한 학생들도 골치 아픈 철학, 역사학, 문학 같은 교양과목을 회피한다.

    일류대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미래의 사회 지도자들이 당장 취업에 유리한 분야를 공부하기에 급급한 것이다. 안정된 직장을 얻어 잘 살아가는 것이 지금 대학생들의 지상목표가 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의 미래 지도자들은 선비정신이나 아카데미즘이 표방하던 고고하고 청렴한 덕성과는 거리가 멀고, 약자에 대한 배려나 인간의 희로애락을 이해하는 폭넓은 인간과도 거리가 먼 사람이 돼가고 있다. 대학교육의 타락이라고 불러야 할 이 현상은 불행하게도 한국의 대학가 전체를 휩쓸고 있다.

    한국 대학사회의 대혼란 (하)
    정정길

    1942년 경남 함안 출생

    서울대 행정학과, 동 대학원 석사, 미국 미시간대 대학원 박사(정치학)

    행정고시 합격

    경북대 행정학과 교수,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교수

    現 울산대 총장

    저서: ‘정책결정론’ ‘정책학원론’ ‘50년대의 지방자치’ ‘대통령의 리더십’ 외


    이런 분위기가 인문학자들을 괴롭힌다. 교양과목으로서의 인문학이 외면당하면서 교수직의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하고, 교수를 양성하는 대학원의 인문학 계통이 위기에 봉착했다. 더 심각한 것은 대학생들이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전공과 관계가 없는 공부를 하고 있는 사실이다. 대학생활이 취직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인식되면서, 더욱 광범하게 확산되고 있는 현상이다.

    대학의 타락을 막고, 미래의 지도자를 도량과 덕성을 지닌 인간으로 키울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가는 사태는 작게 보면 직업구조와 경제상황의 변화에서 파생되는 문제지만, 크게 보면 인류사회 전체가 겪고 있는 현상으로 너무나 많은 요인이 결합돼 있어 해답을 찾기 어렵다. 우수한 학생들을 미래의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키우는 방법도 대학의 교육과정, 사회 지도적 지위에 있는 직장의 인사채용 방침, 교수들의 변신 노력 등과 모두 연관돼 있기 때문에 그 해답이 간단치 않다. 이 분야 전문가들의 고민과 연구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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