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바로 살아라’ : 신정일 지음, 다산초당, 376쪽, 1만3000원
‘공주 정안은 알밤으로 유명해’라던 우리는, 이제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요절한 혁명가의 삶을 떠올릴 것이다. 신 선생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20년 뒤 개화파 동지였던 박영효가 김옥균의 머리칼 한 줌을 가져와 관에 넣어 충남 아산 영인면에 무덤을 만들었는데, 그때 그곳에 찾아와 통곡하던 백발의 할머니가 있었어요. 죽은 줄로만 알았던 김옥균의 누이동생 김균이었지. 실패로 끝난 정변에 가담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일족이 모두 연좌에 걸려 사형을 당하거나 독약을 마시고 자진했는데 김옥균의 집안도 아버지, 동생, 어머니까지 모두 죽고, 시집간 누이는 결석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음독을 했으나 치사량에 이르지 못해 살아났어요. 이때 남편 송병의가 꾀를 내어 송장 없는 관으로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멀리 떠났다가 1년 뒤 새색시처럼 꾸며 아내와 재혼해서 살았어요. 세상에 이런 로맨스가 없었지.”
그들은 무장한 개혁자들이었다
이제 차는 점점 전주에 가까워진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동학으로 넘어간다. 사람들은 ‘동학’이라 하면 ‘녹두장군 전봉준’을 떠올리지만 실제로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사람은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3명의 지도자였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전북 태인, 손화중은 정읍 사람이었다. 동학 활동에서 김개남과 전봉준을 굳이 구분하자면 김개남은 급진 강경파였고, 전봉준은 현실을 복합적으로 고려하는 현실파였다고 한다. 특히 김개남이 이끈 부대는 농민군 전체에서도 최정예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청주성 전투에서 패한 뒤 김개남은 은신했으나 밀고로 붙잡혀 처형된다. 원평 전투에서 진 전봉준도 비슷한 시기에 붙잡힌다. 다만 전봉준은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을 당하는 과정에서 기록이 남았으나, 김개남은 전주에서 즉결 처형된 뒤 역사 속에서 지워져버렸다. 김개남의 무덤은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에 있으나 시신도 없이 후대 사람들이 만든 가묘라고 한다. 그의 가족들은 족보에서 이름이 지워지고 성(姓)도 박씨로 바꾼 채 살아오다 1950년대 들어서야 성을 되찾았다고 한다.
영국의 지리학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날 무렵 조선을 방문했다가 김개남의 최후를 지켜보고 자신의 책 ‘한국과 이웃 나라들’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외세에 좌지우지되고 있는 임금과의 충성 관계를 끊고 그와 다른 주권을 약속했던 동학은 1월 초 전멸하여 충성스러운 관리에 의해 교주의 머리가 서울로 압송됐다. 나는 그것을 베이징으로 가는 길에서 가장 부산한 거리인 서소문 밖의 어느 시장에서 보았다. ……동학군은 너무나 확고하고 이성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그들의 지도자들을 ‘반란군들’이라기보다 차라리 ‘무장한 개혁자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민중 신앙의 텃밭 모악산
김제에 온 관광객들이 미륵신앙의 본거지라는 금산사는 가도 귀신사를 놓치기 쉬운데, 현재 금산사의 말사로 되어 있지만 귀신사는 676년 의상이 창건한 유서 깊은 절이다. 대적광전(보물 제826호)은 깔끔한 맞배지붕과 단청을 치지 않은 다포양식의 절제된 아름다움이 인상적이다. 대적광전을 돌아서면 위쪽을 향한 돌계단 꼭대기에 오래된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서 있다. 그 계단 위에 앉아 잠시 후 오르게 될 맞은편 모악산 자락을 본다. 이제 우리는 모악산을 걷고 있다. 농익어 그냥 둬도 금방 떨어질 것 같은 홍시를 따먹고, 발에 채는 알밤을 줍고, 시디신 정금나무 열매를 입 안에 굴리며 “가을산행은 없는 집 처가 가기보다 낫다”는 말에 한바탕 웃는다.
인적 드문 코스를 택해서인지 마주치는 등산객도 없다. 그런 우리가 잠시 쉬어간 곳이 용화사. 1960년대 초 서백일 교주가 칼에 찔려 사망하면서 사회적으로 엄청난 사교(邪敎) 파문을 일으킨 곳이라고 한다. 인기척은 없지만 누군가 꾸준히 고옥을 관리하고 있는 듯 깔끔하다. 모악산은 계룡산과 함께 한국 민중 신앙의 텃밭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산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 용화사와 같은 집이 도처에 있다.
증산 강일순도 모악산 대원사에서 도를 닦은 뒤 “삼계 대권을 주재하여 조화로써 천지를 개벽하고 불로장생의 선경을 열어 고해에 빠진 중생을 건지려 하노라”라며 자신의 존재를 천명하고 이른바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시작했다. 천지공사는 빈부 격차와 생사와 차별이 없는 영원한 선경을 여는 것이라고 한다.
민중의 밥이 되겠노라
종교적인 견해 차이는 뒤로하고 여기서는 강증산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는지만 이야기하자. 1908년 정읍 입암면 대흥리의 한 집에서 강증산과 고판례가 천지굿을 열었다. 고판례가 여성을 억압해온 사상과 풍습, 제도를 담은 책들을 밟고 뛰면서 춤추는 동안 강증산은 둘러멘 장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이것이 천지굿이라, 나는 천하 일등 재인(才人)이요, 너는 천하 일등 무당이나 앞으로는 네가 천지개벽의 주인이 될 것이다.” 이것이 강증산의 후천개벽 선언이다. 그는 후천 세계에서는 여자를 대장부(大丈夫)라 부르게 된다며 일종의 여성해방선언을 했다. 또 동학이 서양의 것, 즉‘서학’에 반대하여 일어났다면, 증산 사상은 상생적인 입장을 강조했다. 즉 동양과 서양이 창조적으로 통일될 것을 강조한 것이다. “후천에는 천하가 한집안이 되어 위엄을 과시하거나 형벌을 쓰지 아니하고 조화로써 중생을 다스려 화합할 것이다.”
하지만 강증산이 죽은 뒤 그를 따랐던 사람들이 70~80개에 이르는 교파를 만들어 갈라졌다. 그 가운데 제자 차경석이 세운 보천교가 있다. 총 신자 수가 600만명에 달하고 정읍 대흥리에 대규모 건축물들이 지어지고 드디어 조선사상 가장 큰 건물인 십일전(경복궁 근정전보다 더 컸다고 하며, 현재는 조계사 대웅전 건물로 남아 있다)이 신축되면서 항간에는 “차경석이 천자가 되기 위해 대궐을 신축하고 천자 등극식을 갖는다”는 말이 돌았다. 이로 인해 보천교는 조선총독부의 견제를 받아 결국 전국적인 신자 검거령에 일순간 무너지고 말았다.
강증산이 병을 고쳐주며 포교활동을 한 구릿골 약방은 대순진리회가 인수하여 마당에 잔디까지 깔고 깨끗하게 복원해놓았다. 그의 유해는 딸 강순임이 세운 증산 법종교 본부 안에 마련된 화강석 무덤에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강증산이 세상을 떠난 뒤 신도들끼리 유해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다 법정까지 갔고 그 와중에 팔 하나가 없어진 시신을 안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씁쓸했다.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기를 청하며 “민중의 밥이 되어 민중의 온갖 고통을 다 한 몸에 짊어지고 가노라” 했던 강증산의 뜻이 이것이었을까.
점심식사를 위해 금평 저수지 쪽으로 가다보니 제비산 입구에 안내판이 하나 세워져 있다. 정여립이 이곳에서 대동계를 조직했다고 한다. 정여립이라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 전라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역모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은 기축옥사의 주인공이다. 스물넷에 문과에 급제하여 당대의 대학자 이이의 총애를 받았던 그가 왜 역모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어찌 주인이 따로 있나
홍문관 재직 시절 선조를 부도덕한 임금으로 생각했던 정여립은 낙향하여 처가와 가까운 제비산 밑에 집을 짓고 대동계를 조직했다. 대동계는 사노공상과 남녀의 신분적 차별이 없는 조직이었다. 그는 전주, 금구, 태인 등지의 무사와 노비들을 모아 매월 보름 모임을 갖고 무예를 익히며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공공연하게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겠는가?”라며 왕위 세습과 충군 사상을 부인했다.
1589년 가을 선조 앞에 정여립이 역모를 꾀했다는 보고서가 올라왔다. 당시 조정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세력 다툼이 극심했고, 정여립은 동인 계열로 분류되었다. 훗날 정여립 역모 사건은 정철과 송익필 등 서인 측이 동인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꾸민 사건이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신정일 선생은 조선왕조의 근본이념인 불사이군(不事二君)을 부정한 정여립의 이단성과 혁명성이 ‘조선조의 광주사태’라 일컬어지는 기축옥사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기축옥사로 인해 죽은 사람이 1000명에 달했다. 그중에는 정여립과 9촌간이라는 이유로 희생당한 정언신도 있었다. 정언신은 여진족 니탕개가 난리를 일으키자 신립, 이순신, 이억기 등을 거느리고 평정한 장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 황정욱이 서울을 떠나기 전 숭례문에 올라 “정언신이 살아 있었다면 왜적에게 이토록 허망하게 국토를 밟히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당쟁이 새로운 정치질서로 자리 잡아가던 시대에 대동으로 세상을 바꿔보려 했던 정여립만 탓하랴.
모악산 자락을 헤매던 1박2일 동안 우리는 참으로 많은 역사 인물과 조우했다. 못다 한 이야기는 신정일 선생이 쓴 ‘똑바로 살아라’(다산초당)에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은 정도전, 조광조, 정여립, 황진이, 허균, 이중환, 박지원, 정약용, 최제우, 김개남, 김옥균, 강일순 등 저자가 고른 진보주의자 12명이 걸어온 길을 소개하고 있다.
무엇이 진보고 무엇이 보수냐를 가리기 전에, 이들의 선택이 옳고 그르냐를 따지기 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남이 뚫어놓은 안전하고 평탄한 길을 걸을 때, 그들만의 길을 개척하며 세상을 새롭게 변혁시키고자 했던 이들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