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잘 모시지도 못하고, 마음 상하게 해드린 것 용서해주세요. 다 푸시고 편히 저세상 가세요.”
그 마지막 구절의 절절함에 둘러섰던 식구들이 감전이라도 한 듯 일제히 훌쩍이기 시작했다. 순간 엄마 얼굴에 실낱같은 경련이 스치고 지나갔다고 느낀 것은 착각이었을까.
새언니 옆에 서 있던 오빠도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연극 대사라도 읊듯 감정을 넣어 목멘 음성으로 고별인사를 했다.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어머니가 이 지경이 되실 때까지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고 불효했어요. 이제 우리들 걱정, 세상 시름 다 놓으시고 좋은 길 가세요.”
비장한 얼굴로 말을 마친 오빠는 마치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리를 숙이고 훌쩍이는 새언니를 일으켜 부축한 뒤 병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엄마의 팔에 부착된 심장박동기의 스크린은 조금도 변함없이 일정한 모양으로 그래픽을 그리고 있었다.
임종자리
그동안 콧구멍에 튜브를 넣어 위 속으로 음식물을 투여하던 것을 가족들 동의를 받아 제거한 게 사흘 전이다.
딴 정신은 없어도 몸의 고통을 느끼는 것은 조금도 둔화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누워 있는 병원이 한국에서 한동안 계시던 요양원이라고도 하고, 오래전 우리들과 살던 수원이라고도 하면서도 목구멍의 고통을 절절하게 호소하셨다. 그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회진 온 의사에게 물었다.
“이 튜브를 빼면 어떻게 됩니까.”
며칠간 입으로 아무 음식도 넘기시지를 않아 끼운 튜브라 그걸 빼버리면 굶어서 돌아가시는 것이 아닐까. 내 질문에 의사의 대답은 간단했다.
“억지로라도 잡숴야지요.”
“엄마, 죽 잡수셔야 된다는 선생님 말씀 들었지? 잡숫겠다고 약속하면 빼드릴 거야.”
엄마는 조급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서 튜브를 빼게 되었다.
엄마는 이제는 살았다는 듯이 편안해 하셨다. 그리고 처음에는 집에서 쑤어 온 죽을 입에 넣어드리면 기를 쓰고 삼키는 듯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서는 떠 넣어드린 죽을 입속에 한참을 물고 있다가 뺨을 꾹꾹 누르면 깜짝 놀란 듯 삼키곤 하셨다.
그런데 주말인 어제부터는 아무리 뺨을 꾹꾹 눌러도 삼키지를 않으니 온종일 목으로 넘긴 음식이 서너 숟가락 정도밖에 안 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세상 사는 것이 귀찮아지신 듯 온종일 눈을 감고 뜨려고 하지 않았다.
두어 시간이면 오는 거리에 살고 있지만 가게를 비울 수가 없다고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고 3주가 되도록 한 번밖에 다녀가지 않은 오빠와 동생에게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고 전화를 했었다. 임종자리만큼은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굳은 얼굴들을 하고 나타나서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병실에 들어온 후 남편인 남동생의 뒤에 숨듯이 붙어 있던 작은올케는 작은 키를 커버하기 위한 한 뼘 높이는 됨직한 하이힐을 신고 있는 것이 힘들었던지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 병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람객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50이 넘은 나이임에도 20대 때처럼 가는 허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꽉 졸라맨 허리께가 꼿꼿하게 앉아 있는 그 자세가 내 눈에 경이롭게 들어왔다. 남이라면 부러웠을 그 가느다란 허리가 새삼스럽게 징그럽게 느껴지는 것은 작은올케에 대한 내 감정이 애초에 끔찍할 만큼 고약한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병실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엄마 곁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그래도 손위 시누이인데 눈길 한 번 주고 고개 한 번 까딱하는 것으로 인사치레를 했다고 생각하는지 이후 내내 표정 한 번 바꾸지 않고 앉아 있었다. 남동생은 그 옆 벽에 기대서서 어둠에 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밖을 바라보는 듯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올케의 눈치가 보이는지 초조한 기색이 얼굴에 번지기 시작했다.
하이힐 소리
“당신 시장할 텐데 나가서 식사를 하고 오는 게 어떻겠소?”
그렇게 말하는 남편의 초췌한 얼굴을 보며 벽시계를 보니 벌써 10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나야 이것저것 주워 먹어서 크게 시장기를 느끼지 못했으나 하루 종일 일하고 온 남편은 피곤하고 배가 고픈 것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내 친정어머니 곁에 앉아 있느라고 남편 저녁까지 굶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 언제까지 기다리고 앉아 있을 수만도 없었다.
“너희들 저녁은 먹었니?”
나는 남편의 말에 답하는 대신 동생에게 물었다.
“아니, 아직….”
남동생이 또 올케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그럼 매형이랑 가서 먹고 와. 나는 좀 먹었어.”
“금방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으니 같이 가서 먹읍시다. 밤샘할 생각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남편이 동생하고만 가는 게 마음에 안 내키는지, 나만 놔두고 가서 먹고 싶지 않은지 내게 재촉했다. 나만 떼어놓고 가서 먹을 생각은 전혀 없는 기색이었다.
“그럴까.”
언제 숨을 거두실지 모르는 엄마 곁에 한없이 앉아 있는 것도, 또 그 곁을 잠시라도 비우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 2~3주 동안 식사다운 식사를 제대로 못한 처지여서인지 어느 맛있는 식당에 가서 잘 먹고 싶은 욕망도 뿌리치기 힘들었다.
엄마가 언제 마지막 숨을 내쉴지 모르는 판국에서도 입속에는 맛있는 음식을 향한 열망으로 침이 고였다. 먹는 일은 사람을 가장 치사하게 만든다던가. 단호하게 권하는 남편이 고맙기까지 한 나는 의자에서 일어서며 깊은 잠이 드신 것인지 혼미 상태에 계신지 알 수 없는 평안한 얼굴로 조용한 호흡을 계속하고 계신 엄마를 살피며 말했다.
“엄마, 나 저녁 먹고 올 테니까 그때까지 혼자 가버리지 말고 쉬고 있어. 응? 어디 혼자 가면 안 돼. 알았지? 나도 배가 고프지만 종수랑 정 서방도 아직 저녁을 못 먹었어.”
아무 대답도 없으시지만 엄마도 우리가 배를 곯으면서 곁에 앉아 있는 것을 절대 원치 않으실 것이다. 담당 간호사에게 식사를 해야 하는데 한 시간만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는지 물으니 당연한 듯 “슈어” 하고 대답한다.
오빠 내외는 어디로 갔는지 복도에도 밖에도 보이지 않았다.
동생 내외와 우리 네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메인 로비를 지나 주차장으로 나왔다. 발딱 일어나 제 남편 옆에 딱 붙어 걷는 올케의 따박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내 머릿속을 예리하게 찔러댔다.
“어머니는 좀 어떠세요?”
나는 남편에게 인사말처럼 생각난 듯 물었다.
“아, 별일 없으셔. 저녁 잡숫는 것 보고 나왔으니까 지금은 잠드셨을 거야.”
“유노 인슐린도 잊지 않았지요?”
“응.”
집에는 시어머니와 딸 유노가 이미 깊은 잠에 들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법을 어기고 있는 중이다. 이 두 사람만 집에 놔두고 우리 둘이 다 나와 있으면 안 된다. 우리 둘 중 하나가 이 두 사람 옆에 있어야 하는 것이 법이다.
30년 전, 결혼 후 남편과 미국으로 오던 다음해 한국에 혼자 남아 계시던 시어머니를 모시고 오게 되었다. 내가 남편과 만나 결혼을 결정할 때 시어머니를 우리가 평생 모시고 살아야 된다는 것은 당연 그 이상의 의무였다. 스물두 살에 청상과부가 되어 달랑 하나 키운 아들이 내 남편이다.
시어머니
시어머니는 우리를 미국으로 떠나보내던 해 어느 추운 겨울밤,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다가 기적같이 살아나셨다. 그리고 거의 1년 이상 병원과 재활원을 오가며 끈질기게 삶의 줄을 놓지 않으셨다. 부축을 안 받아도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있고 화장실 출입도 제대로 하게 되었을 때 줄곧 한국을 오가며 어머니를 보살피던 남편이 모시고 들어왔다.
시어머니는 내가 한국을 떠날 때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의 훈육부장같이 무섭고 당당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주눅 든 어린애같이 얼이 빠져서 아들인 남편 옆을 잠시도 떠나지 않으려 했다. 몇 달 동안 헤매던 사경에서 소생하실 때 같이 소생하지 못한 두뇌의 어떤 부분이 시어머니를 멍청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결혼 초 나를 노상 긴장하게 만들던, 명석한 변호사 못지않던 언변은 어눌해졌고, 예리한 눈빛은 흐리멍텅해졌다. 또한 냄새나 음식 맛을 못 느껴 차려주는 밥상의 음식을 쓴지 단지 모르고 그냥 씹어 삼키기만 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라는 네 가지 감정인 희로애락 가운데 애락은 사라지고 단지 희로의 표현만이 기복 심하게 오르내렸다.
하지만 소아당뇨에 장애자인 유노를 위해서는 무조건의 사랑으로 감쌌다. 왜 유노에게 그 좋아하는 단것들을 못 주게 하는지 아무리 설명해도 시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엔 크고 작은 분란이 일기도 했지만 그것이 유노에게 얼마나 나쁜 것인지 파악한 듯 이제는 단것만 보면 유노에게 안 돼, 안 돼 하며 주의를 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우리 집은 주부인 내가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장애자인 딸을 돌보며 사는 평화로운 집인 것이다.
온전하지 못한 노인으로 타운에 등록되어 있는 시어머니로서는 ‘다운 신드롬 장애자’인 손녀를 법적으로 보호해줄 수가 없었다. 만약 두 사람만 집에 있을 때 타운의 감독관이 알게 된다면 즉시 담당관의 관할 아래 분리조치 당하고 보호자인 나와 남편은 형사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 여기 법이다.
아주 오래전 유노를 시어머니에게 잠깐 맡기고 시장에 간 사이, 유노가 혼자 밖에 나갔다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이웃집에서 보고 경찰에 신고한 일이 있다. 시어머니가 유노의 외출을 알아차리고 온힘을 다해 붙잡았더라도 유노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때 타운재판소에 몇 번이나 불려 다니면서 시어머니도 장애자로 분류돼 경고처분을 받았다.
다시 어머니와 유노만 집에 두고 나갔다가 적발되면 나는 아마 수갑을 차고 감옥에 가야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친정엄마의 임종을 기다리다가 배가 고파서 밥을 먹으러 가야 하는 나는 어느 우주에 살고 있는 사람일까.
조금 떨어진 뒤에서 아스팔트를 울리는, 올케의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내 두뇌 속의 신경을 몹시도 자극했다. 나는 엎드려 풀어진 운동화 끈을 다시 맸다. 30년간 미국에 살면서 달리기 선수처럼 운동화만 신고 살아온 세월. 오래전에 나도 또각거리는 하이힐을 신고 거리를 활보하던 시절이 있지 않았던가.
친정어머니
젊었을 적 엄마는 천하에 무서운 것이 없고 어려운 것 모르고 매사에 똑 부러진 성격이셨다. 동네에 무슨 일이 생기면 재판장처럼 쓰윽 나서서 해결하시던 어른이신 엄마가 사위인 남편이 어려워 눈치를 보신다는 것을 안 것은 이번에 다시 함께 살기 시작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였다.
보통 장모가 사위에게 하는 ‘하게’ 소리도 못하고 반쯤 경어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60세가 넘은 사위의 집에서 살게 된 처지라 어려워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당신의 장대 같은 두 아들 집을 곁에 두고 90세 된 시어머니를 모시고 온전하지 못한 딸과 부대끼며 사는 딸에게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주눅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미국에 오셔서 오빠 집으로 가시기 전의 당당했던 처신을 생각하면 그 몇 달 동안 엄마가 처했던 불행의 늪이 얼마나 깊었던지는 입을 꾹 닫아버린 엄마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만했다.
전에도 물론 딱 부러지게 ‘하게’를 하지는 않았지만 이번에 오셔서는 출근하는 사위에게 딴 일을 하다가도 지팡이를 휘두르며 달려와 ‘잘 다녀오시라’는 인사를 공손하게, 단지 허리만 굽히지 않고 조아리는 것이었다. 그것이 나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그렇게 된 엄마가 불쌍하고 서러워서 나는 엄마에게 모질게 퍼부었다.
“엄마, 딸자식도 자식이야. 나는 시어머니를 30년 모시고 살고 있어. 엄마는 딸집에서 당당히 살 권리와 자격이 있어. 왜 그렇게 눈치를 보고 그래?”
“누가 눈치를 본다고 그러냐?”
그렇게 자신없게 말하며 엄마는 시어머니 눈치를 살폈다.
엄마의 생년월일과 시어머니의 생년월일을 대조해보면 엄마가 꼭 3개월 빠르다. 엄마 얘기로는 그 옛날 태어났을 때 하도 골골해서 출생신고를 했다가 죽으면 번잡하니까 2년이나 기다리다 다행히 살아남아 그제서야 출생신고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실은 두 살이 더 위라고 하셨다.
누가 세상을 더 오래 살았는지는 따져볼 필요도 없었다. 어느 날 미리 연락도 없이 사돈청년이 차에 싣고 와서 거실에 짐짝처럼 부리고 간, 거동이 불편한 사부인이 평생 아들집을 떠나본 적 없는 시어머니의 기득권을 감히 넘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서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엄마도 거동이 불편하지만 그래도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서 당신의 몸을 추스를 수는 있었다. 그래서 거실에 앉아 있는 엄마를 처음 봤을 때의 놀라고 당혹스러웠던 기억은 그대로 남았다 하더라도 그냥 그렇게 함께 살아도 무방할 것이라는 계산이 체념과 같이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89세의 동갑내기 사돈인 시어머니와 엄마, 그리고 스물아홉 살이지만 정신연령은 서너 살밖에는 안 되는 딸. 유노.
엄마의 자존심
엄마는 오빠와 나, 그리고 남동생 이렇게 삼남매를 혼자 키우셨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아버지는 세상을 일찍 떠나셨다. 엄마는 눈물과 땀을 흘리면서 아마 이를 악물고 사셨을 것이다.
호강은 못했지만 홀어머니 밑에서 우리 삼남매는 학교 납부금 걱정 같은 것은 모른 채 모두 대학을 나와 결혼한 후 나를 선두로 하나씩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엄마는 자녀들을 모두 미국으로 떠나보낸 채 혼자 사셨다. 그리고 더 이상 혼자 몸을 움직여 장사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당신이 판단을 내리신 여든 살 되던 해 50년간 살던 집을 팔고 그 돈을 사립 양로원에 맡기고 몸을 그곳에 의탁하셨다.
“나는 절대로 너희들 신세는 안 지고 산다. 이제 이곳에서 살다가 죽으면 된다.”
엄마는 남자로 태어났으면 장군이 되어 싸움터에서 누구보다도 앞서서 적진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졸병을 앞세우고 뒤에서 우물거리는 장군이 아닐 것이다.
사실 엄마의 계획은 큰 차질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그냥 경기도 수원 근교의 양로원에서 멀리 가 있는 자식들 그리워하면서 명이 다할 때까지 사셨다면 서로가 좋았을지도 몰랐다.
엄마는 그때까지 근력이 아주 좋았던지 양로원에서 제공되는 식사만 받아먹으며 같은 노인들끼리 하루하루 축내며 지내기에는 아직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멀든 가깝든 연락이 닿는 일가들을 버스를 타고 찾아다니며 환영을 받지 못하는 대신 밥도 사주고 몇푼 용돈도 아이들에게 쥐어주며 외로움을 달래며 지냈다.
그런데 만나는 친척마다 아들딸이 미국에 가서 잘살고 있는데 왜 여기서 이렇게 외롭게 지내느냐고, 미국에 가시라고 위해주는 듯이 한마디씩 하더니 점점 반강제적으로 아들에게 가라고 떠밀다시피 하기 시작했다. 잘못하다가는 자식들 없는 땅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들이 장례라도 치르게 될까 부담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엄마는 아무리 자식들이 다 와서 살고 있어도 미국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으셨다. 엄마에게 미국은 살 곳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탓이기도 했다.
15년쯤 전이었다. 엄마가 일흔 되던 해 내가 엄마를 초청해서 우리 집에 오셨다. 그때 꼭 한 달 머물고는 미국은 살 곳이 못된다고 선언하고는 들고 온 옷보따리를 단단히 싸놓고는 당장 보내달라고 하셨다. 하긴 엄마가 오시기 전에는 그런대로 계획을 좀 세웠었다. 그런데 유노의 발가락에 염증이 생긴 일과 시어머니의 발병으로 (의사는 신경성 위염이라고 했다) 단 하루도 자유롭게 집 밖에 나갈 수 없었다.
원래는 나도 아직 못 가본 나이애가라 폭포도 그 참에 가보고, 멀리서만 본 자유의 여신상에도 올라가보려고 계획을 했는데 결국은 동네 그로서리와 한국 식품점에 두 번 간 것이 엄마의 한 달 미국 방문 일정의 전부였다. 아, 그리고 내가 나가는 교회에 하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구경 삼아 주일마다 따라 나서기도 했으니까 미국에 와서 미국사람보다는 한국사람 얼굴만 보았다고 해도 되었다.
“미국 구경 잘 했으니 이젠 가야겠다.”
엄마는 일부러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이 빈정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엄마 성격에 내가 살고 있는 꼴을 더 이상 봐줄 수 없었을 것이다.
15년 만의 재회
그때, 그러니까 엄마의 손녀딸인 열다섯 살이지만 정신연령은 두세 살 정도인 유노와, 일흔 살을 넘어 살면서도 철부지 아이 같은 시어머니와 보대끼며 사는 딸을 보는 것은 하루하루가 형벌의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유노는 선천적 소아당뇨 환자로 당수치가 하루에도 몇 번씩 올랐다 내렸다가 극에서 극이었다. 그래서 하루 다섯 번씩 정확하게 피 검사를 하여 그 수치를 보면서 인슐린을 투여해야만 했다.
새벽에 출근해 밤늦게야 퇴근해 오는 남편이 도와줄 수 있는 일도, 어눌한 시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도 더더욱 아니었다. 나는 유노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어야 했다, 24시간을.
15년 만에 만난 엄마였지만 온전치 못한 시어머니랑 애물단지 같은 딸을 끼고 사는 자신의 딸이 한심하고 보기 싫으셨을 것이다. 엄마의 확고한 고집은 그 살아온 에너지이기도 했다.
“엄마 이렇게 가버리면 나랑 다시는 안 볼 거야?”
나는 사정하고 협박했지만 남은 것은 화나고 속상한 채 엄마를 공항에 바래다주고 돌아와야 하는 일뿐이었다. 속으로는 엄마를 모셔다놓고 한동안 계시게 하면서 잠깐씩 유노를 맡겨놓고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맨해튼의 뮤지컬 구경이라도 할 꿈을 꿨었는지도 모른다. 참으로 황당한 꿈이기도 했다.
그런데 15년이 지난 2년 전, 수원 양로원 생활을 청산하고 너희들 있는 미국으로 가겠노라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워싱턴에 살고 있는 오빠 집에 갈 것인즉 일단 뉴욕에 가서 며칠 네 얼굴이나 보고 가겠노라는 통고였다. 나는 엄마가 보고 싶었다. 반가웠다.
“엄마, 잘됐어. 이제는 미국서 우리들하고 살아. 워싱턴은 자동차로 달려도 너댓 시간이면 되니까 왔다갔다하면서 살지 뭐.”
그런데 엄마가 미국에 오시기 며칠 전 워싱턴 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집을 새로 공사하고 있는데 엄마가 오시면 계시기가 불편할 테니 집 공사가 끝날 때까지 우리 집에 계셔야 되겠다는 내용이었다.
JFK 공항에 내린 엄마는 15년 전,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는 선언을 하고 찬 바람나게 평생을 지탱하고 온 당당한 몸집을 휘두르며 떠날 때와는 사뭇 달랐다. 맥 빠지고 기가 죽어 보호자가 필요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15년이 훑어간 노인의 외모는 그가 어떻게 한세월을 살아왔는지와는 상관없이 몹시 낡고 허술해지고 바삭거리는 소리가 들리지나 않을까 싶을 만큼 앙상해 보였다.
그래도 미국에 간다고 미장원에 가서 파마라는 것을 바로 얼마 전에 한 듯 티가 났는데 머리 가죽이 반짝이며 훤히 들여다보이는 성긴 머리칼은 지나치게 까만색으로 염색하고 충실하게 고불거리면서 손님처럼 머리 위에 어색하게 얹혀 있었다.
말동무
엄마는 15년 만에 만난 딸인 나에게 한 뼘 정도 줄어든 작아진 키로 자신의 여행 스케줄을 설명했다.
“사부인도 계시고 한데 미국 땅에 오면서 인사를 드리고 가야 될 것 같아 네게 먼저 들렀다. 일주일 정도 있다가 오빠 집으로 갈 테니 그리 알아라.”
그 말끝에는 아들의 집에 가기 전 딸의 집에는 마치 아량이라도 베푸는 마음으로 들러 가노라는 당당한 자존심이 묻어 있었다.
“엄마, 오빠네가 집수리 한다니까 다 끝날 때까지 우리 집에서 나랑 같이 지내.”
“집수리 하는 데 일주일이면 됐지, 뭐 집을 짓기라도 한다던?”
몸은 나이를 먹으며 변해도 성격은 전혀 나이를 먹는 기색이 없는 것이 희한했다. 엄마의 말 끄트머리에 어쩐지 다급한 처량함이 묻어 있는 것은 오빠가 엄마에게 집수리가 끝날 때까지 우리 집에 계시라고 일러놓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집수리 한다는 것이 어디 옛날처럼 미장이 불러 아궁이 고치는 일처럼 뚝딱 하루 이틀에 끝나는 일이 아님을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을 것이었다. 사부인께 인사 겸 우리 집에 일주일만 있다가 워싱턴의 오빠 집으로 가겠다던 엄마의 계획은 자꾸만 어긋나 우리 집에서 1년을 함께 사셨다. 집수리가 끝없이 연장되는 동안 엄마가 온 후 처음 한두 달은 오빠에게서 일주일에 한번 정도 전화가 걸려 왔다.
그 이유라는 것을 따지기 시작한다면 아마 집 한 채 거뜬히 지을 수도 있을 집수리 전문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 한동안의 구구한 설명은 엄마를 즉시 모시고 갈 수 없는,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이유가 있음직한 냄새가 났다. 엄마 말처럼 대궐을 새로 지어도 그렇게 세월을 잡아먹지는 않을 터였다. 그래도 그렇게 지낸 1년의 세월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정신이 또렷하지는 않아도 사리판단을 할 수 있는 정신 한 가닥을 놓치지 않고 잡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 분출하지 못하며 가두어두었던 당신의 인간적인 본능을 껄끄러운 사돈관계보다는 오히려 오랜 친구 같은 쪽으로 받아들여 오순도순 말동무 상대로 정답게 지내기조차 했다.
두 노인이 조근조근 대화를 나누는데 슬쩍 들어보면 1960년대 상영됐던 영화와 출연배우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했다.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다. 게다가 레퍼토리도 다양해서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에서부터 벤허에 이르기까지 두 노인의 문화적 수준이 한때 대단했었음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이따금 엄마의 종잡을 수 없는 언행은 노망이라고 하는 치매증상으로 봐야 할지 노인 특유의 변덕으로 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때로 엄마는 한국에서 보낸 한평생을 접고 미국 땅에 와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듯 느닷없이 순천에 사는 작은고모 집에 좀 다녀와야겠다며 버스시간을 알아봐달라고 하기도 하고 교회에 가도 왜 하나님이 안 보이느냐고 하기도 했다. 그러고는 냉큼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하고는 머리를 흔들어 자신의 정신이 아직은 건재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 깊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아픔은 딸인 나에게조차 마음 문을 철저하게 닫아걸고 내보이지 않았다.
6개의 눈동자
단지 두 노인이 공유하는 유일한 아픔이며 한숨의 대상인 유노에게 향한 끔찍한 애정은 서로를 질투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른의 몸에 아기의 두뇌를 가진 유노는 두 노인이 자신에게 보내는 무분별한 사랑을 감지해내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고는 교묘하게 두 노인을 이용해서 제 목적을 이루는 기지도 발휘했다.
내가 잠시라도 곁에 없을 때면 저 혼자 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아온 일들을 두 노인에게 시켰다. 그럴 때는 두 노인이 서로 그 일을 해주려고 앞 다퉈 내달렸다.
엄마는 스스로 이 두 사람의 보호자가 되었다. 오빠가 한 달에 한 번밖에 전화를 안 해도 별 상관이 없었다.
두 노인은 모두 일찍 남편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자식들과 억척스럽게 살아낸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런 삶을 산 사람들의 공통점은 다른 사람들(가족에 이르기까지)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것이다. 두 노인에게서 그런 점을 볼 수 있었다.
남을 배려하려다가 내가 손해를 볼지도 모른다는, 남편 없이 자식을 데리고 살아온 사람만의 억척스러운 계산이 무의식적으로 내면에 깔려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려운 시절을 혼자 힘으로 자식 키워낸 한국 여인네들은 얼마나 장했던 것일까.
그런데 딱한 것은 어느덧 힘없고 쪼글거리는 노인이 되어서도 그 억척스러움은 늙지 않고 고집과 심술로 뭉쳐져서 자신의 의지로 단단하게 자리 잡아 누구와도 타협하려고 하지 않고 마음을 열지 않는다. 어긋나면 대번에 토라져 마음의 문을 걸어 닫는 것이었다.
옛말에 복 받으려면 곱게 늙으라는 말이 있다. 나는 얼마나 많은 순간을 곱게 늙는다는 의미를 곱씹어보았는지 모른다. 그 말은 나이에서 오는 주름과 처지는 피부를 성형수술로 고치고 분을 두들겨 발라서 곱게 보이게 하라는 뜻은 아닐 것이었다.
똘똘 뭉쳐 있는 고집을 풀어버리고 남을 배려하고 두 손을 펴 사랑하고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 곱게 늙는다는 뜻이라고 나는 해석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는 엄마의 당당함을 다소곳이 받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큰아들말고 작은아들 하나가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것에 거의 존경하는 마음까지 보내고 있었다. 엄마가 아직 남동생의 집에 갈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올케인 작은며느리와의 사이가 별로 탄탄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나는 엄마 덕에 슬금슬금 그동안 못해보던 백화점 세일도 찾아다녀보고 교회 여성회에서 가는 맨해튼의 단체 미술관 탐방에 따라가보기도 했다.
그렇게 어쩌다 몇 시간 비우고 집에 들어갈 때면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거실 유리창으로 밖을 내다보는 세 사람의 얼굴이 멀리서부터 보였다. 염색체 속에 한 개의 유전인자를 더 가지고 있다는 유노, 연탄가스 중독으로 두뇌 어느 부분이 마비돼버린 시어머니, 고집과 노망의 변경을 드나드는 엄마. 이 세 사람의 여섯 개 눈동자는 한결같이 내가 돌아오는 것을 보기 위하여 눈을 빛내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남편이 직장으로 나가고 나면 하루 온종일 여섯 개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부지런히 세 사람에게 소일거리를 만들어주어야 했다. 시어머니가 좋아하는 일은 콩나물이나 채소 다듬기였다. 한다발 가득 담아주면 온종일 걸려 다듬어내곤 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항상 유노에게 고정되어 있다.
엄마는 뒷마당에 가꾸어놓은 작은 채소밭을 일구는 일과 한국 비디오테이프를 틀어놓고 보고 또 보는 일, 그리고 유노는 TV 앞에 꼭 붙어 앉아 채널을 돌려가며 레슬링 하는 것과 만화를 지치지도 않고 보는 일이었다.
시원섭섭함의 의미
질식할 것 같은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그나마 아슬아슬한 사건들로 긴장하고 신경이 곤두서는 일이 때로 삶에 탄력을 주기도 하였다.
유노의 당뇨는 종잡을 수가 없어 케이크 한쪽 혹은 아이스크림 몇 스푼이라도 먹게 되면 치명적일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그런 맛있는 먹을 것이 전혀 없다.
그런데 어느 날 일이 터진 것이다. 엄마의 친구 딸이란 분이 인사차 찾아오면서 케이크 한 상자를 사온 것을 유노가 제 방에 가지고 들어가 마음껏 먹은 것이다. 앰뷸런스에 실려가 난리를 치고 간신히 목숨을 건져 퇴원해 돌아오는 것을 질린 얼굴로 보던 엄마는 말없이 보따리를 쌌다.
“오빠에게 전화해서 나 지금 데려가라고 해라.”
그때쯤 해서 오빠는 엄마가 아마 우리 집에 눌러 살기로 작정을 하셨나 보다 하고 안심하고 있었는지 집수리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그래도 의무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지 이따금 전화만 걸어오는 터였다.
엄마의 고집은 전혀 노쇠하지 않은 것을 나는 안다.
“오빠. 엄마가 오빠한테 가시겠다는데 어쩔까, 괜찮겠어?”
엄마가 아들 집에 가신다는데 내가 왜 조심스러워지는 것일까. 오빠가 괜찮지 않아야 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전화를 걸면서 나는 짜증스러웠다.
“그러지 뭐, 무슨 일이 있었니?”
오빠는 맥 빠진 목소리로 맥 빠진 질문을 하고 있었다.
“엄마가 자기 아들 집에 가고 싶어서 가신다는데 무슨 일이 있느냐는 것은 뭐야?”
나는 옆에 나만 바라보는 눈들이 있다는 것을 잊은 채 소리를 버럭 질렀다. 옆에 새언니가 있는 것이 신경이 쓰이는지 훨씬 작은 목소리로 오빠는 얼른 대답했다.
“응. 내가 날짜랑 시간 보아서 다시 전화할게.”
그러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
“왜, 집수리가 아직 안 끝났다든? 안 끝났어도 간다고 그래라.”
엄마는 비장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엄마는 워싱턴에서 차를 몰고 온 오빠의 차를 타고 사돈인 시어머니에게 거만하게 작별을 고한 후 떠나가셨다.
그것이 1년 전. 한국에서 일주일 있을 예정으로 우리 집에 오신 지 1년을 꽉 채운 때였다. 나는 시원섭섭하다는 말을 그때 뼛속 깊이 체험했다.
그렇게 오빠 집으로 떠난 엄마와의 첫 전화 통화는 경쾌했다.
“집도 엄청 크고 마당에는 연못도 있다. 그리고 내 방도 따로 있어.”
우리 집에 있을 때 엄마는 층계를 오르내리기가 힘들어 아래층의 패밀리 룸에서 시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엄마 좋겠수.”
“그래.”
그런데 그 경쾌한 목소리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한 달 만에 시큰둥한 목소리로 변했다.
“어디 사람 그리워서 살겠냐. 애들은 다 나가서 살고 두 사람은 새벽같이 나갔다가 한밤중에 들어오니 온종일 창밖만 보면서 지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밥 한 끼 마주 보고 앉아 먹는 일도 없이 따악 차려놓고 나가면 혼자서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까지 혼자 먹는다.”
“수원으로 보내달라”
갈수록 더해가는 엄마의 넋두리는 불쌍하고 답답하기만 해 전화기 드는 것조차 망설여지는 어느 날, 통 연락 없이 지내던 남동생 종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엄마가 오빠 집으로 가신 후 한 석 달쯤 되었을 때다.
“엄마를 한국에 다시 보내드려야겠어.”
“갑자기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지금 엄마가 우리 집에 계신데 수원으로 가시겠대.”
엄마가 지금 종수 집에 계시다는 것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남동생은 두 시간쯤 떨어진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다.
“너희 집에는 언제 왜 가셨니?”
나는 정신이 제대로 안 들어 닥치는 대로 물었다.
사연은 이랬다. 엄마는 종수와 어찌어찌 전화 연락이 되었다. 그리고 오빠 집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쓸쓸하고 고통스러운지를 낱낱이 고하고 잠시라도 너를 보면 한이 없겠노라고 하소연을 했다.
작은며느리인 올케와는 쉽게 말해서 서로 안 보고 사는 사이다. 처음 결혼하겠다고 올케를 데리고 왔을 때 엄마의 눈에 도무지 마땅치 않았던 모양이다.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 나는 모른다.
모두들 입을 꾸욱 다물고 있고 나도 신혼 때 시어머니(연탄가스 중독 전이니까) 맛을 오지게 본 터라 시어머니인 엄마에게 갖는 올케의 감정을 조금은 이해해주는 아량이 있다. 그런데 두 사람 다 얼마나 지독한지 정말 안 보고 사는 사이로 30년 가까이 살고 있는 것이다.
종수가 지지리 못나서 그런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나 역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니까 남편의 처지를 생각 안 해줄 수 없어 그저 너무 착해서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그리고 나 살아가는 길이 너무 고달프다 보니 세상 보는 눈이 오대양만큼이나 넓고 넉넉해진 터인지도 모른다.
종수의 말에 의하면 매일 일터로 집으로 한밤중에까지도 전화로 하소연을 하는 것이 마음이 안 좋아 워싱턴에 가서 엄마를 모시고 저희 집에 온 것이 일주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생겨 다시 형님 집으로 가시자고 하니까 막무가내로 거길 가려거든 차라리 수원으로 보내달라면서 꿈쩍도 안 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원에 가시게 하면 어떻겠는지 의논하려고 전화했다는 것이다.
나는 전화통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수원에는 지금 남아 있는 친척도 하나 없는데 엄마 보고 혼자 비행기 타고 가서 택시 불러 타고 전에 계시던 양로원으로 가시라고 할 거니? 그 양로원인들 엄마를 그냥 받아주니? 그럴 테면 우리 집으로 모시고 오든지.”
나의 고함소리에 놀랐는지 종수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차마 누나 집에 모시고 가겠다고 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노인이며 어린아이 같은 시어머니와 어른이면서도 아기 같은 유노를 보며 터질 것 같은 가슴의 통증을 삼키며 한숨을 죽였다.
닮은 점, 다른 점
다음날 베이비시터에게 두 사람을 맡겨놓고 교회에 갔다 오니 엄마가 마치 나들이라도 다녀온 듯 거실 소파에 앉아 계셨다. 그 옆에 시어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엄마. 잘 왔어. 이제 여기서 아무 말 말고 나랑 살어.”
나는 모든 식구에게 들으라는 듯 커다란 소리로 말했다.
다시 우리 식구로 돌아온 엄마는 석 달 전 오빠한테로 떠날 때의 엄마가 아니었다. 오빠에게 가기 전 담당했던 보호자의 자리를 사양하고 자신이 보호받아야 할 사람으로 자리를 옮긴 듯 멍하니 넋을 잃은 사람이 되어갔다.
그러면서 사위인 남편을 어려워하면서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다리가 안 좋아 전부터 예비용 지팡이를 가지고는 있었으나 별로 쓰지 않았는데 이제는 손에 달고 살았다. 두어 걸음 떨어진 화장실과 부엌을 오가면서도 지팡이에 의지하고 때로는 시어머니가 부축해서 다니기도 했다.
어느 날 나는 궁금해서 종수 집에 가셨을 때 작은며느리가 잘해주더냐고 물었다. 내 말에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던 엄마는 눈을 차악 내리깔더니 간단히 대답했다.
“한 번도 못 봤다.”
“못 봤다니? 종수처가 집에 없더라고?”
엄마는 또다시 입을 다물고 다시는 열지 않았다. 그 후로 내가 알아본 바로는 그 고부지간은 역시 서로 안 보고 사는 사이임에 변화가 없었다. 올케를 열흘간 교회에서 가는 성지순례에 보낸 후 동생이 엄마를 모셔다놓고 있다가 올케가 여행에서 돌아올 때가 되니까 우리 집으로 모시고 오게 된 사연이었다. 그래도 착한 아들이라고 가상하게 여겨야 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혼자 남아 편하기도 하고 조금 외롭기도 했을 시어머니와 엄마의 재회는 시어머니의 환영사로 시작되었다. 한마디뿐이었지만 그 말을 하기 위해 시어머니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아는 나는 눈물이 찔끔 나오려고 했다.
“사부이인, 이제 여기이에서 저와 하암께 가아치 사시입시이다. 어어디 가알 새앵가악 하아지 마알구요오.”
나는 방문 밖에서 들었기 때문에 엄마를 볼 수 없었지만 아마 감동의 눈물을 흘리셨을 것이다.
그러고 난 후, 두 사돈끼리 오랫동안 즐겁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가 아니고 2~3주 지나서부터 두 분 사이가 삐걱거리는 눈치가 보였다. 두 노인이 아무리 일찍 과부가 되어 억척스럽게 살아온 공통의 과거가 있다고 하지만 성격이 너무나 달랐다.
시어머니는 쌀 한 줌이 있으면 내일과 그 다음날이 걱정스러워 죽을 쑤고 둘로 나누고 그걸 또 나눠서 아끼며 먹는 성품이다. 엄마는 일단 오늘 먹을 것은 오늘 먹고 내일은 또 내일 해결하면 된다는 성격이다. 극과 극이다.
시어머니가 절대로 봐줄 수 없는 것은 낭비다. 온전하지 못한 정신상태라고는 하지만 물을 틀어놓고 설거지를 한다거나 전깃불을 켜놓은 채 방에서 나간다든지 하는 일은 우리 집에서는 절대 용납되지 않았다. 나도 오랜 세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그 철칙만큼은 지켰다. 1분 후에 다시 켜더라도 방을 뜰 때는 반드시 전기 스위치를 내리면서 살았다.
“사아부우이인. 지이바알 벼언소 부울 조옴 끄세에요오.”
“아니 내가 언제 켰다고 그러십니까.”
조곤조곤 하던 목소리는 그런 신경전이 벌어질 때마다 볼륨이 올라갔다.
다른 행성에 사는 사람들
어느 날이었다. 엄마가 다시 오신 후 한 2개월쯤 되었을까. 두 분의 방에서 엄마의 역정 섞인 목소리가 2층의 내게까지 들려왔다. 내려가서 보니 등을 돌리고 앉은 두 노인 사이에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엄마가 나를 흘끗 보더니 분해서 목소리까지 떨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글쎄 얼마 전부터 이따금 변소물이 잘 안 내려간다고 나를 의심하더니 저 봐라, 사람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휴지를 손바닥만하게 잘라놓고는 고걸 한 개씩만 쓰라는 거야. 내가 휴지를 너무 많이 써서 변기가 막힌다는 거야. 나도 한국에서 수세식 변소 쓰다가 온 사람이다. 어디서 사람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시어머니는 손에 손바닥만큼의 크기로 잘라 차곡차곡 접은 휴지를 들고 있었다. 흘겨보는 엄마의 눈초리에 시어머니는 잠깐 기가 질린 듯했으나 이 분도 그냥 넘어갈 분이 아니다. 제대로 표현할 수만 있었다면 구구절절 옳은 말씀으로 몇 시간은 끄떡없으실 테지만 가련하게도 그것은 생각뿐인 것이 이런 싸움에는 다행일지도 몰랐다.
“사부우인 오시인 후부우터 자아꾸 벼언소가 마아켜서.”
그러니 틀림없이 사부인이 휴지를 펑펑 쓰니까 변기가 막힌다는 결론이다.
비교적 넓은 아래층 패밀리 룸 양쪽 벽에 붙여놓은 각자의 침대에서 골이 난 두 노인은 서로 등을 돌리고 냉전을 계속했다. 엄마가 얌전하게 잘라놓은 손바닥만한 휴지를 사용하고 있는지 나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변기가 막힌다는 소동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시어머니의 감독이 철저한 듯했다.
한 지붕 아래 사는 한 가족이 제 각기 다른 행성에서 떨어져 나와 여지껏 살아온 길이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우리 집같이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진 집이 얼마나 있을까.
특수학교에 다닌다고는 하지만 면역력이 떨어지는 유노는 노상 감기나 신체 어딘가에 염증이 생겨 반 이상은 집에 있거나 병원으로 실려 가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집 안에서는 휴지나 전깃불 끄고 켜는 일 또는 창문을 여느냐 닫느냐 하는 등등의 문제로 분개하고 삐쳐서 온몸을 떠는 두 노인.
그래도 따스한 햇볕이 방 안을 적시고 꽃피고 새 지저귀는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 봄날 아침, “우리 두 어머니 모시고 식물원에나 갔다 옵시다.” 남편이 바람을 넣었다.
나는 그런 남편을 존경한다. 이렇게 착하고 어진 남편이 옆에서 묵묵히 용기를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살아올 수 있었을까. 이 뉴스는 곧장 두 노인에게 전해졌다.
나는 두 노인의 눈에서 똑같이 반짝하는 빛을 보았다. 그리고 서로 마주 보고 웃는 것도. 두 노인의 얼굴에 분홍빛 색채가 떠오르더니 엄청난 속도로 나들이 채비가 챙겨졌다.
엄마는 싸가지고 와서 한 번도 목에 걸어본 적이 없는 (걸고 갈 곳이 없으니까) 빨간 우단 상자에 들어 있는 진주 목걸이를 목에 걸고 흰 티셔츠에 분홍바지, 그리고 분홍 줄무늬 재킷을 처억 걸치고 지팡이를 조심스럽게 챙겨 들고 나타났다.
시어머니도 질세라 회색 주름 스커트에 분홍과 초록 꽃무늬가 있는 상의를 걸치고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짐작도 안 가는 가짜 루이비통 손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마치 막차를 놓치면 큰일이라는 듯 서둘러 앞장섰다.
“아이고 사부인, 그렇게 차리고 나서니 10년은 젊어 보이네요.”
엄마가 언제 삐쳐 있었더냐는 듯 시어머니를 쓰윽 훑어보고 아부를 했다.
시어머니는 허어허어 웃으며 응답했다.
“사아부인도요오.”
그리고 서로 마주 보고 다시 한 번 씨익 웃었다. 남편은 요술쟁이다. 두 고집 센 노인을 오뉴월 땡볕에 엿가락같이 녹이는 비결을 아는.
식물원 나들이
나는 오곡 찹쌀밥에 깨소금과 김가루를 넣어 주먹밥 다섯 개를 부지런히 쌌다. 그리고 다섯 개의 누런 샌드위치백에 랩에 싼 주먹밥 한 개와 씻은 사과 한 개, 그리고 작은 사이즈 물 한 병씩을 넣었다. 그리고 유노의 약상자와 유노 눈에 안 띄게 어머니들이 좋아하는 단 군것질거리를 따로 한 봉지 만들어 차 뒤에 실었다.
즐거운 소풍 준비가 끝났을 때, 갑자기 유노가 배를 누르며 나를 부른다.
“어엄마. 나 아파.”
“어디가 아파?”
“여기. 여기.”
배가 아프단다.
“화장실에 가서 푸우 할래?”
“으응.”
두 노인의 긴장한 눈이 화장실에 가는 유노의 뒤를 따른다.
학교에서 비슷비슷한 아이들끼리 아무리 조심을 해도 저항력이 약하다 보니까 유노는 온갖 세균을 다 옮아 가지고 와 온 식구를 긴장시키며 노상 병원을 드나든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럴 경우 대개 설사로 이어지고 기저귀를 채워야 한다. 외출할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내 예측은 맞았지만 꿈 같은 소풍을 전부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결국 한 시간이나 실랑이를 하다 떠밀다시피 하여 남편이 두 어른만 모시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잔뜩 골이 난 유노와 나는 집에 남아 TV 앞에 앉아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안되기는 했지만 역시 유노와 내가 집에 남기는 잘했다. 유노의 설사는 더 심해지고 자꾸만 배가 아프다고 하소연을 해 오후에는 병원에 다녀와야 했다.
내가 유노와 결코 즐겁지 않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두 노인을 모시고 남편은 즐거운 하루를 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나와 유노를 집에 남겨놓고 가야 했던 남편도 내가 안쓰럽고 불쌍해 울창한 열대나무와 형형색색의 꽃으로 뒤덮인 숲이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노라고 후에 고백했다. 그런 말이라도 들어야 살 힘이 나지, 나는 중얼거렸다.
그래도 두 노인이 그렇게 화해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 아닌가. 그 스스로 받은 위로는 밤늦게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만 유효했다. 그것은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나고 잠시 후에 문을 열고 들어온 세 사람의 얼굴 표정으로 무슨 일이 생겨도 크게 났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엄마가 참아야 돼”
큼직한 종이 쇼핑백을 양손에 들고 맥 빠진 얼굴로 들어오는 남편 뒤로 아침에 내가 싸준 누런 샌드위치용 봉지를 가슴에 꼭 안고 들어오는 굳은 얼굴의 시어머니가 보였다. 그 뒤로 뒤뚱뒤뚱 지팡이를 짚고 들어온 엄마는 분하고 억울함이 찬바람 부는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다.
“무슨 일이우?”
놀라서 묻는 나를 보며 웃는 남편의 얼굴은 피곤에 절어 보였는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기 싫은 듯 손을 내저으며 부엌 바닥에 쇼핑백을 내려놓고 2층으로 휭 하니 올라가고 말았다. 그 뒤를 바라보던 시어머니가 내게 도시락 봉지를 흔들며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아버엄이 시익당에서어 먹으자고 하아는 데에 이거 남아서 머거어야지.”
나는 단숨에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나의 상황 파악은 역시 정확했다.
돌아오는 길, 엄마가 도가니탕을 좋아하는 것을 아는 남편이 식당에 들러서 도가니탕을 먹고 가자고 제안했다. 엄마가 기뻐서 “아이고 오랜만에 도가니탕 맛보게 됐네” 하고 손뼉을 쳤다.
엄마는 그렇지 않아도 나를 떨어뜨리고 간 소풍이라 온종일 마음이 께름칙했는데 식당에서 맛있는 걸 먹자니 그 께름칙도 싸악 가실 지경이었다.
그때 시어머니가 나섰다. 두 손에는 나와 유노의 몫으로 쌌던 도시락 봉투가 들려 있었다.
“이이거 그냐앙 나마았는데에 왜 도온 쓰고 식다앙에 가?”
“어머니, 그건 그냥 두고 오랜만에 식당에서 잡숫고 싶은 것 잡숫도록 하세요.”
아들의 말이라면 하나님 다음으로 존중하건만 시어머니는 아들의 말에도 꿈쩍을 안 했다.
“아아니야아, 나안 이거 머억어야 돼.”
진기한 맞춤 요리라도 들어 있는 듯 시어머니는 그 도시락 봉투를 가슴에 꼬옥 끌어안았다. 시어머니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아는 남편은 으름장을 놓았다.
“어머니, 그럼 제가 장모님 모시고 들어가서 먹는 동안 차에서 기다리시겠어요?”
그 말에 시어머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원통하셨을 것이다.
엄마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만둡시다. 내가 사위한테 그거 못 얻어먹어 안달이 난 줄 아시우?”
“누가아 아안달이 났다고 하압디까? 여기 이 이거 이있으니까아.”
시어머니는 두 개의 도시락 봉투를 흔들며 완강하게 주장했다.
식당 앞에 주차한 남편은, 또다시 서로 얼굴을 양쪽 창문으로 돌리고 앉아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는 두 노인을 놔두고 들어가서 네 그릇의 도가니탕을 주문해서 쇼핑백에 넣어 들고 집으로 온 것이다.
두 노인의 사이는 예전보다 더 냉랭해졌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두 노인을 만족하게 해줄 솔로몬 왕 같은 지혜는 없었다.
그날부터 엄마의 노망기가 갑자기 심해졌다. 현실과 과거가 롤러코스터같이 영혼을 통과해 다니는 듯했다. 과거를 헤매고 다닐 때의 그 눈빛은 정말 처연하게 먼 옛날을 바라보는 듯했다. 그러다가 문득 현실로 돌아오면 그 화살은 시어머니를 향해 정확하게 날아갔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시어머니에 대한 업신여김은 거의 노골적이어서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어느 날 짜증이 나 아침 일찍부터 시어머니의 부당함을 하소연하는 엄마에게 나는 악을 썼다.
“엄마. 여기가 누구 집이우? 저 노인네 아들 집이야. 엄마가 참아야 돼.”
그 말을 쏟아놓고 온종일 가슴이 아팠다.
아무리 엄마가 딸네 집에 살 자격이 있다고 누구에게라도 할 것 없이 강조하고 다독이면서 살고 있지만 노망이 들었다 치더라도 엄마가 참아야 될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엄마는 내 성질을 건드리는 것이니 안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듯 더 이상 시어머니에 대한 불평을 삼갔다.
담낭의 돌멩이
나는 꼭 외출해야 할 일이 생길 때는 시간당 10달러를 주는 베이비시터를 데려다 앉혀놓아야만 했다. 세 사람 가운데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일이 있을 때면 와서 유노를 돌봐주는 혼자 사는 다나는 돈보다도 사람이 그리워서 전화만 하면 달려와서 성심껏 이들과 시간을 함께 보냈다.
하루는 다나에게 돈을 주는 것을 본 엄마가 내게 항의했다.
“내가 유노랑 저 노인네를 그렇게 잘 돌봐주는데 왜 말도 안 통하는 사람을 불러다 앉혀놓고 돈을 주냐?”
“엄마가 힘이 들까봐 그래.”
나는 엄마를 다독였다.
엄마는 화살을 다나에게 돌렸다. 냉장고에 있는 것을 몰래 꺼내 먹고 있다가 엄마에게 들켰다든지, TV 앞에 앉아 잠만 자느라 당신이 점심을 굶었다든지.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못 들은 척하기로 작정했지만 어떤 때는 폭발하기도 했다.
“내가 다나에게 냉장고에 있는 것은 모두 꺼내 먹어도 좋다고 그랬어. 엄마도 꺼내 먹으면 되는데 왜 굶어?”
엄마는 그날부터 눈을 내리깔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믿고 살 자식이라고는 그래도 딸자식뿐이라고 믿었던 내게서 배신이라도 당한 듯 얼굴은 굳어가고 못이라도 박을 듯 내쉬는 한숨은 강하고 처절했다.
그 분출되지 못한 모든 서러움과 원망과 한이 수십 개의 단단한 돌멩이가 되어버렸나 보다. 그 돌들이 엄마의 담낭 속에서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그 돌들은 서로 부딪치며 연한 장기의 벽을 상처내고 염증을 유발해 엄마의 몸에서 열이 올랐다.
엄마는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의사가 CT 사진을 보더니 물을 많이 마시면 돌들이 소변과 함께 배출될지도 모르니까 좀 두고 보다가 안 되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열과 고통으로 얼굴을 잔뜩 찌푸린 엄마는 우렁차게 “수술은 안 해” 하고 선언했다. 그런데 이 증상은 수술을 하지 않으면 얼마 못 삽니다 하는 선언이 뒤따르는 암 같은 병이 아니어서 계속 아프게 고통만 줄 뿐이라는 것이 의사의 설명이었다.
사흘 후에는 CT 촬영을 통해 몇 개의 돌이 담석을 빠져 나가다가 담석 관에 깊이 빠져버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렇게 되면 수술로 꺼내지 않고는 돌이 점점 더 깊이 박히게 돼 그 고통은 견디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나는 수술 동의서 아래칸 환자의 이름 옆에 있는 보호자란에 사인을 했다. 오래전 내 이름 옆 보호자란에 엄마가 항상 사인을 했듯이. 그리고 원망스럽게 나를 보는 엄마에게 수술 선고를 내렸다.
“엄마는 수술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어.”
정말 그 방법 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그 돌들은 수술을 통해 성공적으로 제거되었다.
그러나 다섯 시간에 걸친 대수술은 역시 그 연세에는 무리였었던지 회복이 더디었다. 사흘 후에는 아이비가 제거되었는데 입으로는 전혀 음식을 넘기지 못했다. 그리고 당 수치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의 기적
의사의 지시로 음식물을 위장에 직접 넣기 위한 튜브를 코에 끼웠다. 그리고 또 사흘, 그동안 엄마는 스스로 그 튜브를 몇 번이나 잡아 빼 간호사가 두 손을 침대 모서리에 잡아매놓았다.
“나를 죽이고 싶지 않으면 이 코에 낀 튜브 좀 빼줘. 너무 목이 아파서 못 살겠어.”
엄마는 소리가 나오지 않아 입술만으로, 손짓만으로, 눈빛으로 내게 사정하고 애원했다. 나는 고통스러워 하는 엄마를 더는 볼 수 없었다. 튜브는 제거되었고 엄마의 깊은 잠은 며칠씩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나는 오빠와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불사조였다. 우리들이 저녁 먹는 동안 혼자 훌쩍 떠나버릴까 봐 많이 먹으라고 이것저것 남편이 시킨 음식들을 입에 허겁지겁 떠넣고 병실로 돌아오니 마침 친구인 내과의사 닥터 박이 병원 안의 다른 환자를 보러왔다가 들렀다면서 엄마 옆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엄마의 환자 차트도 보았노라고 하더니 아이스크림을 좀 빼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누가 먹을 것인지도 물어보지 못한 채 아래층으로 내달렸다.
닥터 박은 아이스크림을 한 숟갈 뜨더니 며칠째 입을 다물고 있는, 그리고 우리가 임종이 눈앞에 왔다고 믿고 있는 엄마의 입에 들이밀었다.
처음 한두 번 아이스크림은 엄마 입을 그냥 스치고 흘러내렸다. 아마 한두 방울 입 안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정확하게 세 번째, 엄마는 입을 벌리고 한 스푼 가득히 담긴 아이스크림을 받아 입속에 넣더니 잠시 후에 목으로 넘겼다. 며칠 만에 목구멍으로 음식을 넘긴 것이다.
나는 비록 아이스크림이 불로초는 아니더라도 진짜 중국산 우황청심환보다는 더 효력이 있다고 말할 자신이 있다. 자신이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내가 그 방면에 약간의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논문이라도 쓰겠다고 달려들지도 모른다.
엄마는 계속 입을 벌려 대여섯 스푼의 아이스크림을 목으로 넘기고 난 후 고개를 흔들었다.
“좋아지실 거예요.”
닥터 박이 스푼을 내려놓고 일어서며 말했다. 엄마의 얼굴에 희미한 빛이 번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닥터 박을 아래층에 바래다주고 올라오니 고별사를 마치고 저녁 먹으러 갔다 온 오빠 내외가 병실 상황을 보고 당황하기도 하고 믿을 수 없기도 한 얼굴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엄마가 누운 채 실눈을 뜨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의학적인 견해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지만 의학에도 별일은 있는 것이고 기적도 있다고 믿는다. 닥터 박은 내게 아이스크림의 효능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은 안 해주었지만 엄마와 같은 상태에 빠진 환자에게 그 처방의 효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엄마는 그날 밤 반 컵의 두유를 더 마시고 하루 지나서는 죽을, 그리고 다음날에는 미역국에 밥을 말아서 잡수셨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러니까 입원한 지 3주 만에 퇴원해 집으로 돌아왔다.
잃어버린 내 별자리
시어머니는 그동안 심상치 않은 눈치라도 채고 계셨던 듯 눈물을 글썽이며 손을 잡고 반겼다.
“우리이 가치 오래 자알 사압시다. 사부우인.”
엄마는 그런 중에도 무언가를 잊지 않고 있었던 듯 킁 하고는 감동하는 빛이 없었다.
“엄마, 어머니가 저렇게 반가워하시는데 왜 대답이 그러우?”
“죽어가는 사람한테 그런 말은 누구나 다 한다.”
“누가 죽어가는 사람이야?”
내 속이 또다시 끓어올랐다. 엄마는 기어코 한마디 더 한다.
“사부인은 아직도 변소 휴지를 잘라놓고 쓰십니까?”
그러면서 왼손으로 오른손을 받쳐 들고 손바닥을 흔들었다.
“아, 아니입니다아.”
시어머니는 놀란 얼굴로 얼른 부인했다.
앞당겨졌던 고별사가 그런대로 인사치레는 되었다고 생각하는지 그날 밤 워싱턴으로 돌아간 오빠에게서는 아무 연락도 없다. 남동생 종수는 이따금 전화를 하는데 올케와 집과 가게에서 24시간 함께 시간을 보내는 터라 눈치를 보는지 몇 마디 하다가는 허둥지둥 전화를 끊고는 한다.
나는 식품점에 갈 때마다 냉동기 속의 아이스크림을 들여다본다. 유노에게는 독약이 된다지만 엄마에게는 생명을 돌려준 요술단지.
30년 전, 유노 같은 아이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대학원에 남아 학위를 따고 대학으로 돌아가 꿈을 펼치리라던, 지금은 사라진 꿈만큼이나, 그러나 더 소중한 오늘.
나는 찻길이 보이는 거실 유리창 앞에서 파수꾼 한 사람을 뒤에 세우고 나란히 앉아 돌아오는 나를 열망에 빛나는 눈으로 기다리는 세 사람의 별자리 속으로 들어가 잃어버린 내 별자리를 찾아 또 다른 하루를 산다. 이미 그 자리를 떠나 별똥별이 되어 영겁의 세월을 위한 여행을 시작했더라도 그곳이 나의 자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