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호

운명적 장애물로 더 빛나는 불온한 혹은 지순한 사랑

  • 강유정 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입력2008-11-03 11: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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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멜로드라마나 멜로 영화의 필수 요소는 사랑의 장애물이다. 장애물의 성격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1960년대 장애물의 상징이 유부남, 호적에 올릴 수 없는 아이였다면, 1970년대 이후는 직업이나 가정형편의 차이에 따른 결혼의 실패다. 불치병도 사랑의 완성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종종 등장한다. 그런데 장애물만 제거되면 사랑은 완성되고, 영원해지는 것일까?
    운명적 장애물로 더 빛나는 불온한 혹은 지순한 사랑

    ‘너는 내 운명’

    이루어진 사랑은 결혼사진으로 남고, 실패한 사랑은 노래 가사로 남는다고 한다. 결혼사진은 물질로 남은 추억이다. 게다가 사진은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이미 그때 거기 있었음’이라는 인증 작용의 실체다. 그러니까, 당신과 나의 결혼이 기정사실이며 역사라는 것, 그것은 바꿀 수 없는 사실임을 사진이 보증해주는 것이다.

    반면 노래 가사는 가슴에 남는다. 어디선가 우연히 노래가 흘러나올 때, 어디선가 우연히 어떤 시 구절을 발견했을 때, 그때 마음속에서 조용히 발효되고 있던 그 ‘사람’이 불현듯 떠오른다. 노래 가사처럼 아련하게, 시 구절처럼 불명확하게 말이다. 추억이 가진 이 불명확함 때문에 노래 가사 속에 남은 사랑은 더 간절해진다. 이뤄지지 못해 슬픈 사랑.

    현재 교과서에 실려 있는 박완서의 ‘그 여자네 집’은 노래를 듣고 생각해낸 사랑 이야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소설의 주인공은 김용택 시인의 ‘그 여자네 집’이라는 시를 보고는 어린 시절 곁에서 보았던 옛날 일을 생각해낸다.

    그 여자네 집

    마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났던 곱단이와 만득이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 마을의 선남선녀이던 두 사람은 기대에 걸맞게 서로에 대한 애정을 품고 성장해간다. 방구리가 제법 잘 어울렸던 새침한 처녀 곱단이, 그리고 중학 모자를 쓴 임화 팬인 만득이는 마을에서 유명 인사처럼 스캔들을 뿌린다. 그런데 어느 날 정신대 모집이라는 상황이 닥치면서 곱단네는 부랴부랴 어린 곱단이를 시집보내게 된다. 징용이라는 문제에 부닥친 만득이에게도 시대는 만만치 않다.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운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 속에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 오는 집

    ―김용택 ‘그 여자네 집’ 중에서

    시 속의 그 사람은 그 여자네 집, 그 여자네 집이라며 간절하게 그 추억을 소환한다. 시의 느낌처럼 소설 ‘그 여자네 집’ 안에 들어가 있는 만득이와 곱단이의 이야기는 멜로 영화 한 편을 떠오르게 한다. 한 마을에서 일어났던 곱단이와 만득의 사랑 이야기는 시대의 조류에 의해 억지로 떠밀릴 수밖에 없었던, 장애물 때문에 굴절된 ‘완전한 사랑’ 이야기인 셈이다.

    그러니까 장애물이 없었더라면, 정신대나 징용이라는 상황이 없었더라면, 곱단과 만득은 영원히 하나가 되어 잘살았을 것이라는 믿음이 이 이야기 안에 숨어 있다. 멜로드라마, 그것은 바로 ‘~만 아니었더라면, 영원히 행복했을 것을’이라는 안타까움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운명적 장애물과 실패한 사랑의 영원함

    ‘그 여자네 집’과 비슷한 경우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인 ‘상실의 시대’를 들 수 있다. 착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비틀스의 노래를 들은 주인공은 초란처럼 연약했던 20대의 첫사랑을 생각해낸다. 말 그대로 초란처럼, 따뜻한 온기를 품었지만 여기저기 혈흔을 간직하고 있는 첫사랑 말이다. 그 회고 속에는 죽어버린 친구, 자살한 여인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게 추억은 비극 속에서 강렬해진다.

    멜로드라마는 세속 비극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원래 비극이란 운명적 결함(hamartia)을 지닌 인물들의 좌절을 그린 그리스 고전 희곡을 뜻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운명적 결함’이라는 말이다. 운명적 결함은 이 비극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신이 내려준 운명, 숙명 외에는 거의 완벽한 인간임을 전제로 설정되어 있다. 오이디푸스처럼 말이다.

    비극의 주인공은 왕족이라는 고귀한 혈통, 스핑크스를 이겨낸 지략가의 면모, 정적을 물리칠 용맹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니까 인간 중에 가장 윗길의 인간인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럼에도’다. 그토록 완벽한 인간임에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실수, 그 실수의 근간에는 ‘운명’이 놓여 있다. 인간적 힘으로는 절대 저항할 수 없는 신의 가혹한 체벌이 ‘운명’이라는 말 속에 녹아 있다.

    멜로드라마는 대개 비슷한 문법을 지니고 있다. 두 사람이 열렬히 사랑했지만 어떤 장애물로 인해 영원할 법한 사랑이 방해받았다는 문법 말이다. 아마도 이 멜로드라마 문법 중에서 가장 고전이 될 만한 것이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열렬히 사랑했지만 서로의 이름, 가문이 내려준 ‘성’ 때문에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두 연인. ‘로미오와 줄리엣’은 외부의 방해로 사랑을 이루지 못한 전형적 이야기다. 혼사 장애와 순애보의 고전으로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운명적 장애물로 더 빛나는 불온한 혹은 지순한 사랑

    ‘트리스탄과 이졸데’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 너머의 사랑, 이 공식이야말로 수많은 연애 서사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왕의 아내를 사랑한 신하, 적의 딸을 사랑한 병사처럼 극복할 수 없기에 그 사랑은 더 숭고해 보인다. 케빈 레이놀즈 감독의 작품 ‘트리스탄과 이졸데’ 역시 그렇다. 12세기 켈트 족 신화를 영화화한 이 작품은 사랑에 관한 가장 오래된 고전 중 하나다. 운명적 우연과 돌이킬 수 없는 정염의 소용돌이 속에 펼쳐지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격정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연애 서사시다.

    켈트 족 신화 속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은 신화의 속성상 운명의 장난에 가깝다. 사랑의 묘약을 잘못 나눠 마신 두 젊은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줄거리이니 말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형이라고도 할 수 있을 이 신화 속에서 트리스탄은 슬픔에 빠져 죽고 이졸데도 따라 죽는다.

    영화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환상적 성격이 강한 신화를 역사적 배경을 근간으로 한 연애 서사시로 각색했다. 아일랜드와 영국 간의 해묵은 갈등이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로 전치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모를 죽인 적국의 여인을 사랑한 트리스탄과 그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인 이졸데, 이 보편적이면서도 오래된 구성은 지금까지도 자유롭지 못한 두 나라의 갈등 위에서 팽팽히 진행된다.

    신에서 인간으로

    바그너의 오페라로도 잘 알려진 이 이야기의 힘은 금지된 사랑에 대한 열망으로 압축된다. 적국의 여인이기에, 그리고 충성을 다짐한 영주의 아내이기에 열정은 더해간다. 친구의 아내를 사랑했던 바그너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를 선택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윤리와 법이 금지한 사랑에 빠지는 것은 통속적이지만 가장 오랫동안 전해온 사건임에 틀림없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매력 중 하나는 몸과 칼이 부딪치는 원시적 전투의 생명력이다. 특별한 기계적 도움 없이 아날로그 방식으로 촬영된 전투 장면은 고전적 로맨스의 질감을 강화한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가득 찬 스크린에 익숙해진 눈에 투박한 질감으로 완성된 12세기 영국 풍경은 독특한 아우라를 제공한다.

    고전적 로맨스의 질감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성적 사랑뿐 아니라 마크 영주와 트리스탄 간에 충성과 신의로 맺어진 남성적 관계에서도 발견된다.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긴 안타까움만큼이나 격정적인 트리스탄의 눈빛은 두 여인을 사이에 둔 갈등보다 더 절절하게 받아들여진다. 품위 있고 격조 있는 영주 노릇을 한 루퍼스 스웰 역시 마찬가지다.

    트리스탄의 죽음으로 끝나는 이 드라마에는 엄밀히 말해 새로운 이야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오래 묵은 로맨스는 보는 이의 가슴을 들뜨게 한다. 금지된 사랑과 장애물 너머의 사랑이 인류의 영원한 서사일 수밖에 없음을 확인시켜주는 작품, 그것이 바로 ‘트리스탄과 이졸데’다.

    고전적 비극은 신 앞에 작아져야만 하는 인간의 비애를 드러낸다. 아니, 인간의 비애만큼이나 신의 강건함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에 비해 세속 비극으로서 멜로드라마는 신과 인간이 아닌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괴로움의 원인을 찾아낸다. 말 그대로 비극의 원인이 바로 세속적 인간사에 있는 것이다.

    멜로드라마는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산출된 예술 장르다. 출현 당시 멜로드라마의 새로움은 고전 비극이 지닌 비극적 전망을 윤리적 강령으로 대체한 데서 비롯되었다. 쉽게 말해 신과 인간, 운명과 저항으로 구성되어 있던 비극의 세계가 가족과 세속적 도덕 체계의 길항으로 전환한 것이다.

    역사적 의미에서 멜로드라마의 출현은 권력과 재산을 세습하던 기존체제가 무너지는 과정을 암시한다. 세습제가 상속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수많은 멜로드라마가 혈통이나 금지된 결혼, 혼외정사와 같은 가족 단위의 문제를 고민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멜로드라마는 가족이 사회 구성의 가장 중요한 단위가 된 이후의 사태를 반영하는 영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혁명 이후 중요한 가치로 등장한 것이 바로 상속의 문제였다. 폐쇄적으로 이뤄지던 양가의 결합이 훨씬 더 자유로워지면서 가족의 사유재산과 그것의 상속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되기 시작했다.

    멜로드라마의 중요 기능 중 하나는 바로 사회·역사적 문제를 개인 혹은 가족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이다. 가령 우리나라 멜로드라마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별들의 고향’만 해도 그렇다. 사회적 지위, 경제적인 면에서 차이가 나는 두 남녀의 만남, 그들의 만남과 좌절의 배경인 사회적 환경을 제거한 채 실패한 두 사람의 개인적 운명에 이야기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의 탈(脫)사회성

    전통적으로 멜로드라마는 장애물을 넘어선 사랑 이야기라는 형식을 띠고 있다. 멜로드라마 속에서 연애는 늘 장애물에 걸려 곤욕을 치르곤 한다. 한국의 고전인 ‘춘향전’에서도 신분의 차이가 장애물이 되고, 1960년대 대표적인 멜로 영화라고 할 만한 ‘미워도 다시 한 번’에서 그 장애물은 사랑에 빠진 대상이 기혼남이라는 사실로 구체화된다. 1997년 흥행작인 ‘편지’에서 장애물은 시한부 인생으로 바뀌고 1999년 작 ‘쉬리’에서 장애물은 남과 북으로 나뉜 현실 체제로 진화한다. 즉, 멜로드라마 속에서 두 연인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금기에 대한 당대의 상식선을 제공하는 셈이다.

    이 중에서 특히 흥미로운 작품이 바로 정소영 감독의 ‘미워도 다시 한 번’ 시리즈다. 이 시리즈는 당시 히로인이던 문희와 신영균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전형적인 최루성 드라마다.

    1편의 내용은 이렇다. 지방에서 하숙생활을 하던 남자가 같은 집에 사는 미혼 여성과 사랑을 나눈다. 이후 여자는 총각인 줄 알았던 남자에게 아내와 아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남자는 여자를 떠나 서울로 올라간다.

    그런데 이미 여자의 뱃속엔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이후의 내용은 남자 몰래 아이를 낳아 기르던 미혼모가 남자와 재회하면서 시작된다. 서울에서 자리 잡고 살아가는 남자에게 아이를 보내야 하는 것, 가슴 아프지만 아이와 이별해야 하는 상황이 관객의 눈물을 끌어낸 것이다. 36만의 관객을 동원한 상업적 성공에 힘입어 제2, 3편이 연이어 매년 제작되어 하나의 시리즈를 이루었다. 1980년에는 제2부인 ‘미워도 다시 한 번 80’, 1981년에는 제2부의 속편 격인 ‘미워도 다시 한 번 81’을 변장호 연출로 정소영이 제작했다.

    운명적 장애물로 더 빛나는 불온한 혹은 지순한 사랑

    ‘미워도 다시 한 번’

    1968년에 나온 정소영 감독의 첫 번째 ‘미워도 다시 한 번’에는 우리의 1960년대 시대감각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러니까 한 남자의 불륜이 한 여자의 삶을 망가뜨려놓았다는 현대적 인식은 전혀 없다. 사태는 분명 자신이 기혼자임을 속인 채 여자를 유혹한 남자로부터 비롯되었다.

    하지만 당시 이러한 상황은 문희라는 여배우가 처한 지극히 슬픈 상황일 뿐 사회적 문제라든지 범죄라는 인식은 전혀 없다. 이러한 점은 남자의 법적인 아내가 아이를 데려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하는 상황에서도 발견된다. 남편이 실수를 저질러 낳은 아이를 걷어 키우는 것, 사실 이러한 모습은 1960년대의 세속적 풍경 중 하나다. 이를 통해 남편을 힐난한다거나 가정의 행복이 깨지는 경우는 없다. 남편과 아내로 이루어진 가족은 탄탄한 채로 단지 실수로 생긴 아이를 거둬들이면 그만인 것이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은 현재까지 지속되는 여성 멜로드라마의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를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남편의 불륜, 혼외정사로 생긴 아이라는 소재가 지금도 여전히 TV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반복되니 말이다.

    물론 조금씩이나마 같은 상황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기는 하다. 요즘은 혼외정사가 가정의 평화를 위협하는 주요한 원인으로 취급되고 있으니.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은 여성의 상황은 운명적인 것으로 바뀔 수 없다는 1960년대의 가부장적 혹은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여성들에게 맘껏 눈물 흘릴 기회를 제공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나약한 위안을 제공한 셈이다.

    사랑과 장애물의 함수

    운명적 장애물로 더 빛나는 불온한 혹은 지순한 사랑

    ‘후회하지 않아’

    멜로드라마는 통속적이라는 점에서 시대적 가치를 갖는 재미있는 장르 영화다. 당시의 사회적 이데올로기와 세속적 풍경을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장애물’의 성격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이다. 1960년대 가장 큰 장애물이 결혼한 남자와의 사랑, 호적에 올릴 수 없는 아이로 압축되었다면, 1970년대 이후 장애물은 직업이나 가정 형편의 차이로 인한 결혼의 실패다. 가난한 여직공과 부유한 남자의 사랑 혹은 호스티스와 상속남의 사랑과 같은 공식이 새로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2005년에 개봉했던 박진표 감독의 ‘너는 내 운명’이나 2006년 이송희일 감독의 ‘후회하지 않아’는 낭만적 사랑을 저해하는 장애물을 통해 우리 사회를 반영하는 작품으로 주목할 만하다.

    비수기 가을 멜로 영화로서 5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던 박진표 감독의 ‘너는 내 운명’은 난치병 환자와의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다. 물론 난치병 혹은 불치병 환자와의 사랑은 멜로드라마의 전형이라고 할 만큼 흔하다. ‘러브 스토리’ ‘편지’ ‘국화꽃 향기’ ‘접시꽃 당신’과 같은 영화가 모두 돌이킬 수 없는 병을 소재로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너는 내 운명’의 놀라운 점은 그 난치병이 백혈병이나 골수암과 같은 비전염성 질병이 아닌 후천성면역결핍증이라는 전염성 질환이었다는 사실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멜로 영화는 사랑의 합일을 방해하는 장애물과 그로 인한 눈물이라는 공식 위에 조형된다. 다른 점은 바로 후천성면역결핍증이라는 병이 다른 불치병과 달리 성접촉을 통한 전염병이라는 사실에 있다. 이 전염성 질환은 사랑의 중요한 방식 중 하나인 섹스를 통해 전염되는, 한마디로 불결한 병인 것이다.

    기존 영화에 등장하는 불치병은 대개 외형상 변형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병’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치 모의라도 한 듯이 영화 속 주인공들은 위암이나 백혈병과 같은 비전염성 병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피부가 괴사한다거나 지독한 악취를 풍기며 죽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병은 사랑의 영원함을 방해하는 원인이기에 사랑의 숭고함을 한층 더해줘야만 하기 때문이다.

    한편 ‘후회하지 않아’는 멜로드라마의 문법을 고스란히 차용하면서 남녀라는 설정을 남남으로만 바꿔놓았다. 이 산뜻한 전회 덕분에 멜로드라마의 진부함은 완전히 다른 것으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이는 한편 동성애의 문제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사회적 문제 중 하나가 되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운명적 장애물로 더 빛나는 불온한 혹은 지순한 사랑
    강유정

    1975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어교육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국문학)

    동아일보 신춘문예 입선(영화평론),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現 고려대·한국종합예술대 강사


    ‘미워도 다시 한 번’이 1960년대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상의 장애물의 구체적 반영물이었다면, ‘너는 내 운명’이나 ‘후회하지 않아’는 장애물의 영역을 넓히는 데 주력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가장 대중적인 장르인 멜로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변화들은 그만큼 우리 영화가 사회적 소수에 관대해졌음을 뜻하기도 한다. 멜로 영화 속에는 관객의 상식적 이해의 폭을 가늠할 기준이 숨어 있다.

    사람들은 장애물이 없었더라면 사랑은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당신이 불치병이 아니라면, 당신이 기혼자가 아니었다면, 혹은 당신이 ‘남자’가 아니었다면, 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렇지 않았다고 할지언정 사랑이 영원했을까? 영원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한 환상적 치유법,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늘 되묻고 싶은 낭만적 영혼을 위해 멜로드라마는 진화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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