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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꺼풀 벗겨본 미국 ⑤

영원한 ‘팍스 아메리카나’ 꿈꾸는 미국의 두 얼굴

  • 김수경 미국 스탠퍼드대 박사과정·사회학 kimsk@stanford.edu

영원한 ‘팍스 아메리카나’ 꿈꾸는 미국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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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운동가=반미주의자”

그렇다면 미국에는 민족주의가 없을까? 적어도 인종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좀 더 전문적인 용어로는 ‘혈통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라고 하는데, 한국사회에서 관찰되는 민족주의가 이에 속한다. 쉬운 예로, 귀화한 외국인은 아무리 대한민국 국적을 갖고 있어도 좀처럼 한국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혈통민족주의는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 때문에 순혈주의나 파시즘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어 종종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다. 특히 다민족 국가인 미국사회에서 혈통민족주의는 금기시될 수밖에 없는 이념이다. 사적으로 백인우월주의자라 하더라도 공공연히 그런 의견을 피력했다가는 개인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것은 물론 감옥에 갈 수도 있다.

혈통민족주의에 상반되는 개념으로는 ‘시민민족주의(civic nationalism)’가 있다. 이는 조상이나 혈통이 다르더라도 자발적 참여에 의해 한 국가의 시민이 된 사람들이 공유하는 민족적 정체성이다. 최근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으로 한국사회가 빠르게 다민족 사회로 변모하면서 혈통민족주의를 버리고 시민민족주의로 나아가자는 움직임도 있다.

미국사회에서 포착되는 민족주의는 혈통민족주의보다는 시민민족주의에 가깝다. 시민민족주의는 소위 ‘열린 민족주의’와 맥락을 같이하는 까닭에 혈통민족주의의 단점을 극복할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가령, 일단 한국인으로 귀화했다면 출신 국가가 어느 곳이든 상관없이 한국 민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9·11테러와 이에 대한 미국사회의 극렬한 반응은 시민민족주의 역시 민족주의의 본질적 폐쇄성을 극복할 수 없음을 보여줬다. 예를 들어, 컨트리 그룹인 ‘딕시 칙스’는 2003년 런던 공연 중 부시 대통령이 자기 고향인 텍사스 출신인 것이 창피스럽다고 발언했다가 CD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미국 전역의 라디오 방송사는 일제히 이들의 노래를 내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또한 2004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건립 50주년 기념식에서 상영하기로 했던 야구영화 ‘Bull Durham’은 이 영화에 출연한 수전 서랜던과 팀 로빈스가 반전운동가라는 이유로 갑작스레 상영이 취소되기도 했다.

시사주간지 ‘타임’의 조사에 따르면 2003년 프랑스가 이라크전쟁에 반대 의사를 표시하자 미국인의 20%가 프랑스 제품의 구매를 중단했다. 또 프랑스는 당시 미국인 여행객의 감소로 관광수익이 5억달러(한화 약 5000억원) 이상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심지어 이라크전쟁에 반대하는 반전운동가들을 비애국적이라는 비난을 넘어 반미주의자(anti-American)로 몰아세우기도 한다. 얼마 전 여성 평화운동단체인 ‘코드핑크’의 연례총회가 있던 날, 식장 밖은 몰려든 시위대로 북적였다. 이들은 ‘코드핑크’의 설립자 메데아 벤자민을 ‘반미주의자’ ‘테러리스트’로 규정했다. 전쟁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테러리즘을 지지한다는 비난을 산 것이다.

미국 시카고 대학 연구팀이 실시한 한 설문조사에서 “세계 어느 곳보다도 나는 미국의 시민이고 싶다”는 문항에 대해 9·11테러가 발생하기 이전에도 이미 응답자의 90%가 긍정의 답변을 했으며 테러 이후에는 97%로 치솟았다.

또한, “다른 국가의 국민이 미국 시민 같다면 세상은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라고 답변한 사람도 테러 이전 38%에서 테러 이후 49%로 증가했다. 2002년 실시된 ‘퓨 세계 태도조사 프로젝트(Pew Global Attitude Project)’에 따르면 당시 미국 응답자의 79%가 “미국의 가치와 사상이 전세계에 퍼지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답했다.

민주주의의 수호자?

미국의 민족주의를 지탱하는 기반은 인종이 아니라 신념(creed) 혹은 가치(value)에 있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 자유, 인류애 등의 가치가 미국 시민의 집단의식을 더욱 공고히 한다는 것. 문제는 그러한 가치들을 미국의 독점적인 것으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미국의 민주주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이고, 미국 사회의 자유만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 것이다.

이는 미국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임하고 치러낸 수많은 전쟁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 베트남전쟁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또한 자유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등 다른 나라의 군부독재정권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권이 인권을 유린하는지 여부는 별개의 문제였다.

영원한 ‘팍스 아메리카나’ 꿈꾸는 미국의 두 얼굴

전문가들은 “9·11테러 이후 미국의 민족주의 성향이 더 짙어졌다”고 말한다.

심지어 미국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후세인 정권을 지지했었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저술가인 사이드 아부리쉬는 ‘사담후세인 평전’에서 “1979년 이란에 이슬람 원리주의 정부가 들어서자 미국은 ‘미치광이보다는 망나니가 낫다’며 대량살상무기를 포함해 후세인 정부를 전폭 지원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십수 년 후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킨다는 명목으로 후세인 정권 축출에 나서자 미국의 모순된 태도에 기자들의 질문공세가 쏟아졌고, 부시 행정부는 “1990년 이전에 이라크에서 일어났던 일은 이번 일과 무관하다”고 잘라 말했다.

9·11테러 이후 부시 대통령의 연설을 분석해온 정치학자 폴 매카트니는 미국 민족주의의 두 가지 특징에 주목했다. 보편주의(universalism)와 예외주의(exceptionalism)가 그것이다.

우선 미국의 민족주의는 민주주의, 자유와 같은 인류 보편적 가치에 중점을 둔다는 점에서 보편주의적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미국에 대한 공격은 곧 인류 보편의 가치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한다. 앞서 9·11테러를 민족 간의 갈등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안녕을 위협하는 사건으로 인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2001년 11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이라크전쟁과 관련해 “적들은 단지 미국의 정책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정의하는 개방적 사고와 관용, 창조적 문화에 도전하고 있다”며 “미국은 이를 위협하는 세력을 척결할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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