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호

박현기

동양 정신과 서양 테크놀로지 결합 ‘비디오로 그리는 동양화’ 완성

  • 정준모 미술비평가,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curatorjj@naver.com

    입력2008-11-03 11: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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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현기는 한국 현대미술에 한국적 정서와 동양적 사유를 접목한 독특한 미학을 구현, 백남준 등 서구의 비디오아트와는 차별화된 자생적인 한국 비디오아트를 완성했다.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테크놀로지를 결합한 ‘비디오로 그리는 동양화’를 완성한 것이다.
    박현기

    1942년 일본 출생. 2000년 작고<br>홍익대 건축과 졸업<br>1979년 상파울로비엔날레, 1980년 프랑스 파리비엔날레 참가<br>전 큐빅디자인연구소 소장

    비디오아트는 20세기 후반 설치미술(Installation)이라는 또 다른 형식과의 교배를 통해 새로운 예술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에게 비디오아트는 백남준이라는 인물로 인해 낯설지 않지만 그 실체에 대한 이해는 일천하다. 흔히 비디오를 매체로 사용하는 미술을 모두 비디오아트라고 생각하지만 비디오 또는 TV는 하나의 수단이자 매개일 뿐, 이를 다루고 사용하는 작가의 입장과 철학에 따라 다르다.

    특히 서구의 비디오아트는 그 출발부터 반(反)미학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무정부주의적인 플럭서스 정신과도 닿아 있다. 백남준(1932~2006)과 볼프 포스텔(1932~1998)은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이 누리던 교조적 권력을 부정하면서 소위 ‘반(反)고급예술’을 주창했던 플럭서스 그룹의 일원이었다. 이들에 의해 시작된 서구 비디오아트는 시각적으로는 플럭서스의 유전인자를 받아 충격적이지만 미학적으로는 개념적이거나 논리적인 부분이 결여돼 있어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반면, 한국의 비디오아트는 시작된 시기와 문화적, 경제적 환경이 서구와는 현저하게 다르다. 텔레비전과 테크놀로지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에 있다 할 수 있지만 한국적, 동양적인 사유체계 속에서 나름대로 독특한 형식과 내용을 담아냈다. 서구의, 또는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와는 다른 면모를 한국 비디오아트의 대부라 할 박현기(朴鉉基·1942~2000)는 보여주었다.

    매력 있는 도구

    백남준이 ‘오브제가 우리를 상실하게 만드는’ 시대의 상징으로 텔레비전을 선택했다면 이들 작품은 ‘ TV 아트’에 더 가깝다. 이후 1965년 소니사가 휴대용 비디오카메라를 시판하면서 비디오는 새로운 표현 수단이자 매체가 되었다. 비디오는 드로잉과 회화처럼 흔한 매체가 되었고 모니터, 폐쇄회로의 테이프에서 설치조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에 비디오 테크놀로지가 적용됐다.



    비디오의 열린 접근성은 작가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새로운 예술적 실험과 시도를 가능하게 했다. 비디오아트는 새로운 도구로서 주목받으며 연극적인 요소와 음악적인 요소, 빛과 행위를 포함하는 총체적인 예술로 자리 잡아갔다. 이후 컬러TV를 거쳐 소형화된 캠코더 시대로 이어지면서 멀티미디어에서 인터미디어로 진화한다.

    박현기
    또한 시간을 넘나드는 비디오 이미지는 공간을 넘어 또 다른 공간, 즉 ‘원본 없는 이미지’를 양산한다. 현실을 대체하는 완전한 시뮬라크르의 세계는 현실 리얼리티와 가상 리얼리티 사이의 경계를 흐려놓음으로써 각종 판타지의 세계로 사람들을 이끈다. 이렇게 기술적으로 내용적으로 급진적인 경향을 지닌 비디오아트를 처음 접한 박현기는 매체를 조작해 시간을 ‘조절’하고 시간과 ‘놀’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카메라가 피사체를 촬영하자마자 비디오는 시간을 박제화한다. 그래서 관객은 비디오가 제시하는 통시성과 동시성을 함께 인식하면서 순간과 영원은 동일하다는 동양적 사유의 표현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작가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관객의 입장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습관적으로 익숙한 이미지를 통해 그것의 실체를 접하고 있다는 믿음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대상과 재현의 동일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대상을 재현한 이미지는 그 대상의 또 다른 현현(顯現)일 뿐 그것 자체는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시각예술의 한계이자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서 재현과 실재, 나타남과 보여짐, 보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의 간극에서 비롯되는 같음과 다름 등 그동안 그를 괴롭히던 문제들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비디오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는 당시 화단을 풍미하던 추상표현주의나 앵포르멜(Informel) 등 인간 내면을 시각화하는 회화의 한계를 실감하면서 새로운 미술의 본질적인 문제에 집착한다. 당시 박현기를 비롯한 많은 작가는 ‘예술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했다. 즉 자기수양과 자기완성이 예술행위의 목적이었다. 이는 서구의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부족과 전통 문인화 정신이 결합해 나타난 과도기적인 현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현기에게 비디오란 매체는 재현과 실재, 초월적인 자아와 존재론적 의미를 동시에 구현하면서도 독창성을 담보해낼 수 있는 매력 있는 도구가 되어주었다. 그는 1974년 대구 미국문화원 자료실에서 백남준의 ‘Global Groove’를 처음 본 순간부터 비디오아트의 가능성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다양한 실험과 시도

    일제 강점기에 일자리를 구해 일본 오사카로 떠난 부모 밑에서 태어난 박현기는 광복되기 직전인 세 살 때 부모와 함께 귀국, 경북 달성에서 자랐다. 그림과 건축에 남다른 재주를 보였던 그는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해서 기계설계를 전공했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하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진학한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졸업 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그는 3학년을 마치고 건축과로 전과한다. 그리고 고향이나 다름없는 대구로 낙향해 인테리어업에 뛰어든다. 이런 선택은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작업할 수 있는 안정적 여건이 되어주었다. 그는 고가의 비디오, 필름 영상 등의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재정적 여유는 개인의 작업뿐 아니라 대구 현대미술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강소와 이명미, 그리고 박현기의 재정적 희생과 현대미술에 대한 열정은 오늘날 한국 현대미술의 단서가 된 대구현대미술제를 낳는 동인이 되었다.

    그는 미국과 일본 잡지를 통해 새로운 미술 동향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국잡지엔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 그리고 아상블라주(assemblage) 같은 새로운 전후(戰後)미술이, 일본잡지에는 ‘구체(具體·구체미술협회)’와 ‘모노하(物派)’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박현기는 일찍이 미술의 근본적인 문제에 회의를 가졌다. 자연이나 존재의 본질에 관심을 두었던 당시의 작가들처럼 사실적이고 환영적인 미술은 시각적 장치를 통해 본질을 왜곡하고 진실을 호도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많은 실험과 시도들을 통해 미술의 본질, 자연의 본질, 공간의 본질에 다가가려 했다. 그는 오브제를 가식적인 요소들이 제거된 순수한 정신세계로 다가가는 데 필요한 도구처럼 인식했고 내용적으로는 한국적이고 근원적인 정신을 추구하고자 했다.

    이 시기 그는 두루마리 화장지를 쌓아올리고 서로 닿은 부분에 먹물이나 안료가 침투해서 일체를 이루는 과정, 또는 물을 머금은 두루마리 휴지들이 뭉치고 무너지는 모습의 ‘몰시리즈’(1974~1975)를 통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의 변화, 사물의 변화를 보여준다.

    박현기

    1981년 발표한 ‘도심을 가로지르다’의 한 장면.

    오브제 사용 이전에 그는 ‘74-Q’(1974)와 ‘♀+♂=0’(1974)의 평면적인 작품을 제작했다. 일루전의 허구에 대한 관심은 캔버스에 건축용 흙손을 대고 그 주변에 스프레이로 물감을 뿌려 형태를 남긴 다음 실제 흙손 손잡이를 앞에 배치해서 진짜와 가짜를 교차시킨다.

    그는 흰색의 횟가루를 가지고 강변의 포플러 나무의 그림자를 만드는 행위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횟가루 나무 그림자는 그림자를 재현한 것이라기보다는 관념적인 그림자에 불과한 것으로 당시 동년배 작가들이 관심을 가졌던 동양적 내세관 또는 피안의 세계에 대한 탐구였다.

    동양적 사유를 표현하기 위해 그는 민화와 석물, 목기와 민예품의 수집과 감상에 몰두하기도 했다. 이 분야에 대한 안목과 지식이 전문가 수준이어서 인근의 골동품상들이 작품의 진위나 가치를 물어오는 경우가 허다할 정도였다. 간혹 고향에 들르는 이우환과도 민화와 골동을 화제로 교유하면서 미학적 공감대를 형성해나갔다.

    대체된 이미지 또는 오브제로서 사물이나 그림자는 이상적인 세계와 현상적인 세계의 구분을 명백하게 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데아의 세계는 영화의 필름과 같고, 현상계는 비춰지는 영상과 같다. 여기서 박현기는 눈앞에 보이는 현세보다는 이데아의 세계, 무념무상의 초월적 세계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것이야말로 진실이고 본질이라고 믿었다. 그가 동경하는 세계는 허구와 상상의 세계가 아닌, 어떤 장치나 전제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순수하고 꾸밈없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였다.

    환영과 실재

    그는 1977년 사진관 암실의 현상용 트레이에 담긴 물을 찍은 비디오 작품을 처음 제작한다. 이 작품은 조명이 비치는 트레이에 담긴 물을 휘저어 물결을 만든 다음 천천히 원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을 반복해 보여준다. 그의 비디오는 반복을 통해 동양적 윤회사상을 표상하는 한편, 그 모습이 방영되는 TV가 다시 그 앞의 물동이에 어느 것이 본래의 이미지인지를 묻는다.

    1978년엔 일본에서 일본 비디오아트의 선구자인 야마구치 가쓰히로(山口勝弘)를 만난다. 그 인연으로 JVC로부터 기술적인 도움을 얻어 ‘ TV 어항’을 완성한다. TV 모니터의 외관이 어항이 되어 주사선을 통해 이미지가 재현되는 TV 속 물고기가 어항 속에서 유영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면서 가상의 TV 속 이미지가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이처럼 환영과 실재의 차이를 거의 완벽하게 메워준다.

    이런 착시행위를 고안해서 실재와 부재 사이의 거리를 메우는 작업은 ‘돌탑’(1978)과 그의 대표작이라 할 ‘돌탑 비디오(Video-inclining)’로 이어진다. 여기서 그는 투명한 인공 돌 대신에 모니터에 돌의 모습이 방영되는 TV를 돌 사이에 끼워놓는다. TV에 보이는 가상의 돌들이 진짜 탑의 일부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영상과 실재가 교묘하게 조합되어 일체를 이루는 작업은 1979년 서울갤러리 개인전과 앙데팡당전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호평을 얻어 1980년 파리비엔날레에 참가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의 작품에서 이미지, 즉 영상은 매우 중요하다. 실제 이미지와 그 실제 이미지를 담은 TV 속 이미지는 각각 또 다른 존재와 의미로 작용한다. 거울에 비친 물과 흐르는 강물은 서로에게 타자와 주체가 되기 때문에 실은 어느 것이 참이고 거짓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상황에 들게 된다.

    이처럼 실재와 가상의 연결과 비교를 통해 인간의 세계를 인식하는 체계를 부정하거나 그 오류를 지적하는 작업을 해오던 박현기는 비디오의 기록과 재생에 매료된다. 시차를 넘어 지난 시간을 지금 여기서 다시 재현할 수 있는 비디오는 재현된 시간과 실재의 시간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드는 좋은 도구였다.

    1981년 ‘도시를 가로지르다’는 이런 비디오의 특성을 극대화한 작품이다. 커다란 바위를 싣고 도심을 지나는 트럭과 그 트럭의 출현에 반응하는 시민의 모습을 비디오를 통해 투사하고, 투사된 이미지와 투영된 이미지의 상관성을 추적한다. 트레일러에 실린 인조 바위와 그 잘린 일부 단면에 거울을 장착해서 여기에 반영된 시민의 반응을 통해 객관적인 관계를 설정해보려는 의도를 지닌 작품으로 거울에 비치는 동시에 비디오로도 기록되고 또 이를 전시장에 전송해서 중계하는 3원 시스템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기술적 진화

    1982년엔 달성군 강정숲과 모래밭에서 ‘전달자로서의 비디오’라는 작업을 펼친다. 그가 그간 제작했던 작품을 대거 동원해 재점검하고 총체적으로 분석하고 종합하는 작업이었다. 그는 18시간 동안 자연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움직이는 행위작업을 펼친다.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고 담아낸다. 1983년 개인전에서는 관객이 주체가 되는 얼터너티브한 작업을 발표한다. 화랑 바닥에 가득 깔린 돌 사이를 관객이 거닐며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확성기를 통해 들을 수 있게 해 관객으로 하여금 익숙한 장소를 낯설게 느끼게 한다.

    그는 수화랑 개인전(1983)에 이어 ‘여기, 가마쿠라’(1985)를 통해 이런 작업을 이어간다. TV 속에 TV가 있고 또 TV 속에 똑같은 화면이 이어지는 3중의 화면은 우리가 익숙하게 인지하던 공간, 장소의 개념을 흔든다. 화면의 안과 밖을 교묘하게 중첩시켜 ‘가마쿠라’라는 단어가 지시하는 장소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런 기표와 기의의 중첩을 통해 벌어지는 의미의 복잡성은 결국 기호는 어느 것도 지시하고 한정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런 종류의 작업은 여체를 애무하는 장면이 방영되는 TV를 안고 그 TV를 애무하는 행위를 반복하는 작가의 모습에도 작용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그의 비디오는 그간의 실험과 미학을 총정리하면서 종합화한다. 기술적으로도 진화한다. 그는 빔 프로젝트를 사용해서 종합적이면서도 스케일 있는 화면으로 관객을 압도해나간다. 정적이고 선(禪)적이었던,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동시에 현상학적이고 기호학적인 그의 작업은 현실에 주목한다. 빔 프로젝터를 사용하면서 대형 이미지를 투사하는 프로젝션 작업은 ‘우울한 식탁’(1995), ‘만다라’(1997), ‘지하철에서’(1998) 등으로 나타났다.

    ‘우울한 식탁’ 연작은 목재 식탁 위에 놓인 둥근 접시에 자신의 신체를 뜬 석고상 파편들을 올려놓고 그 위에 영상을 투사한다. 이때 영상은 당시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일본의 지진,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공사장 도시가스 폭발사건 등 자연재해나 인위적 재앙인 대형사고 장면들을 편집한 것이다.

    박현기

    2008년 10월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박현기 유작전시회.

    ‘만다라’ 시리즈는 이런 작업의 완결편이다. 인간의 삶과 사회의 심각한 폭력성을 빛과 어둠의 묵직한 대비를 통해 신비화하면서 부재하는 것의 부재를 통해 유의미한 것들을 역설적으로 상상하게 한다.

    비디오로 그리는 동양화

    하지만 본시 명상적이고 조용하고 말수가 적은 그는 현실적이고 시끄럽고 복잡한 이미지들을 사용하면서도 ‘반영’이라는 주제를 지킨다. 거울에 비친 강물이 다시 강물에 비친, 그래서 어느 것이 비춘 것이고 어느 것이 비친 것인지 모를 상황을 명징하게 보여주면서 고요하게 흐르는 강물보다 더 명상적인 화면을 보여주는 ‘물결반영’(1997)을 완성한다.

    박현기
    정준모

    1957년 서울 출생

    중앙대 서양화과 졸업, 홍익대 석사 (미술학)

    現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중앙대·고려대 강사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 과학부 교수

    논문 : ‘미술품은 땅인가’ ‘제3의 미학, 새로운 출구’ ‘한국의 모던이즘, 모더니즘’ 등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원숙한 기법과 소재 선택을 통해 시대를 읽어내던 그는 갑자기 위암선고를 받고 2000년 1월 영면에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의 비디오와 함께, 작품과 함께 살아 있다. 아니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는 한국 현대미술에 개념적인 미술을 시도하고, 미니멀리즘과 동양적 사유체계를 접목시킨 독특한 미학을 구현하고자 했다. 이런 그의 노력은 이우환과의 만남을 통해 그 깊이를 더해갔다. 당대의 미술이론뿐 아니라 언어철학, 기호학, 현상학과 동양의 자연관과 노장사상, 불교의 내세관 등을 두루 섭렵하면서 자신의 작품들 속에 이를 구체화했다. 그럼으로써 서구의 비디오와는 다른 한국적 정서를 기반으로 한 자생적인 비디오아트를 완성했다.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테크놀로지가 만나 서로를 반영함으로써 ‘비디오로 그리는 동양화’를 완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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