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는 빨간 길을 택했을까
‘실크로드의 마지막 카라반’에 비하면 손호철 교수의 ‘레드 로드’는 여행을 마치자마자 출간된 정말 따끈따끈한 책이다. 저자는 1934년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중국 장시성의 난창에서 산시성의 시안까지 368일 동안, 노동자와 농민 8만5000명을 이끌고 1만여 km를 걸었던 대장정 코스를 따라갔다.
이 책은 여행서로서 세 가지 장점을 갖췄다. 첫째, 흔히 여행서들이 건너뛰기 쉬운 여행의 준비과정이 충실하게 소개돼 있다. 저자는 2004년 여름 한 달 일정의 남미여행 도중 중국의 힘을 깨닫고 21세기를 이해하기 위해 중국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해 가을 무렵 중국 시안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중국공산당과 홍군이 장정을 마무리한 옌안에서 옛 혁명 유적지를 돌아본 뒤 여행 목적과 코스를 정한다. 일단 결심을 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중국의 장정과 관련된 책들을 읽으며 정보를 모으는 것이었다. 이듬해 가을 안식년이 시작되자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6개월간 집중적으로 중국어 공부를 한 다음 자세한 중국지도를 구입해 장정 코스를 하나하나 점검해간다. 경비와 차량, 통역, 운전사 보조 겸 보디가드 1명 등을 확보했다. 중국 정부로부터 어렵게 취재 허락과 비자를 받았다. 2007년 3월 중순에 시작해 5월 중순에 끝나는 65일의 일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둘째, 단순히 이 코스를 둘러보고 다음 코스로 달려가는 나열식 관광이 아니라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는 역사문화기행의 진수를 보여준다. 오늘의 중국을 탄생시킨 역사의 현장에서 장정에서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중국 현대사를 이해하고 ‘21세기 중국’의 미래를 가늠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에드거 스노우가 ‘중국의 붉은 별’에서 “장정과 비교하면 한니발의 원정은 주말 피크닉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만큼 장정은 엄청난 스케일의 도전이었다. 홍군은 하루 평균 40km씩 걸으며 수없이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출발시 8만5000명이었던 홍군이 도착했을 때 8000명으로 줄어 있을 만큼 큰 희생을 치렀지만 대신 그들은 중국 전역에 공산주의의 씨를 뿌리는 데 성공했다.
저자는 독자에게 이런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이 여행을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시작했다. 특히 상하이는 중국공산당의 메카이자 오늘날 중국 자본주의의 상징으로서 모순을 떠안은 곳이다. 개혁개방 이후 수많은 외국인이 상하이에 머물렀지만 화려한 서구식 카페 밀집지역 신톈디(신천지)에서 ‘공산당 1차 전국대표대회 유적지’를 찾아볼 생각을 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셋째, 이 책에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치르는 중국의 현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마오가 ‘수호지’를 연상케 하는 활약을 펼쳤던 징강산(중국 5대 성지 중 하나다)으로 향하던 도중 승합차의 기름이 떨어져간다. 그런데 주유소마다 기름이 없다고 판매를 거절했다. 휘발유보다 경유의 기름난(難)이 더 심했다. 대도시에서는 몰랐던 중국의 에너지난을 실감하며 아침마다 주유소 문이 열리기 한 시간 전부터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이런 일 정도는 본격적인 출발 전 몸 풀기에 불과하다. 장정 중 12개의 성을 거쳐간 홍군이 그중 가장 오랜 시간 머물렀다는 구이저우로 가기 위해 싼장에서 총장으로 출발하자마자 문제가 생겼다. 모든 길을 아스팔트를 뜯어내고 수리 중인 데다 비가 와서 웬만한 차로는 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길을 찾아 빙빙 돌다 150위안(2만1000원, 3~4일 일당에 해당)짜리 고액 아르바이트를 고용해 어둠 속 산길을 찾아가야 했다. 여기에 손님은 뒷전이고 차만 아끼는 운전기사까지 속을 썩인다.
오죽했으면 책 말미에 저자는 ‘21세기 장정’의 다섯 가지 투쟁을 이렇게 정리했을까. 첫째 길과 벌인 투쟁, 둘째 기사와 벌인 투쟁, 셋째 시간과의 투쟁(30km 거리를 여섯 시간 반을 걸려 가야 하는 상황), 넷째 각종 출입통제 등 규제와 벌인 투쟁, 다섯째 나쁜 길과 짜증나는 운전기사, 누적되는 피로 등 폭발 일보 직전 ‘나’와 벌인 투쟁이다.
인간과 혁명을 다시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가 ‘레드 로드’를 선택한 이유는 인간과 혁명을 다시 생각하기 위해서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저자는 마오의 평생 동지이면서도 문화대혁명 때 가장 비참하게 숙청을 당하고 죽음에 이른 류사오치와 펑더화이가 마오와 이웃사촌이라는 사실에 놀란다. 현장을 둘러보며 저자는 묻는다. “장정을 비롯해 40년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한 혁명 동지들을 그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야만 혁명이 가능한 것인가? 혁명이란 어디까지나 수단이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것 아닌가?” 마오가 살아 있다면 속시원히 대답해주었을까? 아니, 대답은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해야 한다.
저자가 장정을 끝낸 지 3개월 만에 이처럼 탄탄한 한 권의 책을 엮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사전준비가 치밀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책을 보며 일정 정리조차 차일피일 미뤄온 게으른 나를 담금질하며, 다음 답사를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다행히 ‘실크로드의 마지막 카라반’이나 ‘레드 로드’ 어디에도 올해 내가 다녀온 코스는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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