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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사나이’ 안용복 탐구

일본섬 끌려가 50일간 뱀 잡아먹으며 영유권 주장

  •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

‘독도 사나이’ 안용복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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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사나이’ 안용복  탐구

소송을 걸기 위해 2차 도일한 안용복이 울릉도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다 유폐돼 50여 일간 뱀을 잡아먹으며 버틴 호산지 안의 아오시마. 지금은 다리가 놓여 있다. 아오시마와 호산지를 설명하는 안내판에 안용복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

당시 일본 천황은 교토에 있었고 도쿠가와에 앞서 일본을 일시적으로 통일한 도요토미는 오사카(大阪)를 근거지로 삼았다. 교토와 오사카는 인접해 있고 세키가하라 패전에도 불구하고 도요토미의 아들은 살아 있었다. 이 때문에 오사카와 교토에선 권력을 유지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도쿠가와는 1603년 본거지를 지금의 도쿄(東京)인 에도(江戶)로 옮겼는데, 이를 일컬어 ‘에도막부(幕府)’라 한다.

이 시기, 지금의 부산 지하철 3호선 망미역에서 가까운 부산시 수영구 수영동에 경상좌도(左道)를 담당하는 조선 수군 사령부인 경상좌수영이 있었다. 도쿠가와 막부가 4대로 이어지던 조선 숙종 시절 경상좌수영에서 노 젓는 병사를 하다 그 지휘자인 ‘독로군(督櫓軍)’까지 오른 인물이 안용복이다. 지금은 부산시 안에 동래구가 있지만, 당시는 동래부(府) 안에 부산면이 있었다.

동래부 안에는 무역을 하기 위해 쓰시마(對馬島)에서 건너온 일본인들이 모여 사는 ‘왜관(倭館)’이 있었다. 왜관은 일본이 조선과 ‘공(公)무역’을 하는 창구였다. 안용복은 왜관에 드나들며 왜말을 익혀 능숙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공무역’에 대비되는 것이 ‘사(私)무역’인데, 사무역의 한 갈래를 담당한 것이 왜구였다. 고려 말 이후 조선과 중국, 일본에 출몰한 왜구는 주민 재산을 약탈해 팔았다.

약탈을 토대로 한 왜구의 사무역이 번창하면 공무역이 위축되고, 이렇게 되면 공무역에 의존하는 기존 권력기관의 경제력이 약화된다. 이 때문에 동북아의 패권을 쥐고 있던 명나라는 왜구 단속령을 내리고 일본에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왜구는 섬과 섬을 옮겨 다니면서 생활하므로 중국은 왜구가 들어와도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도록 섬을 비우는 정책을 채택했다.

왜구 막기 위한 조선의 海禁정책



이것이 알려지자 조선 조정에서도 “섬에 나가 사는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대신 정기적으로 관리를 보내 섬에 대한 영유권을 확인하자”는 주장이 제기돼, 1403년 조선은 무릉도(울릉도)를 비롯해 섬에 나가 사는 주민들을 불러들였으나, 제대로 집행되지 않았다. 쓰시마는 산물(産物)이 매우 적은 섬이라 무역을 하지 못하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쓰시마 번주(藩主)는 1407년 ‘조선이 비우려고 하는 울릉도에 쓰시마 사람들을 이주시켜도 되느냐’고 물어왔으나 조선 조정은 단호히 거부했다.

1417년 황희는 ‘쇄출(刷出)’과 ‘수토(搜討)’ 정책을 건의해 태종의 윤허를 받아냈다. 쇄출은 ‘(섬에서) 모두 나가게 한다’는 뜻이고, 수토는 ‘관리가 섬에 대한 영유권을 확인하러 돌아다니다 왜구가 발견되면 토벌한다’는 의미이므로, 둘은 주민이 바다로 나가는 것을 막는 ‘해금(海禁)정책’으로 묶을 수 있다.

조선의 해금정책이 집행된 지 200여 년이 지난 1617년경 일본 돗토리 지역에 사는, ‘오야(大谷)’라는 성을 가진 선주(船主)가 탄 배가 폭풍을 만나 울릉도로 표류했다. 사람이 살 만한 섬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오야는 돗토리로 돌아가 ‘무라카와(村川)’라는 성을 가진 선주와 함께 울릉도를 차지해 이득을 올리자는 계획을 세우고, 일본을 통치하던 에도막부에 ‘도해(渡海)면허’를 신청해 1625년쯤 이를 받아냈다.

현재 일본은, 에도막부가 도해면허를 발행했으니 1625년 이후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인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역사의 ‘역’자가 뭔지도 모르는 웃기는 해석이다. 당시 막부는 일본 배가 외국에 갈 때만 도해면허를 신청하도록 했다. 일본이 영유한 섬에 갈 때는 도해면허를 신청할 필요가 없었던 것. 따라서 도해면허를 신청하고 이를 받아냈다는 것은, 오야 선주와 에도막부가 울릉도와 독도를 자국의 섬으로 보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도해면허는 1회용이다. 하지만 오야와 무라카와 가문은 62년 이상 울릉도와 독도에서 나오는 수산물과 임산물을 독점했다. 이들의 울릉도·독도 무단점유가 조선과 일본 사이에 문제가 된 것은 1692년부터다. 당시의 일본 측 기록을 보면, 1692년 울릉도로 나간 일본인들은 조선인이 울릉도에서 조업하고 있는 것을 보고, 조선인이 울릉도에 상륙해 조업하고 있다는 증거를 수집해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같은 내용의 보고가 안용복이 독로군으로 있는 경상좌수영에도 들어갔던 모양이다. 일본은 두 차례나 일본에 건너와 울릉도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 안용복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남겨놓았는데, 그에 따르면 안용복의 키는 4척1촌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1척은 46㎝였으니 안용복의 키는 185㎝ 정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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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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